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현우 씨가… 누구예요?"

도경의 말이 통로의 정적을 갈랐다. 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백에서 자기 이름이 얼룩에 삼켜지는 걸 지켜보면서, 그는 아직도 방금 흘려보낸 게 뭔지 붙잡으려 했다. 무언가 컸다. 얼굴도 노래도 아닌, 더 안쪽의 것. 손가락 끝이 저리도록 애를 써도 이름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판독안은 대가를 받고 답을 줬다. 여백의 명단 아래, 회갈색으로 흐릿하던 문장 하나가 검게 굳어 있었다.

복원 대기자는 삭제를 실행한 규칙을 역으로 지키면 자리로 돌아온다.

검은색. 진짜 규칙이었다. 지운 문장을 되짚으면 지워진 사람이 돌아온다는 뜻. 지안도, 잔여 1도, 방법이 있었다.

현우는 그 한 줄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됐다. 되돌릴 여지가 있다. 그런데 손이 떨렸다. 창밖 표지판. 눈보라 사이로 반쯤 파묻힌 파란 간판이 헤드라이트에 잡혔다.

시외 27번 · 문막.

3년 전 그 밤, 동생을 태워 보낸 버스와 같은 노선. 같은 차량번호. 현우는 그 숫자를 세 번 확인했고, 세 번 다 같았다. 되돌릴 방법을 찾았다는 안도가, 이 버스가 무엇인지 아는 순간 목구멍에서 얼어붙었다.

그때 3번 좌석에서 소리가 났다.

소리라기엔 부족한, 유리에 성에가 번지는 것 같은 미세한 마찰음. 현우는 고개를 돌렸다. 히터가 도는데도 그 자리만 처음부터 얼어 있던 좌석. 정원 일곱에 실제 다섯, 그 어긋난 숫자가 웅크리고 있던 빈자리.

거기서 공기가 하얗게 뭉치고 있었다.

숨을 내쉰 것처럼. 아니, 누군가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냉기가 형체를 얻어갔다. 좌석 등받이에서부터 어깨선이, 목이, 머리 윤곽이 안개가 얼어붙듯 응결했다. 현우는 뒷걸음질했다. 좌석 번호판에 등이 부딪혔다.

"도경 씨. 저거—"

말하다 멈췄다. 도경은 3번 좌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초점 없이 통로 어딘가를 헤맸다. 재혁은 뒷좌석에서 벨트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릴 뿐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고, 하늘은 창가에 이마를 붙인 채 손등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다. 현우만 봤다.

응결한 형체가 좌석에서 몸을 세웠다. 그리고 얼굴이 만들어지는 순간, 현우의 무릎이 다시 꺾였다.

지안이었다.

방금 손잡이를 세 번 두드리게 만들어 삭제한, 그가 민 사람. 흰 서류봉투를 왼팔에 낀 옆모습. 어머니 병원 입원 확인서를 넣어두던 손때 묻은 봉투까지. 얼굴의 반은 아직 성에처럼 흐렸지만, 눈매와 다문 입술은 지안의 것이 분명했다.

"지안 씨…?"

형체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지안의 입이 열렸다. 그런데 나온 건 지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느 승객의 것도 아닌, 얼음이 갈라지는 것 같은 낮은 울림.

"조금만 더."

현우는 물러서려다 좌석 팔걸이에 허벅지를 부딪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 얼굴이 완전해져. 이 사람이 알던 것, 이 사람이 가려던 곳, 아픈 어머니의 이름까지. 전부 나한테 옮겨오는 중이야."

형체의 봉투가 선명해졌다. 조금 전보다 흰빛이 짙었다. 지안이 사라지면서 남긴 것들이 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존재를, 기억을, 흡수하면서 저것은 점점 사람의 모습을 얻어갔다.

살인마가 칼을 든 게 아니었다. 목을 조르러 오는 것도 아니었다. 저것은 그저 빈 좌석의 냉기에 앉아, 지워진 사람을 빨아들이며 형체를 늘려가고 있었다. 현우가 밤새 두려워한 습격 따윈 없었다. 무기는 이미 눈앞에 있었다. 저 앞 유리에 붙은, 종이 한 장.

여덟 번째 승객이 손을 들었다. 지안의 손처럼 생긴 것이. 그리고 운전기사 뒤 안내문을 향해 뻗었다.

손끝이 종이에 닿지도 않았는데 글자가 배어 나왔다. 붉게. 젖은 잉크가 안쪽에서 밀려 올라오듯 새 조항이 떠올랐다.

도현우 승객은 창밖의 목소리에 대답하면 안전합니다.

현우는 그 손이 움직이는 걸 똑똑히 봤다. 안내문은 저절로 갱신되는 게 아니었다. 정거장이 만드는 것도, 눈보라가 쓰는 것도 아니었다. 저 형체가 손짓 한 번으로 문장을 지어내고 있었다. 조작의 출처가 눈앞에 있었다. 밤새 목숨을 걸고 색을 판독하고 문체를 뜯어본 그 규칙들을, 저것이 손가락으로 짜 넣고 있었다.

"네가… 쓰는 거였어."

"나는 옮겨 적을 뿐이야." 형체가 종이에서 손을 거뒀다. "너희가 스스로 어길 문장을. 목도리를 두른 남자가 통로로 나서고 싶어 했으니 나서라고 적었고, 저 여자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걸 봤으니 세 번 두드리라 적었지. 나는 너희를 밀지 않아. 너희 안에 이미 있는 걸 문장으로 꺼내줄 뿐이야."

현우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창밖의 목소리에 대답하라—3화에서 동생 목소리로 그를 유인하던 그 함정. 그가 대답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걸, 저것이 읽었다는 뜻이었다.

"너는 특히 쉬워." 형체가 반쯤 완성된 지안의 입술로 웃었다. "위기가 오면 너는 반드시 옆 사람을 먼저 의심하지. 문 쪽으로 몸을 빼고, 누굴 방패로 세울지 계산해. 그리고 밀어낸 다음에 후회하고, 다음 위기에 또 밀어. 나는 네 다음 손동작을 네가 하기 전에 적어둘 수 있어. 오늘 밤 여기서 그걸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여백에 미래형 문장이 적혀 있던 이유. 그의 결심까지 종이가 앞서 알던 이유. 저것은 규칙을 만드는 게 아니라, 현우라는 사람의 습관을 데이터로 읽어 그에게만 맞는 함정을 재단하고 있었다. 지안을 민 것도, 그 전에 도경을 방패 삼으려 몸을 왼쪽으로 뺀 것도, 전부 저것이 예측한 각본 안이었다.

토할 것 같았다. 현우는 좌석을 짚었다.

"닥쳐."

"닥치라고 해도 다음 정거장에서 너는 또 누군가를 밀 거야. 그게 너니까. 세 명 남았어. 도경, 재혁, 그리고 저 아이. 누굴 먼저 지울래? 계산해 봐. 어느 자리에 앉으면 네가 가장 오래 살지."

현우의 손이 저도 모르게 통로 쪽으로 움직였다. 문에서 가까운 좌석.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셈을 시작했다. 그 순간 그는 자기 손이 뭘 하는지 알아차리고 소름이 끼쳐 주먹을 쥐었다.

또였다. 저것 말대로였다.

"현우 오빠."

하늘의 목소리였다. 창가에서. 현우가 돌아보니 하늘이 손등을 그에게 들어 보이고 있었다. 볼펜으로 눌러 적은 이름들. 번져도 지워지지 않게 몇 번씩 덧그은 글씨.

재혁. 지안. 도경. 그리고 새로 적힌 한 줄. 목도리.

"지안 언니 이름, 아직 여기 있어." 하늘이 손등을 문질러 보였다. 잉크가 살에 배어 지워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언니를 기억 못 해. 근데 내 손에는 있어. 이거 아까 언니 사라지기 전에 적어뒀거든. 목도리 아저씨도. 오빠가 그 사람 얘기했을 때, 안 믿었지만 그래도 적었어."

"하늘아, 그게—"

"난 아무도 안 지워." 하늘이 그의 말을 잘랐다. 시큰둥하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종이가 뭘 하든, 저게 누굴 데려가든. 내 손에 적힌 사람은 내가 기억해. 없던 사람으로 안 만들어. 집 나갔다가 처음 집에 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이야. 지우기 싫어."

현우는 그 손등을 봤다. 열여덟 살짜리 손등에 눌러 적은 이름 넉 줄. 저것은 사람을 흡수해 형체를 늘리는데, 이 아이는 사라진 사람의 이름을 살에 새겨 붙들고 있었다.

밤새 현우가 한 일은 반대였다. 위기가 올 때마다 누굴 밀지 계산했다. 지안을 밀었고, 도경을 방패로 세우려 몸을 뺐고, 3년 전에도—기억이 조작된 거라면, 그때도 누군가를 두고 물러섰을지 몰랐다. 밀어내는 게 그의 습관이라 저것이 그를 제일 쉬운 먹이로 골랐다.

그런데 이 아이는 밀지 않았다. 손등이 새까매지도록 이름을 눌러 담기만 했다.

"오빠도 적어." 하늘이 볼펜을 내밀었다. "손이 떨리면 내가 적어줄게. 누구 지웠어? 이름 알아?"

"…서지안." 현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봉투를 든. 문막이 아니라 그 근처 시골 병원에 어머니가 입원해 있고. 서식 얘기를 하던 사람이야. 이름이 서식이 아니라고, 이 문장은 행정 양식이 아니라고."

하늘이 이미 적혀 있는 지안이라는 글자 옆에, 서지안이라고 성을 채워 넣었다. 세 글자가 살에 박혔다.

3번 좌석의 형체가 그 광경에 움직임을 멈췄다. 봉투의 흰빛이 잠깐 흐려졌다. 흡수하던 지안의 무언가가, 손등에 붙들려 되당겨지듯.

현우는 그걸 봤다. 놓치지 않았다.

"아직 안 끝났구나." 그가 형체를 향해 돌아섰다. 무릎에 힘이 돌아왔다. "지안 씨, 아직 다 안 옮겨갔어. 얼굴 반쪽이 아직 흐리잖아. 봉투 흰빛도 방금 흔들렸고. 흡수가 끝나기 전이면—되돌릴 수 있어. 저 여백에 검은 조항으로 적혀 있었어. 삭제를 실행한 규칙을 역으로 지키면 자리로 돌아온다고."

"그걸 읽으려면 얼마나 잃어야 하는지 알잖아." 형체가 다시 웃었다. "규칙을 하나 되짚을 때마다 너는 기억을 하나 내놓지. 그게 전부 나한테 온다. 네가 지안을 되돌리려 애쓸수록 나는 강해져. 너는 네 손으로 나를 완성시키고 있는 거야."

"그래도."

현우는 형체의 눈을, 지안의 눈매를 정면으로 봤다. 밤새 처음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문 쪽으로 몸이 빠지지 않았다. 계산이 멈췄다.

"그래도 되돌릴게. 지안 씨. 당신 이름 하늘이 손에 있고, 나도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 병원 확인서, 문막 근처, 서식 얘기. 다 기억해. 흡수 끝나기 전에, 내가 규칙 역설계해서 당신 자리로 돌려놓을게요. 이번엔 안 밀어. 안 두고 가."

말하면서도 알았다. 이건 저것이 예측 못 한 문장이라는 걸. 밀어낼 각본에 이런 다짐은 적혀 있지 않았다. 현우는 자기 목소리가 종이보다 먼저 나왔다는 걸, 처음으로 확신했다.

3번 좌석의 형체가 조용해졌다. 웃음기가 걷혔다. 반쯤 완성된 지안의 얼굴이, 어느 사이엔가 지안의 것이 아니게 바뀌고 있었다. 눈매가 낯설어지고, 봉투가 흐려지고, 좌석에 앉은 그림자가 다른 윤곽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이, 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유인하는 붉은 조항의 어투가 아니라, 아주 오래 알아온 것 같은 목소리로.

"도현우."

현우는 얼어붙었다.

"너는 이 얼굴을 되돌리겠다고 하지. 그런데 정작 너 자신은 되돌릴 자리가 어디인지 아니?" 형체가 성에 낀 손을 들어 창밖 파란 표지판을 가리켰다. 시외 27번 문막. "3년 전에도 너는 이 버스에 있었어. 물러선 게 아니라, 탔어. 이 자리에. 그날 밤에도."

눈보라가 창을 때렸다. 히터 소리 말고는 정적이었다.

"동생을 태워 보낸 게 아니라, 너희 둘 다 여기 있었지. 그럼 그날 지워진 건 누구였을까. 네 동생이었을까—"

형체가 말을 멈추고, 아직 반쯤 남은 지안의 입술로 웃었다.

"—아니면 너였을까?"

현우의 숨이 멎었다. 3번 좌석의 냉기가 통로까지 밀려와 발목을 감았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지." 형체가 좌석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지안의 봉투는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다른 것이 손에 들려 있었다. 구겨진 승차권 한 장. 3년 전 날짜가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네 죄책감을 봐. '내가 태워 보냈다', '내가 살렸어야 했다'. 얼마나 선명해. 밤새 그 문장을 몇 번이나 곱씹었어. 이상하지 않았니? 지워진 사람은 아무도 기억 못 하는데, 너만은 네 죄를 그렇게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게."

현우의 손등에 남은 손잡이 자국이 욱신거렸다. 지안을 민 감촉. 3년 전 물러섰던 몸. 방금 저것이 말했다. 그 기억마저—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며." 그가 억지로 입을 뗐다. "네가 심는다며. 그럼 이 죄책감도 네가 심은 거잖아. 내가 밀어냈다는 감각도. 나를 제일 쉬운 먹이로 만들려고."

"반은 맞아." 형체가 승차권을 들어 보였다. "네 죄책감은 진짜야. 다만 대상이 틀렸지. 너는 동생을 두고 물러섰다고 기억하지만, 실제로 그날 이 자리에 앉아 있던 건 너였어. 동생은 배웅하러 나왔던 거야. 눈보라에, 정거장에. 그리고 이 버스가 지워지는 순간, 창밖의 동생만이 너를 기억했지. 딱 지금 저 아이가 지안을 기억하듯이."

현우는 하늘의 손등을 돌아봤다. 서지안. 세 글자가 살에 박혀 있었다.

"3년 동안 네 동생은 손등에, 수첩에, 어디에든 네 이름을 적으며 버텼을 거야. 없던 사람이 되지 말라고. 그러다 지쳤겠지. 아무도 자기 말을 안 믿으니까. 너라는 사람은 이미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형체의 낯선 얼굴이 기울었다. "그런데 오늘 밤, 복원 대기 잔여 1이 다시 이 버스에 올라탔어. 3년 만에. 네 발로."

승차권이 현우의 무릎 앞으로 떨어졌다. 눈보라가 통로를 채웠다.

"읽어 봐. 판독안으로. 이 승차권 이름."

현우는 종이를 주웠다. 손이 떨렸다. 읽으면 잃는다. 하지만 이건 여백이 아니라 물증이었다. 삭제 직전 유류품을 지닌 자만이 볼 수 있다던, 그 물증.

관자놀이가 뜨거워지지 않았다. 대가 없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승차권에 찍힌 이름은 동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것도 아니었다.

도경이었다. 한도경.

"기사님이…?" 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운전석의 도경이 여전히 초점 잃은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왜 기사님 이름이—"

"3년 전에도 저 사람이 이 27번을 몰았거든." 형체가 나른하게 말했다. "폭설에 승객을 잃었다고 그렇게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날 지워진 승객을, 저 사람은 죽었다고 기억해. 실은 지워진 건데. 그래서 매년 같은 노선을 몰아. 없어진 사람을 찾으려고. 저 사람이 이 버스에 다시 오른 이유가 그거야."

현우의 등 뒤에서 도경이 몸을 돌렸다. 초점 없던 눈이, 승차권을 든 현우를 향해 천천히 맞춰졌다.

"그 표…" 도경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디서 났어요. 그거 3년 전, 내가… 내가 못 지킨 승객 표랑 똑같은데."

여덟 번째 승객이 소리 없이 웃었다. 3번 좌석의 형체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 흡수할 다음 것을 고르듯.

"자, 이제 알겠지." 얼음 갈라지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이 버스에 3년 전과 이번을 잇는 사람이 둘이야. 너와, 저 기사. 그럼 오늘 밤 마지막에 지워질 잔여 1은—누구여야 완성될까."

도경이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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