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사회장 문이 활짝 열렸다.

서온은 문지방을 넘기 전, 명서주의 봉투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함을 등으로 느꼈다. 능력이 죽었는데도 아는 종류의 한기. 강윤도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들어가지 마." 그가 낮게 말했다. "저 봉투, 안 봐도 돼. 내가 처리할게."

"아니." 서온은 그의 손등을 톡 두드렸다. "이번엔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그녀는 붕대 감긴 손으로 아버지의 문서 사본을 고쳐 쥐고, 열두 명의 이사가 앉은 긴 테이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석에는 강태산 회장이 손깍지를 낀 채 앉아 있었다.

강윤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매끈했다.

"아버지. 회의 안건 전에, 확인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가 서류철을 테이블에 미끄러뜨렸다. "동생의 혼인은 후계 조항이 요구하는 진정한 혼인이 아닙니다. 부채 대납을 대가로 산 거래 결혼입니다. 여기 계약서와, 대납한 채권 원본이 있습니다."

이사들의 시선이 서온에게 쏠렸다. 명서주는 강윤성 뒤에 조용히 서서, 봉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강윤성이 덧붙였다.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닙니다. 손 하나를 못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정을 만져서 온도로 읽는다더군요. 우리가 조사한 자료가—"

"오빠." 강윤도의 목소리가 칼처럼 잘랐다.

"윤도." 강태산이 손을 들었다. "형 말 먼저 듣자."

서온은 그 순간 강윤성의 얼굴을 봤다. 여유의 밑바닥에 깔린 미열. 능력이 아니라 눈으로 읽었다. 저 남자는 지금 자기 카드가 흠 하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확신이 그의 약점이었다.

"회장님." 서온이 테이블 앞으로 나섰다. 열두 개의 시선이 붕대 감긴 손에 못박혔다. "지금 강윤성 씨가 제출한 계약서 12조, 제가 한 장 짚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사본을 펼쳐 강윤성의 서류철 옆에 나란히 놓았다.

"강윤성 씨 계약서 12조. '일방 귀책으로 파기 시, 대납 부채는 소급 무효화된다.' 공방이 경매로 넘어간다는 조항이죠." 서온은 자기 사본의 같은 페이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원본 초안 12조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파기 시, 대납 부채는 소멸한다.' 무효화가 아니라 소멸. 공방은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사 한 명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두 계약서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종이가 다릅니다." 서온이 강윤성 서류철의 12조 페이지를 손톱으로 튕겼다. "이 페이지만 재질이 달라요. 결정 전날 밤 계약서 원본이 반출된 기록이 있고, 그날 이 페이지가 갈아 끼워졌습니다. 갈아 끼운 사람은—" 그녀는 강윤성을 봤다. "채권 원본을 되사 온 바로 그 사람이겠죠."

강윤성의 목젖이 한 번 움직였다.

"근거 없는 소리군." 그가 웃으려 했다. "초안이라는 게 어디 있어. 조작이겠지."

"여기 있습니다." 강윤도가 서류 가방을 열어 원본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서정목 장인이 계약 검토일에 보관해 둔 겁니다. 십 년 잠긴 목함 안에서 나왔습니다. 필적 감정 넣으시죠. 어느 페이지가 나중에 끼워졌는지."

침묵이 테이블을 덮었다.

강태산 회장이 원본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12조에서 멈췄다.

"윤성아." 회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 종이, 왜 다르냐."

"아버지, 그건—"

"하나 더 있습니다." 서온이 두 번째 문서를 꺼냈다. 회장의 필체가 박힌 각서였다. "십오 년 전, 회장님이 제 아버지 서정목과 목가 재개발에 관해 쓰신 각서입니다. '적법한 동의 없이 목가 골목을 추진하지 않겠다.' 회장님 친필이시죠."

강태산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강윤성 씨는 지금, 목가 일대를 헐값 매집해 재개발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채권을 되산 것도 그 그물의 일부고요. 회장님 각서를 정면으로 위반한 겁니다."

이사석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자기 아버지 서명을 어긴 후계자라."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게 자격이 되나."

강윤성의 얼굴에서 매끄러움이 벗겨졌다.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 흔들리는 눈. 서온은 능력 없이도 그의 온도가 무너지는 걸 봤다. 조금 전의 냉소는 없었다.

"명서주 씨." 강윤성이 뒤를 돌아봤다. "그 봉투. 서온 저 여자 얘기. 지금 꺼내."

명서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온이 그녀를 봤다. 이 사람은 강윤성을 완전히 믿은 적이 없었다. 만찬 때 이미 그 균열을 읽었다. 이용당하는 자의 얼굴을.

"명서주 씨." 서온이 조용히 말했다. "그 봉투 열면, 회장님 각서 위반은 덮이지 않아요. 강윤성 씨는 이미 끝났어요. 같이 가라앉을 건가요, 아니면 여기서 내릴 건가요."

명서주의 손끝이 봉투 위에서 멈췄다.

"…저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처음으로 세련됨을 잃었다. "저는 이 조사 자료가 무슨 내용인지 확인한 적 없습니다. 강윤성 상무님이 전달만 부탁하셨어요."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저는 여기서 빠지겠습니다."

강윤성이 그녀를 노려봤지만, 명서주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봉투는 열리지 않았다. 서온의 비밀은, 이사회장 대리석 바닥 위에 봉인된 채 남았다.

"강윤성." 강태산 회장이 일어섰다. 그 한마디에 이사석 전체가 얼어붙었다. "너, 회의실에서 나가라. 감사팀이 목가 건과 이 계약서 반출 건 전부 들여다볼 거다. 후계 논의는 오늘부로 중단이다."

강윤성은 무언가 말하려다, 열두 개의 시선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문을 향해 걷는 그의 어깨가 처음으로 굽었다. 서온은 그 등에서 아무 온도도 읽지 않았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

문이 닫혔다.

*

이사석이 정리되고, 회장이 강윤도를 상석 곁으로 불렀다.

"윤도." 강태산이 계약서 원본을 손끝으로 밀었다. "네가 이겼다. 형은 자격을 잃었고, 후계는 이제 네 앞에 열렸어. 지분 프리미엄, 의결권, 전부. 네가 원하던 거잖아. 본가에 인정받는 거."

강윤도는 그 서류를 내려다봤다. 오래 봤다.

서온은 그의 옆얼굴을 봤다. 저 남자가 십이 년간 감정을 봉인해 가며 지키려 한 자리였다. 어머니를 밀어낸 본가에게 인정받겠다던, 그 하나.

"아버지." 강윤도가 말했다. "후계, 받지 않겠습니다."

이사석이 다시 술렁였다.

"뭐라고?" 강태산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의결권 프리미엄은 진정한 혼인에 붙는 조건입니다." 강윤도가 서온을 돌아봤다. "그런데 제 결혼은, 방금 이사회 앞에서 계약 결혼이었다는 게 다 드러났습니다. 조건을 못 채웁니다. 그러니 저는 자격이 없어요. 후계도, 프리미엄도."

"윤도, 그건 형이 조작한 거고—"

"계약으로 시작한 건 맞습니다." 강윤도가 잘랐다. "부채 대납을 조건으로 이 사람과 혼인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저는 그걸 거짓말로 덮어 자리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계약서 원본을 회장 앞으로 도로 밀었다.

"지분도 넘기겠습니다. 신탁 이전한 사·이 퍼센트도, 나머지도.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빠지겠습니다." 그가 서온의 붕대 감긴 손을 봤다. "지킬 때마다 무언가를 잃는다더군요. 이 사람 능력이. 이 사람은 저를 지키느라 손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지키느라 자리를 잃겠습니다. 그게 공평하지 않습니까."

서온의 숨이 멎었다.

지킬 때마다 잃는다. 계약이 반드시 무언가를 앗아간다는 그 규칙. 처음 지분을 신탁으로 내줄 때부터 그는 잃어 왔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으로 전부를 내려놓았다.

강태산 회장이 아들을 오래 바라봤다. 그러다 짧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네 어미가." 회장이 낮게 말했다. "너한테 그걸 물려줬구나. 자리보다 사람을 택하는 거. 나는 평생 못 한 걸."

*

이사회장을 나온 두 사람은 복도 끝 창가에 섰다. 이십칠 층 아래로 봄의 도시가 펼쳐졌다.

"후회 안 해?" 서온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네 평생이었잖아. 저 자리."

"안 해." 강윤도가 그녀를 봤다. "너잖아."

두 글자였다. 만찬 때 했던 말 그대로. 하지만 이번엔 무너뜨릴 형도, 흔들 채권도 없었다. 그냥 그 두 글자만 남았다.

서온은 그의 손을 봤다. 흉터 있는 왼손. 십이 년 얼어붙어 있던 자리.

"손 줘 봐." 그녀가 말했다.

"안 돼." 강윤도가 손을 뒤로 뺐다. "읽지 마. 또 손 굳어. 나 확인 안 해도 돼. 그냥 믿어."

"읽는 거 아니야." 서온이 그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냥 잡는 거야."

그녀는 봉투를 열지 않았듯, 이번에도 확인하려 힘을 주지 않았다. 능력을 밀어 넣지 않았다. 그냥 손바닥을 그의 손바닥에 포갰다. 어제 로비에서, 아버지 목함 앞에서 배운 그것—읽지 않고 그냥 느끼는 것.

그런데.

서온의 손바닥으로 온도가 밀려들었다. 미열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잔열도 아니었다. 뜨거웠다. 십이 년 봉인 아래 갇혀 있던 것이, 둑이 터지듯 밀려나왔다. 애정이었다. 그녀를 향한, 숨이 막히게 뜨거운.

읽으려 하지 않았는데 읽혔다. 저주는 확인하려 손댈 때만 발동했다. 지금 그녀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냥 믿고 잡았을 뿐이었다. 그러자 봉인의 벽이 온전히 무너져, 그의 진심이 저주 없이, 반동 없이, 그냥 온기로 흘러들었다.

"윤도." 서온의 눈에 물이 차올랐다. "너… 따뜻해. 진짜 따뜻해."

"손 괜찮아?" 그가 다급히 물었다.

"괜찮아." 서온이 웃었다. 붕대 감긴 손이 시리지 않았다. 얼어붙지 않았다. "안 아파. 하나도 안 굳어. 그냥 따뜻하기만 해."

읽어서 안 게 아니었다. 믿어서 응답받은 것이었다. 증거를 요구하던 평생 끝에, 증거 없이 믿기로 한 그 순간에야 진짜 온도가 그녀에게 열렸다.

*

닷새 뒤, 온공방.

한도아가 SNS에 올린 공방 회생 프로젝트가 예약 주문을 밀어냈고, 강윤성 손에 있던 채권은 12조 원본과 회장 각서 앞에서 무력해졌다. 공방은 경매 목록에서 빠졌다. 서온은 대패 냄새 나는 작업대 앞에 앉아, 강윤도가 내민 계약서를 들여다봤다.

열두 개 조항이 적힌 그 종이.

"이거." 서온이 계약서를 들었다. "이제 필요 없지?"

"응." 강윤도가 답했다.

서온은 붕대 감긴 손 대신 왼손으로 계약서를 반으로 찢었다. 애정 표현 금지도, 계약 사실 비밀도, 유효기간 이 년도, 전부 두 조각이 됐다.

"난 능력으로 사람 읽어서 아는 사람이었어." 그녀가 찢긴 종이를 내려놨다. "근데 너는 안 읽혔지. 그래서 무서웠어.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계속 농담으로 밀어냈어. 너 다가올 때마다."

"알아." 강윤도가 말했다.

"근데 이제 알아." 서온이 그를 봤다. 이번엔 밀어내지 않았다. "확인 안 해도 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아빠가 목함에 그걸 남겨 놨더라. 두렵지 않은 온도는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택하는 거라고. 나… 너 택할래. 안 읽고."

강윤도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새 종이였다. 그가 서온 앞, 찢긴 계약서 위에 내려놨다.

거기엔 두 줄만 적혀 있었다.

*유효기간: 평생.* *조항: 사랑할 것.*

서온은 그 두 줄을 오래 봤다. 대패질 소리도, 아교 냄새도 멈춘 것 같았다.

평생 그녀는 다가오는 것을 먼저 밀어냈다. 온도가 두려워서, 확인이 무서워서, 잃을까 봐.

이번엔 아니었다.

서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업대를 돌아, 강윤도에게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였다.

붕대 감긴 손을 들어 그의 뺨에 댔다. 읽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냥 대는 것이었다. 삼 화 그날 밤, 잠든 그의 뺨에 손을 대고 두려워하며 도망쳤던 그 자리에.

이번엔 도망치지 않았다.

"조항 하나 빠졌어." 서온이 속삭였다.

"뭔데." 강윤도의 목소리가 잠겼다.

"먼저 다가가는 건 나부터." 그녀가 웃었다. 밀어내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건 내가 쓸게."

그녀의 손바닥으로 그의 온도가 흘러들었다. 뜨겁고, 반동 없고, 두렵지 않은 온도가.

*

그날 저녁, 온공방 창턱에는 십 년 잠겼던 아버지의 목함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서온은 그 옆에, 아버지가 미처 다 새기지 못한 나무 조각 위에 새 글자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조각칼은 왼손으로 쥐었다. 서툴렀지만, 떨리지 않았다.

*온기는 읽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대패 냄새 나는 그 방 안에서, 두 사람의 온도가 처음으로 같은 눈금 위에 나란히 멈췄다.

〈끝〉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