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낙검곡의 밤은 언제나 재의 냄새가 났다.

하연서는 스승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끝이 흙을 파고들 때마다 오 년 전 그날 밤의 비명이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흙을 걷어내자 검게 그을린 돌 상자가 드러났다. 봉인된 자물쇠에는 패검문의 검결이 새겨져 있었다. 세 화 전, 그는 이 앞에서 손을 떨며 돌아서야 했다. 구결을 몰랐으니까.

"이제는 알아."

망자검을 무릎 위에 눕혔다. 검신 위로 은빛 실선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 검혼의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다. 둘째 사형—패검문에서 검결의 열쇠를 지녔던 자. 그 목숨은 멸문의 밤에 끊겼고, 검혼이 되어 이 검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하연서는 그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더듬었다. 불길, 무너지는 대들보, 그리고 피를 토하며 되뇌던 한 문장.

『검은 원한이 아니라 진실을 겨눈다.』

하연서의 입술이 그 문장을 따라 움직였다. 자물쇠 위에서 검지를 놀려 검로를 그렸다. 되돌림. 패검문 검법의 심장. 원의 궤적을 마지막까지 긋는 순간—

딸깍.

돌 상자의 뚜껑이 스스로 열렸다. 그 안에 붉은 천으로 싸인 종이 뭉치가 있었다.

혈서였다.

손이 떨렸다. 이건 검혼을 부를 때의 떨림과 달랐다. 살아 있는 자의 떨림이었다. 그는 붉은 천을 풀었다. 스승의 필체. 마른 피로 쓴 글자가 종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삼십 년 전, 정사대전은 사파의 도발로 시작되지 않았다. 정파 수뇌부가 산서 마을 셋을 불태우고 그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씌웠다. 나는 그 증거를 손에 넣었기에, 우리 문파는 제거 대상이 되었다.』

한 줄 한 줄이 못처럼 눈을 파고들었다.

『각본을 짠 자는 무림맹의 얼굴이다. 천하가 정의의 화신이라 부르는 자. 천공진인.』

하연서의 손아귀에서 종이가 구겨졌다. 그는 급히 힘을 풀었다. 찢으면 안 된다. 이건 스승이 죽음으로 지킨 마지막 검이었다.

"천공진인."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자, 5화 밤 그 처소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눈이 떠올랐다. "그 검, 어디서 배웠나." 그때 그 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시험장에서 자신의 검로를 알아본 자. 낯익은 살기를 알아챈 자. 그건 우연이 아니었다.

"네가 각본을 썼구나. 처음부터."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지난 밤 검혼을 여섯 번 불렀던 대가로 몸속 생기가 아직 반쯤 비어 있었다. 그래도 그는 걸었다. 태산으로. 그 얼굴을 베러.

"어딜 가려고."

무덤 뒤편 바위 그늘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술내가 먼저 왔다. 설강이었다. 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그림자 하나가 더 있었다.

"연아! 여기 있었구나. 온 산을 다 뒤졌어."

진유하. 손에는 여전히 낡은 목검을 쥐고 있었다. 2화에서 하연서에게 건넸던,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던 그 목검이었다.

하연서는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돌리지 않았다.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돌아가. 여기서부터는 너희가 낄 자리가 아니다."

"그 손에 든 게 뭐냐."

설강의 목소리에서 술기운이 걷혔다. 그는 절뚝이며 다가와 혈서를 힐끗 보았다. 붉은 천, 마른 피의 글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늙었다.

"기어이 열었군. 낙검곡의 마지막 검을."

"천공진인이 각본의 주인이다. 스승님이 여기 다 남기셨어. 이제 됐어. 명분도 이유도 다 손에 있어."

"그래서? 혼자 태산으로 쳐들어가겠다고?" 설강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 얼굴이 지금 뭐 같은 줄 아나. 시체야. 어젯밤 여섯 번을 불렀지? 이 눈, 이 은빛. 검혼이 네 목까지 차올랐어."

하연서는 그 손을 뿌리쳤다.

"놔. 오 년을 이 하루를 위해 살았어."

"놓으면 죽어!"

설강이 소리쳤다. 늘 취해 흐물거리던 사내에게서 나온 고함이라 진유하까지 멈칫했다.

"혼자 죽으려 하지 마라. 그날 밤 네 스승도, 네 사형들도 그렇게 혼자 싸우다 죽었어. 진실은 한 자루 검으로 밝혀지는 게 아니야. 여럿이 증언해야 세상이 믿어. 네가 천공진인 앞에 혼자 시체가 되어 쓰러지면, 이 혈서는 그냥 사파 잔당의 헛소리가 돼. 알아듣나?"

하연서의 입이 열렸다가 다물렸다.

진유하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연아. 나 5화 그날 밤에 다 봤어. 네가 다른 사람 목소리로 나를 벨 뻔했던 거. 네가 '연아'라는 내 부름에 겨우 멈췄던 거. 그때 알았어. 너 혼자 뭘 짊어지고 있는지 다는 몰라도, 그게 너를 잡아먹고 있다는 건 알아."

그는 목검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이거, 내가 준 거잖아. 진짜 친구가 되고 싶다고. 친구는 혼자 죽으라고 등 떠미는 사람이 아니야. 같이 가는 사람이야."

하연서는 그 낡은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어젯밤 검혼에 잡아먹히려던 순간, 자아를 붙잡아준 것이 바로 저 목검의 감촉이었다. 죽은 자의 검이 아니라, 산 자가 쥐여준 나무 조각이.

목이 뻑뻑했다. 그는 오래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사람을 도구로만 봐 왔어. 너희도 그랬다."

"안다." 설강이 짧게 답했다. "그런 놈이 지금 그 말을 하고 있다는 게 답이야."

바로 그때, 협곡 입구 쪽에서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여럿 겹쳐 들려왔다. 하연서의 귀가 먼저 반응했다. 발소리 여덟. 아니, 열. 훈련된 자들의 발걸음이었다.

"왔군." 설강이 허리춤에서 낡은 검을 뽑았다. "천공진인이 널 그냥 둘 리 없지. 시험장에서 살기를 알아챈 그날부터 넌 지워야 할 이름이었어."

검은 무복의 사내들이 그림자 사이로 미끄러져 나왔다. 가슴에 무림맹의 인장. 앞선 자가 하연서가 손에 쥔 붉은 천을 보고 눈빛이 굳었다.

"그 문서, 넘겨라. 그러면 편히 죽여주마."

"편히?" 진유하가 목검을 고쳐 쥐며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셋인데."

"셋이든 열이든 결과는 같다."

정예들이 부챗살처럼 퍼졌다. 하연서는 혈서를 품속 깊이 밀어넣고 망자검을 뽑았다. 검신이 우웅 울었다.

"진유하, 설강. 등을 맞춰. 되돌림 진세를 짤 거야. 내가 중심, 너희가 양익. 검혼은 꼭 필요할 때만 부른다."

"진세 이름이 되돌림이면, 어떻게 움직이나." 모용성의 목소리였다. 협곡 위 바위에서 뛰어내린 그가 검을 뽑으며 착지했다. "설명은 짧게. 놈들이 온다."

하연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가 왜 여기 있지."

"어젯밤 네 손목의 낙인을 봤으니까. 그래서 문서고를 뒤졌다." 모용성은 짧게 끊어 말했다. 눈은 이미 적을 향해 있었다. "삼십 년 전 산서 화재 기록. 우리 문파 장부에 지워진 페이지가 있더군. 지워진 자리에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마을 셋. 그 위에 찍힌 결재 인장은—맹주의 것이었다."

그가 검끝을 적들에게 겨눴다.

"내 가문의 이름으로 지어진 거짓이면, 내 검으로 되돌린다. 뒷말은 나중에."

정예들이 쏟아졌다. 하연서가 진세의 중심에서 소리쳤다.

"지금!"

세 개의 검이 동시에 원을 그렸다. 진유하가 왼쪽에서 서툴지만 우직하게 검격을 흘려냈고, 모용성이 오른쪽에서 태산검문 정종 검법으로 두 명을 밀어냈다. 하연서의 되돌림 검로가 그 사이를 꿰뚫었다. 적의 힘을 되받아 되돌리는 궤적—찌른 검이 제 주인의 가슴으로 돌아갔다.

"컥—"

앞선 자가 자기 검에 관통당해 무릎을 꿇었다.

넷이 남았다. 하연서는 이를 악물고 망자검에 손을 얹었다.

"넷째 사형, 힘을 빌려주십시오. 딱 한 번만."

은빛 실선이 검을 타고 팔로 번졌다. 순간 그의 검격이 배로 빨라졌다. 검혼의 절기가 몸을 관통했다. 대가로 뼛속 생기가 또 한 줌 타들어갔다. 두 명이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연아, 왼쪽!"

진유하의 외침에 하연서가 몸을 틀었다. 목검이 파고들어 적의 검을 쳐올렸고, 그 틈에 모용성의 검강이 마지막 둘을 갈랐다.

협곡에 다시 재의 냄새와 피가 뒤섞였다. 정예 열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하연서는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눈가의 은빛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진유하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봤지? 혼자 아니잖아."

"…봤다."

설강이 시체들의 인장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무림맹 직속 살수대. 이걸 보낼 수 있는 건 맹주뿐이야. 이제 부인 못 한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협곡 안쪽, 스승의 무덤 방향에서 발소리 하나가 걸어 나왔다. 딱 한 사람. 서두르지도, 숨기지도 않는 걸음. 백의(白衣)가 달빛에 시렸다.

천공진인이었다.

네 사람의 몸이 얼어붙었다. 방금 열을 상대한 것보다 더한 무게가 협곡을 짓눌렀다. 화경. 진짜 화경의 기막이었다.

"수고들 했군." 그가 쓰러진 살수들을 훑어보았다. 안타까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이 아이들은 원래 여기서 죽을 예정이었다. 자네들에게 죽든 내게 죽든,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그만이지."

하연서가 몸을 일으켜 그의 앞을 막아섰다. 품속의 혈서를 움켜쥐고.

"이걸 천하에 알릴 거다. 낙검곡의 진실을. 네 각본을."

천공진인의 시선이 그 붉은 천에 닿았다. 그는 웃지 않았다. 웃음보다 더 서늘한 무표정이었다.

"자네는 하나를 모르는군."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혈서 하나로 세상이 뒤집힌다면, 그건 애초에 각본이라 부를 것도 아니지. 무림맹 문서고의 삼십 년 기록은 전부 내 손으로 다시 쓸 수 있다. 산서의 화재도, 패검문의 죄상도, 필요하면 내일 아침에 새 판본이 나온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이야기를 믿어. 그게 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면 더더욱."

모용성의 눈썹이 꿈틀했다. 지워진 장부 페이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자는 이미 여러 번 그렇게 해왔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천공진인이 소맷자락에서 검을 뽑았다. 검신에 검강이 어리는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세상에 나가선 안 돼. 여기서 자네들 넷과 함께 묻힌다."

그의 검끝이 하연서의 심장을 겨눴다.

"패검문 마지막 후예. 이번엔 내가 직접 끝내주지."

검끝에서 뻗어 나온 검강이 대기를 갈랐다. 소리보다 바람이 먼저 왔다. 하연서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반쯤 비어버린 단전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연아!"

진유하가 몸을 던졌다. 낡은 목검이 하연서의 앞을 가로질렀다. 검강과 나무가 부딪친 순간, 목검은 종잇장처럼 쪼개졌다. 하지만 그 찰나의 어긋남이 검강의 궤도를 손톱만큼 비틀었다. 하연서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간 검강이 뒤편 바위를 두부처럼 갈랐다.

부러진 목검이 진유하의 손에서 튕겨 나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하연서의 시선이 그 조각에 박혔다. 2화의 그 목검. 어젯밤 자아를 붙잡아준 나무 조각. 그것이 지금 그를 살리려 부서졌다.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 그건 복수심도, 검혼의 잠식도 아니었다. 오 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것이 녹아 넘치는 감각이었다.

"…네가 부서지면서까지."

"괜찮아." 진유하가 이를 악물고 웃었다. 손등이 검강의 여파에 찢겨 피가 흘렀다. "친구잖아."

천공진인이 검을 다시 세웠다. 흥미가 스친 눈빛이었다.

"패검문 후예가 정파 제자에게 목숨을 빚지다니. 우습군. 삼십 년 전 그 각본이 없었다면 자네들은 서로를 죽였을 사이인데."

"그 각본을 이제 찢을 거다."

하연서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는 망자검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다. 검신이 낮게 울었다. 은빛 실선이 이번엔 손잡이에서 시작해 팔목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넷째 사형만으론 안 된다. 전부 부른다."

"연아, 안 돼!" 설강이 소리쳤다. "지금 그걸 쓰면 네가 먼저 죽어! 저건 화경이야, 검혼 셋으로도 못 이겨!"

"안다."

하연서의 목소리가 두 겹으로 갈라졌다. 자신의 목소리와, 죽은 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은빛이 두 눈을 뒤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 쓰는 게 아니야."

그가 검을 옆으로 눕혔다. 검신을 따라 흐르던 은빛이 갈라지며 세 갈래로 뻗어 나갔다. 하나는 진유하의 부러진 목검 조각으로, 하나는 설강의 낡은 검으로, 하나는 모용성의 검으로.

"둘째 사형이 남긴 진세다. 되돌림 합격. 혼자선 못 짜. 넷이라야 완성된다."

모용성의 검이 은빛에 물들자 그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그의 검로에 낯선 궤적이 얹혔다. 사파의 검법. 정종만 익혀온 그의 몸이 거부감에 떨었다.

"이건—"

"거부하지 마." 하연서가 낮게 말했다. "정사(正邪)를 나눈 게 저놈의 각본이었잖아.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선을 지워."

천공진인의 무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검혼을 나눈다고? 산 자에게? 그건 패검문 비전에도 없는—"

"없었지." 하연서가 검을 들어올렸다. 눈물이 은빛 눈가를 타고 흘렀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죽은 자만 믿었던 내가, 산 자를 믿은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야 쓸 수 있게 된 거다."

넷의 검이 동시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뻗어 나온 은빛 궤적이 천공진인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완성했다. 되돌림. 상대의 힘을 되받아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검로가, 이번엔 화경의 기막 전체를 겨눴다.

천공진인이 검을 휘둘렀다. 협곡을 통째로 무너뜨릴 검강이 원의 중심에서 폭발했다.

원이 그것을 받아 돌렸다.

콰아아앙—

빛과 흙과 재가 하늘로 치솟았다. 네 사람은 진세의 반동에 뒤로 튕겨 나갔다. 하연서는 무덤 앞까지 밀려나 쓰러졌다.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검혼 셋을 동시에 부른 대가가 뼈를 태우고 있었다. 은빛이 눈을 넘어 얼굴 전체로 번지려 했다.

"연아! 정신 차려!" 진유하가 그를 흔들었다.

하연서는 흐릿한 눈으로 먼지 너머를 보았다. 되돌림이 통했다면—

먼지가 걷혔다.

천공진인은 서 있었다. 백의 자락이 반쯤 찢겨 나가고, 왼팔이 축 늘어져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이마에 핏방울이 맺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화경은 화경이었다.

"흥미롭군." 그가 늘어진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삼십 년 만에 처음 다친 자의 표정이었다. "정말로 검혼을 나눴어. 그것도 정파 제자와 사파 검법을 섞어서. 이 판을 짠 게 삼십 년인데, 이런 변수는 계산에 없었다."

그가 오른손만으로 검을 다시 세웠다.

"하지만 자네는 방금 마지막 힘을 다 썼지. 이 눈, 이 피. 검혼이 자네를 삼키기 직전이야. 나는 팔 하나 잃었을 뿐이고."

정확한 지적이었다. 하연서의 몸은 더 이상 검혼을 감당하지 못했다. 넷째 사형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대로 한 번만 더 부르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건 하연서가 아닐 터였다.

"연아, 검을 놔." 설강이 다가와 그의 손을 검에서 떼어내려 했다. "여기까지야. 우린 놈에게 상처를 냈고, 혈서는 살아 있어. 물러나서 다시—"

"물러나게 두지 않지."

천공진인이 지면을 박찼다. 남은 오른팔에 온 검강을 실은 일격이 하연서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졌다. 설강이 그 앞을 막아섰고, 모용성과 진유하가 몸을 던졌지만—화경의 속도 앞에서 셋은 너무 느렸다.

바로 그때.

협곡 입구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뒤이어 수십 개의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천공진인을 향해 쏟아졌다. 그가 검을 틀어 화살을 쳐내는 사이, 협곡 위 능선을 따라 횃불이 줄지어 타올랐다.

수백 명이었다. 무림맹의 인장이 아니었다. 낯선 깃발. 검은 바탕에 부러진 검 한 자루가 그려진 기치.

하연서의 흐릿한 눈이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심장이 얼어붙었다.

멸문했을 터였다. 오 년 전 그날 밤에, 자신을 제외하고 전부.

능선 위, 횃불을 등지고 선 한 사람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목소리가 협곡을 타고 내려왔다.

"천공진인. 오랜만이오. 낙검곡의 밤 이후로."

하연서의 입술이 떨렸다.

"…큰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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