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여기 있어."
그 말을 뱉은 입술이 낯설었다. 방금 세 글자를 흘려보낸 입. 도, 까지는 나왔는데 그 뒤가 눈보라 속으로 흩어져버린 입. 현우는 운전석 뒤 유리로 다시 눈을 돌렸다. 명단 오른쪽, 자기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이제 젖은 창처럼 뿌옇게 번들거렸다. 획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여백의 옆모습은 도리어 선명해졌다. 사람의 옆얼굴. 이마와 콧대와 턱선. 그 위로 방금 삼킨 이름의 형태가 얇은 실핏줄처럼 겹쳐 있었다.
"봤지?" 여덟 번째 승객이 3번 좌석 언저리에서 응결하듯 흔들렸다. 형체는 이제 지안의 어깨선을 흉내 내고 있었다. "명단에서 지워지는 건 순간이야. 넌 이미 절반 이상 저쪽이야."
현우는 손바닥을 폈다. 손잡이 자국이 그어져 있던 자리. 그 손금 위로 자기 얼굴을 더듬어봤다. 왼뺨의 감각이 없었다. 어제 흥얼거리던 노래 제목도 없었다. 초등학교 담임의 이름도, 이제는 자기 이름도.
읽을 때마다 하나씩. 판독안을 켤 때마다 자신에게서 무언가가 빠져나가 저 종이 왼쪽으로 옮겨 갔다.
"기사님." 현우가 도경을 돌아봤다. "제가 방금, 뭘 잃었는지 기억나세요?"
"당신이…" 도경의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누구시더라. 아까부터 자꾸 물어보는데, 나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 도무지."
기억이 아니라 인식이 지워지고 있었다.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하늘이 볼펜을 쥔 채 손등을 내밀었다. 재혁, 서지안, 도경. 눌러 적은 이름들이 살갗에 파랗게 배어 있었다. 그 아래 빈 공간에 볼펜 촉이 대어졌다가, 멈췄다.
"안 써져." 하늘이 목을 조금 떨었다. "아저씨 이름 적으려고 하면 손이 안 움직여. 뭘 적어야 하는지가 머릿속에서 지워져. 이런 적 없었는데."
"적지 마." 현우가 말했다. "억지로 쓰려다 너까지 이상해질 수 있어."
"그럼 아저씨는 뭐가 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름 없는 사람. 여덟 번째 승객이 나른하게 던진 그 표현이 정확했다.
현우는 안내문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판독안을 켜려던 순간, 형체가 스르르 좌석 밖으로 흘러나왔다.
"켜봐." 형체가 속삭였다. "딱 한 번만 더 읽어. 그럼 넌 완전히 이쪽이 돼. 명단에서 마지막 흔적까지 지워지고, 넌 이 여백의 옆모습이 되는 거야. 편해질 거야. 죄책감도 없고, 3년 전 밤도 없고, 동생도 없어. 없던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으니까."
미끼였다. 현우는 그걸 알았다. 저쪽은 언제나 미끼를 던진다. 지킬수록 죽는 규칙, 대답하면 지워지는 목소리, 밀어내라고 속삭이는 손동작. 판독안을 켜라는 이 유혹도 함정의 문법을 벗어나지 않았다.
읽으면 지워진다. 그런데 저쪽은 읽으라고 한다.
현우는 손을 내렸다.
"안 읽어."
"뭐?"
"내가 판독안을 켜면 네가 강해진다며. 내 기억이 네 힘이 된다며. 그럼 나는 안 읽으면 돼. 네 밥그릇을 안 채우면 돼."
형체가 잠시 흔들림을 멈췄다. 히터 소음만 버스 안을 낮게 채웠다. 창밖 눈보라는 여전히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고, 계기판 시계는 1시 47분에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형체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웃는 것 같았다. "그럼 저 여백의 옆모습은 뭘로 채워지지? 넌 이미 얼굴 반쪽을, 노래를, 담임 이름을, 방금 네 이름까지 잃었어. 그게 다 어디로 갔게?"
현우의 시선이 종이 왼쪽으로 옮겨 갔다.
그 얼룩. 1화 첫 안내문에서부터 있던, 의미 없어 보이던 잉크 자국.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조금씩 짙어지던 번짐. 현우는 여태 그걸 종이의 결함쯤으로 여겼다. 물이 샜거나 인쇄가 뭉친 자리쯤으로.
이제 판독안 없이도 보였다.
얼룩 안에는 획이 있었다. 흐릿한 음표 모양 하나. 그 아래로는 사람 얼굴의 왼쪽 반. 눈꼬리와 광대의 곡선. 그리고 방금 삼켜진 세 글자의 골격.
현우가 잃어온 것들이 순서대로 그 여백에 적혀 있었다.
"이건." 현우가 중얼거렸다. "이건 네가 나한테서 빼앗은 게 아니야. 옮겨 적힌 거야. 여기, 이 종이에."
"그래서?" 형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날카로워졌다.
현우는 안내문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판독안을 켜지 않았다. 그냥 맨눈으로, 여백의 얼룩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음표. 얼굴 반쪽. 이름. 그리고—그 사이사이에, 처음 보는 글자들이 있었다.
작은 획들. 붉지도 검지도 않은, 연필 자국 같은 흐린 글씨. 규칙 조항이 종이 오른쪽에 정식으로 배어나기 전, 초안처럼 여백에 먼저 적혔다가 지워진 문장의 잔해.
'창가 손잡이를 세 번.' 반쯤 지워진 채였다. 그 옆엔 '가장 의심스러운 자를.' 또 그 아래엔 '대답하십시오.'
현우의 숨이 멎었다.
"하늘아."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렀다. "이리 와봐. 네 손등."
하늘이 다가와 손등을 안내문 옆에 나란히 댔다. 파란 볼펜 자국의 이름들과, 종이 여백의 흐린 획들.
"이 얼룩." 현우가 손가락으로 여백을 훑었다. "이게 계속 나를 갉아먹은 거라고 생각했어. 내 기억이 여기로 도망가서 이 옆모습을 짙게 만든다고. 근데 아니야. 이건 창고야."
"창고?"
"저쪽이 함정을 만들려고 초안을 여기다 먼저 써. 붉은 조항을 종이 오른쪽에 정식으로 올리기 전에, 여백에 연습하듯 적어. 그리고 그 초안 사이사이에 내가 잃은 기억이 섞여 들어와 있어." 현우의 손끝이 떨렸다. "그러니까 여백을 읽으면, 저쪽이 앞으로 어떤 규칙을 만들지 미리 볼 수 있어. 내가 뭘 잃었는지도. 대가 없이."
3번 좌석의 형체가 확 부풀었다. 히터가 한 번 꺼졌다 켜졌다.
"여백은 읽지 마." 형체가 낮게 말했다. 처음으로 유혹이 아니라 경고였다.
현우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저쪽이 방금까지 '판독안을 켜라'고 부추긴 건, 정식 조항을 읽게 해서 대가를 뽑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백을 읽는 건 막으려 한다. 여백은 대가가 없고, 여백에는 저쪽의 밑작업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까.
기억의 대가라고 던져준 이 얼룩이, 실은 적의 조작 설계도였다.
"하늘아, 네 손등에 이름 몇 개 있어?"
"재혁 아저씨, 서지안 누나, 도경 기사님." 하늘이 셌다. "세 명. 근데 이거 말고도 처음에 적었다가 손 씻으면서 지워진 것도 있어. 목도리 아저씨. 그리고… 이름 못 물어본 할머니 한 분."
"다섯." 현우가 여백의 흐린 획들을 다시 셌다. 초안 문장은 다섯 덩어리였다. 손잡이, 의심스러운 자, 대답, 그리고 반쯤 뭉개진 두 개 더. "다섯 개의 함정 초안. 다섯 명이 여기 걸렸어. 그리고 나까지 여섯."
"여섯 명이 지워졌다고?" 도경이 운전석 손잡이를 붙들었다. "내 버스에서 여섯이나."
"기사님이 3년간 이 노선을 돌면서 잃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더 많을 거예요." 현우는 승차권을 도경에게 건넸다. 도경의 이름이 찍힌, 3년 전 그 종이. "저쪽은 한 밤에 다 흡수하는 게 아니라, 매 운행마다 조금씩 명단을 비워온 거예요. 3년 동안."
형체가 좌석 밖으로 완전히 흘러나왔다. 지안의 어깨선, 재혁의 실루엣, 목도리의 형태가 겹쳐지며 물결쳤다. 흡수한 존재들의 형상을 죄다 뒤집어쓰고 있었다.
"똑똑하네." 여덟 번째 승객이 여러 겹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이 명단을 다 비우면 완전한 존재가 돼. 없던 운행. 없던 사람들. 그 전부를 나 하나로. 넌 마지막 몇 조각 중 하나일 뿐이야."
현우는 이제 저쪽을 보지 않았다. 도경과 하늘을 봤다.
"지금까지 나는 규칙을 읽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판독안 켜고, 색 보고, 대가 치르고. 나 혼자." 그가 침을 삼켰다. "근데 그게 저쪽이 원한 거였어요. 내가 읽을수록 내가 지워지고, 지워진 내 기억이 저쪽 힘이 되니까. 나는 지금까지 적을 먹여 살린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 하늘이 물었다.
"안 읽어. 대신 나눠." 현우는 여백을 가리켰다. "이 흐린 초안 글씨는 너희도 볼 수 있어. 판독안 없어도. 하늘아, 넌 기억력이 좋으니까 여백에 새 획이 뜰 때마다 손등에 옮겨 적어. 기사님은 3년간 이 노선을 몰았으니까 어떤 조항이 가짜였는지 몸으로 알아요. 지안이 하던 문체 분석은—"
현우가 말을 멈췄다.
"지안이 하던 걸, 우리가 같이 해요. 지안이 남긴 봉투. 어머니 입원 확인서. 그게 진짜 행정 서식이 어떤 문장인지 보여주는 기준이었어요. 그 서식이랑 여백 초안을 대조하면, 색이 없어도, 나 혼자 안 읽어도, 뭐가 가짜 규칙인지 골라낼 수 있어요."
도경이 좌석 밑을 뒤졌다. 지안이 앉았던 자리 아래. 삭제된 사람의 유류품은 물증을 지닌 자에게만 남는다. 하늘의 손등에 지안의 이름이 있었다. 도경의 손이 좌석 틈에서 구겨진 봉투 하나를 끌어냈다.
"이거." 도경이 봉투를 들었다. "여기 있었네.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나는 몰랐는데."
봉투 겉면에 병원 로고와 정갈한 인쇄체가 찍혀 있었다. 존댓말이되 명령형이 아닌, 주어가 분명하고 예외 조항이 붙은 진짜 서식의 문장.
현우는 형체를 향해 돌아섰다. 처음으로, 밀어내는 계산도 자기만 살 동선도 떠올리지 않고.
"너는 내가 혼자 읽다가 지워지길 기다렸지. 근데 나 이제 안 읽어. 이 세 명이 대신 읽을 거야. 넌 우리 모두를 지울 순 없어. 손등에 적힌 이름은 못 지우잖아."
형체가 일렁였다. 여러 겹의 얼굴 사이에서 지안의 윤곽이 잠깐 도드라졌다가 흩어졌다.
"흥미롭네." 여덟 번째 승객이 말했다. "그런데 네 이름은 이미 없어. 넌 명단에 없는 사람이야.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 셋을 지휘하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면, 명단을 다시 세. 너는 애초에 세어지지 않을 거야."
현우는 안내문 여백을 다시 봤다.
옆모습 얼룩. 자기 얼굴, 자기 이름, 자기 노래가 옮겨 적힌 그 자리. 그리고 그 아래, 방금 새로 배어나기 시작한 흐린 획 하나. 다음 함정의 초안이 아니었다. 초안이 아니라—규칙의 구조 그 자체였다.
'복원 대기자는 잔여 명단이 비워질 때 자리로 돌아온다.'
현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여백에는 저쪽의 밑작업뿐 아니라, 이 세계가 돌아가는 진짜 뼈대까지 적혀 있었다. 저쪽이 지우고 싶어 한 문장까지도.
그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잔여 명단이 비워질 때. 흡수된 사람들이 돌아오려면, 명단이 비어야 한다. 저쪽이 명단을 다 비우면 저쪽이 완성된다. 그런데 명단이 비면 복원 대기자가 돌아온다.
두 문장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리고 그 모순 사이에, 틈이 있었다.
"기사님." 현우가 천천히 말했다. "제 이름이 명단에서 지워졌잖아요. 저는 이제 세어지지 않아요. 그 말은—제가 명단의 마지막 한 칸을 스스로 비울 수 있다는 뜻이에요."
"무슨 소리야." 도경이 봉투를 든 손을 멈췄다.
"저를 완전히 지우면요."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가 잔여 1이니까, 제가 스스로 명단에서 사라지면 명단이 비워져요. 명단이 비워지면—복원 대기자가 다 돌아와요. 지안이도, 재혁이도, 목도리 아저씨도, 할머니도. 3년 전 사람들까지 전부."
버스가 눈보라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3번 좌석의 형체가 처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흡수한 얼굴들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안 돼." 여덟 번째 승객이 여러 겹의 목소리로 말했다.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현우는 여백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자기 얼굴, 자기 이름이 새겨진 그 자국. 명단이 비면 모두가 돌아온다. 그리고 그 비움을 완성할 수 있는 건, 이미 이름을 잃고 반쯤 여백이 된 자신뿐이었다.
돌아오는 명단에, 자기 자리는 없을 것이다.
"아저씨." 하늘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손등의 이름들이 파랗게 흔들렸다. "그거 하면, 아저씨는 어떻게 돼."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름이 없었다. 다만 안내문 여백의, 자기 옆모습이 새겨진 그 자리를 오래 바라봤다.
전원을 살려서 함께 내리고 싶었다. 이번만은 아무도 밀어내지 않고.
그런데 그 방법이, 자기 자신을 마지막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