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역시 여기 잔당이 있었군."

앞선 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연서는 볏짚 더미로 손을 뻗었다.

"움직이지 마."

칼 넷이 동시에 뽑혔다. 좁은 화부 처소 안에서 쇳소리가 부딪쳐 울렸다. 하연서의 손이 볏짚 아래를 파고들어 검자루를 쥐었다. 손잡이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망자검의 울음이 손목의 나선 흉터를 타고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 나선 검을 알아본 떨림이었다.

"둘째, 뒤로." 앞선 심복이 턱짓했다. "이 화부 늙은이가 방패로 못 서게 돌아 들어."

늦었다.

설강이 먼저 움직였다.

삼십 년을 술독에 절인 몸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하연서의 앞을 막아서는 동작에는 지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태산검문 이대 제자였던 자의 발놀림. 뒤에서 파고들던 심복의 칼끝을 설강이 맨손으로 쳐냈다. 살점이 갈라지고 피가 뿌려졌다.

"연서야, 뒤로—"

칼이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설강의 몸이 접혔다. 그러나 그는 쓰러지면서도 파고든 칼을 끌어안아 자기 몸에 박아 두었다. 심복이 칼을 뽑으려 힘을 주는 동안, 그 짧은 틈 동안, 하연서를 향한 다른 칼 두 자루의 각이 어긋났다.

"이봐라 이 미친 늙은이가—"

하연서는 그 틈을 보았다.

봤다기보다, 몸이 먼저 그 틈으로 흘러 들어갔다.

세 초식. 곽대를 눕혔던 낙영세. 넷째 사형의 검로가 손끝에서 저절로 피어났다. 떨어지는 낙엽처럼 상대의 시야 밑으로 파고들어 손목을 긋는 검. 앞선 심복의 팔뚝이 그어지고 칼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넷이었다. 낙영세 하나로는 부족했다.

바닥에 엎어진 설강이 피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열지 마! 검을— 검을 다 열면 넌 삼켜져! 그날 밤처럼—"

하연서는 그 말을 들었다. 들으면서도, 손이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설강의 옆구리에서 피가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삼십 년 전 협곡 입구에서 도망치는 자신을 보고도 소리치지 않았다. 그 침묵의 죄를 지고 살다가, 오늘 자기 몸으로 칼을 받아 그 죄를 갚으려 하고 있다.

'이 사람을 여기서 죽게 두면.'

저울이 고장 났다. 적과 도구로 세상을 가르던 저울추가, 설강이라는 이름 위에서 다시 한번 무너져 내렸다.

하연서는 봉인을 열었다.

전부.

*

검흔이 열리는 순간은 소리가 없다.

다만 흉터가 뜨거워진다. 멸문의 밤 등을 가른 나선의 상처, 그 위에 새겨 둔 사형제들의 마지막 검로가 한꺼번에 살아난다. 하연서의 왼팔에서 대사형의 벽력 같은 직도가, 오른 손목에서 넷째 사형의 낙영세가, 어깨죽지에서 셋째 사형의 회선검이 동시에 깨어났다.

"이 계집— 뭐야, 이 검로는—"

앞선 심복의 눈이 커졌다. 그가 아는 검법이 아니었다. 어느 문파의 것도 아니었다. 죽은 자들의 검이었으니까.

첫 번째 심복. 하연서의 검이 대사형의 직도로 내리꽂혔다. 상대의 칼이 반으로 갈라졌다. 손목이 이어서 뒤집히며 낙영세가 그의 허벅지를 긋고, 회선검이 어깨를 밀어 벽으로 처박았다. 세 죽은 자의 검로가 한 몸에서 물 흐르듯 이어졌다.

두 번째 심복이 등 뒤에서 파고들었다. 하연서는 돌아보지 않았다. 다섯째 사매의 반보 신법이 발끝에서 피어나 반 뼘을 미끄러졌고, 칼끝이 허공을 갈랐다. 그대로 팔꿈치를 접어 자루로 상대의 관자놀이를 쳤다.

셋째, 넷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연서는 웃었다.

아니, 하연서의 얼굴이 웃었다. 하연서는 그 웃음이 자기 것이 아님을 느꼈다.

'좋다. 더 와라.'

그 목소리는 하연서의 것이 아니었다. 대사형의 것이었다. 멸문의 밤, 스무 명을 베고 스물한 번째 검에 심장을 뚫린 대사형. 죽는 순간까지 검을 놓지 않았던 그의 살의가, 지금 하연서의 핏줄을 타고 역류하고 있었다.

검이 점점 무거워졌다.

아니, 가벼워졌다. 하연서의 의지가 검에서 떨어져 나가고, 검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셋째 심복의 칼을 쳐올리는 손이, 그 목을 노려 아래에서 위로 긋는 발도로 이어졌다. 장무극의 발도였다. 협곡에서 훔쳐 새긴 그 검로.

심복의 목에서 피가 뿜어졌다.

하연서는 그 피를 보며,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좋아하는 것을 느꼈다.

죽여라.

전부 죽여라.

그날 밤 우리를 벤 것처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연서야! 정신 차려!"

설강이 피를 토하며 기어 왔다. 그의 손이 하연서의 발목을 붙잡았다.

"눈을 봐, 네 눈을— 네가 아니야, 지금! 검이 널 먹고 있어! 검로를 닫아, 하나씩— 이름을 불러, 네 이름을—"

하연서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려다본 것은 하연서였다. 그러나 검을 든 팔은 이미 설강을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방패로 못 서게. 하연서의 안에서 대사형의 목소리가 말했다. 이자도 그날 밤 우리를 지켜보던 놈들 중 하나다. 정벌대. 태산검문 이대 제자. 베어라.

'아니야.'

하연서는 생각했다. 설강은—

이자는 태산검문이다. 우리를 죽인 이름이다.

'설강은 이름을 물어봤을 때 이름을 알려준 사람이다.'

베어라. 베어라. 베어—

검이 올라갔다.

*

넷째 심복이 그 틈에 문 쪽으로 물러섰다. 처소 안이 피와 부서진 나무로 가득했다. 하연서의 검끝이 바닥에 엎어진 설강의 목을 향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 순간 문틀 밖에서 발소리가 쏟아졌다.

"거기 뭐야! 무슨 소리가—"

진유하였다.

가라고 밀어냈던 그가. 밥은 챙겨 먹으라 말하고 돌아섰던 그가. 처소 뒤편을 기웃대다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었다.

진유하가 문틀에 걸린 넷째 심복을 어깨로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멈췄다.

그가 본 것은 피투성이 방바닥, 널브러진 심복 셋, 그리고 검을 치켜든 하연서였다.

"연서야—"

진유하의 말이 목에서 걸렸다.

하연서가 그를 돌아보았다.

진유하는 그 눈을 알았다. 대숲에서 봤던 눈이었다. 왼손에서 피를 흘리며 그를 뿌리치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던 그날 밤, 하연서의 눈에 떠 있던 그것. 자기가 아닌 누군가가 안에서 내다보는 듯한 그 눈. 그때보다 지금은 훨씬 짙었다. 검은자위가 초점 없이 번들거렸다. 하연서가 아니었다.

"너." 진유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너 그 눈… 지난번 대숲에서랑 똑같아. 그때보다 더 심해. 야, 임서."

하연서의 검이 진유하를 향해 각을 틀었다.

"임서."

진유하가 다시 불렀다. 검끝이 자기 가슴을 향하는데도, 그는 두 손을 옆으로 벌린 채 다가왔다.

"그게 네 진짜 이름이 아닌 거 알아. 근데 지금 그 안에 있는 게 누구든, 너 아니야. 내가 아는 너는 밥 안 먹어도 남 밥부터 챙겨 주는 놈이야. 손 다치면 남한테 싸매라 하면서 자기 손은 안 싸매는 병신 같은 놈이라고. 그게 너야."

검이 흔들렸다.

"돌아와. 내가 네 편이라고 했잖아. 그 말 안 무른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돌아오라고— 하연서!"

진유하는 그 이름을 몰랐다. 몰랐지만, 어쩐지 그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아서 불렀는지도 모른다. 임서가 아닌 다른 이름을. 그 사람의 진짜 이름을.

하연서.

*

그 이름이 방 안에 떨어진 순간.

하연서의 안에서 무언가가 우뚝 멈췄다.

'하연서.'

대사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섯째 사매의 것도, 넷째 사형의 것도 아니었다. 그건 하연서 자신이 자기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멸문의 밤 이후 삼 년, 오직 낙검곡 무덤 앞에서만 꺼내 보던 이름. 세상 누구도 부르지 못하던, 부를 수 없던 이름.

죽인 감정을 되살려야만 검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다.

패검안의 규칙이 몸속에서 벼락처럼 울렸다. 지금까지 하연서는 감정을 눌러서 검을 썼다. 감정을 죽여서 검로를 훔쳤다. 그래서 검이 그녀를 먹은 것이다. 눌러 죽인 감정의 빈자리로 죽은 자의 감정이 밀려들었으니까.

그런데 진유하가 자기 가슴에 검을 겨눈 채 걸어오고 있었다.

이 순박한 사내를, 하연서는 오늘 아침 도구가 아니기에 밀어냈다. 밀어내며 아팠다. 그 아픔이— 죽은 줄 알았던 그 아픔이 지금 가슴 한복판에서 뜨겁게 살아 있었다.

하연서는 그 아픔을 붙잡았다.

밀어내지 않았다. 도구로 환산하지 않았다. 눌러 죽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자기 감정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았다.

진유하를 베고 싶지 않다. 설강을 죽게 두고 싶지 않다. 이 두 사람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이 검을 붙잡았다.

죽은 이들의 검로를 모두 두른 팔이, 하연서 자신의 의지로 딱 멈췄다. 대사형의 살의가 밀어붙였다. 셋째 사형의 회선이 팔을 돌리려 했다. 다섯째 사매의 신법이 발을 끌었다. 검흔에 새겨진 모든 죽은 자가 검을 계속 휘두르라고 아우성쳤다.

하연서는 멈춰 세웠다.

"돌아왔어." 하연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야. 하연서."

*

검끝이 진유하의 가슴 한 뼘 앞에서 정지해 있었다.

하연서는 팔을 내렸다. 온몸이 떨렸다. 검흔을 닫는 것은 여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하나씩. 다섯째 사매의 신법을 발끝에서 걷어내고, 셋째 사형의 회선을 어깨에서 재우고, 넷째 사형의 낙영세를 손목에서 접었다. 마지막으로 대사형의 직도가 왼팔에서 잦아들 때, 그의 목소리가 물러가며 아쉬운 듯 속삭였다.

다음엔 안 놔줄 거다, 막내야.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 밖에서 넷째 심복이 도망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셋을 잃고 혼자 남은 자였다. 붙잡을 힘이 없었다. 하연서는 그가 장무극에게 달려가리라는 걸 알았다. 잔당이 화부 처소에 있었다고. 검흔을 쓴다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하연서는 설강 곁에 무릎을 꿇었다.

"설강."

늙은 화부가 눈을 떴다. 옆구리 상처를 손으로 누르며, 그는 하연서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돌아왔구나." 설강이 피 묻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눈이… 다시 네 것이야. 삼십 년 만에 처음 봤다. 검혼을 다 열고도 제 발로 걸어 돌아온 애를."

"그러니까 죽지 마." 하연서가 그의 상처를 자기 소매로 눌렀다. 여전히 피가 배어나는 왼손으로. "명령서 원본, 금서고에 있다고 했지. 그거 없이는 안 돼. 당신 증언 없이는 안 돼. 그러니까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설강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거 아니야. 지금 네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 나를 살려서 증언을 얻으려는 게 아니야, 지금은. 그냥 내가 살길 바라서잖아. 그렇지?"

하연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설강이 다시 웃었다. 이번엔 소리 없이.

*

진유하는 방 한구석에 선 채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굴러떨어진 손수건에 가 있었다. 아침에 하연서가 품속에 넣어 두었던 것. 혼전 중에 흘러나온 것. 그 안에서 반쯤 탄 문서 조각이 삐져나와 있었다. '논공행상'이라는 네 글자가, 그리고 '시월 열이틀'이라는 날짜가 보였다. 진유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하연서가 밤마다 처소를 비운 이유, 왼손에서 피가 마를 날 없던 이유, 낙검곡 근처를 헤매다 온 이유가 전부 저 종잇조각과 이어져 있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그는 방금 본 것을 떠올렸다.

죽은 자들의 검법. 어느 문파에도 없는 검로. 태산검문 것이 아니었다. 정파의 것도 아니었다.

문밖 담장 너머에서, 저 멀리 연무장 쪽에서 규칙적인 검풍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갈랐다. 진유하는 그 소리를 알았다. 모용성이었다. 직계 제자 모용성은 밤마다, 새벽마다 혼자 검을 휘둘렀다. '직계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며, 장로인 숙부가 가문에 배정한 자원을 지켜 내려면 매년 서열을 증명해야 한다며. 진유하는 언젠가 그가 텅 빈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다 주저앉아 있던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모용성이 중얼거리던 말도 기억했다. "장로원이 이번에 우리 가문 몫을 삼 할 줄였어. 내가 지면… 그걸로 끝이야."

그 각박한 검풍이 지금도 담을 넘어왔다. 다들 저마다의 벼랑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용성도. 그리고 이 방 안의, 임서라 불리던 이 사람도.

진유하가 천천히 하연서에게 다가왔다.

하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하연서의 눈은 이제 하연서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춰 두었던 것들이, 오늘 처음으로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죽은 자들의 검. 정파가 아닌 검로. 논공행상 문서. 낙검곡. 그리고 진유하가 삼 년 전 개천가에서 봤던, 상처 입은 아이.

진유하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놀람도, 두려움도 없었다. 다만 오래 곁에서 지켜본 자가 마침내 답을 찾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

하연서의 심장이 멎었다.

"너, 패검문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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