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너, 패검문 사람이구나."

진유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견딜 수 없었다. 화부 처소의 부서진 빗장 사이로 새벽 바람이 밀려들어 볏짚을 흩었고, 그 아래에서 망자검이 나직이 울었다. 하연서는 대답 대신 검을 집었다. 옆구리를 부여잡은 설강이 벽에 등을 기댄 채 신음했다.

"진유하."

하연서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그렇게, 아무런 계산 없이 불렀다. 그 순간에도 머릿속 저울은 돌아가려 했다. 아군이냐 도구냐 위험이냐. 그러나 저울추가 어느 접시로도 내려가지 않았다.

"들었으면 됐다. 여긴 무너진다."

"뭐가 무너진다는—"

말이 끝나기 전에 담장 너머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도주한 심복이 장무극을 데려온 것이다. 하연서는 손수건을 낚아채 품에 쑤셔 넣었다. 반쯤 탄 논공행상 조각과 패검 인장 함이 옆구리에 묵직하게 닿았다.

"뒷담을 넘어. 설강 어른을 부축해라."

"너는?"

"금서고."

진유하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원본을—"

"부본만으론 안 돼. 놈들은 부본이 나오면 위조라고 지껄일 거다. 원본이어야 무림맹의 화압이 찍혀 있어. 그게 있어야 서사가 뒤집힌다."

*

장서각 금서고의 철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모용성이 파문을 각오하고 훔친 예비 인장 자국이 자물쇠 위에 선명했다. 그가 서편 세 번째 서가 뒤, 한 뼘 얇은 벽을 부수고 그 안의 봉장을 뒤지고 있었다.

"왔군, 임서. 아니지."

모용성이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의 손엔 유포로 싼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이거다. 논공행상 원본. 시월 열이틀. 정벌 완료는 열아흐레. 이레 앞서 상을 나눠 먹었어. 천공진인의 화압, 장무극의 서명. 우리 문파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거냐."

그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직계의 이름으로 살아온 자가, 그 이름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목소리였다.

"모용성. 뒤로."

하연서가 그를 밀쳐 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망자검이 몸부림쳤다. 검집을 뚫고 나올 듯 진동하며, 쇳소리도 아니고 사람 울음도 아닌 소리를 냈다. 이 년 전 태산검문 담벼락 명단 앞에서 처음 들었던 그 울음. 원인을 알 수 없어 그저 저주라 여겼던 그 소리.

철문 어귀에 장무극이 서 있었다.

검을 뽑았다. 나선무늬가 새겨진 검신이 서고의 등불을 되쏘았다. 그 검이 등장하자 망자검의 울음이 광기에 가까워졌다. 손잡이를 쥔 하연서의 손바닥으로 진동이 뼈까지 파고들었다. 왼손 흉터가 불에 지지는 듯 뜨거워졌고, 나선 흉터가 옷깃 아래에서 욱신거렸다.

확증이었다.

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낙검곡의 밤과 얽힌 자가 가까이 오면 검이 운다. 그 밤, 스승의 가슴을 관통하고 셋째 사매의 목을 벤 나선 검. 지금 하연서를 겨눈 바로 그 검.

"네가."

하연서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자기 것 같지 않았다.

"그날 밤, 그 검으로."

"패검문 잔당이 하나 남았다더니." 장무극이 혀를 찼다. 무성의하고 저돌적인 웃음이었다. "그날도 계집아이 하나가 개천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봤지. 죽었을 거라 여겼다. 실수였군. 실수는 지금 정정하마."

*

먼저 움직인 건 장무극이었다.

발도가 아니었다. 그가 이미 검을 뽑았으니 발도는 필요 없었다. 대신 나선으로 회전하는 찌르기가 곧장 하연서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서고의 좁은 통로에서 피할 곳은 없었다.

하연서는 청강검을 새긴 손목으로 검을 흘렸다. 이 년 전 첫 대련에서 훔친 정파의 기초 검법. 강철처럼 곧은 흘리기가 나선을 옆으로 튕겨 냈다. 서가의 책들이 검풍에 찢겨 종잇조각이 눈처럼 날렸다.

"호오." 장무극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우리 외당 검이잖나?"

"이것도 그렇다."

하연서의 검이 방향을 틀었다. 반시계로 도는 만천화우. 삼백 년간 시계 방향으로만 돌던 태산검문의 정통 초식을, 죽은 둘째 사형의 손목이 거꾸로 돌렸다. 무수한 검점이 장무극의 상반신을 뒤덮었다.

장무극이 뒷걸음질 쳤다. 처음으로.

"만천화우… 어디서 훔쳤지? 아니, 왜 거꾸로 돌아?"

대답 대신 검로가 다시 바뀌었다. 낙매십삼검. 모용성을 압도했던 그 검. 이어 청강, 하단검, 그리고 발도. 하연서는 이 년간 이 소굴에서 훔쳐 온 모든 검을 흉터에서 끄집어냈다. 검이 바뀔 때마다 그녀의 몸짓, 호흡, 무게중심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갈아 끼워졌다. 열 명의 검객이 한 몸에 깃든 것 같았다.

장무극의 방어가 가팔라졌다. 그의 무성의한 웃음이 지워졌다.

"뭐냐 이건. 검문 하나가 통째로 네 몸에—"

바로 그거였다. 통째로. 하연서의 몸속엔 멸문한 사형제 전원의 검이 있었다.

*

하연서는 나선 검을 정면으로 받아 냈다.

받는 순간, 흉터가 그 검로를 삼키기 시작했다. 벨수록 새기고, 새긴 만큼 되받는다. 나선의 회전 각도, 검을 밀어 넣는 순간의 손목 뒤틀림, 검심의 결.

그리고 그 결 안에서, 원치 않는 것이 흘러들어 왔다.

장무극의 마음. 그가 검을 밀어 넣을 때마다 살짝 늦어지는 반 박자. 완벽한 살수 뒤에 숨은 미세한 주저. 그의 검엔 죄책감의 결이 있었다. 잊으려 애써 온, 그러나 검이 기억하는.

"당신도."

하연서가 검을 맞댄 채 낮게 말했다.

"그날 밤을 아직도 꿈에서 보는군. 열두 살짜리 막내 사제가 문지방을 붙들고 살려 달라 빌던 것. 당신 검이 그 손목을 어떻게 잘랐는지. 검이 다 기억하고 있어. 당신 손이 지금도 그때보다 반 박자 늦잖아."

장무극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닥쳐."

"당신은 대의도 믿지 않아. 그냥 지위가 무서워서 검을 휘둘렀지. 그래서 잊으려는 거야. 그런데 못 잊는 거지. 검이 안 잊거든."

"닥치라고 했다!"

장무극의 검이 이성을 잃고 쏟아졌다. 반 박자의 주저가 사라진 대신, 검로가 거칠어졌다. 정확함을 잃었다.

그게 하연서가 노린 것이었다.

*

"모용성. 문서."

"쥐고 있다."

"뒷문. 지금."

모용성이 두루마리를 품에 안고 무너진 벽 틈으로 몸을 던졌다. 장무극의 심복이 막아섰지만, 모용성의 검이 그를 걷어 냈다. 직계의 검은 실전에선 무뎠지만, 두려움이 없었다. 그가 잃을 것이 이미 다 무너졌으니까.

"원본은 내가 지킨다! 너는 저놈을—"

말이 끝나기 전에 문서를 안은 모용성의 그림자가 새벽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연서 혼자였다. 좋았다.

거칠어진 장무극의 검이 크게 헛돌았다. 그 반 박자. 그 죄책감의 반 박자. 하연서는 방금 그의 몸에서 훔쳐 낸 나선 검로를, 그의 검으로, 그에게 되돌렸다.

같은 각도. 같은 회전. 그날 밤 스승의 가슴을 뚫었던 바로 그 검로가, 이번엔 반대 방향에서 장무극의 어깨로 파고들었다.

살이 갈라지는 소리.

장무극이 비틀거리며 서가에 부딪쳤다.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졌다. 검을 쥔 팔이 축 늘어졌다.

"내… 검로를…"

"패검문의 검으로 갚는 게 아니야." 하연서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 검으로 갚는 거야. 당신이 우릴 벤 그 검로로. 이게 인과다."

이 년이었다. 이름을 숨기고, 무능한 척 실력을 감추고, 밤마다 무덤 앞에서만 진심을 열며 견딘 이 년. 그 이 년의 첫 값이 지금 장무극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

그러나 대가는 곧바로 왔다.

나선 검로를 새긴 순간, 봉인이 다시 벌어졌다. 넷째 사형의 분노가 눈 뒤편에서 치솟았다. 죽여. 목을 베어. 그날의 빚을 지금 다 받아 내. 하연서의 검끝이 장무극의 목을 향해 떨렸다. 이게 자기 살의인지 죽은 자의 살의인지 경계가 흐려졌다.

'죽이면… 서사가 안 뒤집혀. 놈은 살려서 증인으로.'

머리로는 알았다. 그러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넷째 사형의 손이었다.

바로 그때.

"연서야!"

담장 너머에서 이름이 날아들었다. 진유하였다. 설강을 안전한 곳에 눕히고 소란을 좇아 되돌아온 것이다. 그가 부서진 문틈으로 뛰어들며 하연서의 팔을 붙들었다.

"너 지금, 눈이… 그거 네 눈이 아니야!"

그 손이었다. 진유하의 굳은살. 죽은 셋째 사형과 닮은 그 손. 그 온기가 팔뚝에 닿는 순간, 넷째 사형의 분노가 물러갔다. 하연서의 검끝이 목표에서 반 치 빗나갔다.

숨을 몰아쉬었다.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 반 치의 자비가, 그녀가 아직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

장무극이 어깨를 붙잡고 물러났다. 심복이 그를 부축했다. 승산이 없었다. 통로가 좁아 그의 저돌적인 검법은 오히려 독이 되었고, 어깨의 상처는 검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웃었다. 피 묻은 이를 드러내고.

"패검문의 유일한 생존자라…"

그가 뒷걸음으로 철문에 다다랐다.

"좋다. 이 소식을 문주께 전하는 것만으로 내 죄값은 상쇄되고도 남지. 죽이지 않아도 돼. 살려서, 천공진인께 직접 데려가마. 진인께서 널 어떻게 다루실지, 나도 궁금하거든."

철문이 닫혔다. 그의 발소리가 새벽 복도로 멀어졌다.

하연서는 검을 늘어뜨렸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봉인이 벌어진 자리로 죽은 자들의 감정이 아직도 새어 나왔고, 그것이 자기 슬픔인지 그들의 원한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왼손 흉터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원본은 모용성이 지켰다. 장무극에겐 부상을 새겼다. 검이 울며 지목한 원수를, 그의 검법으로 되돌려주었다. 이 년의 첫 값을 받았다.

그러나 정체는 이제 문주에게로 향한다. 천공진인에게로. 판이 뒤집히기 전에, 놈들이 먼저 그녀의 이름을 지워 버릴지도 몰랐다.

하연서가 고개를 돌렸다.

진유하가 여전히 그녀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그가 방금 본 것 — 죽은 자들의 검, 나선 검로에 흐르던 낯선 눈빛, 원수라 불린 자, 패검문이라는 세 글자. 그 모든 것이 그의 얼굴에 겹쳐 떠올라 있었다.

진유하의 손이 떨렸다. 목소리는 더 떨렸다.

"연서야, 너…"

그가 침을 삼켰다.

"정말 패검문이야?"

새벽의 마지막 어둠이 두 사람 사이에 고였다. 담장 너머 어딘가에서 장무극의 발소리가 문주의 처소로 향하고 있었고, 하연서의 손안에서 망자검이 아직도, 나직이,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하연서는 진유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거짓말을 지어낼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잘못 봤다고, 저건 다른 문파의 검이라고, 패검문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이 년간 매일 해 온 일이었다. 얼굴을 지우고, 목소리를 낮추고, 실력을 감추고, 자기 자신조차 없는 사람처럼 사는 일.

머릿속 저울이 다시 돌아가려 했다. 진유하를 어느 접시에 올릴 것인가. 진실을 알면 위험해질 자. 정파 제자. 내 이름을 무심코 흘릴 수 있는 자. 도구로도 쓸 수 없게 된 자.

그런데 저울추가 어디로도 기울지 않았다.

여덟 살 이후 처음이었다. 사람을 저울에 올리지 못한 것은.

"그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목이 메었다. 이 년 만에 처음으로 산 사람에게 자기 이름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나는 하연서. 패검문의 마지막 사람이야."

진유하가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그러나 손을 놓지는 않았다. 그의 눈이 붉어졌다.

"삼 년 전 개천가의 그 아이가… 정말 너였구나. 그때 내가 밥 한 덩이를 던져 주고… 겁이 나서 도망쳤던."

하연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기억이 이제야 진유하의 것과 맞물렸다. 진흙투성이로 물가에 엎어져 있던 아이. 어디선가 날아든 주먹밥 하나. 그때 하연서는 그것이 누구의 손인지 몰랐다. 삼 년간, 그 온기의 출처를 몰랐다.

"미안해." 진유하가 고개를 숙였다. "그때 널 데려갔어야 했는데. 무서워서, 사파 잔당일까 봐, 정파 사람들한테 혼날까 봐."

"네가 던진 주먹밥으로 나흘을 버텼어." 하연서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거 없었으면 관문까지 못 왔어. 미안할 거 없어."

진유하가 소매로 눈을 훔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지. 장무극이 문주한테 가고 있어. 그럼 관문이 봉쇄되고 문파 전체가 널 잡으러—"

*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규칙적이고 무거운 타종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진유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비상종이야. 침입자 발생. 문파 전체 경계령."

하연서는 이를 악물었다. 장무극이 문주에게 닿기도 전에, 아니 어쩌면 닿았기에 종이 울린 것이다. 이제 태산검문의 모든 문과 담이 봉쇄된다. 수백 명의 제자가 검을 들고 장서각으로 몰려올 것이다.

"모용성은 문서를 안고 어디로 갔지?"

"서고 뒷담이면… 후원 쪽으로 빠졌을 거야. 거긴 담이 낮아. 하지만 비상종이 울렸으면 그쪽 순찰도—"

말을 마치기 전에, 서고 밖 복도에서 여러 개의 발소리가 밀려왔다. 이번엔 심복이 아니었다. 검문 제자들의 절도 있는 발소리. 등불이 창틈으로 어른거렸다.

"장서각을 봉쇄하라! 명령서 원본이 탈취됐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남색 깃. 이 년 전 서열전 무렵, 하연서의 망자검이 처음으로 공명했던 그 장로. 패검문의 피를 마셨을 가능성이 있다고 검이 알려 준 자. 그가 직접 제자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하연서의 망자검이 또 한 번, 방향을 틀며 울었다. 장무극의 나선 검과는 다른 결로. 그러나 분명한 진동이었다. 저 장로 역시 낙검곡의 밤과 얽혀 있었다.

"연서야, 이쪽!"

진유하가 반대편 서가 사이로 하연서를 끌었다. 좁은 통로 끝에 채광창이 하나 있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크기.

"내가 시간을 끌게. 너는 저리로—"

"안 돼." 하연서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네가 여기서 잡히면 넌 공범이야. 파문이 아니라 목이 잘려. 정파는 진실을 숨기려면 제 편도 지운다고 했어."

"그럼 어떡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 년간 하연서는 진유하를 도구로 저울질했다. 상급 서고 열람증을 가진 자. 이용하고 버릴 자. 그런데 지금, 그를 살릴 방법을 계산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손익이 아니었다.

*

장로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패검문 잔당이 안에 있다! 산 채로 잡아라! 문주와 진인의 명이시다!"

하연서는 결정했다.

품에서 패검 인장 함을 꺼냈다. 검은 나무함. 패검문의 이름이 새겨진 유일한 물증. 그것을 진유하의 품에 밀어 넣었다.

"이걸 가지고 설강 어른한테 가. 설강 어른은 삼십 년 전 이대 제자였어. 이 인장과 부본, 그리고 모용성이 지킨 원본, 세 가지가 다 모이면 서사를 뒤집을 수 있어. 그때까지 넌 살아 있어야 해."

"너는!"

"내가 미끼가 될게. 저들이 노리는 건 나야. 내가 저 채광창으로 도망치는 척 소란을 내면 다 그쪽으로 몰려. 너는 반대편 뒷담으로 빠져."

진유하가 인장 함을 움켜쥐었다. 손이 떨렸다.

"이건 또… 나를 도구로 쓰는 거야? 아니면—"

하연서가 그의 말을 잘랐다. 이 년간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친구한테 목숨을 맡기는 거야."

진유하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가 인장 함을 가슴에 꼭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서 만나자. 반드시."

*

하연서는 채광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일부러 서가를 쓰러뜨리며. 요란한 소리가 서고를 울렸다.

"저기다! 채광창으로 도망친다!"

장로의 제자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렸다. 그 틈에 진유하의 그림자가 반대편 무너진 벽 틈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하연서는 채광창 아래에 몸을 숨긴 채 망자검을 고쳐 쥐었다. 왼손 흉터에서 피가 흘렀고, 봉인이 벌어진 자리로 죽은 자들의 감정이 아직도 새어 나왔다. 대사형의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울렸다. 다음엔 안 놔줄 거다. 더 열어. 더 새겨. 다 죽여.

이 년 동안 감춰 온 실력이 오늘 하룻밤에 전부 드러났다. 임서라는 이름은 이제 죽었다. 태산검문의 모든 검이 하연서 한 사람을 향해 겨눠졌다.

그러나 원본은 모용성이 지켰고, 인장은 진유하가 안고 달아났고, 증인 설강은 살아 있었다. 세 조각이 흩어졌으나 살아 있었다.

장로가 서가를 돌아 하연서 앞에 섰다. 그의 검이 등불 아래 드러났다. 그 순간, 망자검의 울음이 다시 광기로 치솟았다.

또 하나의 나선무늬였다.

장무극의 것과 똑같은.

하연서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선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날 밤 낙검곡에는, 같은 계보의 검이 여럿 있었다.

"천공진인의 검을 이었다는 건…"

하연서가 검을 겨누며 뒷걸음질 쳤다.

"당신, 몇 명이나 벴지? 그날 밤 낙검곡에서."

장로가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흥미롭군. 검이 울어? 죽은 것들의 원한을 몸에 지녔나 보구나. 마침 잘됐다. 이 검으로 네 사형들을 여럿 보냈으니, 오늘 너까지 보내면 대칭이 맞겠어."

그가 검을 내리찍는 순간, 하연서의 흉터 전체가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새길 검이 눈앞에 또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걸 새기면 봉인이 완전히 무너질지도 몰랐다. 넷째 사형의 분노, 대사형의 살의, 그 모두가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이다.

새기지 않으면 죽고, 새기면 하연서가 사라진다.

검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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