서고의 문틈으로 든 겨울 빛이 먼지를 갈랐다. 유선은 손등의 터진 물집을 헝겊으로 감은 채, 유득경이 사다리 위에서 내려주는 책궤를 받아 안았다. 표지에 붉은 먹으로 『대동사목』이라 적혀 있었다.
"이걸로 뭘 하겠다는 게냐." 유득경이 사다리를 내려서며 소맷자락의 먼지를 털었다. "네 죄목은 실화와 무고다. 무쇠 장부는 이미 붉은 인장까지 찍혀 고쳐졌어. 정답을 아무리 그려 봐야—"
"압니다." 유선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혀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 한 마디를 뱉는 데에도 턱이 뻐근했다. "그러니 도면은 접겠습니다."
유득경의 눈썹이 올라갔다.
유선은 책궤를 바닥에 내려놓고 첫 장을 폈다. 손끝이 떨려 종이가 서걱거렸다. 그가 찾는 것은 톱니의 잇수도, 접쇠의 겹수도 아니었다.
"검서관 나리께서 예전에 말씀하셨지요. 이 법들이 본디 누구를 위해 세워졌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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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득경이 등잔에 불을 옮겨 붙였다. 심지가 타들며 서고 안이 노랗게 밝았다. 그는 유선 옆에 무릎을 접고 앉아, 손가락으로 사목의 조문을 짚어 내려갔다.
"대동법이 왜 생겼겠느냐. 방납(防納)의 폐 때문이다. 아전과 상인이 공물을 대신 바치고, 백성에게서 열 배 스무 배를 뜯었지. 그 중간의 이(利)를 끊자고, 물종을 쌀로 통일하고 값과 질을 관이 직접 검험케 한 것이야."
"검험." 유선이 그 두 글자에 손톱을 박았다. "관에 들이는 물종의 값과 질을, 감관이 검험한다. 결손을 청구하면 죄를 묻는다."
"그래. 대동의 근본은 중간 상인의 농간을 막는 데 있다. 그게 법의 뜻이야."
유선의 흐린 눈에 처음으로 초점이 잡혔다. 그는 사목을 무릎에 펴 놓고, 김치복의 얼굴을 떠올렸다. 열흘 주기로 속이 썩은 무쇠를 삼 할 섞어 들이고, 상등품 값을 궁방에 청구하던 손. 후원자의 낯을 하고 자재를 볼모로 쥐던 손.
"나리. 김치복이 하는 짓이 무엇입니까."
"관에 들일 무쇠를 저 혼자 쥐고, 속을 속여 값을 부풀리는 것이지."
"그게 바로 방납입니다." 유선이 고개를 들었다. "대동법이 없애자던 그 방납. 김치복은 대동의 법도 그 자체를 어기고 있어요. 저는 무쇠를 축낸 죄인이 아닙니다. 축낸 건 그자예요. 법이 그렇게 적고 있습니다."
유득경이 숨을 들이켰다. "허나 그건 네 해석이지. 도청은 김치복 편이고—"
"제 해석이 아니라 사목의 원문입니다." 유선이 조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노론이 신주 모시듯 받드는 옛 법 그 자체에 적힌 글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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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다. 유선은 사목 옆에 둔전(屯田)의 옛 규례를 나란히 폈다. 유득경이 청국에서 들여온 농정서(農政書)까지 얹어 놓으니, 세 권의 책이 등잔 아래 산맥처럼 겹쳤다.
"둔전은 왜 세웠습니까." 유선이 물었다. 이제는 그가 캐묻고 유득경이 답을 뒤졌다.
"군량을 자급하려고. 놀리는 땅에 물을 대고 갈아, 조운(漕運)의 비용을 덜자는 것이다. 운반이 곧 나라의 살이니까."
"운반의 비용을 던다." 유선이 그 대목을 세 번 읊었다. "물을 대는 힘을 사람과 소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대신하면, 그 비용은 더욱 줄겠지요."
"…증기 말이냐."
"둔전의 근본은 힘을 아껴 나라의 살을 찌우는 것입니다. 채석과 양수의 힘을 물 끓는 기관이 대신한다면, 그건 오랑캐의 잔재주가 아니라—" 유선의 입가가 처음으로 벌어졌다. "둔전의 법도를 잇는 일입니다. 옛 법이 바라던 바를, 새 기물로 이루는 것이지요."
유득경이 등잔불을 응시했다. 오래 침묵하더니, 낮게 웃었다.
"네가 달라졌구나."
"무엇이 말입니까."
"예전의 너라면 이 서고에 앉아 밤새 톱니의 잇수나 도면의 오차를 셈했을 테지. 틀린 치수 하나를 못 견뎌 다 만든 물건을 부수던 사람이. 지금 넌 도면을 덮고 법전을 펴고 있어."
유선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감아 놓은 물집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옳은 도면을 들이밀면 인정받으리라 믿었습니다. 그게 제 어리석음이었지요. 조당은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누가 말했느냐를 앞세우는 곳이니까. 서얼의 정답은 정답이 아니라 월권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제 제 말을 하지 않으렵니다." 유선이 사목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저들의 법으로, 저들의 글자로 말하겠습니다. 심환지가 신성시하는 옛 규례를 원문 그대로 인용하면, 그 법이 김치복을 치고 그 법이 저를 지킵니다. 정답을 외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법도가 상대를 치게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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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화성의 대장간에서는 다른 소리가 났다.
홍만춘은 웃통을 벗은 채 벌겋게 단 무쇠를 모루에 얹고 있었다. 곁에는 물시계 시제의 압력통 대신, 손바닥 두 개만 한 작은 통이 놓였다. 폭발로 삭아 버린 가죽 이음새를 대신할 무언가를 시험하는 참이었다.
"에잇, 또 삭았구먼." 그가 김이 밴 통 밑을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소가죽을 삼겹으로 겹쳐 끼운 이음새가 증기의 열에 물러 늘어져 있었다. 손끝으로 문지르니 부슬부슬 부스러졌다.
곁에 선 젊은 풀무꾼이 물었다. "성님, 가죽이 안 되면 뭘로 막습니까?"
"가죽으로 막으려니까 안 되는 게지." 홍만춘이 접쇠를 다섯 겹, 일곱 겹 접어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통의 아가리를 노려보았다. "아비가 그랬다. 물러서 새는 자리는, 물러서 채우면 된다고. 무쇠끼리 부딪는 이음새를 무쇠로 막으려 하면 김이 새. 그럼 사이에 무른 걸 물려서, 김이 밀 때마다 그놈이 눌려 붙게 하면—"
그는 대답 대신 놋쇠 판을 얇게 두드려 접쇠 사이에 끼웠다. 그 위에 삼끈을 기름에 절여 감고, 다시 무쇠 테로 조였다. 놋쇠는 가죽처럼 삭지 않고, 압이 밀 때마다 도리어 눌려 틈을 메웠다.
"불 넣어라."
풀무가 헐떡였다. 통이 달고, 물이 끓고, 김이 차올랐다. 이음새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새어 나왔으나—터지지 않았다. 놋쇠 물림이 김의 힘을 받아 제자리를 파고들었다.
홍만춘이 통을 오래 노려보았다. 이윽고 굵은 손으로 수염을 훑었다.
"…버티는구나. 무쇠론 삼겹, 놋쇠론 한 겹. 이걸 저 잡직 나리한테 보여주면 눈이 뒤집히겠구먼."
그는 통을 헝겊으로 싸 궤에 넣고, 상량문 위쪽에 자기 이름 석 자가 새겨질 자리를 손끝으로 짚어 보았다. 굳은살 밑에서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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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되던 날, 대전 내관이 은밀히 유득경을 불렀다.
돌아온 유득경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는 서고 문을 걸어 잠그고, 목소리를 낮췄다.
"임금께서 판을 여신다."
"판이라니요."
"조당에 자리를 마련하셨어. 네 죄를 다투는 친국이 아니라—예송(禮訟)이다. 심환지가 강상과 예법으로 너를 치겠다면, 임금께선 그 예법을 조당 한복판에서 겨루게 하시겠다는 게야. 그리고 그 자리에 화성의 기물을 함께 들이라 하셨다."
유선의 손끝이 사목 위에서 멎었다.
"시연을… 조당에서요?"
"예법의 다툼과 기물의 다툼을 한자리에 놓으신 게다. 심환지가 예법을 무기로 삼는다면, 그 예법이 옛 규례에서 나왔음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시려는 거지. 규례로 걸어온 자를 규례로 되받아치는 자리. 임금께선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노론의 칼을 노론에게 겨누게 하시려는 게야."
유선은 세 권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대동사목, 둔전 규례, 농정서. 그 위에는 홍만춘이 보내온, 놋쇠를 물린 이음새의 그림이 얹혀 있었다. 도면이 아니라 증거였고, 정답이 아니라 무기였다.
"됐습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법도, 규례도, 기물도 준비됐어요. 저들의 법으로 저들을 치겠습니다."
유득경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허면, 그날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이 조문들을 원문 그대로, 조당에서 소리 내어 읽는 것. 네 해석을 보태지 마라. 글자만 읽어도 김치복은 방납의 죄인이 되고, 증기는 둔전의 법도가 된다."
"소리 내어… 읽는다."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유선의 목젖이 낯설게 조여들었다.
그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다음 글자를 뱉으려 하자, 혀가 입천장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손등의 물집이 저 혼자 욱신거렸다. 폭발 잔해를 역산하던 그날의 열이, 몸 안쪽 어딘가에서 다시 서서히 데워지고 있었다.
"나리." 유선이 겨우 뱉었다. 그다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유득경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유선이 사목을 움켜쥐었다. 조당에 시연과 예송을 함께 여는 날은 사흘 뒤로 정해졌다. 증거도 규례도 손안에 있었다. 저들의 법으로 저들을 벨 칼이 벼려졌다.
그러나 그 칼을 휘두를 혀가, 지금—다시 굳기 시작했다.
유득경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유선의 손목을 잡았다. 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역산을 했느냐. 언제. 무엇을."
유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역산하지 않았다. 폭발 잔해도, 장부도, 이 서고에서 그가 만진 것은 오직 종이와 글자뿐이었다. 그런데도 혀는 굳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벼루의 먹을 갈아, 종이에 적었다.
『역산이 아니어도, 아직 다 낫지 않은 게요.』
붓끝이 흔들려 획이 삐뚤어졌다. 유득경이 그 글자를 읽고 눈을 감았다.
"6화의 잔해 역산이 이틀 실어라 했는데… 그때 앓은 게 아직 몸에서 안 빠졌다는 게냐. 새로 쓴 게 아니라, 지난 빚이 아직 남았다는—"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더 무서운 일이었다. 역산을 삼가면 혀를 지킬 줄 알았다. 그러나 몸에 쌓인 열은 제 마음대로 데워졌다 식었다 하며, 하필 가장 말이 필요한 순간을 골라 목을 조였다. 심상의 도면이 뇌리를 잠식한 그 며칠의 대가는, 그가 셈한 것보다 길게 몸에 머물렀다.
유득경이 벌떡 일어섰다. 서성이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홍만춘을 부르마. 그가 5화 때 네 대신 무쇠를 논했으니, 조당에서도—"
유선이 붓을 던지듯 놀려 종이를 찢을 듯 적었다.
『규례는 무쇠가 아니오. 대동사목의 조문을, 상놈이 조당에서 읽으면 그날로 강상의 죄가 하나 더 붙소. 심환지가 바라는 게 그것이오.』
유득경의 입이 다물렸다. 맞는 말이었다. 무쇠의 성질은 장인이 논할 수 있어도, 왕법의 조문을 소리 내어 읽고 해석하는 것은 신분이 허락된 자의 몫이었다. 홍만춘이 사목을 펴는 순간, 노론은 "천것이 왕법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며 손뼉을 칠 것이다. 예송의 자리에서 예법을 짓밟는 꼴이 되니, 유선을 지키려던 손이 도리어 유선을 벨 것이었다.
"…그럼 검서관인 내가 읽으면."
유선이 다시 붓을 들었다.
『나리가 읽으면 임금의 사람이 노론을 친 것이 되오. 정면 충돌. 임금께서 손에 피 안 묻히려 예송을 여신 뜻이 무너지오. 규례로 규례를 치는 자리는, 죄인으로 몰린 내가 제 목숨을 걸고 제 입으로 읽어야 판이 서오.』
유득경이 종이를 내려다보며 오래 침묵했다. 이윽고 그가 낮게 신음했다.
"네가 읽어야만 한다. 서얼 죄인이 왕법 원문을 짚어 제 무고를 밝히면, 그건 월권이 아니라 자기 변호다. 격식에 어긋나지 않아. 헌데 하필 네 혀가—"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등잔불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크게 드리웠다.
유선은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닦았다. 열이 오르고 있었다. 사흘. 그 안에 혀가 풀리면 다행이고, 풀리지 않으면 이 모든 준비는 벙어리의 손에 들린 칼이 된다. 벨 수 있으나 휘두를 수 없는 칼.
그는 종이를 한 장 더 폈다. 이번엔 조문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적었다.
『방도가 하나 있소.』
유득경이 몸을 기울였다.
『조문을 미리 필사해 두겠소. 원문 그대로. 그날 혀가 안 풀리면, 내가 조당에서 그 종이를 펴 임금께 올리고, 임금께서 친히 읽으라 명하시게 하는 것이오.』
"허나 그건 네 입으로 읽는 게 아니지 않느냐. 죄인이 스스로 변호하는 격식이—"
『읽는 자가 임금이면 격식은 무너지지 않소. 죄인이 증좌를 올리고 임금이 검험하는 것은 친국의 정한 절차요. 다만—』
붓이 멈췄다. 유선의 손이 떨렸다. 다음 글자를 적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만 그리하면, 판을 짜신 이가 임금임이 만천하에 드러나오. 손에 피 안 묻히려던 임금이, 제 손으로 노론의 칼을 쥐는 꼴이 되오. 임금께서 결코 원치 않으실 그림이오.』
유득경이 이마를 짚었다. 두 갈래 길 모두 막다른 골목이었다. 유선이 제 입으로 읽으면 판이 서지만 혀가 굳으면 벙어리가 되고, 임금이 읽으면 혀 문제는 풀리나 임금의 밀계(密計)가 드러나 정조가 세운 판이 무너진다.
"…임금께 이 사정을 아뢰어야겠다. 처분을 미루시든, 다른 방도를—"
유선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지막 종이에 큼직하게 적었다.
『아뢰지 마시오. 임금은 재주를 아끼되 필요하면 버릴 분이오. 벙어리가 된 카드는 버려지오. 혀가 굳었다 알려지는 순간, 나는 판에서 빠지고 예송은 열리지 않소.』
유득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 또한 옳았다. 정조는 유선의 결벽을 답답해했고, 쓸모가 다한 카드에 정을 두지 않는 왕이었다. 유선이 조당에서 벙어리가 될 위험을 미리 알린다면, 정조는 그 위험을 안고 판을 열기보다 조용히 유선을 접고 다른 때를 노릴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때'는 유선에게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유선은 붓을 내려놓았다. 손등의 물집이 다시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대동사목을 끌어당겨, 그날 조당에서 읽을 조문에 손톱으로 자국을 새기기 시작했다. 혀가 굳어도, 손이 그 자리를 기억하도록. 눈을 감고도 짚을 수 있도록.
바깥에서 새벽닭이 울었다. 사흘 중 하루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다.
유득경이 문을 나서기 전, 유선을 돌아보았다. 유선은 등잔 아래 홀로 앉아, 소리 내지 못하는 입술을 달싹이며 조문을 외고 있었다. 목젖이 오르내렸으나 어떤 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유득경이 서고 문을 닫는 순간, 담장 밖 어둠 속에서 발소리 하나가 조용히 물러났다.
김치복의 겸인이었다. 그는 서고 창의 불빛과, 밤새 들고 나던 검서관의 발걸음을 낱낱이 눈에 담고, 새벽 서리를 밟으며 화성 쪽 길을 되짚어 갔다. 유선이 대동사목을 펴 든 것도, 조당에 판이 서는 날짜도, 그 죄인의 혀가 다시 굳기 시작했다는 것까지—머잖아 김치복의 귀에, 그리고 심환지의 귀에 닿을 참이었다.
칼은 벼려졌다. 그러나 칼을 쥔 손은 사흘 뒤 조당에서 소리를 낼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 못했고, 그 흔들리는 손을 노리는 눈은 이미 어둠 속을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