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하다 다쳤어요."
서온은 손을 뺐다. 이번엔 강윤도도 놓아주었다. 놓아준 대신, 빼낸 손을 눈으로 좇았다.
"대패에 밀렸나 봐요. 요즘 무리했거든요. 별거 아니에요."
거짓말은 매끄러웠다. 손끝이 굳어 조각칼을 놓친다는 사실보다, 그의 진심을 읽어 이렇게 됐다는 진실이 훨씬 무거웠으니까. 서온은 무거운 쪽을 삼키고 가벼운 쪽을 내밀었다.
강윤도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온도는 여전히 없었다. 백지. 그래서 표정을 읽어야 했다. 미간의 주름, 다물린 입, 그녀의 손을 다시 잡고 싶어 반쯤 들렸다 멈춘 손.
"대패에 밀리면 손등이 까지지. 손가락 마디가 굳지는 않아."
"…목공 잘 아시네요."
"어젯밤에 찾아봤어."
서온의 숨이 잠깐 멎었다.
"당신 손이 이상해서. 조각칼 쥐는 법부터 굳은살 위치까지. 밤새 봤어. 그러니까 거짓말은 하지 마."
밤새. 그 단어가 명치를 찔렀다. 이 남자는 A블록 거짓 미끼도 밤새 조사한 사람이었다. 서툴게, 미련하게, 확인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 서온의 가슴 어딘가가 데워졌다—그리고 데워지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이 온기가 자라면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질 테고, 확인하는 순간 손이 탄다.
"밥이나 드세요."
서온은 돌아섰다.
***
그날 밤, 강윤성이 저택으로 왔다.
예고 없이. 서재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섰을 때, 서온은 마침 물을 가지러 복도를 지나던 참이었다. 강윤성이 그녀를 보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서온의 피부에 닿기도 전에, 미열이 먼저 왔다. 서늘하게 잘 벼려진, 계산기 돌아가는 열기.
"제수씨도 계셨군요. 잘됐네. 가족끼리 할 얘기니까."
"형님."
강윤도가 일어섰다. 서온은 서재 문가에 멈춰 섰다. 나가야 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강윤성이 서류 봉투를 책상에 던졌다. 봉투가 미끄러지며 서류가 반쯤 흘러나왔다. 채권 원본. 온공방. 서온의 눈이 그 글자에 박혔다.
"온공방 채권을 되사 왔다. 원본이야. 대납은 네가 했지만, 이제 명의는 내 쪽으로 넘어갈 수 있어." 강윤성은 천천히 손가락으로 봉투를 톡톡 쳤다. "그러니까 윤도야. 이 결혼이 부채 대납을 대가로 한 거래라는 게 밝혀지면—후계 조항에서 넌 탈락이고, 이 여자 공방은 다시 경매로 간다. 아주 깔끔하지?"
강윤도의 얼굴에서 온도를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서온은 그의 어깨가 굳는 것을 보았다.
"거래가 아닙니다."
"아니야?" 강윤성이 웃었다. "그럼 뭐지. 사랑? 재계 3위 후계가 파산한 목공소 딸이랑?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말해봐. 아니, 감사팀 앞에서."
***
서온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기가 나서면 안 된다는 걸. 강윤성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 서온이 나서면 나설수록 이 결혼은 '지켜야 할 거래'처럼 보이고, 거래로 입증되는 순간 12조가 아니라 후계 조항이 무너진다.
그런데 강윤도가 입을 열었다.
"형님. 온공방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강윤성의 눈썹이 올라갔다.
"채권이든 재개발이든, 목가 골목이든. 그 사람 아버지가 남긴 걸 후계 싸움 카드로 쓰지 마세요. 나머지는 다 가져가도 됩니다. 지분이든 의결권 프리미엄이든. 하지만 저건 아닙니다."
서온의 심장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지분을 다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후계를 포기하겠다는 말이었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겠다고, 본가를 넘겠다고 그렇게 움켜쥐던 걸—공방 하나 때문에.
그리고 그 순간, 서온의 손이 뜨거워졌다.
봉인의 틈으로 새어 나온 것이다. 백지였던 남자에게서, 그녀를 향한 진심이. 온도 없는 몸 깊은 곳에서 억눌러 온 열기가, 그녀를 지키겠다는 그 우직한 결심이 표면을 뚫고 올라와—서 있는 서온의 손끝을 후려쳤다.
"윽—"
서온은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하나씩 안으로 접혔다. 아니, 접히지 않았다. 편 채로 굳어버렸다. 화상 자국도 없는데 살이 지글지글 타는 감각. 12조. 진심의 온도차가 임계를 넘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뜨거워질수록, 읽는 그녀의 손이 탄다.
"서온?"
강윤도가 봉투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그의 걱정이 또 온도가 되어 밀려왔고, 밀려올수록 손은 더 탔다. 다가오지 마. 서온은 뒷걸음쳤다. 걱정하지 마. 나 지켜주지 마. 당신이 나를 아끼는 그 마음이, 지금 내 손을 죽이고 있어.
"괜찮아요." 이를 악물었다. "쥐가 났어요."
강윤성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계산기가 돌아가는 게 그의 눈에 보였다. 여자가 손을 이상하게 쓴다. 손이 마비된다. 파티에서도 손이 얼어 있었지. 뭔가 있다. 이 여자의 몸에.
서온은 그 시선을 알아챘다. 안 된다. 능력을 들키면 12조는 파기 사유가 된다. 서온이 원인이 되어 계약이 깨지면 부채 대납은 백지. 공방은 끝.
그녀는 굳은 손을 억지로 등 뒤로 감추고, 강윤성 앞으로 나섰다.
***
"거래 아니에요, 아주버님."
목소리가 떨렸지만 눈은 떨지 않았다.
"이 사람이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으셨죠. 지분 다 가져가라고. 후계도 포기하겠다고. 거래하는 사람이 그렇게 손해 보는 협상을 해요? 저는 손해 보는 협상은 안 하는 사람이라, 저런 계약은 세상에 없는 거 압니다."
"…제수씨."
"그리고 채권 되사 오셨다고요. 원본." 서온은 봉투를 턱으로 가리켰다. "되사시느라 웃돈 붙었겠네요. 그거 아세요? 이 결혼이 안 깨지면 그 채권, 만기까지 이자만 물다 휴지 됩니다. 아주버님이 결혼을 깨야 회수가 되는데—" 그녀는 웃었다. 손은 등 뒤에서 타고 있었다. "저는 안 깰 거예요. 죽어도."
강윤성의 미소가 반 뼘 내려앉았다.
"이유가 뭐지."
"제 남편이니까요."
말해놓고 서온 자신이 놀랐다. 남편. 계약서에도 못 쓰는 그 단어를, 처음으로 입 밖에 냈다. 강윤도가 뒤에서 그녀를 보는 게 등으로 느껴졌다.
강윤성은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
"재밌군. 목공소 딸이 이렇게 물지 몰랐어." 그가 문으로 향하다 멈췄다. "손, 병원 가봐요. 자꾸 그러면 못 써."
문이 닫혔다. 서온은 그제야 무릎이 꺾일 뻔한 걸 벽에 기대 버텼다.
***
"손 이리 줘."
강윤도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서온은 손을 주지 않았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안 괜찮아. 형 앞에서 손 뒤로 감춘 거 다 봤어. 지금도 떨고 있잖아. 이리 줘."
서온은 대답 대신 별채로 향했다. 강윤도가 따라왔다. 문을 닫으려 했지만 그가 손으로 막았다. 별채 작업실, 톱밥 냄새가 두 사람을 감쌌다. 여기선 나무가 아무 온도도 내지 않아 마음이 쉬었는데—오늘은 쉬지 못했다.
서온은 작업대로 갔다. 증명하려는 듯, 혹은 도망치려는 듯, 대패를 집었다. 미완성 목재를 대고 밀었다.
대패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냈다. 손가락이 대패의 손잡이를 쥐지 못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서온은 다시 집었다. 또 떨어뜨렸다. 세 번째엔 아예 손가락이 펴지지 않았다.
"…안 돼."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 돼, 안 돼."
서온은 조각칼을 집었다. 아버지가 남긴 조각칼. 손잡이가 손바닥 안에서 헛돌았다. 나무를 긋지 못했다. 결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녀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장을 풀 수 있는 일, 유일하게 온도가 없어 아프지 않은 일—그걸 할 수 없었다.
강윤도의 진심을 읽은 대가로.
서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각칼이 손에서 떨어졌다.
***
"당신 때문이야."
낮은 목소리였다. 강윤도가 굳었다.
"당신이 나를 지키려고 할 때마다, 당신이 나를 걱정할 때마다, 당신 마음이 나한테 뜨거워질 때마다—내 손이 이래요." 서온은 웃으려 했지만 얼굴이 무너졌다. "12조. 진심의 온도차가 임계 넘으면 읽은 사람 손이 탄다는 그 조항. 당신이 넣은 조항. 나 그거 대수롭지 않게 넘겼거든요. 온도도 안 읽히는 사람이랑 무슨 임계야, 하고."
"서온."
"근데 당신 온도가 없는 게 아니었어. 봉인돼 있던 거였어. 그게 새어 나오면—" 그녀의 어깨가 흔들렸다. "당신 진심을 알면, 내 손을 잃어요. 당신이 진심일수록, 나는 나무를 못 깎아요. 이게 무슨 저주 같아요?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규칙. 나는 당신 마음을 확인하고 싶은데, 확인하는 순간 아버지가 남긴 걸 지킬 손을 잃어."
눈물이 톱밥 위로 떨어졌다. 나무는 감정이 없어 그녀를 앓게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위에서 그녀가 앓았다.
"그러니까 좀… 나한테 잘해주지 마요. 걱정하지 말고. 지켜주지 말고. 당신이 백지로 있어야 내가 살아요."
강윤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어로 세상을 통제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
한도아가 온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공방 브랜딩 시안을 들고 왔다가, 조각칼을 쥐지 못하는 서온의 손을 보았다. 도아는 시안을 내려놓았다. 서온의 손을 잡아 펴보고, 굳은 마디를 만지고, 얼굴이 하얘졌다.
"이거 그 12조인지 뭔지 때문이지."
"도아야."
"그 남자 진심 읽어서 이렇게 된 거지. 맞지." 도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온아. 너 나무 못 깎으면 뭐가 남아. 공방이 뭐 때문에 있는데. 아저씨가 너한테 남긴 게 이 손이잖아. 근데 그 남자 곁에 있으면 이 손이 죽어."
"그 사람 잘못 아니야."
"잘못이든 아니든!" 도아가 서온의 양어깨를 잡았다. "결과가 이거잖아. 나는 네가 남한테 휘둘리는 거 못 봐. 서온아, 그 남자한테서 도망쳐. 계약 그만둬. 공방은 우리끼리 어떻게든 살려. 브랜딩 반응 좋아, 후원도 들어와. 자력으로 갚자. 그 저택 나와."
서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망치라는 말이 옳았다. 손을 지키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어젯밤 자기 입으로 '죽어도 안 깬다'고, '제 남편'이라고 말한 순간이 목에 걸렸다.
농담으로 밀어내던 사람이, 처음으로 진심 하나를 밀어내지 못했다.
"…생각해볼게."
"생각은 무슨." 도아가 눈을 붉혔다. "네 손이야, 서온아. 네 손."
***
도아가 돌아가고, 저녁 무렵 강윤도가 별채로 왔다.
빈손이었다. 서류도, 지분 얘기도 없었다. 그는 작업대 앞에 앉은 서온 옆에 무릎을 꿇었다. 어젯밤 그녀가 주저앉았던 그 자리에.
"밤새 생각했어."
또 밤새. 서온은 그 말에 웃음이 날 뻔했다.
"네 능력은 내가 어쩔 수 없어. 온도를 못 없애. 나도 내 마음이 언제 새어 나가는지 몰라. 나는… 내 감정 온도를 통제 못 하는 사람이야. 딱 그것만 못 해."
그가 그녀의 손을, 굳은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서온은 빼려 했지만 이번엔 힘이 없었다.
"그래서 방법을 정했어. 네 손이 나 때문에 상하는 거면, 다시는 안 만들게. 걱정 안 할게. 지키려고도 안 할게. 형이 너를 뭐라 해도 나설 때 온도가 안 새어 나가게, 내가 다시 봉인할게. 잘못한 게 나면—"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잘못한 거면, 다시는 이렇게 안 만들게."
서온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봉인하겠다는 말. 다시 백지가 되겠다는 말. 그게 그녀를 살리는 길이었고, 그래서 더 아팠다. 이 사람은 자기 진심을 죽여서 나를 지키겠다고—
그 순간이었다.
강윤도의 무온이 무너졌다.
봉인이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게 아니라, 벽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십 년을 눌러온 것이, 다시 봉인하겠다 결심한 바로 그 순간 오히려 둑을 터뜨렸다. 그녀의 손끝으로, 굳어 있던 손가락으로, 뜨거운 온도가 쏟아져 들어왔다. 백지가 아니었다. 이건 백지 근처에도 없었다. 서온이 평생 읽어온 그 어떤 애정보다 뜨겁고, 오래 참아 곪은, 화상 흉터처럼 깊은—
"아—"
서온의 눈이 커졌다. 손끝에서 손목으로, 팔로, 그의 진심이 불처럼 번져 올랐다. 12조가 발동하기도 전에, 아니 발동하는 그 순간에, 그녀는 처음으로 강윤도의 진심을 온전히 읽었다.
그리고 강윤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기 손안에서 그녀의 손이 다시 타들어가는 걸, 굳은 손가락이 경련하는 걸 느꼈으므로.
"서온—"
그녀의 손이, 그의 두 손 안에서 완전히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