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회색으로 식어가는 방패의 실루엣을, 렌은 놓지 않았다.

가슴 안에서 파편 하나가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정산창을 쥐어봐도 붉은 글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소거 대기 개체 : 바토리 (방패 코드)]**

"카운트가 임계에 닿으면 실행된대." 렌이 정산창을 눈으로 훑었다. 현재 68,560. 초당 15.6씩 줄지만, 다음 부하 한 번이면 임계를 건드린다. "감소로는 못 늦춰. 시간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세이렌이 팔짱을 꼈다. 이제 막 살아난 인격체의 손끝이 아직 떨렸다. "또 오독? 오독하면 카운트 오르고, 카운트 오르면 쟤가 먼저 지워져. 너 지금 스스로 목을 조르는 거 알아?"

렌은 시스템 지도를 펼쳤다. 검은 우물 아래, 다음 계층으로 이어지는 던전 하나가 붉게 점멸했다.

**[계층 던전 : 순번의 회당(回堂)]** **[보상 : 부하 감쇄 토큰 ×1 — 소거 대기열 1개 해제]**

"저기." 렌이 손끝을 던전에 얹었다. "저 던전 보상이 대기열 해제 토큰이야. 정상 클리어하면, 오독 없이도 바토리를 대기열에서 뺄 수 있어. 카운트 안 태우고."

"정상 클리어. 너답지 않은 소린데."

"그러니까 서두르자."

렌이 우물 가장자리를 밟고 뛰어내렸다. 세이렌이 짧게 욕을 뱉고는 뒤따랐다.

---

던전 입구는 이미 붐볐다.

계단이 끝나는 자리에 은빛 갑주를 걸친 파티가 진을 치고 있었다. 여섯 명. 대열이 자로 잰 듯 반듯했고, 방패조가 앞, 해석조가 뒤, 그 중앙에 한 남자가 규칙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손가락으로 허공의 문장을 짚어 읽고 있었다.

문 위에 걸린 규칙문이 흰빛으로 떠 있었다.

**[규칙문 : 순서를 지킨 자만 보상을 받는다.]** **[진입한 순번대로 관문을 통과해야 하며, 순번을 어긴 자는 판정 소거된다.]**

"메타크래프트." 세이렌이 낮게 뇌까렸다. "랭킹 1위 길드. 저 앞에 앉은 게 카일런이야. 규칙 해석만으로 최상층까지 뚫은 인간."

카일런이 고개를 들었다. 렌을 위에서 아래로 훑는 눈에 미간이 좁혀졌다.

"버그가 여기까지 기어왔군." 그가 일어섰다. 목소리가 성당 안 종소리처럼 낮고 곧았다. "너 얘기는 들었다. 규칙문을 강제로 오독시키는 잔재주. 서버 로그가 네 이름 자리에 붉은 오류 코드를 붙이더군. 사람이 아니라 결함이야, 너는."

"길 좀 비켜줘." 렌이 던전 문을 가리켰다. "급해서."

"급해?" 카일런이 웃었다. 웃음에 온기가 없었다. "이 세계는 규칙으로 서 있다. 한 줄 한 줄 정직하게 읽고, 정직하게 따르는 자만이 다음 층으로 간다. 그게 이 게임의 존엄이야. 그런데 너 같은 것들은 규칙을 문법 틈새로 겁탈하지. 세계를 더럽혀."

"더럽힌다." 렌이 그 단어를 되씹었다.

"우리 길드가 이 관문을 사흘째 붙잡고 있다. 순번 알고리즘을 완벽히 풀어가는 중이야. 여섯 관문, 여섯 순번, 오차 없이." 카일런이 렌의 가슴께를 눈짓했다. 세이렌이, 그리고 회색으로 식은 파편의 온기가 그 안에 있었다. "네가 끼어들면 우리 순번이 뒤틀린다. 그럼 우리 전부가 판정 소거야. 넌 그 대가를 감당 못 해. 물러서."

"물러설 시간이 없어서 그래."

"버그 주제에."

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규칙문을 올려다봤다. 시선이 한 줄에서 멈췄다. **순서를 지킨 자만 보상을 받는다.**

가슴 안에서, 렌은 무언가가 근질거리는 걸 느꼈다. 문장의 이음매. 헐거운 못.

---

"오독할 거지." 세이렌이 렌의 소매를 잡아챘다.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카운트 오르면 바토리 먼저 지워진다고 방금 말했잖아. 저 남자 말이 맞아. 넌 또 혼자 계산 끝내고 뛰어들려는 거잖아."

렌이 멈칫했다.

"틀렸어?" 세이렌이 눈을 들여다봤다. "카일런이 '더럽힌다'고 했을 때, 너 표정 변했어. 반박도 안 하고. 왜? 너 스스로도 네 방식이 옳은지 모르는 거잖아. 이기긴 하는데, 이게 맞는 건지는 너도 몰라."

렌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세이렌의 말이 명치를 눌렀다. 전작에서도 그랬다. 판을 다 짜고, 결과를 통보하고, 동료들은 그가 그은 선 위에서 사라졌다. 그때도 렌은 자신이 옳은지 몰랐다. 그저 확실했을 뿐이다. 확실함과 옳음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어." 렌이 처음으로 인정했다. "내 방식이 옳은지는 나도 몰라. 그런데 세이렌."

"뭐."

"이번엔 저강도로 비틀 거야. 부하 최소로. 규칙을 부수는 게 아니라—" 렌이 규칙문을 다시 봤다. "이 문장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게만 만들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렌이 세이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네가 봐줘. 내가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면, 잡아. 이번엔 혼자 결정 안 해."

세이렌이 잠시 렌을 노려보다가, 짧게 끄덕였다. 손은 여전히 렌의 소매를 쥐고 있었다.

---

렌이 던전 문턱을 밟았다.

"멈춰." 카일런의 방패조가 창을 내렸다. "순번은 우리가 먼저다. 우리 뒤에 서라. 그게 규칙이야."

"규칙은 순서를 지킨 자만 보상을 받는다고 했지." 렌이 규칙문을 손끝으로 그었다. 데드 로그가 발동하며 문장 한 줄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데 '순서'가 뭔지 이 문장은 정의하지 않았어. 진입한 순번? 카일런, 넌 그렇게 읽었지. 그래서 사흘을 걸렸고."

"뭐라고?"

"난 다르게 읽어. **순서(order)**—명령. 시스템이 내린 명령의 순서. 관문이 요구하는 건 진입 시각이 아니라, 관문 자체의 처리 명령 큐(queue)야. 명령 큐에서 우선순위 최상위 프로세스가 '순서를 지킨 자'로 판정돼."

렌이 실행 권한 토큰을 꺼냈다. 2층 거울의 방에서 얻은 것. 그가 그것을 관문 판정부에 밀어넣었다.

**[데드 로그 : '순서'를 명령 큐 우선순위로 오독 처리]** **[부하 : 0.4 (저강도)]** **[실행 권한 검출 — 큐 우선순위 최상위 등록]**

"난 실행 권한을 가진 프로세스야." 렌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이 관문에선 내가 큐의 맨 앞이지. 순서를, 지킨, 자."

문이 렌을 향해 열렸다.

카일런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그건 순번의 정의가 아니야! 그건 억지 해석이다!"

"규칙문이 정의를 안 했잖아." 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빈칸은 채우는 사람 거야."

첫 관문이 열리자, 렌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세이렌이 뒤따르며 그의 부하 게이지를 감시했다. 두 번째 관문 앞에서 렌이 다시 규칙문을 짚었다. 이번엔 오독 없이, 큐 우선순위 판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관문들은 렌을 이미 '순서를 지킨 자'로 등록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뒤에서 카일런의 파티가 여전히 첫 관문 순번 계산을 붙잡고 있었다. 사흘 걸린 것을, 렌은 관문 여섯 개를 이 분 만에 통과했다. 세이렌의 눈이 커졌다.

"세 배가 아니라—" 세이렌이 부하 게이지를 확인했다. "부하는 카일런 파티 총합의 반의반이야. 이게 어떻게…"

"규칙이 안 정한 걸 내가 정했으니까." 렌이 마지막 관문 앞에 섰다.

---

카일런이 첫 관문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은빛 갑주가 통로를 울렸다.

"너!" 그가 렌을 따라잡았다. 숨이 거칠었다. "네가 큐 우선순위를 선점하는 바람에 우리 순번 판정이 전부 뒤로 밀렸어. 우린 처음부터 다시야. 사흘이 날아갔다!"

"미안." 렌이 마지막 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나도 시간이 없어서."

"그게 문제야." 카일런이 창을 겨눴다가, 겨눈 채로 멈췄다. 그의 눈이 렌의 통과 로그를 훑고 있었다. 부하 0.4. 이 분. 관문 여섯. 그 숫자들이 그의 표정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어떻게 그렇게 적은 부하로. 나는 저 관문 하나를 여는 데 우리 파티 전원의 해석력을 총동원했다. 그런데 너는 혼자. 문장 한 줄로."

"넌 규칙을 완벽하게 읽으려 했으니까. 난 규칙을 안 읽은 곳을 봤어."

카일런의 창끝이 천천히 내려갔다. 승부욕과 경멸이 얼굴 위에서 싸우다가, 잠깐, 다른 것이 스쳤다.

"…최하층에." 카일런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나조차 못 푼 규칙문이 하나 있다. 경계 구역 앞을 막고 선 문이야. 나는 그 문장을 삼 년째 읽고 있어. 정공법으론 열리지 않아.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모순만 튀어나오는 문장이지."

렌이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버그." 카일런이 렌을 똑바로 봤다. "네 방식이 세계를 더럽힌다고 나는 아직 생각한다. 하지만 그 문 앞에선—어쩌면 너 같은 것만이 답을 볼지도 모르겠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던전이 흔들렸다. 렌이 마지막 관문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기억해둘게." 렌이 말했다.

문이 열렸다.

---

**[순번의 회당 클리어 — 보상 : 부하 감쇄 토큰 ×1 획득]**

빛이 쏟아졌다. 렌은 곧바로 토큰을 정산창에 갖다 댔다. 세이렌이 곁에서 숨을 죽였다.

"됐어." 렌의 목소리가 떨렸다. "바토리 대기열 해제. 지금—"

가슴 안에서 회색으로 식던 파편에 온기가 돌아오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정산창이 붉게 뒤집혔다. 클리어 판정이 렌의 오독—큐 우선순위 선점—을 뒤늦게 검출하고, 부하 0.4를 오류 지분으로 재산정했다. 낮은 부하였지만, 오독은 오독이었다.

**[경고 : 클리어 판정에 무단 오독 검출 — 오류 지분 누적]** **[DELETE COUNT 재산정 : 68,560 → 71,200]** **[복원 우선순위 재정렬 실행]**

토큰이 손안에서 재로 바스라졌다.

**[소거 대기열 갱신]** **[바토리 (방패 코드) : 대기 3순위 → 대기 1순위]** **[상태 : 소거 임박 — 카운트 임계 도달 즉시 실행]**

바토리의 파편이, 온기를 되찾기는커녕, 대기열 맨 위로 튀어올라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아니." 세이렌이 뒤로 물러섰다. 렌의 소매를 쥐었던 손이 풀렸다. "네가 이겨서. 이겼는데—"

렌은 재가 된 토큰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이 텅 비어 있었다.

이겼다. 카일런보다 빠르게, 우아하게, 적은 부하로. 그런데 그 승리가 방패를, 삼십 초만 버티라던 그 방패를, 소거의 맨 앞줄로 밀어올렸다.

빛이 스러진 홀에, 새하얗게 식은 실루엣 하나가 방패를 든 자세 그대로 굳어가고 있었다.

렌의 손이 대기열 창을 향해 뻗었다. 방패의 실루엣을 붙잡으려는 듯, 허공을 긁었다.

"빼야 해." 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른 던전. 다른 토큰. 뭐든—"

"들어봐." 세이렌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아까와는 반대였다. 이번엔 그녀가 렌을 붙들고 있었다. "너 지금 또 그러고 있잖아. 눈이 벌써 다음 던전 찾고 있어. 방금 뭘 봤는데."

렌이 멈췄다. 세이렌의 손끝이 떨리고 있는 게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이겼는데 바토리가 앞줄로 갔어." 세이렌이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강하게 이겨서가 아니야. 네가 이겼기 때문이야. 오독은—아무리 약하게 비틀어도, 이기는 순간 지분으로 붙어. 0.4든 4든. 그럼 다음 던전에서 또 이기면?"

렌은 대답할 수 없었다. 계산이 이미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산의 끝은 언제나 같은 자리로 떨어졌다. 이기면 카운트가 오르고, 카운트가 오르면 바토리가 지워진다. 정상 클리어의 보상조차, 오독 한 줄이 섞이는 순간 독으로 뒤집혔다.

뒤편, 첫 관문 통로에서 발소리가 났다. 카일런이 창을 지팡이 삼아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이 렌의 붉은 정산창에 붙박였다.

**[DELETE COUNT : 71,200]** **[소거 임박 : 바토리 (방패 코드)]**

"그게 네 대가인가." 카일런이 멈춰 섰다. 경멸도 승부욕도 아닌, 조용한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앉아 있었다. "네가 규칙을 겁탈할 때마다, 서버가 네게서 뭔가를 뜯어가는군. 방금 그 회색 코드—누구지."

"…내가 두고 온 사람." 렌이 겨우 뱉었다.

"두고 온."

"삼십 초만 버티라고 하고, 등을 돌렸어. 전작에서." 왜 카일런에게 이 말을 하는지 렌 자신도 몰랐다. 다만 명치를 누르던 것이 문장이 되어 새어나왔다. "그 사람이 데이터가 됐고, 지금 내 안에 있어. 이번엔 안 버리려고 살렸는데. 살리려고 이겼는데. 이길 때마다 걔가 앞줄로 가."

카일런이 오래 렌을 봤다. 그리고 창을 어깨에 걸쳤다.

"나는 규칙을 정직하게 읽는 게 이 세계의 존엄이라 믿는다." 그가 돌아서며 말했다. "그런데 정직하게 읽어서 사흘을 걸린 나는, 두고 온 사람 하나 못 살려. 너는 반칙으로 이 분 만에 여기 왔는데, 그 반칙이 네 사람을 죽여. 어느 쪽이 옳은 건지—" 그가 잠시 멈췄다. "삼 년을 규칙만 읽은 나도 모르겠군."

카일런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세이렌이 렌의 손목을 놓았다.

"봐. 저 사람도 몰라. 너도 몰라. 나도 몰라." 세이렌이 새하얗게 식은 파편을 응시했다. "그런데 렌. 하나는 확실해졌어. 던전을 이기는 걸로는 바토리를 못 빼. 이기는 것 자체가 문제니까."

렌의 시선이 정산창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글자들 사이, 처음 보는 회색 줄 하나가 방금 조용히 밀려 올라와 있었다.

**[참고 : 소거 대기 개체는 '지분 이관' 절차로 대기열에서 이탈 가능]** **[지분 이관 : 누적 오류 지분을 다른 등록 개체에게 양도함]** **[단, 이관 대상 개체는—]**

문장이 거기서 잘려 있었다. 정의되지 않은 조항. 언젠가 스치듯 봤던 그 문구가, 이번엔 절반쯤 열린 채로 렌 앞에 떠 있었다.

"지분 이관." 렌이 그 글자를 소리 내 읽었다.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바토리의 지분을, 다른 개체한테 넘기면—대기열에서 뺄 수 있어."

세이렌이 그 줄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 잘려나간 마지막 문장의 자리에서,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다른 개체." 세이렌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렌. 여기 등록된 온전한 개체가 몇 명이지?"

렌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둘이야." 세이렌이 대신 답했다. "바토리랑, 나."

가슴 안에서, 새하얗게 식은 방패 옆으로, 갓 살아난 인격체 하나의 서명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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