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닫혔던 세상이 다시 열린 곳은 별채의 천장이었다.
익숙한 나무 대들보. 아교 냄새. 서온은 눈을 뜨자마자 자기 오른손부터 찾았다. 붕대는 그대로였고, 손끝에는 아무 감각도 없었다. 손등을 꼬집어도 남의 살 같았다. 어느 방향에서 볕이 드는지로 시간을 짐작했다. 오후. 호텔 로비에서 쓰러진 게 어젯밤이었으니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뻗었던 손. 강윤도의 심장 자리에 얹은 손바닥. 거기서 뿜어 나올 뜨거움을 기다렸는데, 백지였다. 눈처럼 하얗고 온도가 없는 백지.
'읽어서 믿는 건 이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어.'
서온은 천장을 보며 그 결론을 다시 곱씹었다. 확인 없이 믿는 것. 평생 도망쳐 온 그 한 가지. 두려워서 온몸이 다시 서늘해졌다. 손이 굳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다.
문 쪽에서 인기척은 없었다. 강윤도는 자기 방으로 갔거나, 다시 형과 붙어 있거나. 서온은 성한 왼손으로 이불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작업대 위에 아버지의 목함이 놓여 있었다.
누가 옮겨 놓은 것도 아니었다. 어제 나가기 전 그녀가 거기 두고 갔던 자리 그대로였다. 그런데 함의 이음매에 생긴 실금이, 어제보다 벌어져 있었다.
서온은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균열을 따라, 온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무에는 감정이 없다. 그게 그녀가 이 공방을 안식처로 삼은 이유였다. 나무는 그녀를 앓게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 함은 지금 따뜻했다. 손을 대기도 전에, 30센티 앞에서부터 그 온도가 손등을 훑고 지나갔다.
"아빠."
부르고 나서야 자기가 그 단어를 소리 내 뱉었다는 걸 알았다.
서온은 성한 왼손을 들었다. 도아와 한 약속이 떠올랐다. 손대고 싶어질 때 전화하기로 했지. 하지만 이건 강윤도의 진심이 아니었다. 죽은 나무에, 죽은 사람이 남긴 온도였다. 12조는 강윤도와 그녀 사이에만 걸린 저주다. 이건 반동이 오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면서도, 왼손이 함 위에 얹히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온독.
봉인의 결을 따라 서온의 손끝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대패로 다듬은 결, 사포로 문지른 결, 아교가 스민 이음매. 그 하나하나에 서정목의 손길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무뚝뚝했던 사람. 딸이 열이 나 앓아누우면 말없이 물수건만 갈아 주던 사람. 서온은 그 손이 이 함 안쪽에 뭔가를 새겼다는 걸 손끝으로 읽었다.
실금이 소리 내며 벌어졌다.
딱, 하고 이음매가 풀렸다. 십수 년 닫혀 있던 함이, 서온의 온독을 열쇠 삼아 열렸다.
안은 비어 있었다. 편지도, 유품도 없었다.
그런데 뚜껑 안쪽 면에, 칼로 얕게 새긴 글자가 있었다. 아니, 글자만이 아니었다. 나무 결 자체에 온도가 새겨져 있었다. 서온이 그 면에 손바닥을 얹자, 아버지의 진심이 온도로 흘러나왔다.
미열이었다. 미안함의 온도.
그리고 그 아래, 깊고 고른 뜨거움. 애정의 온도.
서온은 숨을 멈췄다.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어 읽었다. 아버지의 서툰 획.
『온아. 나는 네 온도를 못 읽었다.』
손끝이 떨렸다.
『남들은 다 읽으면서, 정작 너는 아빠 마음을 몰라 서운했겠지. 아빠는 그런 걸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미안했다.』
『그런데 온아. 아빠는 매일 너를 사랑했다. 증명 못 해도. 온도로 못 보여 줘도.』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다. 안 보여도 있는 거다.』
서온의 무릎이 꺾였다. 작업대를 짚고 겨우 버텼다.
십수 년 전, 어린 서온이 물었었다. 아빠는 왜 나 안 사랑해? 아빠 손 잡으면 아무것도 안 느껴져. 아빠는 나 좋아하는 거 맞아? 그때 서정목은 대답 대신 대패만 밀었다. 서온은 그걸 거절로 알아들었다. 아빠도 나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무온이었어.'
그 깨달음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내리쳤다. 아버지도 감정을 몸 깊이 봉인한 사람이었다. 표정으로도, 온도로도 새어 나오지 않던 사람. 그래서 서온은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온도로 확인받지 못했다. 확인받지 못했으니, 없다고 믿었다.
그게 뿌리였다.
남의 온도는 다 읽으면서, 정작 자기 곁의 사람이 다가오면 두려워 먼저 밀어내던 습관. 온도로 확인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겁먹던 마음. 그 결함이 어디서 왔는지, 서온은 서른 살이 다 되어 이 함 앞에서 처음 마주했다.
"바보같이."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 여기 있었잖아. 이렇게 뜨거웠잖아."
아버지의 애정은 십수 년 동안 이 나무 안에 봉인된 채, 딸이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온도로 보여 주지 못한 사랑이, 나무 결 속에서 식지 않고 남아 있었다.
증명 없이도, 있었다.
서온은 손바닥을 함 안쪽에 꾹 눌렀다. 아버지의 온기가 굳은 오른손이 아닌 성한 왼손을 타고 팔뚝까지 번졌다. 눈물이 함 안으로 떨어졌다. 나무가 그것을 빨아들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서온은 알았다. 강윤도도 그랬다는 걸. 그 남자의 심장이 백지였던 건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처럼, 봉인해서였다. 열두 살의 밤에 얼어붙어 멈춘 온도. 서온은 그걸 읽으려다 손을 잃었다. 하지만 읽지 못한다고 없는 게 아니었다.
'안 보여도 있는 거다.'
아버지가 방금 그렇게 알려 줬다.
서온은 눈물을 닦고 조각칼을 찾았다. 아버지의 유품. 오른손이 쥐던 칼. 그 손은 이제 감각이 없어 칼을 쥘 수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걸 성한 왼손으로 집었다.
한 번도 왼손으로 나무를 깎아 본 적이 없었다. 서툴렀다. 칼끝이 결을 물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손목이 어색하게 꺾였다. 그래도 서온은 함 안쪽, 아버지 글자 옆의 빈 면에 칼을 댔다.
처음으로, 남의 온도를 읽는 게 아니라, 자기 온도를 새기려 했다.
『아빠. 나 이제 알아.』
첫 획이 파였다. 삐뚤었다.
『온도로 확인 안 해도, 진심은 있는 거지.』
두 번째 획. 왼손이 떨려 획이 두 번 끊겼다. 그래도 이었다.
칼이 나무를 파고들 때마다, 서온은 그 자리에 자기 감정을 흘려 넣었다. 온독의 반대. 읽는 게 아니라 새기는 것. 아버지가 그랬듯,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나무 결에 봉인하는 것. 굳은 오른손으로는 못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비되지 않은 왼손과, 마비될 수 없는 마음으로는 할 수 있었다.
『나 이제 누구 하나, 확인 없이 믿어 보려고.』
마지막 획을 긋고, 서온은 자기가 새긴 글자에 손바닥을 얹었다.
미열이 났다. 자기가 방금 나무에 흘려 넣은 온도가, 손바닥으로 되돌아왔다. 죽어 있던 나무에, 그녀가 온기를 되살려 놓았다. 능력이 자신을 앓게 하고 생업을 앗아가는 저주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처음으로, 그것이 무언가를 살리는 손이 되었다.
"할 수 있잖아. 나."
굳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을 잃어도, 왼손이 있었다. 왼손으로 못 하면, 마음으로 하면 됐다. 공방은 아버지의 손끝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거였다. 그 마음은 서온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온은 처음으로, 손을 잃어도 공방을 지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온도로 확인하지 않아도 강윤도를 믿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 옆에, 이제 아버지의 온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온은 함을 조심스레 닫았다. 이번엔 봉인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보관하는 손길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도아일 거라 생각하며 화면을 봤다. 아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 문자였다.
발신자를 열자, 서명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강윤성.
『제수씨. 몸은 좀 어떤가.』
『의사 말로는 손이 다 상했다던데. 안타깝군. 공방 장인이 손을 잃다니.』
서온의 성한 왼손이 휴대폰을 꽉 쥐었다.
『내일 오후 이사회에서, 나는 이 결혼이 부채 대납 대가로 맺어진 거래임을 안건으로 올릴 걸세. 명서주가 가진 사진과 함께.』
『온공방 채권 원본은 내 손에 있고. 계약 12조에 따라 이 결혼이 가짜로 판명되면, 대납은 소급 무효, 공방은 예정대로 경매행이지.』
『동생은 후계에서 탈락하고, 자네는 아버지 공방을 잃는다. 아주 깔끔하지 않나.』
마지막 줄에서 서온의 눈이 멈췄다.
『막고 싶으면 오늘 밤 안에 연락하게. 자진해서 이혼서에 도장 찍으면, 공방 채권 하나는 봐줄 수도 있으니. 선택은 자네 몫이야. — 강윤성.』
서온은 방금 새긴 함을 내려다봤다. 아버지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증명 없이 믿기로, 방금 마음을 정한 참이었다.
그런데 내일이면, 그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재계 전체 앞에서 발가벗겨질 참이었다. 믿음을 막 배운 순간, 모든 것을 잃을 시각이 정해졌다.
서온은 창밖을 봤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내일까지,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서온은 휴대폰을 작업대 위에 엎어 놓았다. 손이 떨렸지만, 아까와는 다른 떨림이었다.
문자를 다시 읽지 않았다. 강윤성의 계산은 뻔했다. 그가 원하는 건 서온의 항복이 아니었다. 항복하든 안 하든, 그는 이미 이길 판을 짜 놓았다. 이혼서에 도장을 찍으면 계약은 서온 쪽 귀책으로 파기되고, 12조에 따라 부채 대납은 무효가 된다. 도장을 안 찍고 이사회에서 폭로되면, 그때도 결혼이 가짜로 판명되어 결과는 같다. 어느 쪽이든 공방은 경매행이고 강윤도는 후계에서 탈락한다.
'깔끔하다'는 그의 말이 맞았다. 서온에게는 빠져나갈 문이 없었다.
빠져나갈 문이 없다면.
서온은 목함을 다시 바라봤다.
8화에서, 명서주가 소송 증거로 낸 붕대와 실신 영상. 그때 강윤도가 회장 앞에서 후계를 포기하겠다 선언했을 때, 서온은 흐릿한 정신 속에서 이상한 걸 하나 잡았었다. 계약서 12조. 그 페이지만 종이 재질이 달랐다. 서명 다음 날 계약서 원본이 반출된 기록. 페이지 삽입 위조 의혹.
12조는 처음부터 그 계약서에 없었을지도 몰랐다.
서온의 손이 목함 뚜껑을 다시 열었다. 안에서 새 종이 냄새가 났다. 어제 병원에서 도아가 흘리듯 말했었다. 계약 초안 검토일에, 서온이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이 함에 넣어 두었을 거라고. 함이 백지라 아무것도 안 읽혔지만, 안에서 종이 냄새가 났다고.
서온은 봉인이 풀린 함 바닥을 성한 왼손으로 더듬었다. 나무 바닥과 옆면 사이, 아버지가 짜 넣은 이중 바닥의 틈. 손톱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온은 조각칼 끝을 밀어 넣어 얇은 판을 들어 올렸다.
아래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펼치자 익숙한 서식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서. 하지만 열두 개 조항이 아니었다. 열한 개였다.
12조가 없었다.
서온은 종이를 넘겼다. 하단에 서명이 있었다. 강윤도의 서명, 그리고 자기 서명. 검토일 날짜. 이건 서명 전 초안이 아니었다. 서명까지 마친 원본이었다. 서온이 초안 검토를 끝내고 자기도 모르게—아니, 자기 손으로—이 함에 넣어 둔 것이다. 평생 습관이었다. 중요한 걸 아버지 함에 감춰 두는 것.
강윤성이 쥔 계약서에는 12조가 있고, 서온이 쥔 원본에는 12조가 없었다.
페이지 삽입 위조. 강윤성이 서명 다음 날 원본을 반출해, 12조 페이지를 끼워 넣은 것이다. 부채 대납을 소급 무효화하는 함정 조항. 애초에 서온과 강윤도가 합의한 계약에는 존재하지 않던 문장.
서온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게 있으면, 강윤성이 이사회에서 계약서를 흔들어도 소용없었다. 12조가 위조라면, 파기되어도 부채 대납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 공방은 경매로 넘어가지 않는다. 강윤성의 삼중 그물 중 가장 굵은 줄이 끊기는 셈이었다.
"찾았어."
목소리가 떨렸다. 서온은 원본을 두 손으로—성한 왼손과 감각 없는 오른손으로—움켜쥐었다.
그때 별채 문이 열렸다.
"온아."
강윤도였다. 하루 만이었다. 그의 얼굴은 밤새 한숨도 못 잔 사람의 것이었다. 서온이 깨어난 걸 확인하러 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손에도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이 켜져 있었다.
"형한테 왔지." 그가 낮게 말했다. "너한테도 왔어? 이혼서 얘기."
서온은 대답 대신 손에 쥔 원본을 들어 보이려 했다.
그런데 강윤도의 다음 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내가 도장 찍을게."
서온의 손이 멈췄다.
"이혼서에. 내가 먼저 찍는다고 했어. 방금 형한테 답장 보냈어." 강윤도가 문틀을 짚었다. 목소리가 고르지 않았다. "귀책을 나한테로 돌리면, 네 쪽 파기가 아니게 돼. 그럼 12조가 발동해도 대납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계약 위반한 걸로 하면 돼. 애정 표현 금지 조항, 내가 어겼다고. 별채 사진, 그거 내가 너 안은 거잖아. 내 귀책으로 파기되면 공방은 지킬 수 있어. 12조는 일방 귀책이 너일 때만—"
"윤도 씨."
"너는 공방 지키고, 나는—"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나는 후계 안 해도 돼. 어차피 버리겠다고 회장 앞에서 말했어. 이건 내가 정한 거야. 네 손 이렇게 만든 것도 나고, 형이 널 노리는 것도 나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서온이 소리쳤다. 강윤도가 입을 다물었다.
서온은 방금 찾은 원본을 그의 앞에 펼쳐 들었다. 손이 떨려 종이가 흔들렸다.
"12조는 처음부터 없었어요. 우리 계약엔. 형이 끼워 넣은 거예요. 이게 진짜 원본이에요. 열한 개 조항. 12조 같은 건 없어요."
강윤도의 눈이 종이 위를 빠르게 훑었다. 하단의 서명. 검토일 날짜.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가, 곧 다른 빛이 올라왔다.
"이게…"
"당신이 도장 안 찍어도 돼요. 아무도 공방 안 뺏겨요. 후계도 안 버려요." 서온은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이 나 때문에 뭘 또 잃게 두지 않을 거예요."
강윤도가 원본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굳었다.
"온아. 이거… 형이 이걸 알면."
"뭘요."
"형은 자기가 12조를 끼워 넣은 걸 알아. 근데 원본이 세상에 남아 있는 줄은 몰랐을 거야. 반출한 원본을 자기가 갖고 있다고 믿고 있을 거라고." 강윤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형이 반출한 계약서는… 위조본이야. 진짜 원본은 여기 있었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이사회에 내면, 형은 문서 위조로 끝나. 후계고 뭐고 다 날아가. 이건 그냥 반격이 아니야. 형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카드야."
서온의 등줄기로 서늘한 게 지나갔다.
강윤성이 오늘 밤 안에 연락하라고 한 이유. 이혼서 도장을 유도한 이유. 그건 항복을 받으려는 게 아니었다. 이사회 전에 계약을 조용히 끝내려는 것이었다. 왜? 이사회에서 계약서가 공식 검토되면—원본과 대조되면—위조가 드러날 위험이 있으니까.
그는 서온이 원본을 가진 줄 몰랐다. 하지만 위조가 발각될 가능성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서온이 천천히 말했다. "이사회에서 계약서가 검토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전에 이혼으로 덮으려는 거예요. 위조가 드러나기 전에."
강윤도가 원본을 조심스레 접었다.
"그럼 우린 정반대로 가면 돼. 덮지 말고, 이사회 한복판에서 이걸 펼치는 거야."
서온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화면을 봤다. 강윤성. 새 문자였다.
『답이 없군. 그럼 이렇게 하지.』
『방금 명서주가 이사회 사무국에 계약서 원본을 정식 제출했네. 내일 안건 자료로. 자네들이 도장 찍든 안 찍든, 이제 물릴 수 없어.』
서온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강윤성이 위조본을 이사회에 스스로 제출했다. 그건, 그가 위조 발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자네가 아버지 함에 뭘 숨겨 뒀는지, 나는 알고 있네.』
『검토일에 자네가 그걸 함에 넣는 걸, 그날 자리에 있던 사람이 봤거든.』
강윤도가 숨을 삼켰다.
『그 함, 어제까지 안 열렸다며. 오늘 열렸나? 축하하네. 하지만 늦었어.』
『이사회에 제출된 원본과, 자네 함 속 원본. 둘 중 어느 게 진짜인지—』
『판단하는 건 자네가 아니라 나야. 내일, 이사회에서.』
마지막 줄에서, 서온의 손에서 원본이 미끄러졌다.
강윤성은 처음부터 이 함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