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손을 놓지 못했다.

서온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 신경을 있는 대로 세워, 이번에는 손등을 지나 손목의 맥까지 짚었다. 사람의 온도는 맥을 따라 흐른다. 슬픔은 손목 안쪽에서 서늘하게 고이고, 애정은 손바닥 한가운데서 뜨겁게 번진다. 노부인은 손을 스치기만 해도 겨울이 밀려들었다. 아까 그 비서는 죄책감의 미열이 손가락 마디마다 축축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

없었다. 겨울도, 여름도, 미열도. 두 번째로 잡은 손에서도 손끝은 백지 위에 놓인 것처럼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서온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서온 씨?"

강윤도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목소리는 평평했다. 진심인지 예의인지, 판단할 근거가 아무것도 없었다. 평생 서온은 목소리보다 손끝을 믿어왔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만 온도는 못 하니까. 그 무기가, 지금 이 남자 앞에서 통째로 먹통이 됐다.

"악수가 길어서요."

서온은 손을 뺐다. 뺐다기보다, 놓는 척 잡은 손을 슬쩍 뒤집어 손톱 끝으로 그의 손목 안쪽을 한 번 더 눌렀다. 마지막 확인이었다. 그래도 없었다. 완벽한 무(無).

"손 차갑네요, 서온 씨."

"직업병이에요. 대패 오래 잡으면 손이 이래요."

거짓말이었다. 그의 온도를 못 읽어 시린 게 아니라, 방금까지 노부인과 비서를 읽은 대가로 손끝이 굳어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서온은 두 손을 앞치마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 남자, 왜 읽히지 않지.

죽은 사람도 잔열은 남는다. 나무조차 제 결에 사람 손길의 온기를 오래 붙든다. 그런데 눈앞에서 숨 쉬고 말하는 사람이 함처럼, 미완성 목함처럼 완전한 백지라니. 서온은 작업대 위, 천으로 덮어둔 아버지의 함을 힐끔 봤다. 저것도 아무 온도가 없었다. 열리지도 않고, 읽히지도 않고.

같은 종류의 침묵.

***

계약서가 온 건 나흘 뒤였다.

강윤도는 약속을 지켰다. 서온의 통장으로 '부채 정리 진행 확인서'가 아니라, 채권자 세 곳의 담당자 연락처가 먼저 왔다. 직접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서온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대출 원장을 한 줄씩 짚었다. 삼억 팔천. 이자까지. 셋 다 같은 말을 했다. "선우 쪽에서 전액 대납 조건으로 접촉이 들어왔습니다."

거짓이 아니었다.

"이걸 진짜 다 갚아준다고?"

도아가 계약서 사본을 넘기며 인상을 썼다. 서온의 공방 회생을 도맡은 친구였고, 이 계약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서온아. 삼억 팔천이 껌값인 인간이 왜 파산 직전 목공방 딸이랑 결혼을 해. 뭐가 있어. 무조건 뭐가 있어."

"있지. 후계 자리."

서온은 12개 조항을 손끝으로 훑었다. 종이는 종이라 온도가 없어 편했다. 사람 대신 글자만 읽으면 되니까.

제1조, 유효기간 2년. 제2조, 상호 사생활 불간섭. 제3조, 계약 사실 절대 비밀.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였다. 문제는 뒤였다.

"이거 봐. 제9조. 위약금."

서온이 손톱으로 한 줄을 짚었다.

"'계약 파기 시, 귀책 사유자가 상대에게 위약금 30억을 지급한다. 단 파기 원인이 서온 측에 있을 경우, 공방 부채 대납은 소급하여 무효로 한다.'"

도아의 눈이 커졌다.

"이거… 네가 못 버티고 뛰쳐나가면 빚 그대로 돌아온다는 거잖아. 갚아준 삼억 팔천이 다시 네 목에 걸리는 거야. 야, 이거 함정이야. 이 인간 사기꾼—"

"사기꾼은 아니야. 계약서를 이렇게 짠 놈이 사기꾼이지. 강윤도가 짠 게 아닐걸."

서온은 그 조항 아래, 작은 글씨로 삽입된 문구를 눈여겨봤다. 필체가 아니라 서체가 달랐다. 본문과 폰트가 미묘하게 어긋난 한 줄. 누가 나중에 끼워 넣었다는 뜻이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확인하면 돼."

***

선우 그룹 접견실은 온도가 없었다.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데 모두 억누르고 있어서였다. 서온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러 겹의 감정이 한꺼번에 손끝으로 밀려들었다. 왼쪽 벽 응접 소파에 앉은 남자에게서 서늘한 계산의 온도. 그 옆 여자에게선 세련된 미소 밑에 깔린 옅은 경멸. 문가 비서에게선 여전한 죄책감의 미열.

강윤도만 백지였다.

"어서 오세요."

서늘한 남자가 일어섰다. 강윤성. 강윤도의 이복형이라는 건 얼굴 윤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웃는 낯이 완벽했다. 손끝으로 잡히는 온도만 아니었다면 서온도 속았을, 서리 낀 유리 같은 웃음.

"동생 배필이 될 분이라기에 인사나 드리려고요."

"인사는 됐고요."

서온이 자리에 앉으며 계약서를 테이블에 펼쳤다. 강윤성의 온도가 한 톤 서늘해졌다. 예의 없는 상대를 만난 계산기의 소리.

"제9조요. 파기 원인이 제 쪽이면 부채 대납이 무효가 된다. 이 조항, 강윤도 씨가 넣으셨어요?"

강윤도가 서류를 내려다봤다. 그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온도는 못 읽어도 표정은 보였다. 처음 보는 조항이라는 얼굴이었다.

"…제가 검토한 초안에는 없던 문구입니다."

"그렇겠죠."

서온은 강윤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손끝에 잡히는 서늘함이 순간 날카롭게 곤두섰다. 들켰다는 자의 반응이었다.

"형님께서 넣으셨나 봐요. 동생 결혼이 걱정되셔서."

"법무팀이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넣은 표준 조항입니다. 계약 결혼이란 게, 아무래도 한쪽이 변심할 확률이 높으니까요. 재산 없는 쪽이."

재산 없는 쪽이. 서온을 겨눈 칼이었다. 도아가 옆에서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서온은 웃었다.

"좋아요. 그럼 그대로 두죠."

강윤성의 서늘함이 흔들렸다. 반발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받으니 불안한 것이다.

"대신 한 줄만 대칭으로 넣을게요."

서온은 펜을 들어, 제9조 아래 여백에 또박또박 적었다.

"'파기 원인이 강윤도 측에 있거나, 제3자의 개입으로 계약 목적이 훼손된 경우, 서온은 위약금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대납된 부채는 소급하여 유효로 확정한다.' 이렇게요."

접견실이 조용해졌다.

"제3자의 개입, 이라는 게—" 강윤성이 입을 열었다.

"형님 같은 분들 말이에요. 계약서에 몰래 한 줄 끼워 넣는."

서온은 펜을 내려놓고 강윤성을 똑바로 봤다. 그의 온도가 냉기 직전까지 서늘하게 떨어졌다. 살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여자를 밟고 싶다는, 아주 차가운 욕구.

"이대로면 형님이 저를 파탄내려고 뭔가를 흘리는 순간, 이 계약은 저한테 유리한 쪽으로 확정돼요. 빚은 갚아진 채로. 형님은 삼억 팔천을 버리시는 거고요. 그래도 넣으시겠어요, 아까 그 9조?"

강윤성이 웃었다. 웃음의 온도만 낮았다.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거절로 알아들을게요. 그럼 9조는 원래 초안대로 돌리고, 제 조항은 빼죠. 서로 깨끗하게."

강윤도의 백지 위로, 처음으로 무언가 지나갔다. 온도가 아니라—시선이었다. 그가 서온을 오래 봤다. 뭔가 말하려다 삼킨 얼굴로.

***

조항은 원래대로 돌아갔다. 강윤성이 심어둔 함정은 서온의 대칭 조항 앞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협상 테이블을 자본이 아니라 정보가 이긴 셈이었다.

두 사람만 남은 뒤, 강윤도가 정정된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

"열두 조항, 다시 읽으시죠. 직접 확인 안 하면 서명 안 한다고 하셨으니까."

서온은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4조 애정 표현 금지. 5조 대외 활동 시 부부로서 최소한의 예의. 그러다 마지막, 제12조에서 손끝이 멈췄다.

"'제12조. 양 당사자는 계약 존속 기간 중 상호 진심의 온도차가 임계를 초과할 경우, 서온의 감응 능력에 반동이 발생함을 인지하고 이를 감수한다.'"

서온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이건 뭐예요? 무슨 온도차, 무슨 반동."

"제가 넣었습니다." 강윤도가 담담하게 말했다. "서온 씨 능력을 봤으니까요. 능력엔 대가가 있는 것 같더군요. 계약 중에 문제가 생기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려고 넣었습니다. 관용적인 문구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관용적인 문구. 서온은 그 한 줄을 손끝으로 한 번 쓸었다. 종이라 온도가 없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임계를 초과할 온도차가 이 남자와 자기 사이에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애초에 강윤도는 백지였다. 온도차가 나려면 둘 다 온도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쪽이 무(無)라면—

"뭐, 안 생길 일이겠죠."

서온은 페이지를 넘겼다.

이 문장이 자신의 손을, 생업을, 나무 곁의 마지막 안식처를 앗아갈 방아쇠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

"서명하시죠."

강윤도가 펜을 건넸다. 그리고 먼저 자기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강, 윤, 도. 획이 반듯했다.

그가 펜을 쥐고 팔을 뻗는 순간, 재킷 소매가 손목까지 살짝 밀려 올라갔다. 왼쪽 손목 안쪽. 서온의 눈이 거기 붙들렸다.

오래된 화상 흉터였다. 손목 안쪽에서 팔뚝 방향으로, 불에 데어 살이 한 번 녹았다 아문 자국. 시간이 오래 지나 색은 옅어졌지만 결이 뒤틀린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무를 오래 다뤄온 서온은 안다. 데인 자국은 나이테처럼 남는다. 이건 최소 십 년 전, 어쩌면 그가 아직 소년이던 시절의 상처였다.

강윤도가 서온의 시선을 느끼고 손목을 슬쩍 내렸다. 소매가 다시 흉터를 덮었다. 그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몸에 밴 습관처럼 보였다. 감추는 데 익숙한 사람의 손짓.

"…화상이에요?"

"펜 여기 있습니다."

대답 대신 그가 펜을 다시 내밀었다. 서온은 더 묻지 않았다. 온도가 없는 남자가 유일하게 감추는 게 손목의 흉터라면, 그건 아마 그의 백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캐물을 자리가 아니었다.

서온은 계약서 아래 자기 이름을 적었다. 서, 온.

서명이 끝나자 강윤도가 4조를 손끝으로 가볍게 짚었다.

"4조. 애정 표현 금지. 이건 서온 씨를 위한 조항입니다. 계약이니까요."

"아, 그거요."

서온은 픽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무슨 강윤도 씨 좋아할 일 있겠어요. 얼굴 좀 잘생긴 거 빼면 재수 없고, 말투는 계약서 읽는 것 같고, 웃을 줄도 모르고. 애정 표현 금지 조항이 제일 지키기 쉬운 조항이겠네요."

농담이었다. 밀어내는 농담. 상대가 가까이 오려 하면 먼저 웃음으로 벽을 세우는 게 서온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해놓고도 뒷맛이 남았다.

읽히지 않는 남자. 좋아할 일 없다고 웃어넘겼는데, 좋아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온도를 못 읽으니까. 사람은 온도로 미리 알고 방어했는데, 이 남자는 방어할 근거가 없었다. 얼마나 다가오는지, 얼마나 진심인지, 손끝이 아무 경고도 주지 않았다.

강윤도는 서온의 농담에 웃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말했다.

"잘됐네요. 그럼 서로 편하겠군요."

편할 리가. 서온은 속으로 생각했다. 편한 건 온도를 아는 상대다. 이 남자는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

짐을 옮긴 건 그 주 주말이었다.

트럭에 실린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옷가지 몇 벌, 작업 공구, 그리고 천에 감싼 아버지의 미완성 목함. 온공방은 강윤도 쪽 관리인이 상주하며 지키기로 했다. 계약대로 재개발 부지에서 제외됐고, 부채도 정리됐다. 서온은 자물쇠를 세 번 확인하고서야 트럭에 올랐다.

선우가 저택은 언덕 위에 있었다. 대문을 지나 진입로만 이 분을 달렸다. 서온이 평생 만져온 나무의 온기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집이었다. 대리석은 차가웠고, 유리는 더 차가웠고, 사람들은 표정으로 온도를 지운 채 그녀를 맞았다. 서온은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아무것도 만지지 않으려 애썼다.

"2층 동쪽 끝 방입니다. 저는 서쪽 끝을 씁니다."

강윤도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복도 하나 사이 두고 최대한 멀리. 사생활 불간섭이 2조니까요."

"배려 고맙네요."

방은 넓고, 깨끗하고, 서늘했다. 서온은 목함을 창가 선반에 조심스레 올렸다. 이 낯선 집에서 유일하게 온도가 없어 마음 편한 물건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온도를 못 읽어 무서웠던 것들 사이에 이제 스스로 들어와 살게 됐다.

강윤도는 문가에 잠깐 서 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온도가 없으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서온은 알 수 없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인터폰 3번입니다. 그럼."

문이 닫혔다.

***

밤이 깊었다.

저택은 조용했다. 서온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이 멀었다. 온공방이었으면 나무 냄새와 대패 자국이 그녀를 재웠을 텐데, 여기는 아무 냄새도 없었다.

발소리가 들린 건 자정이 넘어서였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소리. 서온은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잠시. 그리고 무언가 바닥에 놓이는 부스럭 소리. 다시 멀어지는 발소리.

서온은 문을 열었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서쪽 끝, 강윤도의 방문이 막 닫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 앞—

담요가 한 장 개켜져 있었다.

두꺼운 겨울 담요였다. 이 집 사람이 서온의 방이 서늘하다는 걸 알고 가져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인터폰을 누른 적도 없고, 아무에게도 춥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서온은 담요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손끝이 멈췄다.

미열이었다. 아주 희미한, 잔불처럼 남은 온기. 사람의 체온이 담요에 옮아 남은 잔열이었다. 방금 누군가 이걸 품에 안고, 오래 들고 서 있다가 놓고 간 온도. 애정도 아니고 적의도 아닌, 뭐라 이름 붙일 수 없이 조심스러운 미열.

서온의 심장이 어긋나게 뛰었다.

담요를 가져다 놓은 건 강윤도였다. 이 복도에 그 말고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백지였다. 손을 두 번 잡았어도, 접견실에서 반나절을 마주 앉았어도, 단 한 톨의 온도도 새어 나오지 않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놓고 간 담요에서—온기가 났다.

사람에게선 읽지 못한 온도를, 사람이 남긴 사물에서 읽었다.

서온은 담요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손끝의 미열은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았다. 서쪽 끝, 굳게 닫힌 방문을 서온은 오래 바라봤다.

그가 남긴 온도인가.

아니면, 그 담요를 안고 있던 다른 누군가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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