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낙검곡의 잿빛 하늘 아래, 부러진 검 깃발이 바람에 찢겨 펄럭였다.

수백의 병력. 그 앞에 선 사내의 얼굴을 본 순간, 하연서는 쥐고 있던 망자검이 손아귀 안에서 떨렸다.

"큰… 사형."

목소리가 갈라졌다. 진소하. 오 년 전 그 밤, 스승의 검을 등지고 화염 속으로 사라졌던 큰사형. 하연서는 그날 그의 시체를 찾아 사흘을 뒤졌고, 찾지 못한 채 이곳에 무덤 하나를 더 팠다. 이름만 새긴 빈 무덤을.

"살아… 있었습니까."

진소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 다가와 하연서의 손목을 붙잡았다. 낙인이 새겨진 그 손목을. 손끝이 뜨거웠다. 산 자의 온기였다.

"연서야. 네가 다 짊어졌구나. 혼자서."

그 한마디에 하연서는 무릎이 꺾였다. 오 년. 오 년 동안 그는 자신을 '유일한 생존자'라 믿었다. 산 자를 믿지 못한 것도, 죽은 자에게만 마음을 연 것도, 전부 그 믿음 위에 세운 성이었다. 그 성이 지금 발밑부터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왜 오 년을 숨어 계셨습니까. 나는, 나는 사형들 무덤 앞에서 매년…"

"숨을 수밖에 없었다."

진소하의 눈이 병력 뒤편의 폐허를 향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걸 저들이 알면, 진실을 아는 목격자가 남았다는 뜻이니까. 나는 흩어진 문도들을 모으느라 오 년을 썼다. 너를 부르지 못한 건… 미안하다. 어린 너까지 표적이 되게 할 순 없었어."

하연서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젖은 감각이 낯설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산 사람 앞에서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설강이 기침하며 몸을 일으켰다. 천공진인의 팔에 상처를 낸 대가로 갈비뼈가 나갔는지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진 대협… 오랜만이오. 그날, 내가 침묵했던 그 밤 이후로."

진소하의 시선이 잠시 서늘해졌다가 풀렸다.

"당신 죄는 당신이 갚으시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지."

멀리 능선 위, 백의를 걸친 형체가 나타났다. 천공진인이었다. 상처 입은 왼팔을 소매 안에 감춘 채, 그는 수백 병력과 부활한 패검문을 눈앞에 두고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패검문의 잔당이 이토록 남았을 줄이야."

그의 목소리는 산 아래까지 닿을 만큼 청명했다. 협박이 아니라 훈계에 가까운 어조.

"어리석은 자들. 너희가 병력을 모아 무엇을 하겠느냐. 천하는 이미 나의 이야기를 믿고 있다. 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진소하가 검을 뽑으려는 순간, 하연서가 그의 팔을 막았다.

"사형. 저자와는 지금 싸우면 안 됩니다."

"연서야."

"화경입니다. 방금 넷이 합격해서 겨우 팔에 상처 하나 냈습니다. 여기서 병력을 소모하면 저자가 원하는 대로예요. '사파 잔당이 정파를 습격했다', 그 각본에 우리가 제 발로 들어가는 겁니다."

진소하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하연서는 천공진인을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천공진인.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음은 당신이 정한 자리가 아니라 내가 정한 자리에서 봅시다."

천공진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흥미롭구나. 죽은 검을 쓰는 아이가."

그가 손을 들었다. 능선의 백의 무사들이 물러났다. 이 산에서 병력을 부딪치는 것은 천공진인에게도 실익이 없었다. 진실이 새어나가지 않는 한, 그는 언제든 시간을 자기편으로 둘 수 있었다.

하연서는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품속의 혈서를 손끝으로 눌렀다. 스승이 무덤 아래 오 년을 묻어둔 종이. 정사대전의 진실이 스승의 피로 적힌 그것을.

'당신이 정한 판이라고요.'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그 판을 내가 뒤집을 겁니다. 칼이 아니라, 이야기로.'

*

무림맹 대집회는 삼 년에 한 번, 태산 정상의 회맹대에서 열렸다. 천하 각 문파의 수장 수백이 모여 무림의 질서를 확인하는 자리. 정파의 위엄을 천하에 새기는 무대.

하연서는 그 무대의 계단을 홀로 걸어 올라갔다.

문지기 무사 둘이 창을 교차해 앞을 막았다.

"외당 견습이 어디를 함부로—"

"패검문의 하연서가 무림맹주께 아뢸 말씀이 있어 왔다."

교차한 창이 흔들렸다. 무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패, 패검문…?"

"비켜라."

하연서는 창날 사이로 어깨를 밀어 넣었다. 그 뒤로 설강이 절뚝이며 따라 올라왔다. 옆구리에 붕대를 감고, 술 냄새 대신 각오만 짙게 밴 얼굴로. 그는 어젯밤 하연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 년을 술로 도망친 겁쟁이가, 마지막으로 사람 노릇 한 번은 해야 죽어도 죽는 거라고.

집회대 안으로 발을 들이자, 수백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상석의 천공진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옆에 장무극이 앉아 있었다. 왼손목에 은팔찌를 채운 채로.

"하연 견습이 아닌가."

천공진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 신성한 자리에 무슨 일로 왔느냐. 물러가거라. 좋게 말할 때."

하연서는 회맹대 한복판에 섰다. 수백 명의 정파 수장들 한가운데. 사방이 적이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처음으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왼손목의 낙인을 좌중에 드러냈다.

"나는 패검문의 마지막 후계자, 하연서다."

집회장이 얼어붙었다. 이내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패검문이라니, 오 년 전에 멸문한—"

"사파의 잔당이 감히 회맹대에!"

칼자루로 손이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하연서는 그 소음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심장이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오 년 동안 삼켜온 말이 마침내 목을 뚫고 나온다는 감각이었다.

"멸문이 아니라 학살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산정의 바람을 갈랐다.

"오 년 전 낙검곡의 밤, 태산검문 장로 장무극이 이백여 문도를 도륙했다. 노인과 아이까지. 이유는 하나. 우리 패검문이 정사대전의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헛소리를!"

장무극이 벌떡 일어섰다. 목의 핏대가 불거졌다.

"근거가 어디 있느냐! 죽은 문파의 잔당이 무슨—"

"근거."

하연서는 품에서 혈서를 꺼내 펼쳤다. 낡은 종이 위, 검붉게 마른 글씨가 햇빛에 드러났다.

"패검문주 하공진의 혈서다. 정사대전은 천공진인이 짠 각본이며, 사파의 도발이라 알려진 학살은 정파 수뇌부의 자작극이었다는 사실이 여기 적혀 있다. 삼십 년 전, 무고한 마을 하나를 정파가 불사르고 그것을 사파의 소행으로 조작한 진실이."

설강이 앞으로 나섰다. 절뚝이는 다리로, 그러나 목소리만은 곧게.

"나는 그날 밤을 봤소. 나는 학살의 자리에 있었소."

그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수백의 얼굴을.

"태산검문 잡역 무사 설강이오. 삼십 년 전 정사대전에서 정파의 별동대에 있었고, 오 년 전 낙검곡에서 장무극의 검을 두 눈으로 봤소. 그 손목에… 죽인 자마다 새기던 검문(劍紋) 표식을. 지금도 그 자리에 있을 거요. 은팔찌 아래에."

시선이 일제히 장무극의 왼손목으로 쏠렸다.

장무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 그 동작 하나가 백 마디 자백보다 무거웠다.

"보, 보여줄 이유가 없다! 잡역 무사의 헛소리와 죽은 자의 종이 쪼가리로—"

"팔찌를 풀어라."

하연서가 한 걸음 다가섰다.

"떳떳하다면 풀어. 여기 천하의 수장들이 다 보고 있다."

장무극의 시선이 천공진인을 향해 흔들렸다. 도움을 청하는 눈빛. 그러나 천공진인은 미동도 없이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장무극의 무언가가 끊어졌다.

"내가… 내가 왜 혼자 뒤집어써야 하지?"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낙검곡은 내가 벴다. 인정하마! 하지만 명령을 내린 자는 따로 있다! 각본을 쓴 자는! 삼십 년 전 마을을 태우라 명한 자는! 서찰이 있다. 맹주가 내게 내린 밀지가, 태산 서고 세 번째 궤짝—"

"장 장로."

천공진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부드럽게.

"진정하시게.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세 번째 궤짝 밑바닥에! 붉은 인장이 찍힌—"

천공진인의 손가락이 찻잔 위에서 아주 짧게 튕겼다.

소리도 없었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쳤을 뿐인데, 장무극의 말이 목 안에서 끊겼다. 그는 자기 목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것이 배어 나왔다. 가느다란 기막의 실이 그의 후두를 관통해 있었다.

"큭… 커…"

"과로가 심하셨군."

천공진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 장로께서 헛것을 보고 실성하셨소. 안타까운 일이오."

장무극은 두 걸음 비틀거리다 회맹대 바닥에 쓰러졌다. 서고 세 번째 궤짝. 그 다섯 글자를 채 다 뱉지 못한 채. 아슬아슬하게, 진실은 그의 입술 끝에서 봉인당했다.

집회장이 침묵에 잠겼다.

그러나 이번의 침묵은 아까와 달랐다. 수백의 눈이 이제 하연서가 아니라 천공진인을 향하고 있었다. 무림의 정의라 믿었던 사내가, 방금 제 손발을 좌중 앞에서 소리 없이 죽인 것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맹주. 방금 그건—"

"장로가 실성해 검을 뽑으려 하기에."

"검을 뽑지 않았소이다. 우리 모두가 봤소."

하연서는 스러진 장무극을 내려다보았다. 오 년을 벼른 원수. 제 손으로 베겠다 다짐했던 그 손목의 주인. 그러나 그는 천공진인의 손가락 한 번에 도구처럼 버려졌다.

'네 검이 얼마나 많은 이를 죽였는지, 너 자신조차 각본 속 소모품이었구나.'

허무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 판을 짠 자의 얼굴이 이제야 온전히 드러났을 뿐이다.

*

집회장 뒤편, 진유하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뛰어들어 왔다. 산길을 달려온 듯 숨이 거칠었다.

"연서야!"

그는 하연서의 팔을 붙잡았다. 낡은 목검을 등에 멘 채. 이 년 전, 아니 몇 달 전 하연서에게 억지로 쥐여준 그 목검.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며 건넨 나무 검.

"괜찮은 거야? 여기, 여기 다 적인데 왜 혼자…"

하연서는 진유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 년 동안, 그에게 산 자는 셋 중 하나였다. 적, 아군, 혹은 도구. 진유하는 오래도록 마지막 칸에 놓여 있었다. 이용할 만한 순박한 외당 제자. 그렇게 저울질했다.

그런데 지금, 사방이 칼날인 이 회맹대에 제 발로 뛰어든 사람은 저 순박한 얼굴 하나뿐이었다.

"유하야."

하연서는 등에 멘 목검을 내려 손에 쥐었다. 며칠 전 살수의 검을 막아준 그 나무 검을.

"나는 산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었다. 죽은 사형들한테만 마음을 열고, 살아있는 너는 도구로만 봤어. 미안하다."

진유하의 눈이 커졌다.

"무슨… 그런 소릴—"

"들어. 한 번만 말할 거니까."

하연서는 나무 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밴 손때가 느껴졌다. 진유하가 밭일하던 손으로 깎아 만든 흔적.

"죽은 자의 검을 오 년을 빌려 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어갔어. 그런데 나를 살아있게 붙든 건 무덤 속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날 밤, 셋째 사형한테 몸을 빼앗겼을 때 나를 부른 건 너였어.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사람의 목소리였다고."

그는 진유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죽은 자 말고, 살아있는 너를 믿기로. 이 싸움이 끝나면… 아니, 끝나지 않아도. 나는 네 친구다, 진유하. 진짜로."

진유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이 자식… 이런 걸 왜 지금, 꼭 이런 데서…"

"미루면 못 할 것 같아서."

하연서는 처음으로 입가를 풀었다. 오 년 만에.

*

집회대 상석에서, 천공진인이 소맷자락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부드러운 미소가 아니었다. 얼굴 근육은 웃고 있는데 눈에는 온기가 한 점도 없었다. 정의의 화신이라는 가면이, 소리 없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삼십 년을 공들여 쌓은 질서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좌중 전체를 짓누르는 무게로.

"고작 종이 한 장과 겁쟁이의 넋두리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느냐."

그가 눈을 들었다. 회맹대에 모인 수백의 얼굴을 하나하나 쓸어보며.

"진실이라. 그래, 진실이 새어나갔다 치자. 하지만 이 자리에 진실을 들은 자가 몇이나 되나. 여기 모인 이백 명 남짓. 그것뿐이지."

산정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천공진인의 몸에서 뿜어나온 기운이 회맹대 전체를 유리종처럼 덮어씌웠다. 문파 수장들이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으냐."

가면이 완전히 떨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학살을 필요악이라 부르는 자의 진짜 얼굴이었다.

"이 자리의 목격자를 전부 없애면 될 일."

살기가 폭발했다. 회맹대의 돌바닥이 그 압력에 금이 가며 갈라졌다.

하연서는 목검을 고쳐 쥐고, 다른 손으로 등 뒤의 망자검을 뽑았다. 죽은 자의 검과 산 자의 나무 검. 두 자루를 양손에 든 채, 그는 화경의 살기 한복판에서 처음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큰사형! 문도들을!"

집회대 아래에서 진소하의 고함이 터졌다.

그러나 천공진인의 손이 이미 하연서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