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볏짚 아래에서 새어 나온 울음은 사람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검신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떨림, 하연서의 나선 흉터를 뜨겁게 달구는 그 진동을 알아챌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하연서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설강의 눈이, 그 떨림을 감지한 것처럼 마구간 그림자 쪽으로 미끄러졌다가 돌아왔다.

하연서는 손끝의 저릿함을 삼켰다. 지금 검을 뽑으면 넷째 사형의 검로가 다시 손목을 타고 올라올 것이다. 그러면 이 늙은 잡역부는 확신할 것이다. 확신한 자는 죽이거나,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여야 했다.

"떠도는 검객이었습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름도 몰랐습니다. 재작년 겨울에 하동 어느 주막에서 사흘 붙어 지냈고, 밥값 대신 검을 몇 초식 배웠습니다. 발목을 끊고 목을 짚는 하단검이 신기해서 흉내만 냈을 뿐입니다."

설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의 흉터를 문지르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지로, 오래된 화상 자국 같은 그 흔적을 천천히 훑었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름도 몰랐다."

설강이 되뇌었다. 야유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소리였다.

"하동 주막. 사흘. 밥값 대신."

늙은이의 입가가 비틀렸다. 웃음은 아니었다.

"거짓말이 정교하구나. 딱 그만큼만 아는 놈처럼 말하는 것도. 삼십 년 전에 나도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는 법을 배웠지."

하연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자는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할 필요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진위를 가리려는 자의 눈이 아니라, 이미 답을 아는 자가 그 답을 상대의 눈에서 확인하려는 눈이었다.

설강이 몸을 돌렸다. 마구간 기둥에서 등을 뗐다.

"넉 달간 외출 금지다. 낙검곡 근처엔 얼씬도 마라. 밤에 담 넘는 놈은 잡히면 축출이 아니라 그날로 사라진다. 요즘은 그렇다."

그리고 어깨 너머로, 아주 낮게 덧붙였다.

"그 검, 볏짚 속에 오래 두지 마. 우는 검은… 주인을 부른다."

흙 밟는 소리가 멀어졌다. 하연서는 그 등이 담벼락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우는 검은 주인을 부른다. 그 말은 설강이 망자검의 울음을 안다는 뜻이었다. 검혼이 무엇인지, 이 검이 어떤 계보인지 아는 자였다. 삼십 년 넘게 못 봤다고 했다. 삼십 년 전이면 정사대전이었다.

하연서는 볏짚을 헤쳤다. 남빛 검집을 손에 쥐자 진동이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등에 감아 무명천으로 조이는 동안, 머릿속에서 저울이 돌아갔다.

'저자는 안다. 멸문의 밤을, 어쩌면 그 이전을. 죽여야 할 적인지, 캐내야 할 도구인지 아직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있었다. 설강은 표적이었다. 진실의 조각을 쥔 자였다. 하연서는 그 늙은 등을 눈에 새겼다. 발뒤꿈치에 무게를 남기는 걸음. 무인의 습관. 잡역부 행세를 하는 무인이 원수의 문파에서 삼십 년을 버텼다면, 그 이유가 곧 정보였다.

*

장로원 문서고. 그곳에 정사대전의 기록이 있다.

하연서가 얻은 건 장서각 하급 열람권뿐이었다. 하급 서고엔 무공 초식 요결과 문파 연혁 같은 공개된 것만 있었다. 진짜 기록—패검문 멸문의 명분과 전후 사정을 담은 문서는 상급 서고, 그 너머 금서고에 있을 것이다. 하급 열람권으로는 상급 서고 문턱도 밟지 못했다.

이틀 뒤, 밥그릇을 앞에 두고 하연서는 방법을 찾았다.

"임서! 여기 자리 비었다."

진유하가 손을 흔들었다. 나무 밥상 끝, 벽 쪽 구석. 늘 소외된 자들이 앉는 자리였고, 진유하는 늘 거기 있었다. 하연서는 그릇을 들고 그쪽으로 갔다.

"서열 떨어진 놈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냐."

옆에 앉은 곽대가 투덜댔다. 하연서에게 세 초식에 눕은 자였다. 진유하가 그의 그릇에 자기 몫의 나물을 덜어 주며 대꾸했다.

"떨어진 김에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지. 곽대 너, 어제 야간 순찰 서느라 저녁도 못 먹었잖아."

"누가 챙겨 달랬어."

곽대가 투덜대면서도 젓가락을 놀렸다. 하연서는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진유하는 손해 보는 걸 셈하지 못하는 자였다. 셋째 사형이 그랬다. 자기 밥을 막내에게 덜어 주고, 정작 자신은 물로 배를 채우던 사람.

하연서는 그 기억을 눌렀다. 지금 필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진유하."

"응?"

"넌 상급 서고 출입증 있지."

진유하가 젓가락을 멈췄다.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하연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흘 전, 진유하가 부상당한 동문을 부축해 의당으로 데려갔을 때, 의당 관리 무사가 고마움의 표시로 상급 서고 임시 열람증을 끊어 준 걸 봤다. 소외된 자를 챙기다 얻은 대가. 진유하는 그걸 자랑도 하지 않았다.

"어제 네가 서고 쪽에서 나오는 걸 봤어."

거짓말이었다. 매끄러운 거짓말.

"난 하급밖에 못 들어가. 무공 요결을 좀 더 보고 싶은데. 모용성이 대비전을 걸었잖아. 상급 서고에 검법 파훼 요결이 있다고 들었어."

진유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연서가 부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당연히 도와야지! 임시증이라 나랑 같이 들어가야 하지만. 모용성 그놈 콧대 꺾어야지. 언제 갈까?"

너무 쉬웠다. 저울이 소리 없이 기울었다.

'이자는 도구다. 상급 서고로 들어가는 문이고, 상급 서고에서 금서고로 가는 다리다.'

하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소등 후에."

그런데 진유하가 밥알을 씹으며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저울 위에 얹은 추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연서는 그 흔들림을 못 본 척했다. 손끝이 저릿했다. 넷째 사형의 검로를 부른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다.

*

밤. 하연서는 서고로 가기 전, 몸을 풀어야 했다.

검흔의 여파로 굳은 손목과 어긋난 기맥을 풀지 않으면 상급 서고에서 실수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후원 대나무 숲으로 갔다. 달빛이 대숲 사이로 갈라져 흘렀다.

망자검을 뽑았다. 검신이 낮게 울었다. 하연서는 넷째 사형의 낙영세를 천천히 되짚었다. 떨어지는 그림자처럼. 발목을 끊고. 목을 짚고.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손이 저절로 다음 검로로 넘어갔다. 대사형의 검. 멸문의 밤, 죽어 가며 전수한 그 검로였다. 하연서는 그걸 부른 적이 없었다. 검흔이, 검이, 스스로 그것을 끌어올렸다.

머릿속에서 그날 밤이 역류했다. 불타는 전각. 나선 검이 어깨를 가르던 감각. 대사형이 피를 토하며 검을 쥐여 주던 손. "패검문은 죄가 없다—"

숨이 막혔다. 검이 손을 이끌었다. 이건 하연서의 의지가 아니었다. 대사형의 팔이, 대사형의 살의가 하연서의 근골을 타고 흘렀다. 눈앞의 대나무가 적으로 보였다. 매화 문양을 단 자들로 보였다. 베어야 했다.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라. 그날 밤을 갚아라.'

그것은 하연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죽은 자의 목소리였다. 하연서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낯선 살의가 새어 나왔다. 손이 검을 치켜들었다. 이대로 휘두르면 이 검로는 완성될 것이다. 대사형의 검을 온전히 되살릴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하연서는 사라질 것이다.

'지금 검을 휘두르는 것이 나인가.'

물음이 번쩍 스쳤다. 스승이 남긴 경고. 검혼에 삼켜지는 순간의 물음.

하연서는 이를 악물었다. 어금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치켜든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이 아래로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 대사형의 팔은 아직 그날 밤에 있었다. 아직 베고 있었다.

"—아니야."

하연서는 목구멍을 쥐어짜 냈다. 자기 목소리로. 봉인한 감정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자기 목소리로.

"나는 살아 있다. 나는… 하연서다."

왼손이 검신을 붙잡았다. 날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흘렀다. 통증이, 산 자의 통증이 정신을 붙들었다. 하연서는 오른팔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근육이 찢어질 듯 저항했다. 검이 울부짖었다.

한 치. 또 한 치. 검끝이 내려왔다.

마침내 검이 땅을 향했다. 하연서는 무릎을 꺾고 검을 흙에 박았다. 손잡이를 두 손으로 짓눌러 못 박듯 고정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렸다.

억눌렀다. 살의를. 죽은 자의 팔을. 폭주하는 검을. 자기 손으로.

거친 숨이 대숲을 흔들었다. 하연서는 흙에 박힌 검을 붙든 채 한참을 웅크렸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피가 흙으로 스몄다.

이겼다. 이번엔.

그런데 다음엔.

*

"임서."

하연서는 몸이 굳었다. 대나무 뒤. 진유하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본 것인지. 그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금… 너 눈이."

진유하가 침을 삼켰다.

"네 눈이, 딴 사람 같았어. 시커멓게, 뭔가 다른 게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목소리도… 네 목소리가 아니었어."

하연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봉인이 아직 헐거웠다. 대사형의 감정이 완전히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날 밤의 기억이 눈꺼풀 안쪽에서 아직 타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서는 자기 뺨이 젖어 있는 걸 깨달았다.

눈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눈물. 감정을 봉인한 뒤로 흘린 적 없는 것. 죽은 자의 감정이 역류하며 하연서의 것이 아닌 슬픔을, 혹은 하연서가 삼 년간 얼려 둔 자기 슬픔을 함께 끌어올린 것이다. 무엇의 눈물인지 하연서 자신도 몰랐다.

하연서는 그걸 닦지도 못했다. 손이 검에 붙어 있었다.

진유하가 다가왔다. 하연서는 경계했다. 무슨 질문이 올까. 추궁이. 정체를 캐는 물음이. 저울이 돌기 시작했다. 이자를 어떻게 무마할지. 어떻게 이용할지. 어떻게—

진유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옆에 와서 앉았다. 흙바닥에. 하연서가 웅크린 그 옆, 팔 하나 닿을 거리에. 그리고 그냥 있었다. 대숲의 바람 소리와 하연서의 거친 숨소리 사이에, 아무 말 없이.

"…물."

한참 뒤 진유하가 허리춤 물통을 끌러 하연서 손 옆에 놓았다.

"손, 피난다. 나중에 의당 가자. 지금은… 그냥, 여기 있을게."

하연서는 물통을 보았다. 진유하의 굳은살 박인 손을 보았다. 셋째 사형의 손. 그 손이 지금 여기 있었다. 도구여야 할 손이. 이용해야 할 다리가.

봉인의 균열이 벌어졌다. 하연서가 삼 년간 죽은 것으로 여긴 그것—누군가의 온기를 그저 온기로 받고 싶은 마음이, 얼음장 밑에서 꿈틀거렸다.

'이자는 도구다.'

하연서는 되뇌었다. 상급 서고의 문. 금서고의 다리. 복수의 계단.

'이자는 도구다.'

그런데 되뇔수록 그 문장이 흐려졌다. 계산이 미끄러졌다. 저울이 흔들리다 멈췄다. 어느 접시가 무거운지, 하연서는 처음으로 셈할 수 없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번엔 검흔의 여파 때문이 아니었다.

하연서는 자각했다. 자신이 이 순간을 이용가치로 환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실패가, 어깨의 흉터보다 더 오래 아플 것이라는 것을.

바람이 대숲을 훑었다. 진유하는 여전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하연서가 숨을 고를 때까지, 곁을 지켰다.

이윽고 하연서는 검을 흙에서 뽑았다. 검신은 조용했다. 울음이 멎어 있었다. 왼손에 검을 감고, 오른손으로 물통을 들어 상처를 씻었다. 물이 붉게 흘렀다.

일어서려는데, 진유하가 하연서의 소매를 붙잡았다. 세게가 아니라, 가볍게. 놓칠까 두려운 것처럼.

그리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말했다.

"너, 방금 다른 사람 같았어."

하연서의 위장이, 삼 년간 한 번도 갈라진 적 없던 그 껍데기가, 처음으로 정면에서 금이 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숲 사이로 달빛이 갈라졌다. 하연서는 붙잡힌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뿌리치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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