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의 벨트 버클이 바닥에 부딪히며 딱,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통로의 정적을 갈랐다.
"앉으세요." 현우의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이었다. 밀어내는 말이 아니라 붙잡는 말이었다. 스스로도 낯설었다. "기사님, 지금 일어나면 저것이 노려요."
3번 좌석의 형체가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안의 어깨선을 흉내 낸 윤곽이 눈보라 사이로 흐려졌다 다시 응결했다.
"도현우." 얼음 갈라지는 목소리가 현우의 이름을 굴렸다. "3년 전에도 너는 이 자리에 있었어. 지금과 똑같이. 눈보라, 27번, 그리고 나. 기억이 안 나겠지. 내가 가장 먼저 가져간 게 그 밤이니까."
현우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승차권을 쥔 손이 얼음장 같았다.
"그럼 보여줘."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네가 가져간 그 밤을."
"읽으려고?" 형체가 웃었다. "읽으면 잃을 텐데. 이번엔 큰 걸 가져갈 거야. 아주 큰 걸."
"안 읽어."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네 종이 안 읽어. 내 머릿속을 읽을 거야."
그는 눈을 감았다. 판독안은 안내문의 글자에 반응한다. 하지만 소급 삭제된 것들은 좌석 잔열로, 앉은 각도로, 시선의 습관으로 흔적을 남긴다고 했다. 지안의 흔적을 되짚었을 때처럼. 이번엔 3년 전의 자기 자신을 되짚어야 했다.
관자놀이가 뜨거워졌다.
눈 속에서 형상이 배어 나왔다. 같은 버스, 같은 통로. 다만 그때 창밖 정거장에 서 있던 건 동생이었다. 열아홉 살, 목까지 올린 패딩,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 잘 가. 도착하면 전화해.
버스가 눈에 갇혔다.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안내문이 갱신됐다. 붉은 글씨로. 그때도 현우는 그 붉은색을 봤다. 다만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승객 한 명이 하차하면 나머지는 안전합니다.'
현우는 숨을 삼켰다. 기억의 구석에서 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3년 전의 자기 목소리였다.
"너 먼저 내려. 정거장 문 열렸을 때. 나는… 나는 뒤에 남을게."
동생은 이미 밖에 있었다. 배웅하러 나온 동생. 그런데 그날의 현우는 문이 열린 틈에 몸을 문 쪽으로 뺐다. 자기가 내리려고. 동생을 방패처럼 앞에 두고. 눈보라 속에서 누가 안이고 누가 밖인지 뒤섞였다.
"기억났어?" 현실의 형체가 속삭였다. "그날 밤 문이 열렸을 때, 너는 계산했어. 문 옆이 안전하다고. 밖으로 나가는 게 사는 길이라고. 그래서 몸을 뺐지. 하지만 규칙은 '한 명이 하차하면'이었어. 넌 나가지 못했고—대신 안내문은 하차한 것으로 처리할 사람을 골랐어. 너의 계산 방향을. 네가 밀어낸 방향을."
"동생이…" 현우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내가 몸을 뺀 자리에… 동생이 배웅하러 서 있었어."
"정답."
관자놀이가 더 뜨거워졌다. 현우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의 얼굴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이번엔 무언가 더 무거운 게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삭제된 건 동생이 아니었지." 형체가 이어 말했다. "이 버스에 탑승 명단이 있는 건 승객이니까. 배웅 나온 사람은 명단에 없어. 삭제할 수 없어. 그래서 규칙은 명단 안에서 골랐어. 네가 앉은 자리, 네 승차권. 잔여 1은—"
"나였어."
현우의 무릎이 다시 꺾였다. 통로 바닥에 손을 짚었다.
"내가 지워졌어. 3년 전에. 그리고 동생만 나를 기억했어. 창밖에서. 아무도 안 믿어주는 채로."
"그런데 넌 지금 여기 있잖아." 형체가 몸을 기울였다. "지워진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탔을까? 궁금하지 않아?"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왼쪽 뺨. 얼굴 반쪽 기억이 사라진 그 쪽이었다. 감각이 없는데도 뜨거운 게 흘렀다.
그때 도경이 통로로 한 걸음 나섰다.
"잠깐." 도경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운전기사 특유의, 사람을 안심시키려 다듬은 톤이었다. "그 얘기… 3년 전 폭설. 나 그날 몰았어요. 27번. 승객을 하나 잃었다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미쳐서 매년 이 노선을 몰았고."
"기사님, 앉으세요." 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도경은 멈추지 않았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잃은 승객 얼굴이 기억이 안 났어. 이름도. 그날 사고 기록을 아무리 뒤져도 실종 신고가 없었어. 죽은 사람이 없는데 나는 누굴 잃었다고 3년을 앓았을까. 미친 사람처럼."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도경의 눈이 초점을 되찾고 있었다.
"당신 얘기 들으니까 아귀가 맞아." 도경이 형체를 노려봤다. "기록에 없는 이유가, 애초에 없던 사람으로 지워졌기 때문이라면. 내가 못 지킨 게 저것이었다면."
"기사가 눈치가 빠르네." 여덟 번째 승객이 흥미롭다는 듯 소리를 냈다. "맞아. 그날 잃은 승객도 나야. 정확히는 내가 지웠지. 그리고 너의 죄책감을 3년 동안 밥으로 삼아왔어. 이 사람의 죄책감도. 두 그릇을."
현우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딸깍, 맞물렸다.
4화에서 느낀 위화감이 살아났다. 안내문이 그의 손동작을, 그가 문 옆으로 몸을 빼려는 계산을, 예측을 깨겠다는 결심까지 미리 적어두던 그 감각. 그때 소름 끼치게 정확했던 이유가 이제 보였다.
"넌 나를 3년 전부터 읽고 있었어." 현우가 천천히 말했다. "그날 내가 문 옆으로 몸을 뺀 걸 봤으니까. 위기 앞에서 남을 먼저 앞세우고, 문 옆 자리를 계산하고, 비상 망치를 눈으로 재는 습관을. 삭제하기 전에, 전부 수집한 거야."
"데이터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겠지." 형체가 만족스럽게 응결했다. "3년 전 밤, 나는 너를 지우기 전에 너의 계산 패턴을 통째로 복사했어. 어떤 위기에서 누구를 밀어낼지, 어떤 자리로 도망칠지. 그걸로 이번 밤의 규칙을 짰지. 붉은 조항 하나하나, 다 너를 위한 맞춤 설계였어. '가장 의심스러운 자를 격리하라'—너는 반드시 옆 사람을 의심하고 밀어내니까. '창가 손잡이를 세 번 두드리라'—너는 반드시 상대를 그 자리로 몰아넣으니까."
지안. 세 글자가 하늘의 손등에서 현우를 찔렀다.
"내가 지안을 밀어낸 것도." 현우의 입술이 떨렸다. "네가 짜놓은 각본대로였구나."
"각본대로였지. 네 습관이 각본이었으니까." 형체가 나른하게 웃었다. "나는 손 하나 안 댔어. 그냥 너를 너답게 두면, 네가 알아서 사람들을 지워줬거든. 3년 전 동생처럼. 오늘 밤 지안처럼."
통로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히터 소음만이 낮게 깔렸다.
현우는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잡이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 손으로 동생을 밀었고, 지안을 밀었다. 위기가 올 때마다 몸이 먼저 계산했다. 문 옆으로. 남을 앞으로. 살 동선으로.
그런데 그게 전부 저것의 먹이였다.
"하늘아." 현우가 쉰 목소리로 불렀다.
창가 자리에서 하늘이 손등을 들어 보였다. 볼펜으로 눌러 적은 이름들. 재혁. 서지안. 도경. 목도리. 살에 박히도록 눌러 쓴 글씨였다.
"넌 왜 이걸 적어." 현우가 물었다.
"이 사람들만은 없던 사람 되기 싫어서." 하늘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눈은 젖어 있었다. "지워져도, 내 손등엔 남으니까. 아저씨가 지안 누나 기억하는 거랑 똑같아."
현우는 그 손등을 오래 바라봤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가 밀어낸 사람들을 후회로만 기억했다. 후회는 부채였다. 갚아야 하는 빚. 갚을 수 없어서 다음 위기에 또 같은 짓을 반복하게 만드는 저주. 저것은 그 저주를 밥으로 먹었다.
"틀렸어." 현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형체가 흥미를 보였다.
"네가 나를 읽었다는 거. 3년치 데이터로 내 습관을 완벽하게 안다는 거." 현우는 승차권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건 어제까지의 나야. 네가 복사한 건 밀어내고 후회하는 나였지. 근데 후회는 습관을 못 바꿔. 후회는 다음번에 또 밀게 만들어. 넌 그걸 알고 후회하는 나를 3년이나 키운 거잖아."
"그래서?"
"그래서 이번엔 후회 안 해." 현우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밀어내고 후회하는 대신, 밀어내지 않기를 선택할 거야. 부채라서 갚는 게 아니라, 그냥 안 미는 걸 고르는 거야. 동생 때문에 갚는 게 아니라, 여기 이 사람들을 살리고 싶어서."
그는 도경을 돌아봤다. 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계산, 나도 안 믿어요." 도경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3년 전엔 나도 규칙만 붙들다가 사람을 놓쳤어. 이번엔 안 그래. 내 버스, 내 승객. 둘이서 하나도 안 지워지게 이걸 끝내봅시다."
"둘이 아니야." 하늘이 손등을 들었다. "이름은 내가 붙들어. 아저씨 둘이 못 기억하는 거, 내 손등이 기억해."
세 사람의 시선이 3번 좌석으로 모였다.
여덟 번째 승객의 형체가 처음으로 미묘하게 흔들렸다. 흡수할 각본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처럼.
"재밌네." 형체가 낮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엔 아까의 여유가 조금 빠져 있었다. "그럼 확인해보자. 네가 정말 바뀌었는지. 마지막 잔여 1이 채워지면 이 운행은 영원히 없던 게 돼. 후보는 둘이었지. 너와 기사. 그런데—"
형체가 안내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운전석 뒤 유리에 붙은 종이가 스르르 밝아졌다.
"네가 방금 진실을 읽었잖아. 3년 전 밤을. 대가 없이 넘어갈 줄 알았어?"
현우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까 소급 기억을 총동원해 3년 전을 되짚었을 때, 무언가 무거운 게 빠져나갔던 감각. 그게 이제야 형태를 드러냈다.
"내가 뭘 잃었지." 현우가 물었다. 자기 목소리가 이상하게 멀게 들렸다.
"네 이름." 형체가 속삭였다.
현우는 안내문을 봤다. 판독안이 없어도 보였다. 종이 오른쪽, 승객 명단. '서지안'은 이미 지워진 자리였고, '한도경', '이하늘', '윤재혁'은 검은 글씨로 또렷했다. 그리고 그 위, 세 글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흐려지고 있었다.
도. 현. 우. 마지막 획부터 잉크가 번지듯 풀리며 왼쪽 여백으로 스며들었다. 여백의 얼룩—그의 얼굴 반쪽이 옮겨간 그 얼룩이, 이제 이름 석 자를 삼키며 사람 옆모습으로 짙어졌다.
"도… 씨였나." 도경이 미간을 찡그렸다. "방금까지 뭐라고 불렀더라. 당신 이름이…"
"기사님." 현우가 다급하게 도경의 팔을 잡았다. "제 이름, 방금 뭐였어요."
도경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이름을… 아까 들었는데. 이상하다. 왜 기억이 안 나지."
하늘이 볼펜을 쥐고 손등으로 가져갔다. 재혁, 서지안, 도경. 그 아래 빈 살갗에 볼펜을 댔다. 그러나 촉이 멈췄다.
"아저씨." 하늘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저씨 이름, 뭐였어. 나 지금 적어야 하는데. 적어야 하는데 뭔지가—"
현우는 자기 이름을 말하려 입을 열었다.
혀끝에서 세 글자가 미끄러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 알던 것이었다. 도, 까지는 나왔다. 그다음이 눈보라 속으로 흩어졌다.
안내문 여백의 옆모습이 한 겹 더 짙어졌다. 이번엔 이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자." 여덟 번째 승객이 나른하게, 그러나 이번엔 분명한 허기를 담아 말했다. "네가 밀어내지 않기를 선택하든 말든 상관없어. 넌 진실을 읽었고, 진실은 비쌌지. 이제 아무도 널 부를 이름이 없는데—어떻게 남을 살릴 거야? 이름 없는 사람이."
버스가 눈보라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히터가 한 번 꺼졌다 다시 켜졌다.
현우는 흐려지는 자기 이름을 응시했다. 손등의 하늘을, 팔을 붙든 도경을 번갈아 봤다. 세 글자를 잃은 입으로, 그는 남은 목소리를 짜냈다.
"그래도… 나는 여기 있어."
여백의 옆모습이, 그 말에 대답하듯 마지막 획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