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검끝이 목을 겨눈 채로, 하연서는 무릎을 살짝 꺾었다.

등의 검이 미친 듯이 울었다. 나선 흉터가 인두처럼 달았다. 그 뜨거움이 관자놀이까지 치받았지만, 하연서는 그것을 얼굴 안쪽에 눌러 담았다. 여기서 검을 뽑으면 임서는 죽고 하연서만 남는다. 그리고 하연서 하나로는 저 순찰대를 뚫을 수 없다.

"이름을… 이름을 말씀드리면 살려 주십니까."

목소리를 떨었다. 일부러. 무릎을 더 낮추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소인은 지나가던 약초꾼입니다. 낙검곡에 죽은 이 넋을 달래는 영초가 난다 하여… 그저 그것만 캐러 들었습니다. 금지된 땅인 줄 몰랐습니다. 정말로 몰랐습니다."

장무극이 코웃음을 쳤다. 검끝은 내리지 않았다.

"약초꾼치고 손이 곱군. 굳은살이 어정쩡해."

"산에서 나고 자란 손입니다요. 나리께서 보시기엔 그럴지 몰라도—"

"닥쳐라."

말이 협곡 벽에 부딪혔다. 순찰대 횃불이 반원을 좁혔다. 하연서는 발끝의 무게를 반씩 나눠 실었다. 왼쪽으로 세 걸음, 안개 짙은 바위 그늘까지. 거기까지만 가면 순찰대 시선 하나가 죽는다. 머릿속으로 도주로를 그리는 사이에도, 등의 검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장무극이 검을 고쳐 잡았다. 안개 사이로 새벽의 첫 빛이 검신을 훑고 지나갔다.

하연서의 숨이 멎었다.

검신에 문양이 있었다. 검코에서 검첨을 향해 비스듬히 감아 도는 나선. 세 겹으로 감기다 끝에서 살짝 꺾이는 그 각. 하연서는 그 각을 안다. 매일 밤 옷을 벗을 때 어깨에서 옆구리로 흐르는 제 흉터에서 본다. 멸문의 밤, 자신을 벤 검이 살에 새긴 각인. 흉터는 그 검을 본떠 아물었다. 나선의 감김 방향까지 똑같았다.

같은 검이었다.

아니— 같은 검이 아니라, 같은 문양을 새긴 검. 태산검문의 특정 계보만 쓰는 검. 그 검이 지금, 삼 년을 삼켜 온 흉터를 향해 울고 있었다.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검을 잡은 손가락이 저절로 오므라들었다. 지금 뽑으면. 저 목을 향해 낙영세를 흘리면. 반 박자 만에 닿는다. 대사형의 검로라면—

'안 돼.'

하연서는 제 손톱을 손바닥 자상에 박아 넣었다. 어젯밤 검신을 쥐어 생긴 상처. 그 통증이 살의를 반 뼘 물러서게 했다. 저 뒤에 순찰대가 열둘. 지금 죽이면 임서도 죽고, 장부를 짠 손도 못 찾고, 스승의 이름도 못 되돌린다. 죽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훔친다.

"나리, 소인이 정말로—"

말끝을 흐리며 오른발을 반 보 물렸다. 겁먹은 약초꾼의 몸짓. 장무극의 눈이 그 물러섬을 도주 신호로 읽었다. 원한 대로.

"도망치겠다?"

장무극의 검이 움직였다. 오만한 자세에서 벼락처럼. 어깨에 걸친 검을 아래에서 위로 긋는 발도. 검로가 짧고 곧았다. 정파의 검답지 않게 인정사정없는 궤적. 목을 노렸다.

하연서는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눈을 떴다. 흉터가 볼 수 있는 눈으로.

검흔이 열렸다. 세상이 반 박자 느려졌다. 장무극의 검이 그리는 선이 은빛 실처럼 공기 위에 새겨졌다. 그 선을 하연서의 흉터가 빨아들였다. 검로의 이치가 살갗 아래 근골로 흘러들었다. 견본을 뜨듯이. 채취하듯이.

그리고 하연서의 몸이, 훔친 그 궤적을 반대로 되짚었다.

몸을 옆으로 흘리며 왼손 등으로 검면을 스쳤다. 정면으로 받으면 부러진다. 반쯤 흘리고, 흘린 힘의 방향을 그대로 되돌려 장무극의 손목 안쪽으로 밀어냈다. 장무극이 방금 그은 그 힘을, 장무극에게 되돌려주는 흐름이었다.

챙— 하는 소리 없이, 검이 미끄러졌다.

장무극의 필살 발도가 허공을 갈랐다. 목표를 잃은 검첨이 제 궤도에서 반 뼘 어긋나 바위를 긁었다. 불꽃이 튀었다. 그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되받아친 힘 때문에.

찰나였다. 순찰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지 못했다. 약초꾼이 허둥대다 넘어질 뻔한 것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오직 장무극만이, 제 손목에 남은 이질감으로 알았다.

"···."

장무극의 눈이 좁아졌다. 검을 어깨로 되걸며 그가 낮게 물었다.

"방금."

하연서는 이미 세 걸음 물러나 바위 그늘에 반쯤 몸을 넣고 있었다.

"넘어질 뻔했습니다요. 나리 검이 무서워서."

목소리를 떨었지만, 손끝은 떨지 않았다. 방금 그 반 박자 사이에, 하연서는 흉터에 하나를 더 새겼다. 장무극의 발도. 아래에서 위로 목을 긋는 그 짧고 곧은 초식. 근골이 아직 그 궤적을 기억하며 저릿저릿했다.

그 저림 속에서, 무언가가 겹쳐졌다.

같은 각도였다. 같은 짧기였다. 셋째 사형이 마지막에 이렇게 베였다. 하연서는 그날 봤다. 셋째 사형의 목이 아래에서 위로 열리던 순간을. 피가 안개처럼 흩어지던 것을. 그 검로가 방금 하연서의 살갗을 스치고 갔다.

이자다.

이 손이었다. 셋째 사형을 벤 것도, 넷째 사형을 벤 것도, 어쩌면 스승을 벤 것도. 공적비의 이름이 아니라 이 손이. 이 나선 문양의 검이.

그 확신이 봉인을 두드렸다.

셋째 사형의 목소리가 귓속에서 되살아났다. 굳은살 박인 손으로 하연서의 머리를 헝클던 그 사람의 웃음소리가. 흉터가 견본을 새기는 대가로, 죽은 자의 마지막 감정이 역류했다. 배신감. 통증. 어린 사제를 지키지 못했다는 마지막 한 조각의 회한까지.

무릎이 흔들렸다. 시야가 붉게 번졌다. 하연서의 입술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손이 검 자루를 향했다.

'—나는 임서다.'

제 목소리로 눌렀다. 어금니를 물었다. 손톱을 다시 손바닥에 박았다. 자상이 벌어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통증을 붙잡고, 하연서는 셋째 사형의 회한을 흉터 안쪽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되살릴 때가 아니다. 아직. 지금 무너지면 다 잃는다.

"···잡아라!"

장무극이 마침내 손을 들었다. 순찰대가 그늘을 향해 창을 뻗었다. 하연서는 이미 몸을 낮춰 바위 뒤로 굴렀다. 안개가 짙었다. 새벽의 협곡은 그가 삼 년을 헤맨 땅이었다. 순찰대는 낮에 지도를 보고 왔지만, 하연서는 이 바위 하나하나에 사형들을 묻었다.

경공을 얕게 썼다. 임서의 몸으로 낼 수 있는 최대만큼만. 그 이상은 정체가 드러난다. 무너진 전각 잔해 사이로, 마른 개천 바닥으로, 안개의 결을 따라. 횃불이 뒤에서 흔들리며 멀어졌다. 창검이 바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뒤로 밀려났다.

"뒤쫓지 마라."

장무극의 목소리가 안개를 넘어왔다. 추격을 멈추라는 명령. 하연서는 잔해 뒤에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놈은 이 골짜기를 나보다 잘 안다. 안개 속에서 흩어지면 우리가 당한다. 관문을 막아라. 새벽 안에 들어온 자가 새벽 안에 나갈 수 없게. 그리고—"

장무극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검을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그놈, 손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약초꾼이 아니야. 재조사 명단을 다시 훑는다. 낙검곡에 발이 닿은 놈은 하나도 남기지 마."

발소리가 멀어졌다. 하연서는 그제야 숨을 길게 뱉었다. 손바닥의 피가 손목을 타고 흘렀다. 등의 검은 여전히 얇게 울었다. 그러나 아까처럼 미치지는 않았다. 원수가 멀어지고 있었다.

바위에 등을 기댄 채, 하연서는 하늘을 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안개 위로 회색빛이 번졌다. 낙검곡의 밤이 끝나 가고 있었다.

'이제 알았다.'

가슴이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사냥꾼이 발자국을 찾았을 때의 뛰임이었다.

장무극. 저 나선 문양의 검. 저 손이 실행했다. 그러나 저 손은 명령을 받는 손이다. 오만하되 스스로 각본을 짤 그릇은 아니다. 서고의 장부를 조작한 손은 따로 있다. 논공행상 날짜를 정벌 완료보다 앞당겨 적을 수 있었던 자. 저 손에게 검을 쥐여 준 자.

공적비에서 장무극의 이름 위에 새겨져 있던 이름. 정의의 화신. 천공진인.

사슬의 한 고리를 하연서는 방금 제 손으로 만졌다. 이 고리를 잡아당기면 그 끝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 이제 알았다.

일어서려는데, 흉터가 다시 저릿했다. 방금 새긴 장무극의 발도가 근골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아직 채 새겨지지 못한 것. 완전히 훔치려면 더 봐야 한다. 저 검을 한 번 더. 될 수 있으면 정면에서.

'그리고 그 전에.'

하연서는 손목을 들여다봤다. 문득 다른 손목이 떠올랐다. 설강의 손목. 늘 문지르던 그 오래된 흉터. 설강도 삼십 년 전 이 검을 봤을까. 이 나선을. 넷째 사형의 낙영세를 "삼십 년 넘게 못 봤다"던 그 눈이, 어쩌면 이 문양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더 늘었다.

몸을 일으켰다. 옷자락에 흙이 묻었다. 관문이 막혔다면 뒷길로 돌아야 한다. 넉 달 외출 금지를 어긴 몸으로, 새벽 안에 담을 넘어 처소로 돌아가야 임서가 산다.

바위 그늘을 나서는데, 나뭇가지 하나가 어깨를 스쳤다. 어젯밤 검신을 쥐다 상한 왼손이 균형을 놓쳤다. 몸이 반 뼘 기울었다. 옷자락이 날카로운 잔해 모서리에 걸렸다.

찍—.

앞섶이 뜯겼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옷감이 비스듬히 갈라졌다. 안개 위로 번지던 새벽빛이 그 틈으로 들이쳤다.

하연서는 굳었다.

가슴이 드러났다. 왼어깨에서 옆구리로 흐르는 나선. 세 겹으로 감기다 끝에서 살짝 꺾이는 그 흉터가, 새벽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방금 봤던 검신의 문양과 똑같은 각으로.

그리고 협곡 어귀에서, 아직 물러나지 않은 발소리 하나가 멈췄다.

장무극이었다. 순찰대에 명령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안개를 훑던 그 눈이, 바위 그늘을 나서던 하연서의 벌어진 앞섶에 닿았다.

안개가 잠시 걷혔다. 두 사람의 시선이 협곡을 가로질러 부딪혔다.

장무극의 눈이 흉터에 박혔다. 그의 검이 손안에서 다시 울었다. 하연서의 흉터가, 그 검의 울음에 화답하며 뜨거워졌다. 두 개의 나선이 안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장무극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만한 웃음도, 심문하던 냉소도 사라진 얼굴이었다. 그가 검을 어깨에서 다시 내렸다. 한 걸음, 안개를 밟으며 다가왔다.

"그 상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협곡 벽을 타고 되돌아오지 않았다. 오직 하연서에게만 닿도록.

"어디서 났나."

하연서의 손이 앞섶을 여몄다. 너무 늦었다는 걸 안다. 이미 봤다. 저 눈은 봤다.

머릿속이 얼음처럼 맑아졌다. 임서는 여기서 끝난다. 저 눈이 흉터를 본 이상, 아무리 어눌한 약초꾼을 연기해도 소용없다. 장무극의 검이 저리 우는 이유를, 이제 장무극도 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다."

한 걸음 더. 안개가 그의 발목에서 흩어졌다. 검끝이 다시 지면을 향해 늘어졌다. 겨누지 않은 검이 오히려 더 위험했다. 언제든 그을 수 있는 각도였다.

하연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길에서 다쳤습니다요'라는 말은 저 문양 앞에서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침묵도 대답이 된다. 약초꾼이라면 겁에 질려 뭐라도 지껄였을 테니까.

그래서 하연서는 대신 몸을 폈다.

어눌한 척 굽혔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반씩 나눠 실었던 발의 무게를 다시 정돈했다. 임서의 껍데기를 벗는 순간, 봉인 안쪽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살의였다. 삼 년을 재운 살의였다.

장무극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변화를 읽었다. 무인의 눈은 자세를 속이지 못한다.

"···그렇군."

그가 낮게 웃었다. 아까의 오만한 코웃음이 아니었다. 사냥감이 사냥꾼이었음을 깨달은 자의, 흥미와 경계가 반씩 섞인 웃음이었다.

"약초꾼이 아니라. 낙검곡에 무덤을 찾아온 놈이라. 그 상처는 그날 밤에 났고. 그날 밤 그 검에 베이고도 살아남았고."

검이 서서히 들렸다.

"패검문 잔당. 살려 보낸 게 있었나. 삼 년을 새고서야 기어 나왔군."

하연서의 손이 등 뒤로 흘렀다. 망자검의 자루가 손바닥에 닿았다. 검신이 뜨겁게 진동했다. 반갑다는 듯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죽은 사형들의 목소리가 손끝을 타고 올라오려 했다.

이번엔 안개도, 지형도, 도주로도 계산하지 않았다. 관문이 막혔다면 뚫으면 된다. 순찰대는 이미 멀어졌고 지금 이 자리엔 장무극과 하연서뿐이다. 하나 대 하나. 그리고 하연서는 방금 저 검의 발도를 한 번 훔쳤다.

한 번만 더 보면 온전히 새긴다.

"이름을 대라 했지."

하연서가 입을 열었다. 임서의 떨림이 걷힌 목소리였다. 오래 쓰지 않아 갈라진, 그러나 벼려진 목소리.

"패검문 대사제, 하연서."

이름을 말한 건 삼 년 만이었다. 봉분 앞에서도 소리 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원수의 얼굴 앞에 던지는 순간, 봉인의 실금이 한 뼘 더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위험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험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장무극의 검이 완전히 들렸다. 아래에서 위로. 아까 그 발도의 시작 자세였다.

"좋아. 이름 있는 시신은 처리하기 편하지."

그가 지면을 박찼다. 안개가 폭발하듯 흩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목을 긋는 그 짧고 곧은 궤적이, 이번엔 아까보다 배는 빠르게 하연서를 향해 뻗어 왔다.

하연서는 이번에도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엔 흘리기만 하지 않았다. 망자검을 뽑아 그 궤적 위에 겹쳤다. 아까 훔친 발도의 이치를 근골이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궤적, 같은 속도. 하연서의 검이 장무극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함께 그으며 나란히 흘렀다.

두 개의 나선이 부딪혔다. 강철이 강철을 긁으며 불꽃을 뿌렸다. 검신 두 자루가 서로의 문양을 스치는 순간, 두 검이 동시에 울었다. 같은 음으로. 같은 밤을 기억하는 두 검이.

장무극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이 검로를··· 네가 어떻게."

방금 자신이 그은 발도를, 사흘 만에 처음 보는 낯선 놈이 똑같이 되받아 그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반 박자 늦게 시작해 같은 지점에서 만나도록. 이건 배워서 될 일이 아니었다. 훔치지 않고서는.

하연서는 대답 대신 검을 밀었다. 겹친 두 검 사이로 힘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 접점에서, 하연서의 흉터가 장무극의 검로를 마저 빨아들였다. 아까 반만 새긴 발도가, 이번엔 근골 깊은 곳까지 완전히 새겨졌다.

동시에 감정이 역류했다. 이번엔 셋째 사형이 아니었다. 이 발도가 셋째 사형만 벤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넷째 사형의 마지막이, 둘째 사형의 마지막이, 스승의 마지막이— 이 하나의 검로에 겹겹이 얹혀 흉터 안쪽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세상이 붉게 무너졌다. 검을 밀던 팔이 후들거렸다. 하연서의 입에서 제 것이 아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하연서다. 하연서다. 하연서···'

이름을 붙잡았다. 방금 삼 년 만에 되찾은 그 이름을. 어금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겹쳐 밀려드는 사형들의 죽음을 이름 하나로 밀어냈다.

그 순간, 장무극이 검을 비틀었다. 맞선 힘의 접점이 무너지며 하연서의 검이 튕겼다. 감정에 흔들린 반 박자의 틈을, 저 노련한 손이 놓치지 않았다.

검이 되돌아왔다. 이번엔 목이 아니라 가슴을. 드러난 나선 흉터를 정확히. 그 흉터를 완성한 검이, 삼 년 만에 나머지 반쪽을 마저 새기러 오는 것 같았다.

피할 각이 없었다. 흔들린 몸으로는.

하연서는 왼손을 들었다. 어젯밤 검신을 쥐어 상한 그 손을. 자상이 벌어진 손바닥으로, 되돌아오는 검면을 정면으로 붙잡았다.

살이 갈렸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 사이로 뿜어졌다. 그 통증이 붉게 무너진 세상을 한순간 하얗게 표백했다. 감정이 밀려났다. 하연서가 돌아왔다.

돌아온 순간, 붙잡은 검을 그대로 비틀어 장무극의 손목 바깥으로 꺾었다. 자기 피를 윤활유 삼아 검면을 미끄러뜨리며. 방금 완성한 발도의 이치를 역으로 되짚어. 장무극의 검이 제 주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기우뚱했다.

"이놈—!"

장무극이 검을 놓치지 않으려 상체를 틀었다. 그 틈에 하연서는 뒤로 몸을 던졌다. 무너진 전각 잔해 너머로. 피 흐르는 왼손을 가슴에 붙인 채.

이번엔 안개가 도와주지 않았다. 새벽빛이 이미 협곡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장무극의 검손이 하연서의 피로 미끄러워진 지금, 추격의 반 박자가 죽었다.

"관문! 관문을 열지 마라! 문주께 전한다—"

장무극이 검을 고쳐 잡으며 외쳤다. 목소리에 아까 없던 것이 실렸다. 다급함이었다.

"패검문 잔당이 살아 있다! 태산검문 안에 들어와 있다! 임서라는 이름으로—!"

하연서의 발이 얼어붙을 뻔했다. 임서. 그 이름을 저자가 어떻게. 아까 손목이 예사롭지 않다며 재조사 명단을 훑겠다던 말. 흉터를 본 지금, 저자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조각이 방금 맞물린 것이다.

잔해 뒤에서 하연서는 피 흐르는 손을 움켜쥐었다.

이제 임서는 죽었다. 정체가 태산검문 수뇌부의 입으로 올라가는 데 반 시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담을 넘어 처소로 돌아간들, 그곳에 기다리는 건 순찰대와 장로원의 검일 터였다.

그러나 물러나던 하연서의 눈이 반대로 타올랐다.

'네가 내 이름을 문주께 전한다면.'

가슴을 여민 손 아래, 나선 흉터가 뜨겁게 뛰었다.

'나는 그 문주의 검이 어떻게 우는지 들으러 가겠다.'

동이 완전히 텄다. 협곡 어귀에서 장무극의 외침이 관문을 향해 번져 갔다. 그리고 그 외침보다 먼저, 무너진 전각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하연서의 어깨를 뒤에서 붙잡았다.

익숙한 손이었다. 오래된 흉터가 있는 손목.

"···쉿."

설강이었다. 술 냄새 대신 식은땀 냄새가 났다. 그의 눈은 취해 있지 않았다. 하연서의 벌어진 앞섶, 그 나선 흉터에 그의 시선이 못 박혀 있었다.

"그 문양을··· 너도 가졌구나."

설강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다른 손이 제 손목의 오래된 흉터를 문질렀다.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을 문질러 온 손짓으로.

"나도 그날, 그 검에 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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