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안의 종이가 서온의 눈앞에서 흔들렸다.
"조용히." 강윤도가 앞으로 나섰다. 서온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였다. "형이 되사 왔다고? 웃돈을 얼마 얹었는데."
"글쎄. 네 지분 4.2퍼센트만큼은 아니었지." 강윤성이 봉투를 가슴 안쪽에 넣었다. "네가 신탁에 넘긴 그 표차,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텐데."
서온은 두 사람 사이에서 강윤성의 온도를 읽고 있었다. 읽지 않으려 해도 이 거리에서는 새어 들어왔다. 승기를 쥔 자의 뜨거움 아래, 그와 이질적인 냉기가 한 겹 더 깔려 있었다. 그건 방금 만든 감정이 아니었다. 오래 벼려 온, 이제 완성 단계에 접어든 어떤 것.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반대편에서 다가왔다.
명서주였다. 그녀는 강윤성 옆에 서더니, 클러치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서온 쪽으로 돌렸다.
사진 한 장.
어젯밤 별채, 서온이 강윤도를 뒤에서 안고 있는 뒷모습. 강윤도의 왼손목, 소매가 밀려 올라가 드러난 화상 흉터. 각도가 정확했다. 누군가 문틈으로 오래 겨눈 렌즈였다.
"이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해요." 명서주의 목소리는 차 스푼을 젓듯 부드러웠다. "가짜 부부가 밤에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지만—이건 다르죠. 계약서에 '애정 표현 금지' 조항이 있잖아요. 이 사진이 이사회에 도는 순간, 두 분 중 누구 말이 진짜인지가 아니라, 이 결혼이 얼마나 우스운지가 증명돼요."
서온은 사진을 보지 않았다. 명서주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손끝이 시렸다. 4화 작업실에서 읽었던 그 불안의 미열—이제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강윤성의 것과 똑같은 냉기가 그녀 안에도 굳어 있었다. 두 사람의 온도가 하나로 맞물려 있었다. 같은 거푸집에서 나온 쇳물처럼.
'확정됐어.' 서온은 속으로 삼켰다. '이 두 사람, 완전히 같은 걸 쥐고 움직여.'
강윤도가 명서주의 휴대폰 앞을 손으로 가렸다.
"이 결혼은 진짜야." 그가 말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복도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 위로 하얗게 떨어졌다. 그는 명서주를 보지 않고 서온을 봤다.
"계약서에 뭐라고 쓰였든 상관없어. 나는 이 사람이랑 사는 거, 진짜로 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 사진 이사회에 돌려. 돌리면 내가 직접 나가서 말할 거야. 우리 결혼은 진짜고, 형이 채권을 되산 것도, 감사팀을 붙인 것도 전부 후계 조항 노린 공작이라고."
명서주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휴대폰을 도로 클러치에 넣는 동작이 반 박자 느렸다. 서온은 그 반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냉기 위로, 미세한 균열 같은 미열이 스쳤다. 예상 밖의 대답을 들은 자의 흔들림이었다.
"진짜라." 명서주가 미소를 되찾았다. "그럼 증명하시면 되겠네요. 다음 주 목요일, 재단 이사회 전 만찬이 있죠. 창업주님도 오시고, 이사진 전원이 모여요." 그녀가 서온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자리에서, 이 결혼이 진짜라는 걸 두 분이 증명하지 못하면—저는 이 사진을 돌릴 거예요. 시간을 드리는 거예요. 엿새."
폭로 시한. 서온의 머릿속에서 날짜가 째깍거렸다.
"관대하시네요." 서온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저 자신도 놀랄 만큼 평평했다. "엿새나 주시고. 원래 이런 건 뒤통수를 쳐야 재밌는데. 미리 알려주는 걸 보니, 자신이 없으신가 봐요."
명서주의 눈꼬리가 팽팽해졌다.
"온 씨." 강윤성이 대신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끄러웠다. "말재주가 좋아. 그런데 말재주로 종이를 이길 순 없어."
그가 다시 봉투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손가락으로 가슴께를 톡톡 두드렸다. 봉투가 든 자리였다.
"계약서 12조." 그가 말했다.
서온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제수씨는 그 조항 읽어봤나? '일방의 귀책으로 계약이 파기될 경우, 부채 대납 효력은 소급하여 무효로 한다.' 파기 사유는 여러 개지만—가장 간단한 건 이 결혼이 거래였다는 게 밝혀지는 거지. 그럼 동생이 갚은 삼억 팔천은 없던 일이 되고, 채권은 살아 있는 채로 내 손에 남고, 공방은 경매로 가. 아주 깨끗하게. 이혼 소송도, 위약금 다툼도 필요 없어. 종이 한 장이면 전부 백지야."
'12조 은닉 조항.' 서온은 계약서에 서명하던 밤을 떠올렸다. 강윤도가 넣은 진심 반동 조항 뒤에, 강윤성의 손이 슬쩍 붙여 놓은 문장. 그때는 대칭 조항으로 되받았다고 안심했는데—이 사람은 그 대칭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파기의 귀책만 서온 쪽으로 만들면, 대칭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형." 강윤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공방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건드리는 건 내가 아니야, 윤도야." 강윤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종이가 하는 일이지. 나는 그냥 그 종이를 갖고 있을 뿐이고."
두 사람이 나란히 돌아섰다. 하이힐과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서온은 그 뒷모습을 봤다. 그리고 손을 폈다 오므렸다. 붕대 감은 오른손은 이미 감각이 반쯤 죽어 있었다. 성한 왼손조차 손끝이 저릿했다.
이 두 사람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어디까지 준비했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래야 엿새를 버틸 수 있었다. 그래야 공방을 지킬 수 있었다.
읽으면 된다.
읽으면—
***
"온 씨. 온 씨."
강윤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온이 멀어지는 두 사람을 향해 반걸음 내디딘 참이었다.
"뭐 하려고." 그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아무것도요." 서온이 웃었다. 입꼬리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그냥, 저 사람들 얼마나 준비했나 배웅하려던 거예요. 문 앞까지."
"거짓말."
"거짓말 아닌데."
"손 떨고 있잖아."
서온은 왼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강윤도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왔다.
"윤도 씨." 서온이 화제를 돌렸다. "아까 그거 진심이었어요? 이사회에서 다 말하겠다는 거."
"응."
"그럼 후계 자리 날아가요."
"알아."
"공방 하나 지키자고 그룹을 버려요?"
"공방 하나가 아니라." 강윤도가 말을 멈췄다. 그는 늘 이 지점에서 멈췄다. 머릿속의 말과 입 밖의 말 사이 어딘가에서. "너잖아."
서온의 발밑이 잠깐 기울었다. 온독으로 읽은 것도 아닌데, 그의 말이 그대로 온도처럼 번졌다. 서늘한 복도가 반 도쯤 데워진 것 같았다.
'안 돼.' 서온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흔들리면 손이 죽는다. 아버지의 조각칼을 영영 못 쥔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했다.
"그렇게 로맨틱한 대사를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서온이 어깨를 툭 쳤다. "연습 좀 하세요. 이사회에서 그렇게 말했다간 이사진들 다 졸아요."
강윤도가 그녀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온은 그 침묵이 자기 농담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먼저 갈게요." 그녀가 돌아섰다. "차에서 봐요."
***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온은 결국 멈췄다.
강윤도는 아직 복도에 있었다. 서온은 로비 쪽으로 사라진 강윤성과 명서주의 자취를 봤다. 엿새. 종이 한 장. 12조. 공방의 백지화.
이건 배웅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알아야 했다. 저들이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파기의 귀책을 서온 쪽으로 몰 것인지. 명서주의 사진이 유일한 카드인지, 그 뒤에 또 뭐가 있는지. 강윤성의 냉기 안에는 아직 읽지 못한 층이 남아 있었다. 승리를 확신한 자의 온도 아래, 아주 깊은 곳에.
서온은 로비로 이어지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발레파킹 데스크 앞에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무언가를 낮게 주고받으며.
서온은 그들 뒤로 다가갔다. 온도를 읽는 데에는 접촉이 필요 없었다. 감정이 격하면 거리 안에서도 흘러들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격했다.
세 걸음.
강윤성의 냉기가 밀려들었다. 서온은 그 층을 하나씩 벗겼다. 승리의 열기. 그 아래 계산. 또 그 아래—
'목가 재개발.' 온도가 문장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감정의 결이 방향을 가리켰다. 강윤성은 공방만 노리는 게 아니었다. 공방이 있는 골목 통째. 강윤도가 신탁으로 지켜 낸 그 부지. 파기가 성사되면 채권으로 공방을 삼키고, 후계 표차를 뒤집고, 재개발 이권까지 한 손에 쥔다. 세 마리를 한 그물로.
두 걸음.
명서주의 온도가 겹쳤다. 그녀의 냉기는 강윤성과 다른 결이었다. 강윤성이 이익이라면, 명서주는—두려움이었다. 강윤도를 놓치면 자기 가문의 위상이 무너진다는, 오래 눌러 온 공포. 그 공포가 질투로, 질투가 배려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서, 서온은 뜻밖의 것을 읽었다.
명서주는 이 공작이 성공하리라 확신하지 않았다.
'이 여자, 강윤성을 완전히 믿지 않아.' 서온의 손끝이 저릿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강윤성이 재개발까지 삼키면, 명서주 몫은 없어. 이 여자는 지금 강윤성한테 이용당하는 중이면서, 그걸 반쯤 알고 있어.'
읽었다. 균열을 찾았다. 두 사람을 갈라놓을 틈이. 명서주가 강윤성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면—
한 걸음.
그 순간, 오른손 전체가 얼어붙었다.
붕대 아래에서 시작된 냉기가 손목을 타고 팔뚝으로 번졌다. 두 사람의 냉기를 동시에 읽어 내느라 몸이 그 온도를 앓기 시작했다. 손끝이 하얗게 굳었다. 감각이 사라졌다. 오한이 척추를 훑고 올라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서온은 물러나지 않았다. 명서주가 언제 사진을 돌릴지, 강윤성의 다음 수가 무엇인지, 그 마지막 층을 읽어야 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무릎이 꺾였다.
시야가 하얗게 지워졌다.
발레파킹 데스크가, 대리석 바닥이,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몸속에서 체온이 빠져나갔다. 남의 냉기를 앓느라, 자기 열을 다 내주고 있었다.
"—온 씨!"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강윤도였다. 발소리가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서온의 다리가 완전히 무너졌다. 대리석 바닥이 뺨을 향해 다가왔다.
넘어지기 직전, 팔 하나가 그녀의 등을 받쳤다. 무릎 밑을 받쳤다. 몸이 붕 떠올랐다.
"온 씨. 온아. 눈 떠 봐." 강윤도가 그녀를 안아 든 채였다.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떨리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왜 또 이래. 뭐 읽었어. 저 사람들 읽었지."
서온은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무거웠다. 온몸이 얼음물에 잠긴 것 같았다.
"읽었어요."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명서주… 강윤성 안 믿어요. 재개발까지… 삼키면… 둘 갈라놓을 수 있어요. 그것만 알면… 됐어요."
"됐긴 뭐가 됐어!" 강윤도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팔이 그녀를 감싸는 온도조차, 서온은 여전히 읽지 못했다. 백지. 이 남자만은. "이러다 죽어. 손 봐. 손 얼었잖아. 이게 뭐야 이게."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하루면… 아니, 사흘이면…"
"거짓말하지 마." 그가 그녀의 얼어붙은 손을 자기 뺨에 갖다 댔다. 그 뺨은 뜨거웠다. 사람의 뺨이었다. 그런데도 서온에게는 그 열기가 읽히지 않았다. "이제 읽지 마. 응? 저 사람들 내가 상대할게. 채권도, 사진도, 이사회도, 내가 다 할게. 너는—"
강윤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제 나 읽지 마. 그냥 나를 믿어. 온도로 확인 안 해도, 내가 진짜인 거 그냥 믿어 주면 안 돼? 너 이러다가 손 다 잃어. 나 때문에 네 손 다 잃는 거 나 못 봐."
서온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건 오한 때문이 아니었다.
'믿으라고.' 그녀는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 그 말을 붙들었다. 그녀가 평생 못 하던 일이었다. 온도로 확인해야 안심하던 사람. 손끝으로 진심을 읽어야 곁에 머물던 사람. 확인 없이 누구를 믿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두려웠다. 온도를 읽는 것보다 훨씬.
강윤도의 얼굴이 눈보라 속에서 흐려졌다. 그녀를 안은 팔이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분명히 거기 있는데, 서온은 그것을 읽을 수 없었다.
읽을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의 진심 온도를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면, 믿는 게 이렇게 두렵지 않을 텐데.
서온은 마지막 힘을 짜내 손을 뻗었다. 얼어붙어 감각도 없는 손을, 강윤도의 심장이 있는 자리로. 거기서 뿜어 나올 진심을, 뜨거움을, 백지 아닌 무언가를.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백지였다. 눈처럼 하얗고, 온도가 없었다. 십 년을 봉인한 남자의 심장은 그녀에게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다.
'아.'
정신이 하얗게 지워지는 그 순간, 서온은 알아 버렸다. 읽어서 믿는 건 이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걸. 온도로 확인할 수 없는 사람. 손을 대도 백지인 사람. 그렇다면 이 남자를 믿는 방법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다.
증명 없이.
확인 없이.
그냥, 믿는 것.
그녀가 평생 도망쳐 온 그 한 가지.
"윤도… 씨." 입술이 겨우 그 이름을 만들었다. "당신은… 왜… 하필… 읽히지가… 않아…"
강윤도의 팔이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대답이 들렸는지 안 들렸는지, 서온은 알 수 없었다.
그의 심장에 얹은 손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감각이 사라졌다.
세상이 하얗게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