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종이 아래에서 그의 얼굴 반쪽이 눈을 뜨듯 짙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새 잉크가 한 줄 더 배어 나왔다.

도현우 승객은 이제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심할 것입니다.

현우의 손끝이 등받이를 긁었다. 젖은 잉크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종이는 벌써 다음 문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자가 정보를 흘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뭐라고 적혔냐니까요." 지안이 한 발 다가섰다. 흰 봉투를 쥔 손이 그의 어깨에 닿을 듯 가까웠다. "도현우 씨. 얼굴이 하얘요."

닿지 마. 현우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깨가 창 쪽으로 물러났다.

머릿속에서 계산이 돌았다. 내가 밀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걸 저쪽이 안다. 손잡이에서 손 뗀 걸 안다. 그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나를 읽어서 저쪽에 넘기는 사람. 창밖도 아니고, 3번 좌석도 아니고—바로 옆에서.

지안이었다. 처음부터 나를 재는 눈으로 봤던 사람. 색이 안 보인다면서 문체만으로 전부 골라내던 사람. 봉투를 놓지 않는 사람.

"당신."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 뭐예요."

"뭐라니." 지안의 눈이 좁아졌다.

"처음부터 나 관찰했잖아요. 내가 뭘 보는지, 어디서 얼어붙는지. 다 봤잖아요. 그거 어디에 넘겼어요? 저 종이한테?"

"도현우 씨." 도경이 통로에서 반쯤 일어섰다. "지금 무슨—"

"내 결심을 저쪽이 알아요." 현우는 종이를 가리켰다. 손이 떨렸다. "손잡이에서 손 뗀 것까지 적혀 있어요. 방금. 이 안에서 그걸 본 사람은 당신뿐이야."

지안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냉철하던 관찰자의 입에서 상처받은 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색을 봐요? 미래형인지 아닌지밖에 못 읽는 내가?"

말은 옳았다. 현우도 알았다. 알면서도 몸이 멈추지 않았다. 3년 전에도 그랬다. 동생을 태운 버스가 출발할 때, 그는 자리가 하나 남았는데도 다음 차를 타겠다고 뒤로 물러났다. 붐비는 게 싫어서. 위험할까 봐. 자기만 살 계산을 순간적으로 한 것이다. 그 버스가 빙판에서 미끄러졌다.

밀어내는 건 그의 본능이었다. 후회는 언제나 그다음에 왔다.

"저기." 현우가 붉은 조항을 가리켰다. 안내문 아래쪽, 이번 정거장에 뜬 새 문장. **추위를 느끼는 승객은 창가 좌석의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려 안전을 확인하십시오.** 다정한 권유형. 색은 붉었다. 그의 눈에만.

"당신이 결백하면 저거 두드려요. 안전하다며. 서식 전문가면 알 거 아냐. 저게 진짠지 가짠지."

"현우 씨, 저건—"

"두드리라고!"

버스가 흔들렸다. 지안이 균형을 잡으려 창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현우의 손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밀 생각이 아니었다. 아니라고, 나중에 백 번 되뇌게 될 것이었다. 그저 몸이 먼저 움직였을 뿐. 지안의 손이 손잡이를 잡았고, 관성으로—한 번, 두 번, 세 번, 두드렸다.

세계가 깜빡였다.

히터 소음이 한 박자 끊겼다. 창밖 눈보라가 정지 화면처럼 멈췄다가 다시 흘렀다. 현우의 눈앞에서 지안이 있던 자리가 흐려졌다. 흰 봉투가 공중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시야에서 지워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몇 명이었죠." 도경이 손가락을 접다 멈췄다. "네 명. 넷이었나?"

하늘이 손등을 내려다봤다. 볼펜으로 적은 이름 네 개. 윤재혁, 서지안, 한도경, 도현우. 하늘의 눈이 두 번째 이름에 머물렀다.

"이거." 하늘이 손등을 문질렀다. "이거 왜 적었지. 서지안… 누구예요, 이거?"

"몰라." 재혁이 팔짱을 꼈다. "네가 적었잖아."

현우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창가 좌석이 비어 있었다. 손때 묻은 봉투도, 그것을 쥐던 손도, 어머니에게 가던 마지막 버스도, 전부. 좌석 시트는 눌린 자국 하나 없이 매끈했다. 아무도 앉은 적 없는 것처럼.

"서지안." 현우가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 있었어요. 봉투 들고. 어머니 병원 확인서. 문체가 어쩌고 하면서 진짜 규칙 골라내던 사람. 조금 전까지 나랑 얘기했잖아요."

"누구랑?" 도경이 진심으로 물었다. 강박에 사로잡힌 그 눈에, 이번엔 어떤 상실감도 없었다. 잃은 걸 모르니까. "현우 씨, 계속 혼자 얘기했어요. 아까부터."

또였다. 또 나 혼자만 기억한다.

무릎이 꺾였다. 현우는 통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에 아직 지안의 등을 민 감촉이 남아 있었다. 얇은 코트 너머의 척추, 그 미세한 떨림. 밀어낼 때 그녀가 뒤돌아본 눈. 상처받은 게 아니라—놀란 눈이었다.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믿어주지 않는 사람을 볼 때의 그 눈.

3년 전 동생의 뒷모습이 그 위에 겹쳤다. 잘 다녀올게, 하고 버스에 올라타던 등. 형은 왜 안 타, 물었을 때 그가 뒤로 물러나며 지었던 표정. 다음 차 탈게. 붐비잖아.

밀어냈다. 또 밀어냈다. 내가 살자고.

"난 아무도 안 밀어낸다고 했잖아." 현우는 자기 무릎에 이마를 박았다. "방금 말했잖아. 안 밀어낸다고. 근데 또—"

저쪽이 이겼다. 나를 읽고, 내 결심을 미끼로, 내가 결심을 지키려다 오히려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예측을 깨겠다는 결심조차 저쪽의 함정 안에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무너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안은 3년 전 동생과 다르다. 동생은 물리적으로 죽었다. 지안은—지워졌다. 지움에는 규칙이 있다. 규칙이 있으면 되짚을 수 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안내문 앞에 섰다. 판독안을 켜는 건 대가를 치르는 일이다. 읽을 때마다 그의 무언가가 종이 여백으로 옮겨 간다. 그래도 봐야 했다.

**추위를 느끼는 승객은 창가 좌석의 손잡이를 세 번 두드려 안전을 확인하십시오.**

방금 지안이 어긴—아니, 어겼다고 만들어진 그 조항.

현우는 글자를 응시했다. 색이 번졌다. 붉게. 명백하게 붉게. 가짜였다. 안전을 확인하라는 다정한 문장은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관자놀이가 뜨거워졌다. 종이 왼쪽 여백, 그의 얼굴 얼룩 옆으로 새 잉크가 스몄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빠져나갔다. 초등학교 담임 이름. 방금까지 알았는데, 지금은 자음 하나도 남지 않았다. 대신 여백의 얼룩이 조금 더 짙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걸 봤다.

붉은 조항 아래, 아주 흐리게, 그가 결심을 말한 직후 배어 나왔던 문장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도현우 승객은 이제 곁에 있는 사람을 의심할 것입니다.** 그 미래형. 그가 지안을 의심하기 전에, 종이가 먼저 적어둔 문장.

퍼즐이 맞물렸다.

"이 조항은." 현우가 소리 내어 말했다. "지안한테 온 게 아니야."

그는 붉은 문장을 손끝으로 짚었다. 창가 좌석 손잡이를 세 번 두드리라는 이 조항—이건 추위를 느끼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공통 규칙처럼 위장돼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이 버스에서 지안을 창가 손잡이 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그녀 뒤에 서 있던 사람. 위기 앞에서 반사적으로 남을 밀어내는 사람.

나.

이 조항은 지안을 위한 규칙이 아니었다. 나를 위한 미끼였다. 저쪽은 내가 의심할 걸 알았고, 의심하면 손잡이 쪽으로 몰아붙일 걸 알았고, 그러면 그녀의 손이 관성으로 세 번 손잡이를 짚을 걸 알았다. 조항은 지안이 어긴 게 아니다. 내가 어기게 만든 것이다. 내 습관을 데이터로 설계한 함정.

"가짜였어."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공포가 아니었다. "이건 규칙이 아니라 나를 유도한 함정이야. 지안은 규칙을 어기지 않았어. 어긴 형태로 만들어진 거지. 그럼—"

그럼 되돌릴 수 있는가. 어긴 게 아니라 어긴 것처럼 조작된 거라면.

현우는 판독안으로 지안의 흔적을 좇았다. 좌석의 온도를 읽었다. 창가 좌석—매끈하게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미세한 잔열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앉았던 온기. 삭제는 사람을 지우지만, 열의 흔적까지 완전히는 못 지운다. 2화에서 봤던 그 원리. 빈 숫자를 메우지 못하듯이.

그가 좌석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으로 온기의 형태를 더듬었다. 봉투를 무릎에 올려두던 각도. 창밖을 보던 목의 기울기. 흔적이 있었다. 지워진 사람도 흔적을 남긴다.

"기억해." 현우는 눈을 감았다. "서지안. 행정 문서 만들던 사람. 어머니 김순자, 지방 병원 입원 확인서. 봉투는 손때가 묻어서 모서리가 접혔고. '이건 행정 서식이 아니다'라고 처음 말했을 때, 목소리가 낮고 확신에 차 있었어. 나를 재는 눈으로 봤지만—결국 나랑 손잡았어.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걸로 신고를 피하게 해준 사람."

기억을 붙들 때마다 판독안이 아니어도 그의 무언가가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급 삭제된 사람을 억지로 붙드는 건, 지워진 자리를 자기 기억으로 메우는 일이었다. 그 대가로 그 자신이 명단에서 한 걸음 더 흐려졌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되짚는 동안, 그의 시야 가장자리로 무언가 스쳤다. 지안의 흔적을 따라가던 판독안이, 그녀가 앉아 창밖을 보던 각도를 재현했다. 그 각도로 현우도 창밖을 봤다.

눈보라 사이, 정거장 표지판이 있었다. 아까부터 창밖에 있었는데 눈에 덮여 안 보이던 것. 지안의 시선을 빌리자 각도가 맞았다. 낡은 철제 표지, 페인트가 벗겨진 노선 번호.

**시외 27번. 서울 ↔ 문막.**

현우의 손이 좌석에서 미끄러졌다.

27번. 문막행. 3년 전 동생이 탔던 버스. 그가 안 타겠다고 물러났던, 빙판에서 미끄러진 그 버스의 노선. 차량 번호까지 기억났다—왜냐하면 그 번호를 3년 동안 매일 밤 떠올렸으니까. 사고 뉴스에 뜬 앞 유리의 번호판.

지금 이 버스 운전석 위의 번호판과, 같았다.

"같은 버스야." 현우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3년 전 그 버스. 같은 노선. 같은 차량."

그러면 이 안내문은. 이 여덟 번째 승객은. 이 소급 삭제는.

3년 전 그 밤에도 있었나. 동생도, 지워진 건가. 사고가 아니라—

현우는 운전석 위 번호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되돌릴 실마리를 겨우 잡았다. 지안이 어긴 게 아니라는 걸 증명했고, 조작된 삭제라면 역설계할 여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손안에 처음으로 무기가 쥐어진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무기를 쥔 손이, 번호판을 본 순간부터 떨려서 멈추지 않았다.

동생을 태운 그 버스가 지금 여기 있다면, 3년 전 그 밤에 진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정말 알고 싶은가.

여백의 얼룩이, 그의 얼굴 반쪽 옆에서, 두 번째 형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형상은 첫 번째보다 빠르게 짙어졌다. 얼룩은 옆모습을 그렸다. 어깨선이 좁고, 목덜미가 가늘었다. 현우가 아니었다. 그보다 작은 사람. 잘 다녀올게, 하고 손을 흔들던.

현우는 종이에서 물러났다. 봐선 안 될 것을 봤다는 감각. 그러나 판독안은 이미 열려 있었고, 열린 눈은 스스로 닫히지 않았다.

여백의 두 번째 얼룩 아래로, 아주 흐린 글자들이 배어 나왔다. 방금 지안을 위한 조항이 그랬던 것처럼—누구에게나 온 것처럼 위장한,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을 겨눈 문장이었다.

**시외 27번 승객 명단 · 복원 대기 · 잔여 1.**

현우의 눈이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명단. 27번. 복원 대기.

지워진 사람이 여백에 흔적을 남긴다면. 그 여백에 지금—누군가의 명단이 적혀 있다면.

"복원 대기." 그가 소리 내 읽었다. "잔여 1."

지워진 사람도,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삭제는 열의 흔적을 못 지웠고, 온기의 각도를 못 지웠고, 그리고—이 여백에 명단으로 남겨두었다. 지안이 아니었다. 지안의 이름은 아직 하늘의 손등에 있다. 이건 더 오래된 명단이었다. '복원 대기'가 3년이나 걸린.

현우의 손이 여백으로 향했다. 판독안을 더 밀어붙이면 저 글자를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잔여 1이 누구인지. 관자놀이가 다시 뜨거워졌다. 종이가 그의 응시에 응답해 더 젖어들었다. 대가를 요구하면서.

읽으면 알 수 있다. 3년 전 그 밤에 동생이 사고로 죽은 건지, 이 버스의 규칙에 지워진 건지. 잔여 1이 동생인지.

읽으면, 나는 또 무언가를 잃는다. 그리고 잃은 만큼 저쪽이 강해진다.

"현우 씨." 도경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아직 통로에 반쯤 일어선 채였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요. 종이엔 아무것도 없는데."

없을 것이다. 도경에겐. 검은 조항 두 줄 말고는.

현우는 손등의 손잡이 자국을 내려다봤다. 지안을 밀었던 그 손. 3년 전 물러섰던 그 몸. 그리고 지금, 여백의 명단을 읽으려는 이 눈.

읽는 순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읽지 않으면 지안도, 잔여 1도, 되돌릴 방법을 영영 모른다. 되돌리려면 규칙을 알아야 하고, 규칙은 저 여백에 적혀 있다.

전원 생환. 아무도 밀어내지 않고. 이번만은.

현우는 여백에 눈을 고정했다. 판독안이 최대로 열렸다. 종이가 그의 시선을 빨아들였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감각—이번엔 컸다. 노래 제목도, 얼굴 반쪽도 아니었다. 더 깊은 것. 붙잡으려 했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여백의 글자가 또렷해졌다. 잔여 1의 이름이 배어 나왔다.

그런데 그 이름을 읽는 순간, 현우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 낯선 이름도 아니었다. 그건—

그의 이름이었다. 여백에, 잔여 1의 자리에, 도현우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잠깐." 현우의 무릎이 다시 꺾였다. "이거 왜—"

복원 대기, 잔여 1, 도현우. 3년 전 27번 명단에서 복원을 기다리는 마지막 한 사람이, 그 자신이었다.

그럼 3년 전 그 버스에서 물러선 게 아니었나. 다음 차를 타겠다고 뒤로 빠진 게 아니라—탔었나. 타서, 지워졌나. 그래서 아무도 기억 못 하고, 나만 내가 안 탔다고 기억하는 건가. 밀어냈다는 죄책감마저, 저쪽이 나한테 심어준 가짜 기억인가.

현우는 자기 손등을 봤다. 손잡이 자국. 방금 지안을 민 감촉. 그것도—진짜였나.

"도경 씨."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여기 앉아 있었어요? 처음부터? 서울에서 탈 때부터, 내가 이 버스에 있었어요?"

도경이 그를 빤히 봤다. 강박에 사로잡힌 눈이, 이번엔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현우 씨가… 누구예요?"

여백의 세 번째 얼룩이, 그의 이름을 삼키며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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