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오기 전, 하연서는 진유하의 방문 앞에 섰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문을 두드릴 손이 자꾸 허공에서 멈췄다. 어젯밤 자신의 검이 이 사내의 목 앞 반 치에서 멎던 감각이 손아귀에 아직 남아 있었다. 셋째 사형이 자신의 몸을 빌려 휘두른 검. "연아." 그 부름이 아니었다면 진유하의 피가 지금쯤 마룻바닥을 적셨을 것이다.
문이 안에서 열렸다.
"안 자고 뭐 해."
진유하가 눈을 비비며 나왔다.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연서의 검이 스친 자리였다. 그 붕대를 보는 순간, 하연서의 목구멍이 막혔다.
"…미안하다."
말이 저 혼자 튀어나왔다. 하연서는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다섯 해 동안 산 자에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무덤 앞에서는 수백 번 했다. 살아 있는 자에게는 처음이었다.
진유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어젯밤 네 눈, 은빛이었어."
하연서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내가 헛것 본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리고 네 말투도… 너 같지 않았고." 진유하는 문틀에 어깨를 기댔다. "나 무섭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야. 근데 그거 알아? 네가 검을 멈췄잖아. 스스로. 그걸 봤어."
"멈춘 게 아니다. 멈춰졌다."
"뭐가 됐든." 진유하가 낡은 목검을 내밀었다. 외당에 처음 들어온 날 하연서에게 쥐여줬던 그것이었다. "이거, 네가 밤마다 두고 다니길래. 진짜 친구가 되고 싶댔지, 나. 그 말 아직 유효해. 네가 무슨 사연을 지고 있든."
하연서는 목검을 받지 않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 사내를 아군으로 분류할 수도, 도구로 저울질할 수도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두렵게 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알아. 넌 훨씬 위험한 사람이지." 진유하가 목검을 그의 품에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래도 도망 안 갈 거야. 나 원래 손해 보는 데 도가 튼 놈이거든."
하연서는 목검을 안은 채 돌아섰다. 등 뒤에서 진유하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잘 갔다 와, 내당 견습. 그 평범한 배웅이 가슴 어딘가를 긁었다.
*
내당 견습 신고식은 장로원 앞뜰에서 열렸다.
돌계단 위, 태사의에 앉은 노인이 하연서를 내려다봤다. 넓은 어깨, 굳은살 박인 손, 눈 밑까지 파인 흉터. 태산검문 장로 장무극. 학살자 손목의 검 문양을 설강이 증언한 바로 그 이름.
"네가 그 외당 것이냐. 직계를 이겼다는."
목소리가 자갈을 굴리는 것처럼 거칠었다. 하연서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얼음처럼 가라앉았다. 이 자다. 이 자가 그날 밤—.
"사파 검로를 쓴다는 소문이 있더군." 장무극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감히 태산검문 내당에서. 어디, 그 검을 좀 봐야겠다."
그가 소매를 걷었다. 팔을 뻗어 자기 앞의 검을 집으려는 동작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왼손목이 드러났다.
검 문양. 태산검문 특유의, 검신을 세 겹 휘감은 문양. 다섯 해 전 그날 밤, 불길 속에서 스승의 목을 벤 그 손목에 새겨져 있던 표식. 어린 하연서가 무너진 기둥 틈에 숨어 이를 악물고 눈에 새긴 바로 그것.
기억이 짐승처럼 튀어올랐다. 스승의 피, 사형들의 비명, 무너지는 대들보, 그리고 어둠 속에서 검을 닦던 저 왼손목. 하연서의 손끝이 떨렸다. 등에 멘 망자검이 웅웅 울었다. 검혼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죽여. 지금. 저 손목을 잘라. 넷째 사형의 목소리, 둘째 사형의 목소리가 두개골 안에서 겹쳐 울렸다.
하연서는 눈을 감았다.
숨을 셌다. 하나. 둘. 검을 뽑으면 끝이다. 여기서 저 자를 베면 나는 자객이 되고, 패검문은 영원히 악으로 남는다. 이름을 되찾을 수 없다. 스승의 무덤에 이름조차 새기지 못한다.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은빛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붙잡았다.
"검은 없습니다. 내당 견습에게 사병은 허락되지 않으니." 목소리가 놀랍도록 평평하게 나왔다. "다만 무예를 보여드릴 수는 있습니다. 견습이 익힌 태산 기본 검로로."
장무극이 코웃음을 쳤다.
"기본 검로로 뭘 보이겠다는 거냐. 건방진 것. 좋다, 저기 목인(木人)을 쳐봐라. 세 합 안에 못 부수면 사파 검로 운운한 소문을 문책하겠다."
앞뜰 구석에 박달나무를 깎아 만든 목인 셋이 서 있었다. 팔뚝 굵기의 몸통에, 태산검문 상급 제자들조차 한 자루로 하나를 부수기 벅찬 물건이었다.
하연서는 걸음을 옮겼다. 목검을 들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펴 목인 앞에 섰다. 장로원 제자들이 웅성거렸다. 맨손으로? 저 애송이가?
검혼을 부르지 않았다. 부를 필요가 없었다. 패검문의 기본기, 스승이 여섯 살 하연서에게 처음 가르친 '되돌림'의 첫 초식. 상대의 힘을 흘려 되꽂는 이치. 그는 그 이치를 목인에게 걸었다.
손날이 목인의 관절을 짚었다. 밀지 않았다. 나무 자체의 결과 무게를 역으로 타고 흘렸다. 뚝. 첫 번째 목인의 목이 제 무게에 눌려 부러졌다. 하연서는 반 발짝 미끄러지듯 옆으로 흘렀고, 그 흐름 그대로 두 번째 목인의 허리를 손끝으로 튕겼다. 우지끈. 결을 따라 갈라졌다. 세 번째 목인 앞에서 그는 몸을 팽이처럼 돌렸다. 팔꿈치가 몸통 정중앙을 관통했다. 쩡— 하고 박달나무가 두 쪽으로 쪼개졌다.
세 합이 아니었다. 한 호흡이었다.
앞뜰이 조용해졌다. 부서진 목인의 파편이 마지막으로 툭, 하고 굴렀다.
장무극의 손이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그 눈에서 방금까지의 조롱이 싹 가셨다.
"…내당 견습에게 저런 힘이."
"장로께서 기본 검로를 보라 하셨으니." 하연서가 손을 털며 돌아섰다. "이것이 태산검문 외당에서 가르친 기본입니다. 소문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짓말이었다. 저건 패검문의 이치였다. 그러나 태산의 이름을 방패로 되받아친 순간, 장무극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 문파의 기본이라 우기는 애송이를 사파 운운하며 문책하면, 태산검문 무예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꼴이 된다.
명분의 함정. 하연서는 이 자들이 평생 휘둘러온 무기를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
장무극은 하연서가 물러간 뒤에도 오래 앉아 있었다.
"저 손놀림." 그가 곁의 심복에게 나직이 말했다. "결을 흘려 되꽂는 이치. 어디서 봤더라."
심복이 침묵하자, 장무극은 스스로 답을 찾았다. 낙검곡. 다섯 해 전 그 밤, 패검문 늙은이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걸었던 검. 되돌림.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패검문… 잔당인가."
그는 왼손목을 슬쩍 문질렀다. 세 겹 검 문양이 소매 속으로 숨었다.
"저 애송이를 조용히 치워라. 밤에. 흔적 없이. 맹주께 알릴 것도 없다. 내 손으로 처리한 일이니 내 손으로 끝낸다."
심복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장무극은 부서진 목인 조각을 노려봤다. 이번엔 확실히 죽여야 했다. 다섯 해 전 한 놈을 놓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온다면, 그 뿌리를 남길 수 없었다.
*
땅거미가 질 무렵, 설강이 잡역 무사 옷차림으로 우물가에 나타났다.
"오늘 장로원 앞에서 목인 셋을 한 호흡에 부쉈다며." 그가 물바가지를 뜨는 척 몸을 낮췄다. 술 냄새가 났지만 눈은 맑았다. "미친 짓이다. 그 늙은이 눈에 들었어."
"봤다." 하연서가 두레박을 끌어올렸다. "손목의 문양. 그날 밤 그 손목이었어."
설강의 손이 멈췄다. 물이 바가지에서 넘쳐 흘렀다.
"…확인했나."
"확인했다."
두 사람 사이로 저녁 바람이 지나갔다. 설강이 목소리를 더 낮췄다.
"연서야. 잘 들어라. 장무극은 손이야. 검을 쥔 손. 그 손을 벤다고 몸이 죽지 않아." 그가 하연서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날 밤 명령을 내린 건 그자가 아니다. 장무극 위에 있는 자, 낙검곡을 통째로 지운 각본을 짠 자가 따로 있어. 나는 그 얼굴을 못 봤다. 하지만 네 스승은 알고 있었어."
"스승님이."
"무덤 아래 혈서. 그 안에 다 적혀 있을 거다. 정사대전이 어떻게 조작됐는지, 누가 붓을 잡았는지." 설강의 눈이 붉게 젖었다. "장무극을 죽이면 넌 자객으로 끝나. 배후가 그 시체를 딛고 더 깨끗한 정의가 될 뿐이야. 순서를 지켜라. 혈서부터. 진실부터. 그다음이 검이다."
하연서는 두레박을 내려놓았다. 무덤 아래 봉인된 상자. 구결을 몰라 열지 못한 그 혈서가 다시 떠올랐다.
"구결을 모른다. 상자가 안 열려."
"그건…" 설강이 입을 열려다 멈췄다. 멀리서 순찰 무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물바가지를 챙기며 몸을 일으켰다. "다음에. 반드시 알려주마. 오늘은 몸 사려라. 그 늙은이가 널 그냥 둘 리 없다."
설강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하연서는 홀로 우물가에 남아, 품속의 낡은 목검을 만졌다. 진유하가 억지로 밀어넣은 그것.
배후가 있다. 손 위의 머리가. 그 얼굴을 아는 건 죽은 스승뿐이고, 스승의 진실은 무덤 아래 잠들어 있다.
*
숙소로 돌아온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하연서는 문을 닫고 등불을 켜지 않았다. 습관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등의 망자검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하루가 몸속에서 아직 웅웅거렸다. 장무극의 손목. 부서진 목인. 진유하의 목검. 설강의 붉은 눈.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 한 점 없는데 등불 심지가 흔들릴 뻔한, 그 미세한 압력. 하연서의 손끝이 저릿했다. 넷째 사형의 검혼이 먼저 반응했다. 위험. 사방.
창밖 처마에 그림자가 없어졌다. 있어야 할 달빛의 윤곽이 지워졌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공기에서 쇠 냄새가 났다. 기름 먹인 강철, 방금 갈아낸 칼날의 냄새.
하나. 둘. 셋. 지붕 위, 창가, 문밖. 셋이 아니었다. 넷. 다섯. 소리 하나 없이, 숨소리조차 지운 자들이 방 하나를 그물처럼 조여오고 있었다.
복면 살수. 장무극이 보낸 손.
하연서는 천천히 망자검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검신이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낮게 울기 시작했다. 죽은 사형들이 눈을 뜨고 있었다.
문고리가, 소리 없이, 돌아갔다.
문이 안으로 밀렸다.
하연서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앉은 자리에서 몸을 옆으로 흘렸다. 첫 번째 칼날이 방금까지 그의 목이 있던 허공을 갈랐다. 바람 소리도 없었다. 정말로 잘 훈련된 자들이었다. 태산검문이 겉으로 협의를 논하는 동안 뒷마당에서 길러온 그림자들.
발끝으로 방바닥을 찍어 몸을 세우는 순간, 창이 부서졌다. 살수 둘이 동시에 뛰어들었다. 하나는 위에서, 하나는 옆에서. 협공의 각도가 완벽해서 피할 곳이 없었다.
검혼을 부르면 된다. 넷째 사형의 쾌검을 빌리면 이 방 안의 다섯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할 수 있다. 검혼들이 그렇게 속삭였다. 불러. 우리를 불러. 저 손목을 벤 자의 개들이다. 갈라. 찢어.
하연서는 그 목소리를 밀어냈다.
오늘 목인을 부순 힘이 온 문파에 퍼졌다. 여기서 살수 다섯을 검혼의 이능으로 몰살하면, 그 흔적이 곧 증거가 된다. 사파 검로. 이단의 검. 하연서 자신이 패검문 잔당임을 자백하는 시체 다섯이 남는다. 장무극은 그것을 원했다. 죽이든 죽든,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내게 만드는 것.
그래서 하연서는 검혼 대신 손에 익은 것을 잡았다.
진유하의 낡은 목검이었다.
칼날이 그의 어깨를 노리고 떨어졌다. 하연서는 목검으로 그 칼등을 비스듬히 받아 흘렸다. 되돌림. 힘을 꺾지 않고 방향만 틀었다. 살수의 칼이 제 힘을 못 이기고 옆의 동료를 향해 미끄러졌다. 챙— 강철끼리 부딪히며 처음으로 소리가 났다. 두 살수의 균형이 반 치 무너졌다.
그 반 치면 충분했다.
하연서는 몸을 낮춰 첫 번째 살수의 손목을 목검으로 후려쳤다. 뼈가 아니라 힘줄을 노린 타격. 칼이 손에서 떨어졌다. 이어 발등으로 두 번째 살수의 무릎 안쪽을 걷어차 자세를 무너뜨렸다. 목검은 사람을 죽이지 못한다. 그러나 죽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필요한 무기였다.
"…이놈이."
문밖의 살수가 낮게 뱉었다. 상황이 계획과 어긋나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흔적 없이 애송이 하나를 지우라 했는데, 애송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살아 있었고, 심지어 칼조차 뽑지 않았다.
지붕에서 셋째 살수가 떨어졌다. 검강이었다. 견습을 상대로 검강이라니. 장무극이 얼마나 이 일을 확실히 하고 싶어했는지가 그 한 줄기 빛에 드러났다. 목검으로 검강을 받으면 목검이 두 쪽 난다.
하연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검은색과 은색의 경계에서.
부를까.
한 번만. 셋째 사형의 검혼 하나만. 그러면 이 검강을 되받아칠 수 있다.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검신이 기뻐하듯 울었다. 수명이 타는 냄새가 벌써 코끝에 맴돌았다.
그때, 목검의 나뭇결이 손바닥에 닿았다.
잘 갔다 와, 내당 견습.
하연서는 검강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몸을 회전시켜 검강의 궤적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검강이 방바닥을 그었고, 마룻장이 불타는 재로 갈라졌다. 그 갈라진 틈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연서는 그 연기를 방패 삼아 셋째 살수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목검 손잡이 끝으로 뒷목을 정확히 찍었다. 살수가 소리 없이 고꾸라졌다.
넷이 남았다.
숨이 가빠왔다. 검혼을 쓰지 않고 절정급 살수 다섯을 상대하는 것은 육신의 한계를 긁는 일이었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검었다. 아직은 하연서였다.
문밖의 우두머리 살수가 손짓했다. 남은 셋이 진형을 바꿨다. 이번엔 죽이는 진이 아니었다. 몰아 가두는 진. 산 채로 잡아 어딘가로 끌고 가려는 형태.
'죽이라'가 아니라 '잡으라'로 바뀌었다.
하연서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그것은 장무극의 명령이 아니었다. 장무극은 흔적 없이 죽이라 했다. 산 채로 잡으라는 명령은 다른 곳에서 왔다. 장무극 위. 손 위의 머리. 얼굴을 아는 건 죽은 스승뿐이라던, 바로 그 배후.
"…누가 보냈나."
하연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두머리 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매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작은 나무패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 보였다.
세 겹 검이 아니었다.
구름 위로 솟은 봉우리. 그리고 그 봉우리를 감싼 후광. 무림맹의 상징. 정의의 화신이라 불리는 자만이 쓸 수 있는 인장.
하연서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건 장무극의 개가 아니었다. 장무극이 조용히 처리하려던 밤에, 더 높은 곳에서 다른 손이 뻗어 나온 것이다. 외당 시험을 참관하며 '낯익은 살기'를 읽었다던 그 노인. 검로 하나로 다섯 해 전 벤 문파를 기억해낸 자.
각본을 쓴 자가, 이미 알고 있었다.
"살려서 데려오라 하셨다." 우두머리 살수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패검문의 마지막 씨앗을. 맹주께서 직접 물어보실 것이 있다더군. 네 스승이 무엇을 남겼는지."
혈서. 하연서의 손에서 목검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들은 혈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넣기 전까지, 하연서를 죽일 수 없었다. 그가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르니까.
그 사실이 그를 살렸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미끼로 만들었다.
세 살수가 동시에 조여들었다. 하연서는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검혼을 부르면 정체가 드러나고, 부르지 않으면 산 채로 끌려가 혈서의 위치를 실토하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스승의 진실은 배후의 손에 넘어간다.
목검을 쥔 손이 떨렸다. 검은 눈동자 안에서, 아주 천천히, 은빛 한 줄기가 번져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 자신도 멈출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