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멈춘 지 40분째, 히터는 돌아가는데 유리창은 안쪽부터 얼어붙고 있었다.
도현우는 창에 손톱으로 그은 선을 지켜보았다. 성에가 다시 그 자리를 메웠다. 밖은 눈보라뿐이었다. 국도 표지판도, 앞차의 미등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 신호는 출발한 지 한 시간 만에 죽었고, 마지막으로 본 시각은 새벽 1시 47분이었다. 그 뒤로 시계는 멈춘 것처럼 그 숫자에 붙어 있었다.
"기사님, 이거 언제 뚫려요?"
앞쪽 좌석에서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검은 패딩, 목에 두른 흰 목도리. 두 시간 전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사 들고 오르던 사람이었다. 현우는 그 목도리를 기억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에 걸렸다.
"제설차 올 때까지 여기서 대기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아 계세요."
기사가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대답한 건 통로 건너편의 여자였다. 서지안. 무릎 위에 서류 봉투를 세워 안고 있었고, 아까부터 봉투 입구를 손가락으로 접었다 폈다 했다.
그때 기사 뒤 유리에 붙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없던 종이였다. 현우는 그 자리를 계속 보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낡은 배차 시간표와 소화기 위치 안내 사이, 빈 유리였던 곳에 새 공고가 붙어 있었다. 형광등 아래 잉크가 축축했다.
**심야 운행 안내문** **1. 정차 중 하차를 금합니다.** **2. 안내 방송 전 통로 이동을 금합니다.**
"저건 언제 붙은 거예요?"
현우의 물음에 몇이 고개를 돌렸다. 서지안이 종이를 훑더니 코웃음을 쳤다.
"이상하네요. 이런 문구는 회사 게시물 양식이 아니에요. 보통은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끝나거든요. '금합니다'는 너무… 명령조야."
"그게 뭐가 중요해요."
목도리 남자가 짜증을 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좌우로 꺾었다. 뻐근한 소리가 났다.
"두 시간을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려서. 화장실도 없고. 잠깐 스트레칭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방송 전엔 통로 이동 금지랍니다."
서지안이 종이를 가리켰다. 남자는 그 종이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버스 안내문이 무슨 법이에요?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그가 통로로 발을 디뎠다.
현우는 그 순간을 나중에 몇 번이고 되짚게 된다. 남자의 오른발이 통로 바닥에 닿았고, 흰 목도리 끝이 좌석 손잡이를 스쳤고, 그리고—
깜빡였다.
형광등이 아니었다. 현우 자신의 눈이 감겼다 뜬 것도 아니었다. 세계가 한 번 깜빡였다. 눈꺼풀 안쪽에서 흰 섬광이 지나간 것처럼.
통로에 아무도 없었다.
목도리 남자가 서 있던 자리, 그가 밟고 있던 통로 바닥, 그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앞쪽 3열 좌석 — 전부 비어 있었다. 등받이 위에 걸쳐 둔 검은 패딩도, 그물망에 꽂아둔 생수병도 없었다. 좌석 시트에 눌린 자국조차 없이 매끈했다.
"…방금."
현우의 입이 마르게 벌어졌다.
"방금 저기 누가 있었잖아요. 목도리 하고, 라면 사 왔던 사람."
버스 안의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서지안은 여전히 서류 봉투를 접고 있었다. 방금 그 남자와 말을 주고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눈에는 물음조차 없었다.
"무슨 사람이요?"
"방금 통로로 나섰던… 당신이 안내문 가리키면서 말렸잖아요."
"제가요?" 서지안이 미간을 좁혔다. "저 혼자 그 종이 읽고 있었는데요."
뒷좌석의 여자애가 이어폰 한쪽을 뺐다. 이하늘. 손등에 볼펜 자국이 번진 채였다.
"아저씨 무슨 말 해요? 여기 지금 몇 명 있는지 세어봐요. 저기 기사님, 앞에 아줌마, 서류 든 언니, 뒤에 딴 아저씨, 나, 그리고 아저씨. 여섯. 처음부터 여섯이었는데."
여섯.
현우는 좌석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었다. 세었다. 여섯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곱이었다. 아니, 방금까지 분명—
기사 옆 통로에 서 있던 중년 여자가 돌아보았다. 한도경. 승무원 조끼를 입은 것으로 보아 인솔 기사인 듯했다.
"손님, 어디 편찮으세요? 눈보라 오래 보시면 그럴 수 있어요. 잠깐 눈 감고 계세요."
"편찮은 게 아니라—"
말이 목에 걸렸다.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목도리를 두른 남자는 이 버스에 탄 적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컵라면 냄새도, 그의 짜증 섞인 목소리도, 통로로 내딛던 발도. 오직 현우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었고, 그 기억마저 물에 번진 잉크처럼 흐려지려 하고 있었다.
현우는 그 흐려짐과 싸웠다. 목도리. 흰색. 컵라면. 라면. 그가 앉았던 3열. 놓치면 안 된다는 감각이 목덜미를 조였다. 왜인지는 몰랐다. 다만 지금 이걸 놓으면 자기 자신도 어딘가로 미끄러질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기사 뒤 안내문으로 향했다.
**2. 안내 방송 전 통로 이동을 금합니다.**
남자는 방송 없이 통로로 나섰다. 그게 마지막 행동이었다.
현우는 그 문장을 노려보았다. 놓친 사람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잉크가 마르기 전에 읽어두려는 것처럼.
글자가 움직였다.
착각이라기엔 명확했다. '안내 방송 전 통로 이동을 금합니다'라는 문장의 획들이 안쪽에서부터 짙어졌다. 검은색이었다. 원래도 검은 잉크였는데, 그 검음이 종이 뒤에서 배어 나오듯 두꺼워졌다. 획 하나하나가 부풀어 통로 위 허공으로 번졌다.
그리고 그 문장 밑에서, 방금 사라진 남자가 발을 디디던 순간이 재생되었다. 잔상처럼. 흰 목도리가 손잡이를 스치는 장면, 오른발이 통로에 닿는 장면, 세계가 깜빡이던 그 반 박자. 안내문의 검은 글자가 그 장면을 그대로 삼켰다.
'통로 이동 금지.' 남자는 이걸 어겼다. 그래서 지워졌다.
현우의 등줄기로 소름이 훑고 지나갔다.
이건 게시물이 아니었다. 규칙이었다. 어기면 사람이 사라지는,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없던 사람이 되어버리는 규칙. 그리고 방금 그 검은 문장은— 지켜야 할 진짜였다. 그 남자를 죽인 건, 정확히는 이 진짜 규칙을 우습게 본 대가였다.
숨을 고르며 현우는 눈을 안내문에서 뗐다.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무언가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없었다. 이건 목도리 남자와 다른 종류의 상실이었다. 그건 바깥의 일이었고, 이건 안쪽의 일이었다. 현우는 그게 뭔지 더듬었다.
노래.
그가 좋아하던 노래가 있었다. 3년 동안 밤마다 이어폰으로 들었던,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재생했던 노래. 지금 그 멜로디는 남아 있었다. 후렴의 흥얼거림도 입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제목이 없었다. 제목이 있었다는 사실만 남고, 글자가 뽑혀 나갔다. 혀끝에서 맴돌다 미끄러지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 자리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느낌. 아는데 모르는.
그는 반사적으로 다시 안내문을 보았다.
문장 옆 여백에, 방금 전까지 없던 잉크 얼룩이 번져 있었다. 손톱만 한 크기. 누가 펜을 잘못 짚은 것처럼 불규칙한 모양. 형광등 아래 아직 축축했다.
현우는 그 얼룩을 오래 보았다.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그게 자기와 상관없는 얼룩 같지 않았다. 방금 잃어버린 무언가가 저기로 옮겨간 것 같은, 근거 없는 확신이 명치를 눌렀다.
"아저씨, 진짜 괜찮아요?"
이하늘이 다시 물었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현우는 대답 대신 그 애의 손등을 보았다. 볼펜으로 이름 몇 개가 적혀 있었다. '지안 언니', '도경 아줌마', '재혁'. 사라진 목도리 남자의 이름은 없었다. 애초에 그 애도 몰랐을 것이다. 이름을 물어본 적 없으니까.
"…왜 이름을 적어놔요?"
"그냥." 이하늘이 이어폰을 마저 뺐다. "사람 얼굴 잘 까먹어서. 나중에 헷갈리기 싫어서."
현우는 그 대답을 흘려듣지 못했다. 나중에. 헷갈리기. 지금 이 버스에서 그 말은 다른 무게로 내려앉았다.
버스 뒤편에서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윤재혁이라고, 아까 자기소개도 없이 통화하려다 신호가 안 잡히자 욕을 뱉던 사람이었다.
"환자 하나 나왔네. 눈보라에 갇히면 헛것 보인대요. 다들 신경 쓰지 마요."
"헛것 아닙니다."
현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방금 이 버스에 한 사람이 더 있었어요. 흰 목도리에 검은 패딩. 라면 사 왔고, 다리 저리다고 통로에 섰고. 그리고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기억 못 하지만 저는 기억해요."
침묵이 흘렀다. 히터 소음과 눈이 지붕에 쌓이는 미세한 소리만 남았다.
"그래서요." 윤재혁이 팔짱을 꼈다. "그게 뭐. 우리보고 뭘 어쩌라고. 사라졌으면 사라진 거고 우린 여섯이고. 자리 하나 남으면 좋지 뭐. 답답한 게 덜하니까."
한도경이 그를 돌아보았다.
"손님, 말이 지나치세요. 사람이 사라졌다잖아요."
"아줌마는 저 말을 믿어요?"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여기 있는 사람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되니까 하는 소리예요. 내 버스, 내 승객이면 다 챙기는 게 맞아요."
내 버스, 내 승객. 그 말이 현우의 가슴 어딘가를 긁었다.
3년 전에도 버스가 있었다. 현우가 표를 끊어 동생을 태워 보낸 버스. "혼자 잘 갈 수 있어?"라고 묻는 동생에게 "형은 일 때문에 못 가. 다음에 같이 가자"고 대답한 그 밤. 다음은 없었다. 국도에서 미끄러진 그 버스에서 동생은 돌아오지 못했고, 현우는 그 뒤로 매일 자문했다. 내가 태워 보내지 않았다면. 내가 같이 탔다면. 내가 그날 밤 조금만 덜 이기적이었다면.
이번엔 아무도 잃지 않는다. 현우는 속으로 되뇌었다. 여섯 명, 아니 원래 일곱 명. 이번엔 한 사람도 저 안내문에 먹히게 두지 않는다. 전원이 살아서 내린다. 그게 3년 치 부채를 갚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렇게 다짐하면서도 그의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이 좌석 옆 비상 망치의 위치를 확인했다. 통로 쪽 자리보다 창가가 안전하다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저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은— 바로 앞자리 서지안의 뒤통수를, 그녀가 안고 있는 서류 봉투를 훑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뭘 저렇게 소중히 안고 있나. 저 안에 뭐가 있나. 혹시 저 여자가.
현우는 자기 시선을 알아채고 눈을 질끈 감았다.
또였다. 전원을 살리겠다고 다짐한 입과,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의심하고 도망칠 동선을 재는 몸이 따로 놀았다. 3년 전과 똑같았다. 그때도 그는 "다음에"라고 말하며 자기 일정을 먼저 계산했다.
"저기요."
서지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현우의 얼굴을 지나 안내문으로 향했다.
"아까 그쪽이 종이 노려볼 때, 저 문장 좀 이상하지 않았어요? 잠깐 진해 보였는데."
"봤어요?"
"착각이겠죠." 그녀가 봉투를 고쳐 안았다. "근데 아까부터 이 안내문 문체가 계속 걸려요. '금합니다'라니. 저 이런 서식 지겹게 다뤄본 사람인데, 이건 관공서 문서도 아니고 회사 게시물도 아니에요. 누가 규칙인 척 흉내 낸 거예요."
규칙인 척. 흉내. 현우의 머릿속에서 방금 검게 번지던 문장과, 그 옆 여백의 새 얼룩이 겹쳐졌다.
그때였다.
기사 뒤 유리 안내문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현우가 응시하지 않았는데도.
두 개의 문장 아래, 빈 공간이 있던 자리에 세 번째 조항이 배어 나왔다. 잉크가 종이 뒤에서 스며 올라오듯 천천히.
**3.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자는 즉시 신고하십시오.**
현우는 그 문장을 보았다.
앞의 두 문장은 검은색이었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문장은— 붉었다. 획이 짙어질수록 검음이 아니라 핏빛으로 번졌다. 종이 위에서 붉은 잉크가 천천히 부풀어 올랐다. 그를 향해서.
이 버스에서 사라진 승객을 기억하는 사람은 오직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붉은 글자는, 방금 검게 번지던 진짜 규칙과 전혀 다른 색이었다.
"…이건." 현우의 입술이 떨렸다. "이건 무슨 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