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불길이 하늘을 삼켰다.

낙검곡의 전각이 무너지는 소리는 사람의 비명과 구분되지 않았다. 열두 살 하연서는 무너진 서까래 아래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재가 눈에 들어가 따가웠지만 손으로 비빌 수도 없었다. 손을 움직이면 죽는다. 그건 본능으로 알았다.

앞마당에서 사형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대사형 정운의 검이 두 동강 나 흙에 박혔다. 언제나 웃으며 하연서의 머리를 헝클던 손이 마당의 진흙을 움켜쥐었다가, 힘없이 펴졌다.

검은 무복의 무사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얼굴을 천으로 가린 자들. 그 한가운데 선 사내가 검을 털어 피를 뿌렸다.

"확실히 처리해. 씨를 남기지 마."

낮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사내가 검을 검집에 넣으려 소매를 걷었을 때, 화광에 그의 왼손목이 드러났다. 살갗에 새겨진 문양—검 한 자루를 산 모양으로 감싼 각인. 하연서는 그것을 보았다. 눈이 그것을 붙잡았다. 불타는 밤 속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것이 그 손목의 검 문양이었다.

기억은 그 순간에 못 박혔다.

"저기 하나 더 있다!"

무너진 서까래를 넘어온 무사가 하연서의 발목을 낚아챘다. 소년의 몸이 재 속으로 끌려 나왔다.

"애새끼구먼. 잘됐네, 손 안 대고—"

말이 끝나기 전에 하연서는 발버둥 쳐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삼류도 못 되는 발길질이었다. 무사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들었다.

하연서는 뒤로 기었다. 손바닥이 뜨거운 무언가에 닿았다. 검집. 스승의 검이 아니었다. 스승이 늘 벽에 걸어두고 아무에게도 잡지 말라 하던 그 검—검신이 밤보다 검은 망자검이었다. 스승의 시신이 그 검을 품에 안은 채 쓰러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이것을 지키려 한 것처럼.

"뽑아라."

목소리가 들렸다. 무사의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아니 검에서 울렸다. 여러 사람이 겹쳐 말하는 것 같은 소리.

무사의 검이 내리꽂혔다.

하연서는 망자검을 뽑았다.

검이 검집을 벗어나는 순간, 소년의 팔이 제 것이 아니게 움직였다. 팔꿈치가 돌고 손목이 꺾이며 검이 위로 솟구쳤다. 대사형 정운이 즐겨 쓰던 상단 올려베기. 하연서는 그 초식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몸이 알았다. 아니, 몸을 빌린 누군가가 알았다.

무사의 검이 두 조각 났다. 이어 그 팔목도.

"뭐, 뭐야 이 새—"

두 명이 더 달려들었다. 하연서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시야가 느려졌다. 왼쪽 무사의 발이 어디를 디딜지, 오른쪽 무사의 검이 어느 각도로 올지, 전부 미리 보였다. 죽은 자들이 그의 눈으로 대신 봐주고 있었다.

"셋째 사제, 왼쪽. 여섯째, 오른쪽 발목."

입에서 자기 것이 아닌 명령이 흘러나왔다. 몸이 그 명령대로 흘렀다. 발이 미끄러지듯 왼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류 무사의 방어를 검이 종잇장처럼 갈랐다. 회전. 오른쪽 무사의 발목 힘줄이 끊겼다. 놈이 무릎을 꿇는 순간 목이 떨어졌다.

세 명이 쓰러지는 데 열 호흡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발길질도 제대로 못 하던 소년이었다.

정적. 하연서는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방금 이 손을 움직인 것은 누구였나. 사형들의 목소리가 아직 귓속에서 웅웅거렸다.

*지금 검을 쥔 게 나인가, 죽은 정운 사형인가.*

그리고 대가가 왔다.

가슴 안쪽이 타들어 갔다. 불이 몸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났다. 하연서는 검을 놓치고 무릎을 꺾었다. 입에서 검붉은 것이 쏟아졌다. 각혈. 열두 살 소년의 몸에서 나온 피가 재 위에 검게 번졌다.

숨을 쉬려 할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긁혔다. 눈앞이 흐려지고 손발이 얼음처럼 식었다. 방금 태워버린 것이 자기 목숨의 일부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다만 알았다. 이 검을 쓰면 죽는다. 그런데도 살았다.

멀리서 발소리가 물러갔다. 학살자들은 소년 하나가 무사 셋을 벤 광경을 뒤로 남긴 채 이미 철수하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문파를 지우는 것이었지, 재 속에 숨은 아이 하나를 끝까지 쫓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하연서를 살렸다.

소년은 기어서 스승에게로 갔다.

스승의 얼굴은 평온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검을 품고 있었다. 하연서는 그 위로 엎어졌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올 만큼의 물기도 몸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밤새 곁을 지켰다.

동이 트고 나서야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재가 식은 낙검곡은 무덤보다 조용했다. 하연서는 하나하나 시신을 옮겼다. 대사형 정운. 둘째 사저. 셋째 사형. 여섯째. 열두 명의 형제와 스승. 흙을 파는 손톱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무덤 앞에 앉았을 때, 소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표정이 사라졌다.

"…사형들이 방금 도와줬어요."

죽은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산 사람 앞에서는 한 번도 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이 검이 사형들 목소리를 담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직 다 죽은 거 아니에요. 그렇죠?"

대답은 없었다. 바람이 재를 쓸고 지나갔다. 하연서는 망자검을 무릎에 얹고 검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검은 미지근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의 체온 같았다.

"우리 이름을요." 소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패검문이 악이었대요. 다들 그렇게 말해요. 사파가 대전을 일으켰고, 사람을 죽였고, 그래서 벌받은 거라고. 어젯밤에 저놈들이 그랬어요. '정의를 세운다'고."

주먹이 검자루를 쥐었다.

"거짓말이에요. 그게 정의면… 정의 같은 거 필요 없어요."

하연서는 무덤 앞에 이마를 댔다. 흙냄새와 탄내가 섞여 코를 찔렀다.

"이름을 되찾을게요. 누가 우리를 죽였는지 다 밝혀낼게요. 손목에 검 문양 있던 그놈. 그놈을 시킨 놈. 그놈들 위에 있는 진짜 놈까지. 전부. 제 손으로."

맹세는 짧았다. 열두 살이 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말이었다.

무덤 아래, 스승이 죽기 전 흙 속에 묻은 것이 있다는 걸 그때 하연서는 몰랐다. 스승의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던 이유를. 그 아래 무언가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언젠가 그것이 세상을 뒤집을 열쇠가 되리라는 것을.

소년은 알지 못한 채, 무덤에 마지막 절을 올렸다.

---

오 년이 흘렀다.

열일곱의 하연서가 산길을 내려갔다. 등에는 낡은 봇짐, 그 안에 검은 헝겊으로 감싼 망자검. 얼굴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의 것이었다. 눈빛만이 또래와 달랐다. 사람을 볼 때 그는 셋 중 하나로 분류했다. 적, 아군, 도구. 지난 오 년간 만난 모든 이가 그 셋 안에 들어갔다. 예외는 없었다.

품속에는 방문(榜文) 한 장이 있었다. 저잣거리 관문에 붙어 있던 것을 떼어 온 것이었다.

*태산검문, 외당 제자를 모집한다. 출신·문파 불문. 무재(武才) 있는 자는 누구든 시험할 것이니, 태산 본산으로 오라.*

정파 최대 문파. 무림맹의 기둥. 오 년 전 그 밤을 각본으로 짠 자들이 앉아 있는 심장부.

하연서는 방문을 접어 품에 넣었다. 적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그것이 진실을 캐낼 가장 빠른 길이었다. 어린애의 복수심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그는 다섯 해 동안 몸을 훈련했고, 정종심법의 겉모습을 흉내 내는 법을 익혔으며, 삼류 검사의 어수룩한 검법을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을 숨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망자검은 최후의 순간에만 쓴다. 쓸 때마다 목숨이 타니까. 그리고 쓸 때마다, 자기가 자기인지 확신할 수 없게 되니까.

태산 본산은 사흘을 걸어 도착했다. 산문(山門)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흰옷을 입은 제자들이 개미처럼 오르내렸다. 정의의 상징. 협의의 본가. 하연서는 그 현판을 올려다보며 속으로만 웃었다.

외당 접수처는 산문 아래 별채에 마련되어 있었다. 줄이 길었다. 하연서는 맨 뒤에 섰다. 앞에 선 소년들은 저마다 긴장한 얼굴로 손을 비볐다. 하연서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차례가 왔다.

접수 탁자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외당을 관리하는 장로인 듯했다. 붓과 명부가 놓여 있고, 노인은 안경 너머로 지원자를 하나하나 훑었다.

"이름."

하연서는 붓을 들었다. 준비해 둔 가짜 이름이 있었다. 흔하디흔한 성에, 눈에 띄지 않는 이름. 다섯 해 동안 수백 번 되뇐 이름이었다. 붓끝이 명부에 닿았다.

첫 획을 긋는 순간,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어디 출신인가."

"…떠돌이입니다. 정해진 문파는 없습니다."

목소리를 낮게, 어수룩하게. 완벽하게 연기했다.

노인의 붓이 자기 손 위에서 멈췄다. 안경 너머 눈이 하연서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떠돌이라. 나이가 몇인가."

"열일곱입니다."

"열일곱." 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명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아주 나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며칠 전에 맹주령이 내렸다네. 위에서 직접."

하연서의 붓끝이 명부 위에서 멈췄다.

"오 년 전에 정화된 그 사파 검문 말일세. 낙검곡. 거기 씨가 하나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돌아. 열댓 살 남짓한 아이였을 거라더군. 맹주께서 친히 명하셨지. '패검문 생존자를 반드시 찾아내라'고."

노인의 눈이 안경 위로 올라와, 하연서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자네, 어째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본 적 있나?"

붓끝에서 먹물 한 방울이 명부 위로 떨어졌다. 아직 쓰다 만 이름 위로, 검게 번져 갔다.

먹물이 번지는 것을 하연서는 보지 않았다. 노인의 눈만 보았다.

시간이 늘어졌다. 은빛으로 물들 뻔한 시야를 그는 억지로 눌렀다. 지금 검혼을 부르면 안 된다. 이 자리에서 검을 뽑는 순간, 그가 찾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영영 닫힌다. 다섯 해를 쌓은 계산이 붓 한 자루의 무게로 손끝에 매달렸다.

"글쎄요." 하연서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목소리에 어수룩한 웃음기를 얹었다. "저 같은 얼굴이 흔해서 그럴 겁니다. 마을에서도 다들 어디서 본 것 같다고들 했어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경 너머 시선이 하연서의 손목께로 흘렀다. 봇짐 끈을 쥔 손. 소매 아래로 아무 문양도 없는 맨살. 노인의 눈이 거기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손목을 봤다.'

하연서는 속으로만 그 사실을 새겼다. 이 노인은 학살자의 손목에 무엇이 새겨져 있었는지 안다. 검을 산으로 감싼 문양. 그 문양이 지원자 어딘가에 있는지 확인하려 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그날의 진실 한 조각을 쥔 자다. 적이거나, 적의 개이거나.

머릿속에서 분류가 끝났다. 적.

"이름을 마저 쓰게." 노인이 붓을 턱으로 가리켰다. "쓰다 만 이름은 명부에 올리지 않는 법이야."

하연서는 다시 붓을 놀렸다. 먹물이 번진 자리를 피해, 첫 획부터 새로 그었다. 손 떨림 하나 없이. 오 년간 되뇐 그 이름을 획 하나까지 정확하게.

*하연.*

성을 뗀 외자 이름. 진짜 이름의 첫 글자를 남겼다.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었다. 완벽하게 지워야 마땅한데, 그 한 글자만은 버리지 못했다. 죽은 자들이 부르던 이름의 흔적. 산 자에게 내주는 유일한 진심의 조각.

노인이 명부를 끌어당겨 이름을 확인했다. 붓을 놓았다.

"하연이라." 노인이 나직이 읊조렸다. "외자 이름은 사파 것들이 즐겨 쓰던 방식이지. 정파 문하는 대개 성과 항렬을 갖춰 쓰거든."

하연서의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것이 지나갔다. 겉으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떠돌이라 성이 없습니다. 부모 얼굴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노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나른한 어조 아래, 무언가를 저울에 올리고 눈금을 읽는 자의 냉정함이 배어 있었다. "됐네. 저 뒷마당에서 입문 시험을 치른다. 검을 잡을 줄 아는가?"

"조금 압니다. 마을 무관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정도입니다."

"어깨너머로." 노인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그럼 시험관 앞에서 딱 그만큼만 보여 주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하연서는 순간 노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 말은 지원자에게 하는 격려가 아니었다. 경고에 가까웠다. 마치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나는 안다, 그러니 잘 숨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인이 명부에 붉은 인장을 찍었다. 하연이라는 이름 옆에 접수 번호가 매겨졌다. 그리고 노인은 목패 하나를 탁자 위로 밀어 주었다. 외당 지원자임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뒷마당으로 가게. 오늘 시험관은 특별하니, 실수 없이 하고."

하연서는 목패를 집어 들었다. 돌아서려는데, 노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 꽂혔다.

"참, 하연."

멈춰 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맹주령 말일세. 생존자를 찾으면 상이 크다더군. 은자 천 냥에 무림맹 직속 자리까지. 그러니 요즘 산문 안이 눈이 많아. 다들 서로를 뜯어보고 있지. 누가 그 사파 잔당인지." 노인은 잠시 뜸을 들였다. "몸조심하게. 애먼 사람 하나 잘못 걸려들면… 진짜든 가짜든, 확인하는 방법이 곱지가 않아."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별채를 벗어나 뒷마당으로 향하는 회랑에 들어서고 나서야, 쥐고 있던 목패에 땀이 밴 것을 깨달았다.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천 냥의 상. 직속 자리.'

그 미끼가 뿌려진 산 전체가 지금 사냥터로 변해 있다는 뜻이었다. 여기 있는 흰옷들 하나하나가 그를 잡으면 신분이 오르는 사냥꾼이 될 수 있었다. 적진 한복판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더니, 적이 이미 그의 냄새를 맡고 그물을 쳐 둔 뒤였다.

계산이 틀렸나. 하연서는 회랑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토록 다급하게 생존자를 찾는다는 것은, 위에 앉은 자들이 겁을 먹었다는 뜻이다. 오 년 전 완벽하게 지웠다고 믿은 진실이, 어딘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그들도 안다는 뜻이다.

겁먹은 짐승은 실수를 한다. 그리고 실수하는 짐승일수록, 꼬리를 잡기 쉽다.

봇짐 속 망자검이 미지근하게 열을 냈다. 등에 닿은 검신의 온기가 마치 대답 같았다. 하연서는 회랑 끝,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서 검이 부딪는 소리, 사람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시험이 한창이었다.

그때, 회랑 반대편 그늘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허름한 잡역 무사 차림에 술 냄새를 풍기는 중년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 반쯤 풀린 눈. 손에는 빈 술병이 들려 있었다. 하연서는 그를 도구로도, 적으로도 분류하지 않았다. 분류할 가치조차 없는 배경. 그렇게 지나치려 했다.

사내가 하연서의 앞을 막았다. 정확히는, 하연서가 지나가려는 자리에 우연인 척 비틀거리며 멈춰 섰다.

"어이, 젊은이." 술 취한 목소리가 걸걸했다. "입문 시험 보러 왔나?"

하연서는 대답 없이 옆으로 비켜서려 했다.

그 순간, 사내의 눈이 하연서의 얼굴을 스쳤다. 반쯤 풀린 줄 알았던 눈동자가, 하연서와 마주친 찰나 얼음처럼 또렷해졌다. 취기가 순식간에 걷힌 얼굴. 그 낯빛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하얗게 질렸다.

들고 있던 술병이 사내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회랑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깨졌다.

사내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하연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입술이 달싹였다.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몇 번을 삼킨 끝에 겨우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놈."

하연서의 손이 봇짐 끈으로 향했다.

"네놈, 그 눈… 그 검을 쓰던 자와 똑같은—" 사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하연서를 향해 뻗어 왔다. "너를 어디서… 아니, 나는 안다. 나는 그날 밤 낙검곡에서, 분명—"

회랑 저편에서 시험관의 호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지원자, 하연! 하연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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