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진동했다. 목함이 손 안에서 삐걱이던 그 순간, 차 안의 정적을 찢고.
발신자 표시가 없었다. 서온은 붕대 감긴 손을 무릎에서 떼지 못한 채 왼손으로 화면을 밀었다.
「내일 이사회, 열한 시. 네 계약이 가짜라는 걸 거기서 밝힌다. 온공방 채권 원본과 함께. 도망칠 곳은 없어. 서온 씨.」
강윤성이었다. 이름 대신 문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남자. 서온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뭐야." 도아가 곁눈질했다. "얼굴 하얘졌어."
"강윤성." 서온은 목소리를 눌렀다. "내일 이사회에서 폭로하겠대. 계약이랑 채권 다."
"내일? 하루밖에 안 남았잖아. 이 손으로 뭘 어떻게—" 도아가 핸들을 쳤다. "물증도 없고, 너 손도 못 쓰고, 능력도 안 되잖아. 서온아, 도망가자. 진짜로. 지금이면—"
"공방으로 가."
"뭐?"
"공방으로 가 줘." 서온이 목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여기, 아빠 작업대 위에서 이걸 열어야 해. 딴 데선 안 될 것 같아."
도아가 뭐라 더 쏘아붙이려다 서온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차가 방향을 틀었다.
*
온공방의 문을 밀자 아교 냄새와 마른 나무 냄새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었다. 서온은 여기서만 앓지 않았다. 나무는 감정이 없으니까. 평생 사람들의 온도에 몸이 난도질당한 그녀에게, 이 공방은 체온이 일정한 유일한 방이었다.
작업대 위,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대패질하던 자리에 서온은 목함을 내려놓았다.
"안 열려." 도아가 팔짱을 꼈다. "십 년 넘게 안 열렸다며. 너희 아빠가 무슨 특수 장치라도—"
"장치 아니야." 서온이 함의 이음새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죽은 손으로도 나무의 결만은 어렴풋이 만져졌다. "아빠가 만든 장부맞춤은 힘으로 안 열려. 결을 정확히 눌러야 해. 근데 그게…"
말이 멈췄다.
서온은 이 함을 여러 번 열려 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몇 번이고. 손끝에 힘을 주고, 각도를 바꾸고, 온독으로 안을 읽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함은 완강했다. 백지였고, 온도가 없었고, 강윤도처럼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
읽으려 할수록 닫혔다.
서온의 손이 멈췄다.
"도아야." 목소리가 떨렸다. "나 지금까지 이걸 열려고 한 게 아니라, 읽으려고 했어.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나서 믿으려고 했어. 아빠 마음도, 강윤도도, 다."
"…무슨 소리야."
서온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붕대 감긴 오른손은 감각이 없었다. 능력도 죽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평생 처음으로,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는 상태로 그녀는 이 함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처음으로 옳았다.
서온은 힘을 뺐다. 각도를 계산하지 않았다. 안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이 마지막으로 닿은 자리에, 그저 자기 손을 겹쳐 얹었다. 확인 없이. 두려움 없이.
목함이 손 안에서, 아주 작게, 딸깍였다.
"…열렸어." 도아가 숨을 삼켰다.
이음새가 밀려나며 얇은 틈이 벌어졌다. 십 년을 버틴 장부맞춤이 아버지의 손짓을 기억한 것처럼 소리 없이 풀렸다. 마른 나무 향과 함께, 새 종이 냄새가 새어 나왔다. 서온이 차 안에서 맡았던 그 냄새.
함 뚜껑을 들어 올린 순간, 서온의 손끝에 온기가 번졌다.
죽은 손인데.
능력이 사라진 손인데.
나무 결 안쪽에서, 아교로 봉해 새긴 글자들이 손끝을 뜨겁게 데웠다. 온독이 아니었다. 이건 능력이 읽어낸 온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나무에 새겨 넣은 진짜 열이었다. 서온이 평생 다른 사람에게서 읽어 온 것과 달리, 이 온기는 그녀를 앓게 하지 않았다.
"뭐라고 써 있어." 도아가 다가왔다.
서온은 함 안쪽을 들여다봤다. 아버지의 서투른 글씨. 대패는 잡아도 붓은 못 잡던 손.
'온아. 네가 이걸 열었다면, 드디어 확인하는 걸 멈춘 날이겠구나.'
서온의 숨이 걸렸다.
'너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손으로 읽었지. 남의 온도는 다 알면서, 정작 네 마음은 무서워서 도망만 쳤다. 아빠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렸다. 능력이 널 지켜 주는 게 아니라 널 가둬 놨으니까.'
'온아. 네 능력이 아니라 네 마음을 믿어라. 두렵지 않은 온도는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택하는 거다. 무서워도 손을 내미는 게, 그게 진짜 온기다. 아빠가 네 엄마한테 그랬던 것처럼.'
목함을 쥔 서온의 손이 떨렸다. 붕대 사이로 새어 나온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를 무너뜨렸다.
"아빠…" 서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생 그녀는 남의 온도를 읽어 미리 알고, 알고 나서 안전한 거리를 재고, 그마저 무서우면 농담으로 밀어냈다. 강윤도가 다가올 때도 그랬다. 손을 대 확인하려다 손을 잃었고, 확인 못 하니 못 믿겠다고 스스로 벽을 세웠다.
아버지는 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 딸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지.
서온은 목함을 가슴에 안았다. 어깨가 흔들렸다. 눈물이 붕대 위로 떨어졌다.
"울어." 도아가 등을 쓸었다. "너 원래 안 울잖아. 항상 농담으로 넘기고. 그냥 울어, 이번엔."
서온은 밀어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섭다고 웃어넘기지도, 괜찮다고 거짓말하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온기를 안고, 자기 안에서 터진 것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한참 만에 눈을 떴을 때, 함 바닥에 접힌 종이 뭉치가 보였다.
"이거…" 서온이 젖은 손으로 종이를 꺼냈다. 새 종이 냄새의 정체.
한 장은 계약서였다. 서명 전 초안. 그녀가 계약하던 날 아버지 작업대에서 검토하다, 손이 기억하는 대로 이 함에 넣어 둔 원본.
서온은 12조 페이지를 폈다.
"도아야, 봐." 손끝이 종이를 짚었다. "원래 12조엔 이렇게 써 있어. '계약 파기 시 대납 부채는 사유와 무관하게 소멸된 것으로 본다.' 소급 무효화가 아니라 소멸이야. 강윤성이 갈아 끼운 페이지랑 정반대야."
"그럼 이게 위조 증거네." 도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명 전 원본이 위조된 페이지랑 다르다는 걸 증명하는—"
"이게 끝이 아니야." 서온이 다른 종이를 폈다. 아버지의 필체가 아니었다. 인쇄된 계약서와 손으로 적은 각서가 뒤섞인 문서. 맨 위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강태산. 선우 그룹 회장.
그리고 그 아래, 아버지의 이름. 서정목.
"이게 뭐야." 도아가 몸을 기울였다.
서온은 문서를 훑었다. 손이 차가워졌다.
"목가 재개발 밀약이야."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아빠가… 아빠가 살아 있을 때, 강태산 회장이랑 목가 재개발 두고 각서를 썼어. 여기 봐. 목가 골목 상인들 동의서를 몰래 받아내는 대가로 온공방 부채를 탕감해 주기로 했었어. 근데 아빠가 거절한 기록이야. '골목을 팔지 않겠다'고. 회장 서명까지 있어."
"그게 왜 증거가 돼?"
"강윤성이 지금 노리는 게 뭐야." 서온이 종이를 들었다. 눈이 빛났다. 조금 전까지 젖어 있던 눈이. "목가 재개발 이권. 근데 이 각서엔, 강태산 회장이 목가 재개발을 '적법한 동의 없이 추진하지 않겠다'고 각서로 못박은 기록이 있어. 회장 본인 필체로. 강윤성이 헐값 매집하려던 방식이 회장의 각서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거야."
도아의 입이 벌어졌다.
"이걸 이사회에서 까면…"
"강윤성은 위조로 나를 치려다가, 아빠가 남긴 회장 각서에 자기 재개발 계획이 통째로 걸려. 위조 계약서 하나가 아니라, 강윤성이 후계로 밀어붙이던 목가 이권 자체가 부정 정황이 돼." 서온이 문서를 가슴에 눌렀다. "아빠가… 이걸 함에 넣어 뒀어. 나 하나 지키려고 골목을 안 판 게, 결국 강윤성을 뒤집을 카드가 됐어."
공방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서온."
강윤도였다. 코트 어깨가 젖어 있었다. 병원에서 곧장 달려온 듯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 그가 목함을 안은 서온을, 눈물 자국이 마른 뺨을 봤다.
"열렸어?" 그가 성큼 다가왔다. 존댓말이 벗겨진 채였다. "네가 안 받아서 계속… 도아 씨가 여기라고."
"강윤도." 서온이 그를 봤다. "증거 찾았어."
그가 종이를 살폈다. 서온이 요약했다. 12조 원본, 위조 대조, 그리고 회장의 각서까지. 그의 눈이 마지막 문서에서 오래 멈췄다.
"아버지 서명이야." 그가 낮게 말했다. "아버지가 목가를 함부로 못 건드린다고 못박은 걸, 형이 어기고 있었어. 이건… 후계 자격 자체를 흔들어."
강윤도가 문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온의 붕대 감긴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조심스럽게. 마비된 손이 다칠까 봐.
"내일 이사회, 내가 다 짊어질 생각이었어." 그가 말했다. "후계도 버렸으니까 잃을 것도 없다고. 근데 이제 안 버려도 되겠다. 너 덕분에."
서온은 그의 손을 봤다. 화상 흉터가 있는 왼손. 십 년을 얼어붙어 있던 온도.
능력은 죽었다. 그의 온도를 읽을 수 없었다. 백지일 것이다, 여전히.
그런데 서온의 손끝에 온기가 번졌다.
읽어서가 아니었다. 능력이 알려 준 게 아니었다. 그냥 그의 손이 따뜻했다. 사람의 손이 사람의 손을 데우는, 세상에서 제일 단순한 온도. 서온이 평생 능력 뒤에 숨어 놓쳐 온 것.
"따뜻해." 서온이 속삭였다. "너 손, 따뜻하다."
강윤도가 멈췄다.
"읽은 거야?" 그가 물었다. 목소리에 두려움이 실렸다. 그녀가 또 손을 잃을까 봐.
"아니." 서온이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다시 고였지만 이번엔 웃었다. 밀어내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웃었다. "능력으로 안 읽었어. 그냥… 느껴져. 네가 따뜻한 게. 안 읽어도 알겠어."
아버지의 말이 손 안에서 뜨거웠다. 두렵지 않은 온도는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스스로 택하는 것.
서온은 처음으로, 확인하지 않고 그의 온기를 믿었다.
강윤도의 흉터 있는 손이 그녀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십 년 얼어붙었던 그 자리에서, 아주 미세한 열이 서온의 손바닥으로 흘러들었다.
*
이튿날 아침, 선우 그룹 본사 이십칠 층.
이사회장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복도를 서온과 강윤도가 나란히 걸었다. 서온의 붕대 감긴 손에는 아버지의 문서 사본이, 강윤도의 서류 가방에는 원본이 들려 있었다. 위조를 뒤집을 12조 초안, 그리고 회장의 각서.
"떨려?" 강윤도가 물었다.
"아니." 서온이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안 떨려."
복도 끝, 이사회장 문 앞이었다.
두 사람이 다가서는데, 문 옆 대기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일어섰다.
강윤성이었다. 그 곁에 명서주.
강윤성은 어제 문자의 여유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명서주는 손에 얇은 봉투 하나를 쥐고 있었다. 서온이 별채에서 찍힌 그 사진—이 아니었다.
"일찍 왔네." 강윤성이 웃었다. "물증, 가져왔다고 했지."
"당신 것도 가져왔나 보네요." 서온이 명서주의 봉투를 봤다.
명서주가 봉투를 들어 보였다. 그 안에서 서늘한 무언가가 새어 나왔다—능력이 죽은 서온에게도 등줄기가 곤두서는 종류의.
"사진은 이제 안 써요." 명서주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건 애정 표현 위반, 낡았죠. 이건 다른 거예요." 봉투를 흔들었다. "서온 씨 손. 왜 그렇게 됐는지. 우리가 조사한 게 여기 다 들어 있어요. 당신, 사람 아니잖아요."
강윤도의 표정이 굳었다.
이사회장 문이, 안쪽에서 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