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의 손등에 서온의 손가락이 닿는 순간, 겨울 우물물 같은 냉기가 손끝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이 목함, 손질만 해달라고 하셨죠."
서온은 벚나무 목함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결을 따라 천천히 쓸었다. 오래 쥐어 반들거리는 뚜껑 모서리에서, 슬픔이 얼음처럼 배어 나왔다. 뜨거움도 미열도 아니었다. 뼛속으로 스며드는 서늘함. 누군가를 잃은 사람만이 가진 온도였다.
"이 안에, 사진을 넣어두셨네요. 오래된 사람 거요."
노부인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떻게."
"경첩이 헐거워진 게 아니라, 매일 열어보셔서 닳은 거예요. 손질하면 다시 뻑뻑해질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자꾸 여시려면 이대로 두는 게 나아요."
노부인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서온은 목함을 조심히 내려놓고, 손끝을 주먹 안으로 감아쥐었다. 감각이 없었다. 남의 냉기를 읽은 대가로 제 손끝의 체온이 빠져나간 자리에, 시린 통증이 못처럼 박혔다. 반나절은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굳어 있을 손이었다.
"이대로 둘게요, 아가씨."
노부인이 목함을 다시 품에 안고 문을 나섰다. 종소리가 딸랑였다. 서온은 작업대에 손등을 대고, 굳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접었다. 이게 그녀가 세상을 읽는 방식이었다. 닿으면 알고, 알면 앓는다.
"손 또 얼었지."
작업실 안쪽 커튼을 걷으며 한도아가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왔다.
"괜히 손님 목함 만지지 말랬잖아. 네 손이 무슨 손난로야? 매번 남 슬픔 데우다가 네 손가락 다 망가지겠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만져봐야 알지."
"봐, 또 농담으로 넘긴다."
서온은 커피를 받아 손바닥을 감쌌다. 온기가 손금을 타고 겨우 스며들었다. 그 순간, 문틈으로 우편물 하나가 툭 떨어졌다. 두꺼운 봉투.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한도아가 먼저 집어 들었다. 봉투를 뜯는 손이 멈췄다.
"…온아."
"뭔데."
"부동산 경매 개시 결정. 온공방. 부동산 목록에… 여기 주소 있어."
서온은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받아 든 손이 조금 전보다 더 시렸다. 이번엔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 빚보증. 그거 다 정리된 줄 알았는데."
"이자가 붙었어. 원금은 갚아도 이자가… 온아, 이거 3주 남았어. 경매 3주."
공방 안 공기가 아교 냄새 속에서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온은 벽에 걸린 아버지의 대패를 올려다보았다. 서정목. 말수 적던 아버지는 감정을 입이 아니라 손으로 표현하던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나무를 깎았고, 기쁘면 딸의 머리에 대팻밥을 얹어주며 웃었다. 그 손이 남긴 공방이 3주 뒤면 남의 것이 된다.
서온은 작업대 안쪽 선반으로 걸어갔다. 헝겊에 싸인 물건 하나. 매듭을 풀자 미완성 목함이 나왔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것.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경첩도, 자물쇠도 없는데 열리지 않는 함이었다. 서온은 늘 하던 대로 손바닥을 함 위에 얹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슬픔도 온기도 냉기도. 나무는 원래 감정이 없어 그녀를 앓게 하지 않는다지만, 이 함은 달랐다. 무언가가 안에 있는데—분명히 아버지의 손길이 배어 있는데—온도가 잡히지 않았다. 손바닥을 아무리 눌러도 백지처럼 아무 말이 없었다.
"이 함만은 아버지가 못 만지게 했어. 완성하면 보여준다고. 그런데 완성 못 하고 가셨어."
"열어본 적은?"
"안 열려. 억지로 열면 부서질 것 같아서."
한도아가 서온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목소리를 낮췄다.
"온아. 나 어제 이상한 얘기 들었어. 선우 그룹 개발사가 이 목가 골목 통째로 매입하려 한대. 네 공방 경매도, 우연이 아닐 수도 있어."
"우연이든 아니든, 3주 안에 돈이 없으면 결과는 똑같아."
"…그래서 말인데."
한도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나한테 연락 온 데가 있어. 선우 그룹 둘째, 강윤도. 너한테 계약 결혼을 제안하고 싶다고."
서온은 대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었다.
"미친 거 아냐, 재벌이 왜 나랑."
"내 말이! 그래서 나도 거절하려고 했어. 계약 결혼이 무슨 드라마야? 서온, 그거 진짜 미친 짓이야. 너 남의 온도 하나에도 며칠씩 앓는 애야. 그런 집안 만찬 한 번 가면 온갖 인간들 적의랑 질투가 너 온몸을 난도질할 거라고. 파티장이 너한텐 지옥인 거 알잖아."
"알아."
"근데 왜 얼굴이 그래. 흔들리는 거야, 지금?"
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의 시린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손을, 미완성 목함 위에 다시 올렸다. 여전히 아무 온도도 없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편안했다. 남의 슬픔을 읽고 앓는 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무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공방을 지킬 방법이 그거뿐이라면."
"온아—"
문에 달린 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이 들어섰다. 앞선 남자는 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다. 표정이 없었다. 뒤따르는 남자는 서류가방을 든 수행비서였다. 서온은 그들이 문턱을 넘는 순간 자동으로 온도를 더듬었다.
비서에게서는 미열이 났다. 불안, 혹은 죄책감. 무언가를 감추는 사람의 온도.
앞선 남자에게서는—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 그 함처럼.
"서온 씨."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감정의 높낮이가 도려내진 목소리.
"강윤도입니다. 용건은 들으셨을 겁니다. 2년 계약 결혼. 조건은 온공방 부채 전액 대납. 경매는 취하시키고, 잔여 부채와 이자까지 선우 측이 정리합니다."
"싸게 부르시네요."
서온은 팔짱을 꼈다.
"제 결혼값이 겨우 빚 몇 억이에요?"
"부채 규모는 정확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삼억 이천. 이자 포함 삼억 팔천. 그리고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골목 재개발에서 온공방 부지는 제외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한도아가 서온의 팔을 잡았다. 그만두라는 신호였다. 서온은 그 손을 가만히 떼어냈다.
"제안이 너무 깔끔해서 무서운데요. 재벌가 후계자가 왜 파산 직전 목수랑 결혼을 해요. 진짜 이유가 뭐예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자에게 의결권 프리미엄을 준다. 창업주 유언 조항입니다. 형이 그 조항으로 저를 후계에서 밀어내려 합니다. 저는 방어책이 필요합니다. 감정 없는, 계약대로 움직이는 상대가."
"솔직하시네."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때 뒤에 선 비서가 끼어들었다.
"서온 씨, 오해 마십시오. 계약서 조항은 전적으로 서온 씨께 유리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위약금도 이사님 측에서 전부 부담하도록—"
서온은 그 순간, 두 걸음 다가가 비서의 손등에 제 손끝을 스쳤다. 서류를 건네는 척하며.
미열이 확 올라왔다. 죄책감의 온도. 그리고 그 아래 깔린 것—숨긴 거짓의 서늘한 결.
"이분, 지금 거짓말하시네요."
작업실이 얼어붙었다.
"계약서 조항이 저한테 유리하다고요? 이분 손끝이 지금 죄책감으로 미지근해요. 유리하지 않은 조항을 알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온도예요. 위약금 부담 조항, 진짜로 확인은 하셨어요? 아니면 그렇게 말하라고 지시받았어요?"
비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류가방을 쥔 손이 떨렸다.
"저, 저는—"
"됐어요. 손 떨리는 거 봐. 벌써 답 나왔네."
서온은 물러섰다. 손끝이 또 시렸다. 남의 미열을 읽은 대가로 감각이 한 겹 빠져나갔다. 그녀는 태연한 척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때, 강윤도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무표정하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서온을 보는 눈에, 지금까지 없던 무언가가 스쳤다. 그는 비서를 돌아보지도 않고 짧게 말했다.
"나가 있어."
"이사님—"
"나가."
비서가 서류가방을 안고 뒷걸음질로 나갔다. 종소리. 문이 닫혔다. 공방에는 강윤도와 서온, 그리고 눈치를 살피는 한도아만 남았다.
강윤도는 서온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서온은 온도로 읽으려 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백지. 이 남자는 화가 났는지, 놀랐는지, 관심이 생겼는지, 아무 단서도 흘리지 않았다.
"방금 그거, 어떻게 안 겁니까."
"눈치죠. 사람 손 떨리는 거 누가 못 봐요."
거짓말이었다. 서온은 웃으며 대패를 다시 올려다봤다. 능력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거짓말이군요."
강윤도가 말했다.
"방금 그 사람 손등을 만졌습니다. 서류를 건네지도 않았는데. 만지고, 정확히 짚어냈습니다. 눈치가 아니라 다른 겁니다."
"…"
"어떤 능력이든, 나는 상관없습니다."
그가 한 발 다가왔다.
"오히려 마음에 듭니다. 사람 속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계약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읽어낼 수 있겠죠. 그게 이 계약에 가장 필요한 신뢰입니다."
서온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사람 속을 읽는다. 이 남자는 몰랐다. 정작 자기 자신에게선 아무 온도도 나지 않는다는 걸. 서온이 지금 이 순간 그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는 걸.
두려움이 등줄기를 훑었다. 동시에, 그보다 낯선 무언가가 명치에서 뜨거워졌다. 평생 세상 모든 사람이 손끝에서 온도를 흘렸다. 슬픔도, 적의도, 사랑도, 다 알아버려서 아무도 그녀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남자만은 알 수 없었다. 노력해서 알아내야 하는 사람. 처음이었다.
"3주."
서온이 입을 열었다.
"경매까지 3주. 그 안에 부채 정리되는 거 확인시켜 주면, 계약합니다. 대신 조항은 제가 다시 읽어요. 아까 그 비서가 거짓말한 조항까지 전부.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말, 제 손으로 확인 안 하면 서명 안 해요."
"당연히 그래야죠."
강윤도가 손을 내밀었다.
"계약합시다, 서온 씨."
서온은 그 손을 내려다봤다. 크고, 마른 손. 왼쪽 소매 끝으로 흉터 같은 흔적이 살짝 비쳤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남의 손을 잡는 건 언제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상대의 온도가 확 밀려들 테고, 그만큼 제 손끝이 시릴 테니까.
숨을 참고, 서온은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손바닥이 맞닿았는데, 뜨거움도 서늘함도 미열도, 그 어떤 온도도 손끝에 잡히지 않았다. 방금 노부인의 슬픔에, 비서의 죄책감에 시리던 그 손이, 지금은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노부인의 함처럼. 아버지의 미완성 목함처럼. 완전한 백지.
서온의 심장이 한 박자 어긋나게 뛰었다. 손끝의 신경을 있는 대로 곤두세워도 잡히는 게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아무 온도도 읽지 못한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강윤도는 그녀의 얼굴이 굳는 걸 보며 담담히 손을 흔들었다. 계약이 성사됐다는 표정으로.
서온은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다시, 한 번 더.
이 남자, 왜 읽히지 않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