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안에서 서온의 손가락이 완전히 굳었을 때, 그녀는 비명을 삼켰다.
뜨거웠다. 십 년을 눌러온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 손끝을 지지는데, 그 온도가 너무 진해서 무엇을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애정이라기엔 너무 아프고, 그리움이라기엔 너무 오래 곪은—화상 흉터 같은 진심이었다.
"내가 잘못한 거면, 다시는 이렇게 안 만들게."
강윤도가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봉인하겠다는 그 말이 오히려 둑을 터뜨렸다.
서온은 손을 뿌리쳤다.
"놔요."
굳은 손으로는 힘을 줄 수 없어서, 성한 왼손으로 그의 손등을 밀쳐냈다. 무릎으로 바닥을 밀며 뒷걸음질 쳤다. 작업대 다리에 등이 부딪쳤다. 아버지가 쓰던 조각칼들이 벽에 걸린 채 흔들렸다.
"서온—"
"알아버리면요." 숨이 찼다. "당신 진심을 다 알아버리면, 이 손 영영 못 써요. 대패도 못 잡고, 끌도 못 쥐고. 나 나무 못 깎아요. 그럼 나 뭐예요, 그럼 나."
강윤도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려 했다. 서온이 더 물러섰다.
"오지 마요."
그가 멈췄다. 방금까지 그의 손에서 쏟아지던 온도가 뚝 끊겼다. 다시 백지였다. 봉인이 도로 닫힌 게 아니라, 그가 이를 악물고 억지로 잠가버린 거였다. 그 안간힘이 서온에게는 더 잔인했다.
"닷새 됐어요." 서온이 얼어붙은 오른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지난주에 세 손가락 굳고, 그제 손목까지 왔고, 방금—" 목이 메었다. "방금 다 갔어요. 이제 이 손,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강윤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완벽주의자가 처음으로 조립할 문장을 찾지 못했다.
***
만찬 초대장은 사흘 뒤 도착했다.
두꺼운 크림색 카드에 선우 그룹 창립 사십 주년 기념 만찬, 금박으로 박힌 글자. 봉투 하단에 손글씨로 한 줄이 덧대여 있었다. 강윤성의 필체였다.
—제수씨의 첫 공식 석상이 되겠군요.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아가 카드를 낚아채 읽더니 코웃음을 쳤다.
"부부의 다정한 모습? 이거 무대야. 너 세워놓고 진짜 부부인지 온 재계 앞에서 시험하겠다는 거잖아. 계약 결혼 티 하나만 나면 그 자리에서 물어뜯길걸."
"알아."
"아는 사람이 왜 가."
"안 가면 거래라고 인정하는 꼴이니까." 서온은 붕대 감은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가짜 결혼 아니라는 거, 내가 직접 보여줘야 그 사람 후계 조항 안 걸려. 그럼 채권도, 공방도 아직 안전해."
도아가 입을 다물었다. 서온이 저택을 나오지 않겠다는 대답을, 결국 이렇게 돌려서 하고 있었다.
***
만찬장은 온도의 지옥이었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서온은 이를 악물었다. 사방에서 감정이 밀려들었다. 웃는 얼굴 뒤의 서늘한 계산, 악수하는 손끝의 미열, 샴페인 잔 너머로 오가는 냉기. 남의 온도를 읽는 대가로 서온의 몸은 이 방의 모든 감정을 앓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었다.
"괜찮아?"
옆에서 강윤도가 물었다. 그는 서온이 온도에 시달리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서온의 팔꿈치 아래에 슬쩍 손을 받쳐,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길을 열었다.
"괜찮아요. 윤도 씨 손이나 조심해요."
"내 손이 왜."
"백지잖아요. 여기서 제일 편한 게 당신 손이라." 서온은 농담으로 밀었다. "온도가 없어서 안 아파요. 신기하죠."
강윤도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서온은 그가 상처받은 건지 안심한 건지 읽지 못했다. 그건 언제나처럼 읽히지 않았다.
강윤성이 단상에 올라 창립 사십 주년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다. 미소가 완벽했다. 서온이 스쳐 잡은 그의 손끝에서는 공모의 미열이 배어났다. 명서주에게서 읽었던 것과 똑같은 온도. 같은 비밀을 나눈 두 사람의 체온.
"그리고." 강윤성이 잔을 들었다. "얼마 전 가정을 이룬 제 동생 부부에게도 박수를. 강윤도, 서온 씨. 앞으로 나와 인사 한마디 하시죠."
수백 개의 시선이 쏠렸다.
무대였다. 서온은 알면서 걸어 나갔다.
***
명서주는 디저트 시간에 다가왔다.
서온이 잠시 창가로 물러나 관자놀이를 누르는 사이, 그녀는 곧장 강윤도 앞에 섰다. 와인색 드레스, 흠 하나 없는 미소. 서온의 손끝이 세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녀의 미열을 읽었다—불안을 세련되게 덮은 온도.
"윤도 오라버니. 옛날 그 곡 기억해요? 유학 시절에."
"기억 안 나."
"거짓말." 명서주가 웃으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이런 자리가 편하네. 어릴 때부터 같은 물에서 놀아서 그런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는 굳이 설명 안 해도 결이 맞잖아요. 저기 저분처럼—" 시선이 창가의 서온을 훑었다. "억지로 배우는 게 아니라."
강윤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서주가 손을 얹은 채였다. 강윤도는 그 손을 밀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계산하느라, 그 침묵이 몇 초나 길어졌다. 완벽주의자의 병이었다. 정답을 찾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는.
멀리서 그 침묵을 본 사람들에게, 그것은 다르게 읽혔다. 옛 연인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그 곁에 홀로 선 계약 아내.
서온의 손끝이 시렸다.
명서주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안에서 올라온 것 때문이었다. 저 손, 저 침묵, 저 두 사람의 그림 같은 어울림. 그걸 보는 순간 명치 아래가 뜨거워지고 손끝은 반대로 얼어붙었다. 자기감정이 온도가 되어 손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들키면 안 됐다. 여기서 손이 굳는 걸 보이면, 강윤성이 눈치챈다. 이미 그녀의 손을 의심하고 있었다.
서온은 몸을 돌려 테라스 문을 밀고 나갔다.
***
밤공기가 손끝의 열을 식혔다.
"바보 같긴."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난간을 붙잡았다. 성한 왼손으로. 오른손은 코트 주머니에 숨겼다.
질투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시린 감각의 정체는 질투였다. 계약 상대의 옛 인연을 보고 명치가 뜨거워지다니. 계산 없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랑을 얻겠다던 사람이, 정작 자기 감정 앞에서는 매번 이렇게 서툴렀다. 남의 온도는 다 읽으면서.
"온 씨."
강윤도였다. 테라스 문을 닫고 다가왔다.
"안에 들어가요. 사람들 봐요."
"명서주는 그냥—" 그가 멈췄다. 말을 다시 골랐다. "옛날에 같은 학교였고, 집안끼리 아는 사이고, 그래서 인사한 거고, 나는—" 문장이 자꾸 조각났다. "그 손을 뺐어야 했는데 어떻게 빼야 실례가 안 되는지 계산하다가 늦었어. 그게 다야."
"해명 안 해도 돼요."
"해명 아니야. 사실이야. 사실을 말하는 거야." 강윤도가 답답한 듯 이마를 눌렀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오해가 안 생기는지 다 알아. 표정, 거리, 각도, 다. 아는데—" 그가 서온을 봤다. "네 앞에서는 그게 안 돼. 계산이 다 틀려. 너한테만 매번 틀려."
바람이 불었다. 서온의 오른손이 주머니 속에서 조금 더 얼었다.
"온 씨." 강윤도가 반보 다가왔다. "네가 방금 나간 이유, 나 그거 알 것 같은데—"
"모르는 게 나아요." 서온이 웃었다. 밀어내는 웃음이었다. "그리고 윤도 씨, 우리 계약이잖아요. 12개 조항짜리. 서로 캐묻지 않기로 한 거, 3조던가."
강윤도의 얼굴이 굳었다.
서온은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
문을 열자마자 강윤성이 서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그 뒤로 재계 인사 서넛과 명서주가 따라붙었다. 강윤성이 만든 자리, 만든 관객.
"제수씨." 강윤성이 부드럽게 웃었다. "밖은 추운데. 부부가 따로 바람을 쐬는 게 요즘 유행입니까? 아니면—" 잔을 흔들며. "따로 쐬어야 할 이유라도?"
명서주가 옆에서 거들었다. "제가 괜히 오라버니랑 옛날 얘기를 해서 서온 씨 마음이 불편했나 봐요. 미안해서 어쩌죠. 근데 원래 결이 맞는 사람들끼리는 말이 자꾸 나오잖아요. 서온 씨는 좀… 다른 세계 분이시니까 이해 못 하실 수도."
관객들이 미소 뒤에서 서온을 재고 있었다. 온도가 서늘하게 몰려들었다. 저 여자가 진짜 아내가 맞나. 거래 아닌가. 얼마짜리인가.
서온은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붕대 감은 손. 굳어 감각도 없는 손. 그 손으로, 강윤도의 왼팔을 감아 팔짱을 꼈다.
닿는 순간, 손끝이 소맷단 아래 그의 손목에 스쳤다. 오래된 화상 흉터. 온도가 전혀 없는 죽은 피부. 그런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무언가가 읽혔다. 무온이 아니라—얼어붙은 온도였다. 오래전 불에 데인 채로, 그날 그대로 멈춰버린. 열두 살의 어떤 밤이 그 흉터 안에 갇혀 있었다. 느끼면 잃는다고, 스스로를 봉인한 아이가.
서온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제 남편이에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결이 맞는지 안 맞는지는," 서온이 명서주를 정면으로 봤다. "제가 알아요. 제 남편이니까. 다른 세계요? 저 원래 손으로 나무 깎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손도 제가 제일 잘 알아요. 여기—" 흉터를 감싼 손에 힘을 줬다. "이 흉터까지."
강윤도가 굳었다. 아무도, 서온조차 함부로 만지지 않던 그 자리를, 그녀가 온 재계 앞에서 제 것처럼 감싸 쥐었다.
"그러니까," 서온이 웃었다. 이번엔 밀어내는 웃음이 아니었다. "저희 부부 걱정은 넣어두세요."
침묵. 그리고 누군가 박수를 쳤다. 부러움의 열기가 번졌다.
—그 열기 속에서, 서온의 손끝은 반대로 얼어붙고 있었다. 강윤도의 흉터에서 읽은 온도가, 방금 팔짱을 끼며 새어 나온 자기감정이, 임계를 향해 손을 태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정한 부부를 봤지만, 서온은 팔짱 낀 손이 감각을 잃어가는 걸 느꼈다. 이 선언 한 번에, 그녀는 또 손을 내주고 있었다.
명서주의 미소가 굳었다. 강윤성의 눈이 서온의 붕대로 내려갔다.
***
만찬이 파하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복도.
강윤도가 서온의 팔을 붙잡았다.
"온 씨."
"손 놔요. 사람들—"
"없어. 아무도 없어." 그가 서온을 돌려세웠다. "아까 안에서, 명서주한테 내가 아무 말도 안 한 거. 그리고 테라스에서 내가 한 말들. 다."
"됐어요."
"안 됐어. 정리 좀 하게 둬." 그가 숨을 골랐다. 완벽주의자가 문장을 조립하고 있었다. "나 아까 서재에서, 계약 상대일 뿐이라고—"
"그랬죠. 그게 맞잖아요."
"아니야." 강윤도가 서온의 눈을 봤다. 무온의 벽 뒤에서, 다시 무언가 새어 나오려 했다. "아까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나는—"
"자, 감동적인 부부 상봉이군."
강윤성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손에 든 서류 봉투를 흔들며.
"동생아. 그리고 제수씨." 그가 봉투를 톡톡 쳤다. "아주 근사한 연기였어. 흉터까지 알고, 팔짱까지 끼고. 재계가 다 속았지. 그런데 말이야—" 미소가 서늘해졌다. "온공방 채권이 지금 내 손에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서온의 얼어붙은 손이, 강윤도의 팔에서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