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를 움켜쥔 손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무진." 서린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듣지 마. 저건 네가 아니야."
무진은 봉인검을 등지고 위패당 문턱을 넘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문턱 따위로 끊기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명치 안쪽에 자리를 잡고, 걸음마다 실을 당겼다.
—네 안엔 나를 부를 절망이 있다.
새벽 산길을 내려가는 내내 그 문장이 발소리에 섞여 걸었다. 무진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했다. 대답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를 빌려 갈 것 같았다.
"손." 서린이 곁눈질했다. "떨어. 아까부터."
"괜찮아."
"안 괜찮은 놈이 매번 그 소리를 해."
검총까지는 꼬박 하루 반이 걸렸다. 흑철련 접경을 지나 서편으로, 죽은 검객들의 무덤이 골짜기 하나를 통째로 메운 땅이었다. 이름 없는 봉분이 계단처럼 쌓여 올라간 그 끝에, 낡은 석실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무진이 걸음을 멈췄다.
봉분 사이에 검이 꽂혀 있었다. 한 자루가 아니었다. 스물, 서른, 셀 수 없이. 녹슨 검, 부러진 검, 검집째 흙에 박힌 검. 바람이 골짜기를 훑을 때마다 그것들이 낮게 울었다.
"검진이야." 서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봉분이 아니라. 저 검들, 배치가—"
"알아." 무진의 눈이 검의 간격을 훑었다. "무천검가의 것이야. 낙엽진(落葉陣). 사방에서 검이 떨어지는 진법. 우리 가문 것을 우리 가문 사람이 여기 깔았어."
석실 어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늙었으나 흔들림 없는, 오래 다듬은 쇠 같은 목소리였다.
"낙엽진을 한눈에 알아보는구나. 역시 후계자야."
무진의 손이 검자루로 갔다. 석실 안쪽 어둠에서 사람 형체가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그늘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숙부." 무진의 입에서 그 두 글자가 얼음처럼 떨어졌다.
"들어오너라, 무진아. 진을 거두마. 너와 나 사이에 검을 둘 이유가 없다."
"거둘 필요 없습니다." 무진이 봉분 사이로 발을 디뎠다. "제가 지나가겠습니다."
"고집도 아버지를 닮았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골짜기의 검들이 일제히 뽑혀 올랐다.
수십 자루가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무진에게로 쏟아졌다. 무진은 무천현을 부르지 않았다. 검격이 아니라 몸으로 첫 열 자루를 받아냈다. 손목이 비명을 지르고, 마른 살갗 위로 붉은 줄이 그였다. 서린이 뒤에서 단검을 던져 두 자루를 쳐냈다.
"무진!"
"물러서!" 무진이 소리쳤다. "여긴 검진 안이야. 너까지 휘말려."
낙엽진은 사람을 지치게 하는 진법이었다. 검을 쳐낼수록 검이 늘었다. 사방에서, 위에서, 땅에서. 무진의 팔은 한계에 다다랐고, 손바닥의 옛 자상이 다시 벌어졌다.
그가 왼손 검지를 깨물어 검자루에 피를 발랐다.
"무천현."
명치의 실이 당겨지고, 위패당의 봉인검이—하루 반이나 떨어진 그곳의 봉인검이—응답하듯 무진의 등뼈를 타고 진동해 올라왔다. 그것을 느끼며 무진은 이를 악물었다. 강림이 시작될 때마다 최심부의 그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늘은 미세하지 않았다. 하루 반 거리에서도, 명치를 통해 그 진동이 뚜렷하게 전해졌다.
무천현의 검혼이 팔을 채웠다.
시야가 넓어졌다. 검 하나하나의 궤적이 느리게 풀어져 보였다. 무진의 몸이 낙엽진의 리듬을 거슬러 돌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검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떨어질 자리를 미리 비우며 흘렸다. 열 자루가 헛되이 흙에 박혔다. 스무 자루가 서로 부딪혀 부러졌다.
"짧게 끝내." 서린이 외쳤다. "네가 말했잖아. 짧고 강하게—"
"진핵을 못 찾으면 강림을 못 거둬." 무진의 목소리에 무천현의 무게가 섞여 있었다. "이 진은 핵을 부수기 전까지 안 멈춰."
핵을 찾으려면 진 안을 깊이 들어가야 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시간이 길어졌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진은 알면서도 들어갔다.
봉분 셋을 지나고 넷을 지나며 검을 흘리고 부수었다. 흰머리가 정수리를 넘어 뒤통수까지 번졌다. 손등을 덮은 마른 살갗이 손목 위로 두 마디 더 올라왔다. 강림을 거둘 시점은 이미 지나 있었다. 무천현의 검혼이 무진의 팔을 지배한 지 너무 오래되었다.
그리고 그 오래된 틈으로, 다른 것이 들어왔다.
명치의 실이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무천현에게로 가던 힘이, 아래로—어딘가 더 깊고 차가운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무천현이 네게 검격을 빌려준들." 목소리가 무진의 안에서 울렸다. 봉인검의 그 탁한 목소리. 이제 하루 반 거리 밖이 아니라, 무진의 갈비뼈 안쪽에서. "그는 너를 죽음에서 건지지 못한다. 봐라. 네 머리가 세고 있지 않느냐."
무진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실핏줄이 눈 전체로 번지며, 골짜기가 핏빛 유리 너머로 보였다.
"손을 다오, 무진. 네 원수가 저기 앉아 있다. 저자가 네 부모를, 네 형제를, 수백을 죽였다. 그런데 네 검은 이미 지쳤어. 나를 부르면, 지치지 않는 검을 주마."
"닥쳐." 무진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검을 쥔 손이 자기 의지 없이 방향을 틀었다.
"네가 부르지 않으면, 내가 가마."
명치의 실이 뚝, 끊기는 감각.
무천현의 검혼이 밀려났다. 그 자리를 차갑고 무거운 것이 채웠다. 무진의 눈동자가 검은 가장자리부터 붉게 얼어붙고, 살갗의 검은 흔적이 팔꿈치를 넘어 어깨로 기어올랐다. 목소리가 이제 무진의 입을 통해 나왔다.
"삼백 년 만이군." 무진의 입이 낯선 억양으로 웃었다. "산 자의 몸이라니. 따뜻해."
"무진?" 서린이 얼어붙었다.
무진의—혈검조 무한의—고개가 천천히 서린에게로 돌아갔다. 붉은 눈에 무진은 없었다.
"넌 누구지. 이 몸을 붙들고 있는 손이." 검이 서린을 향했다. "방해가 되겠어."
"무진,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혈검조는 낙엽진 따위 상관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검을 손등으로 후려쳐 부수며 서린에게 걸어갔다. 걸음마다 봉분이 짓밟혔다. 무진의 검이 서린의 목을 겨눴다. 지쳤던 검이, 정말로 지치지 않은 손에 쥐여 있었다.
"이게 네가 원하던 힘이지." 무한이 무진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지 않는 검. 지치지 않는 팔. 원수를 벨 수 있는—"
"서린을 벤다고 원수를 베는 거냐!"
서린이 물러나지 않았다. 물러나기는커녕, 겨눠진 검날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검끝이 그녀의 쇄골에 닿아 붉은 점을 냈다.
"무진." 서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가 준 그거, 여기 있어."
그녀가 품에서 낡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계율첩 사본. 손이 떨려 몇 장이 흩어졌다.
"검은 명예를 위해 뽑되, 목숨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서린이 읽었다. 아니, 외웠다. 이미 외운 지 오래인 것을. "후계자는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고—가문과 함께 검을 나눈다."
"닥쳐라, 계집."
"검은 함께 나눈다고, 무진!" 서린이 소리쳤다. 검끝이 그녀의 살을 파고들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너 혼자 죽는 방식으로 갚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저 목소리한테 몸을 내주는 게 혼자 짊어지는 거야! 네가 사라지면 우리 열아홉은 또 후계자를 잃어! 나까지 여기서 네 손에 죽으면, 그 빚은 대체 누가 갚아!"
검이 멈췄다.
붉은 눈 속에서, 무언가 흔들렸다.
"우리가 남았잖아."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너 하나 살자고 우리가 남은 게 아니야. 함께 세우자고 남은 거야. 그러니까—돌아와. 이 자식아. 그 검 치워."
무진의 입술이 벌어졌다. 무한의 억양이 아닌, 짓눌린 무진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린…"
"그래, 나야."
"팔이… 안 움직여."
"버텨." 서린이 두 손으로 검날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내가 잡을게. 너 혼자 안 놔."
"어리석은 것들." 무한이 다시 무진의 목을 눌렀다. "이 몸은 이미 내 것—"
그때 무진의 명치가, 안에서부터 하얗게 타올랐다.
무천현의 검혼이 스스로를 불살랐다. 밀려났던 조상이 자신의 존재를 연료 삼아 혈검조를 짓눌렀다. 무진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거둬지고, 검은 눈동자가 반쯤 돌아왔다.
《무진.》 무천현의 목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처음으로, 무거운 위엄이 아니라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내가 오래 못 버틴다. 나는 지금 나를 태우고 있어. 검혼이 검혼을 태우면, 다시는 부르지 못한다. 잘 들어라.》
"할아버지—"
《수명을 연료로 삼는 방식으로는, 너는 결국 삼켜진다.》 무천현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저것은 절망을 먹는다. 네가 목숨을 태울 때마다 네 절망도 함께 자란다. 강해질수록 저것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야. 이 길로는 못 이겨. 알겠느냐. 이 길로는—》
"그럼 어떻게!"
《혼자 태우지 마라. 검을 나눠라. 그 아이가 이미 답을 들고 있지 않느냐.》
무천현의 존재가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마지막 힘으로 그가 혈검조를 무진의 갈비뼈 밖으로 밀어냈다. 명치의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툭 느슨해졌다.
무진이 무릎을 꿇으며 검을 떨어뜨렸다.
서린이 그를 붙들었다. 피 흐르는 손바닥 그대로. 골짜기의 검들이 힘을 잃고 흙으로 떨어졌다. 낙엽진이 저절로 풀렸다. 진핵을 부순 것도 아닌데.
"거뒀어." 무진이 헐떡였다. "숙부가 진을… 거뒀어."
혈검조의 기운이 명치에서 조금씩 물러났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갈비뼈 안쪽 어딘가에, 발톱 자국처럼 남았다. 물러나며, 그것이 마지막으로 웃었다.
"무천현이 저를 태웠구나." 무한의 목소리가 무진의 귓속에서만 울렸다. "덕분에 저 늙은 검혼은 이제 거의 재가 됐다. 조상 하나를 태워 나를 밀어냈다니. 값비싼 저항이야."
"닥쳐." 무진이 신음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마. 급할 것 없지."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러나 그 여운이 등골을 얼렸다. "이번엔 서린이 널 붙들었다. 무천현이 널 밀어냈다. 다음엔—누가 남지? 무천현은 다 탔고, 넌 여전히 절망을 안고 있는데."
무진의 손이 명치를 눌렀다.
"다음번엔 말이다."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내가 오는 게 아니라—네가 스스로 나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침묵.
무진은 무릎을 꿇은 채 오래 숨을 골랐다. 흰머리는 이제 온통 관자놀이를 덮었고, 검은 흔적은 어깨에서 목덜미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무천현을 부르는 실이, 명치 안쪽에서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당겨도,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할아버지." 무진이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무 응답도 없었다. 삼 년을 함께 걸어온 목소리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서린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무진. 눈 떠. 나 봐."
"들려." 무진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에 붉은 기운은 없었다. 대신 물기가 있었다. "숙부가 자기를 태워서… 나를 살렸어. 조상 하나가 사라졌어. 나 때문에. 또."
"또 그 소리." 서린이 그의 뺨을 감쌌다. 손바닥의 피가 무진의 볼에 묻었다. "그거 네 탓 아니야. 그 양반이 검을 나눈 거야. 알겠어? 그게 계율이야. 나눈 거라고. 버린 게 아니라."
무진이 무언가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석실 어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느리고, 흔들림 없고, 어딘가 익숙한 발소리. 폐허를 제집처럼 걷던 그 걸음. 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무영천이 검을 거둔 채, 봉분 사이로 걸어 나왔다. 낙엽진을 풀어놓은 손에는 이제 검이 없었다. 그늘을 벗어난 그의 얼굴이 새벽빛에 드러났다. 무진의 아버지를 반쯤 닮은 얼굴이었다. 그가 무진의 세어버린 머리와 목덜미의 검은 흔적을 오래 바라보았다.
"거봐라." 무영천이 조용히 말했다. 슬픔이 밴 목소리였다. "그 검을, 버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