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담요를 쥔 손끝에서 미열이 사라지지 않았다.

서온은 그것을 침대 위에 펼쳐놓고 다시 손바닥을 얹었다. 잔불처럼 남은 온기. 이번엔 조금 더 식어 있었지만 분명히 있었다. 애정이라기엔 너무 조심스럽고, 무심하다기엔 너무 오래 품고 있던 온도.

'사람에게선 안 읽히는데 사람이 남긴 물건에선 읽힌다.'

말이 안 됐다. 온독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잔열은 원래 사람 몸에서 나와 사물로 옮는 것이다. 근원이 백지인데 어떻게 옮은 온도만 색을 가질 수 있나.

서온은 담요를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나무 냄새는 없었다. 대신 아주 옅은, 낯선 향—누군가의 침구에서 오래 배어 나온 것 같은 냄새가 났다. 그리고 그 위에 손끝이 붙잡은 온기.

새벽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

아침, 식당은 지나치게 넓었다.

서온은 긴 식탁 끝에 앉았다. 강윤도는 반대편 끝.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접시가 여섯 개는 됐다. 사생활 불간섭 2조가 식탁 위에까지 그어진 것 같았다.

"잘 잤어요?"

강윤도가 신문을 넘기며 물었다. 시선은 활자에, 목소리는 평평했다.

서온은 그를 봤다. 표정 없는 얼굴. 이 거리에서도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온도가 뒤섞인 공간에 들어서면 서온의 몸은 늘 앓았다—식당에 들어올 때 서온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힘을 줬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윤도만 있는 방은 그녀에게 나무로 채워진 방과 같았다. 온도가 없어 앓지 않는 방.

"담요, 고마웠어요."

서온이 말을 던졌다.

신문 넘기던 손이 멈췄다. 아주 짧게. 서온은 그 정지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손이 다시 움직이고, 얼굴은 그대로였다.

"방이 서늘하다고 관리인이 그러더군요."

"관리인한테 말한 적 없는데."

"…추워 보였습니다."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서온은 판단할 수 없었다. 평생 그녀는 판단할 필요가 없었다. 손을 대면, 혹은 가까이 있으면, 진심은 온도로 흘러나왔으니까. 뜨거우면 진심, 서늘하면 거짓. 그게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 앞에서는 규칙이 통하지 않았다. 서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의 말을 말 그대로 믿을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무서웠다. 그리고—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었다.

***

만찬은 저녁에 있었다.

"본가 어른들 인사 자리예요."

강윤도가 넥타이를 매며 말했다. 계단참에서였다. "형님 부부, 아버지. 오래 안 걸립니다. 당신은 아무 말 안 해도 돼요. 웃기만 하면 됩니다."

"웃기만."

"네."

"제가 그렇게 웃음이 헤픈 사람으로 보여요?"

강윤도가 서온을 봤다. 뭐라 답해야 할지 계산하는 얼굴. 이 남자는 농담을 처리하는 회로가 없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만큼만 웃으면 됩니다."

서온은 짧게 웃고 말았다. 이 진지함이 우스웠다.

식당—진짜 만찬용 식당은 아침에 앉았던 곳보다 두 배는 컸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서온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온도였다.

강윤도만 있을 땐 텅 비었던 공간이, 지금은 여러 색으로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서온은 문턱에서 반걸음 휘청했다. 강윤도의 손이 그녀의 팔꿈치를 받쳤다—그 손에선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식탁 상석. 노년의 남자. 강태산. 그에게서는 낡은 쇠 같은 서늘함이 흘렀다. 감정을 다 태워버린 사람의 온도. 자식들을 보는 눈에 애정이랄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오른편, 강윤성. 서온을 향해 웃는 얼굴 뒤로 미열이 피어올랐다. 불안과 계산이 섞인 죄책감의 미열. 계약서 9조에 함정을 심었다가 되받아친 그 남자가 지금 서온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수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목공을 하신다고."

"손재주로 먹고삽니다."

서온이 그 손을 잡았다. 미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달착지근하게 위장한, 뒤가 서늘한 온도. 이 사람은 지금 웃으면서 나를 어떻게 밀어낼지 계산하고 있다. 서온은 손을 놓으며 미소를 유지했다.

강윤성 옆에 앉은 여자. 소개받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명서주. 진주 목걸이를 매만지며 서온을 위아래로 훑는 그녀에게서는—강윤성과 똑같은 미열이 흘렀다. 색도, 결도 같았다. 두 사람에게서 동일한 온도가 났다.

서온의 손끝이 저릿했다. 공모의 미열. 이 둘은 한편이다.

"어머, 손이 참 거치시네요."

명서주가 서온의 손등을 흘긋 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꿀처럼 발렸다. "요즘은 그런 것도 매력이라고들 하죠. 소박한 게."

"거친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삽니다. 고운 손은 밥이 안 되더라고요."

서온이 잔을 들며 받았다. 명서주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온도가 반 뼘 더 서늘해졌다.

식사 내내 서온은 앓았다. 강태산의 쇳내 나는 서늘함, 강윤성 부부의 공모의 미열,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하인들의 긴장한 미열까지—여러 온도가 뒤섞여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손끝은 이미 시렸다. 이마엔 열이 오르는데 등은 차가웠다.

그런데 그녀의 왼쪽, 강윤도가 앉은 자리만 텅 비어 있었다.

서온은 그 텅 빈 자리 쪽으로 자꾸 몸이 기울었다. 폭풍 속에서 유일하게 바람이 닿지 않는 처마 밑 같았다.

***

"제수씨, 온공방이라고 하셨죠."

디저트가 나올 무렵, 강윤성이 냅킨을 접으며 말을 꺼냈다. "목가 골목. 거기 재개발 얘기가 많던데. 부지에서 빠진 게 참 다행입니다. 어떻게 그게 됐을까 다들 궁금해하던데요."

식탁의 온도가 일제히 서온에게 쏠렸다. 강윤성의 미열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함정이었다. 계약 조건으로 부지에서 빠졌다는 사실—그걸 강태산 앞에서 들추면, 계약 결혼이 부동산 거래의 대가로 보이게 된다.

서온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회피하는 게 정답이라는 걸. 그런데 그녀는 손해 보는 협상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동시에—강윤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이 남자는 온도가 없다. 그러니 진심을 증명할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행동은 어떤가.

"제외된 게 아니라, 제가 넣지 말라고 했어요."

서온이 또박또박 말했다. 강윤성의 눈이 번뜩였다. 걸려들었다는 미열이 확 뜨거워졌다. "재개발 계획서에 온공방 필지가 원래 A블록으로 잡혀 있던 걸, 제가 서류를 봤거든요. A블록은 시행사가 이미 이중 매매를—"

"거기까지."

강윤도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식탁이 조용해졌다. 강윤도가 잔을 내려놓았다.

"A블록 이중 매매 건은 제 관할입니다, 형님. 제수씨가 아니라 제가 답하죠. 서류를 본 것도 접니다. 시행사 실사에서 걸러낸 건도 저고요. 궁금하신 게 있으면 저한테 물으세요. 아버지 앞에서."

서온은 그를 봤다.

그녀가 흘린 정보—A블록 이중 매매는 거짓이었다. 서온이 시험 삼아 던진 미끼였다. 강윤성이 그걸 물고 파고들면, 없는 정보를 쫓다 자멸할 판이었다. 그런데 강윤도는 그 미끼를 자기 입으로 삼켰다. 서온을 밀어내고, 화살을 통째로 자기 쪽으로 돌렸다. 서온이 판 함정에 서온 대신 자기가 걸어 들어간 것이다.

"내가 판 건데."

서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윤성의 미열이 헝클어졌다. 동생이 총대를 메자 표적을 잃은 것이다. 강태산은 쇳내 나는 눈으로 둘째 아들을 잠깐 봤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디저트나 들지."

강태산의 한마디로 자리가 정리됐다.

서온은 강윤도의 옆얼굴을 봤다. 여전히 온도는 없었다. 하지만 방금, 그는 아무것도 계산하지 않고 그녀 앞을 막아섰다. 온도로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데, 행동이 그녀보다 앞서 있었다.

서온의 심장이 또 어긋나게 뛰었다.

***

만찬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 강윤도가 복도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까."

"…네."

"위험한 얘기 흘리지 마요. 형님한테. 그 사람은 웃으면서 목을 조르는 사람입니다."

서온은 멈췄다. 그건 걱정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당신은 이런 판을 몰라요. 공방에서 나무만 깎던 사람이니까. 앞으로 저런 자리에선 입 다물고 내 뒤에 있어요."

말이 끝나기 전에 서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공방에서 나무만 깎던 사람.'

이 남자는 지금 그녀를 지키려고 한 말이었다. 서온은 그걸 알았다—온도가 아니라 정황으로. 그런데 그 서투른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평생 지켜온 것을 통째로 깎아내렸다.

"입 다물고 뒤에 있으라."

서온이 천천히 되뇌었다. "제가요? 방금 형님 미끼 물게 판 게 누군데. 나무만 깎던 사람 손에 당신 그룹 하나 홀랑 넘어가겠네요."

"그런 뜻이 아니라—"

"알아요. 걱정해줬다는 거. 근데요, 저는요."

서온이 한 발 물러서며 웃었다. 밀어낼 때 쓰는 웃음이었다. "나무만 깎던 사람이라 사람 마음도 나무 깎듯 봐요. 결이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옹이가 졌는지. 당신 결은 좀 이상하긴 하지만."

강윤도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얼굴로.

"먼저 들어갈게요. 담요는 잘 쓰고 있어요."

서온은 돌아섰다. 방문을 닫고 등을 기댔다. 심장이 뛰었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방금 식탁에서 자기 앞을 막아선 남자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평생 그녀는 모든 사람을 읽어왔다. 노부인의 슬픔도, 비서의 죄책감도, 형과 형수의 공모도. 손을 대기도 전에 온도가 먼저 그녀에게 왔다. 사람을 안다는 건 그녀에게 노력이 아니라 저주였다.

그런데 이 남자만은 노력해서 알아내야 했다.

말을 뜯어보고, 행동을 되짚고, 정지의 길이를 재고. 백지 위에 그녀가 직접 색을 칠해가며 이해해야 했다. 그건 공포였다—평생 의지해온 감각이 무용한 어둠. 동시에 그건 유혹이었다. 저주가 통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 그 앞에서만 서온은 아프지 않았고, 그 앞에서만 사람이 수수께끼였다.

"미치겠네."

서온은 담요를 끌어안았다. 미열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

***

그날 밤, 서온은 잠이 오지 않아 아래층 작업 공간으로 내려갔다.

이사 오면서 챙겨 온 목공 도구 몇 개를 저택 별채 한 켠에 풀어놓은 참이었다. 아버지가 쓰던 조각칼, 대패,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는 미완성 목함. 서온은 작은 벚나무 조각을 손에 쥐고 칼을 댔다. 나무는 온도가 없어서, 이것만이 그녀를 앓지 않게 했다.

대패 소리가 얇게 났다. 손끝의 시린 통증이 조금씩 가셨다. 나무 냄새가 처음으로 이 낯선 집을 견딜 만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온은 등 뒤의 인기척을 느꼈다.

온도는 없었다. 하지만 정황이 있었다. 공기가 미세하게 다르게 흘렀다. 서온은 손을 멈추지 않은 채 계속 나무를 깎았다.

강윤도였다. 문가에 서서, 그녀가 나무 깎는 걸 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온도가 없으니, 서 있던 시간의 무게조차 그녀는 읽을 수 없었다.

서온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강윤도의 어깨가 아주 살짝 움찔했다. 들킨 사람의 반응이었다.

"…불이 켜져 있길래."

"보러 온 거예요, 잠 안 온다 알려주러 온 거예요?"

"…내려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미 내려와 있었으니까. 하지만 서온은 그 거짓말을 온도로 잡을 수 없었다. 다만 어색하게 돌아서는 등을, 계단을 반쯤 내려오다 도로 올라가는 그 뒷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강윤도 씨."

그가 멈췄다.

"내일도 켜놓을게요, 불."

강윤도는 아무 말 없이 계단을 마저 올라갔다. 서온은 웃음이 났다. 이 서툰 남자를.

***

새벽이었다.

서온은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가, 거실 소파에 잠든 강윤도를 봤다.

서류 뭉치를 손에 쥔 채였다. A블록 실사 자료였다. 만찬에서 그녀가 던진 거짓 미끼—강윤성 앞에서 자기 관할이라 못 박은 그 건을, 밤새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없는 이중 매매를 확인하겠다고. 서온이 흘린 말 한마디를 진짜로 여기고, 그녀를 지키려고.

서온은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든 얼굴은 낮보다 어렸다. 미간의 힘이 풀리자, 표정으로 세상을 통제하던 남자가 사라지고 지친 사람 하나가 남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이 사람은 백지다.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손을 대도 그녀는 앓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안전이었다. 유일하게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

손끝이 그의 뺨에 닿았다.

그 순간—

뜨거웠다.

서온의 손끝을 타고, 백지였던 그에게서 온도가 새어 나왔다. 아주 잠깐, 아주 짧게. 여태 어떤 사람에게서도 읽어본 적 없을 만큼 뜨거운 온도가. 강윤성의 미열도, 노부인의 슬픔도 이렇게 뜨겁진 않았다. 봉인된 문틈으로 삐져나온 불길 같은—그녀를 향한, 감춰뒀던, 이름 붙일 수 없이 뜨거운 진심.

서온은 숨을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손끝이 타는 듯 아팠다. 시린 통증이 아니었다. 살이 눌어붙는 것 같은,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열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서온은 손을 떼려 했지만—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굳어갔다. 마비되어갔다.

계약서 제12조.

'진심의 온도차가 임계를 초과하면 감응 능력에 반동이 발생함을 감수한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그 조항이, 지금 그녀의 손끝에서 발동하고 있었다.

강윤도의 진심이 뜨거워질수록, 그것을 읽는 그녀의 손이—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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