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은 서린의 소매를 놓지 않았다.
붉은 실핏줄이 번진 눈동자 안쪽에서, 그 목소리가 또 한 번 밀려 나왔다. 너를 살리려 판 것이다. 무천현의 것이 아니었다. 낮고 탁했다. 목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 봉인검이 잠긴 그 자리에서 올라오는 소리였다.
"무진." 서린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돌아와. 나 봐. 여기 봐."
무진은 눈을 깜빡였다. 산길 초입의 젖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새벽 빛이 서린의 흉터 진 턱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얼굴을 붙들자, 명치 안쪽에서 팽팽하게 당기던 실이 다시 늘어졌다.
"괜찮아." 무진이 소매를 놓았다. 손끝이 떨렸다. "괜찮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서린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네 눈, 지금 사람 눈이 아니야. 그 목소리는 뭐야. 방금 뭐가 너한테 말 걸었어."
"모른다." 무진은 품 안의 장부 한 장을 눌렀다. 밀랍을 긁어낸 자리, 손톱으로 파낸 세 글자. 무영천. 열두 살의 자신을 성문 밖으로 안아 내보내던 그 손. "그래서 물어야 할 데가 있어."
산을 오르는 내내 무진은 말이 없었다. 서린이 세 번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위패당 문턱을 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결계 안은 삼 년째 그대로였다. 수백 자루의 위패검이 제단을 향해 도열해 있고, 가장 앞줄 한가운데 초대 검조 무천현의 검이 꽂혀 있었다. 무진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 돼." 서린이 뒤에서 팔을 잡았다. "또 태우려고? 눈이 그 꼴인데 강림을 해? 미쳤어?"
"물어봐야 할 게 있다." 무진이 손바닥의 아문 자상을 다시 갈랐다. 피가 배어 나왔다. "삼 년 동안 이 검이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무진—"
"딱 한 번이면 돼."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 검자루의 홈으로 스몄다. 위패당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도열한 검들이 일제히 낮게 울었다. 무진의 흰머리가 한 줌 더 세었고, 손목의 마른 살갗이 손등 안쪽으로 더 번졌다. 대가는 언제나 먼저 왔다.
검신 위로 서릿발 같은 기운이 서리더니, 무진의 어깨에 노년의 무게가 얹혔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등이 곧게 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또 나를 불렀느냐." 무천현이었다. 위엄이 밴, 물러설 곳 없는 음성. "네 살갗이 아직도 식지 않았다. 이레 전 제갈운 앞에서 태운 것이 아물지도 않았거늘."
"거짓말쟁이."
무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무천현의 기운이 잠시 멈췄다.
"삼 년 전 밤." 무진은—혹은 무진의 몸을 빌린 두 자아가 함께—말을 이었다. "관제묘에서 흑철련 놈들을 벨 때, 당신은 습격자를 보며 이름을 말하려 했지. '무영—'까지. 그리고 스스로 성대를 붙잡아 삼켰어. 나는 그때 못 들은 척했다. 못 들었다고 믿고 싶었으니까."
무진의 손이 품속 장부를 꺼내 제단 위에 펼쳤다. 손톱으로 파낸 세 글자가 새벽 빛에 드러났다.
"이제 다 안다. 무영천. 그 밤 봉인고 문을 안에서 연 자. 열두 살의 나를 성 밖으로 치워 살린 자. 당신이 삼킨 이름이 이거였지?"
검신의 서릿기운이 흔들렸다. 무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무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검 안에 갇힌 삼백 년 조상 전부가, 처음부터 알았지? 문을 연 자가 누군지. 알면서 나한테 말 안 했지?"
위패당 전체가 진동했다. 도열한 검들이 서로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항의 같기도, 흐느낌 같기도 했다.
한참 만에, 무진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았다."
서린이 뒤에서 숨을 삼켰다.
"우리는 알았다." 무천현이 인정했다. "그날 봉인고의 걸쇠를 안에서 젖힌 손이 누구의 것인지, 진핵에 옥추를 꽂은 순서가 누구의 기억에서 나온 것인지. 검혼은 검가의 피를 안다. 무영천의 검은 방계였으나 정통의 맥을 이었지. 그 손이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위패당 안에서 그것을 느꼈다."
"그런데 왜!" 무진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강림 중인 몸이 스스로 검자루를 붙들었다. "왜 삼 년을 침묵했어. 왜 나를 엉뚱한 방향으로 헤매게 뒀어. 마교 잔당, 외부 습격, 봉인고 흔적—내가 이 손으로 하나하나 파낼 동안 당신들은 답을 알고 있었잖아!"
"들어라." 무천현의 음성이 처음으로 무겁게 흔들렸다. "무영천은 검가를 팔았다. 그러나 그는 위패당은 팔지 않았다."
무진의 몸이 굳었다.
"멸문의 밤, 온 산장이 불탔으되 이 결계만은 온전했다. 왜라고 생각하느냐. 누군가 사람은 죽게 하고, 검혼만은 살려 두었기 때문이다. 그 손은 화탄이 위패당에 닿지 않도록 진법을 걸어 두었지. 그는 검가의 육신은 버렸으나, 검가의 넋은 지키려 했다."
"그게…"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게 무슨 미친 논리야."
"우리도 그 밤을 이해하려 삼 년을 다투었다." 무천현이 말했다. "그자의 손이 우리를 태워 죽였다. 동시에 그자의 손이 우리를 이 결계 안에 남겼다. 원수이자 지킨 자. 우리는 그 모순 앞에서 갈라졌다. 어떤 검조는 그를 저주했고, 어떤 검조는—혈통과 검혼이 살아남은 것만으로 그의 죄를 반쯤 접었다. 그래서 아무도 후계자 앞에서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다. 우리조차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으니."
무진은 오래 침묵했다. 강림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흰 눈썹 아래, 붉게 물든 눈에서 물기가 배어 나왔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무진이 낮게 말했다. "배신자를 감쌌어. 삼백 년 검가의 넋 전부가, 나를 죽이려 문을 연 그 인간을 반쯤 용서하고 있었어."
"무진."
"수백이 죽었어! 검 한 번 못 뽑고! 대장장이 노인의 아들도, 서린이 삼 년 먹인 열아홉 명의 부모도, 형제도! 그 인간이 그 밤에 죽였어! 그런데 검혼이 살아남았으니 됐다고?"
무진의 손이 제단의 위패검을 그러쥐었다. 다른 손이 옆줄의 강한 검조—무천려의 검자루로 향했다. 저 검을 함께 강림시키면, 지금 이 분노를 실어 무영천의 검총까지 단숨에 날아갈 수 있었다. 대가가 몇 달이든 상관없었다.
"멈춰라."
무천현의 기운이 무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제어하지 못하는 기이한 순간, 검조의 의지가 후계자의 팔을 눌렀다.
"네 눈을 보아라. 이미 잠식이 눈까지 올라왔다. 여기서 무천려까지 겹쳐 강림하면, 오늘 밤 안으로 네 자아는 절반이 밀려난다. 그 몸은 네 것이 아니게 된다."
"상관없어. 나만—"
"'나만 죽으면 된다.' 또 그 말이냐." 무천현의 음성이 채찍처럼 내리쳤다. "너는 아직 무영천의 이유를 다 듣지 못했다. 그가 왜 육신을 버리면서까지 넋을 지켰는지, 왜 열두 살의 너를 살렸는지. 우리조차 반밖에 모른다. 원수의 목을 따려거든, 그 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먼저 들어라. 검가의 후계자는 눈을 감고 검을 뽑지 않는다."
무진의 손이 무천려의 검자루 앞에서 멎었다. 손끝이 검자루 한 치 앞에서 떨렸다.
"검은 살기 위해 뽑는 것이다." 무천현이 목소리를 낮췄다. "죽기 위해 뽑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삼 년간 이 검 속에서 그 한 문장을 네게 가르치려 했다. 오늘 네가 나를 거짓말쟁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것만은 믿어라. 진실을 손에 쥐려면, 진실을 말할 자가 살아 있어야 한다. 무영천이 죽으면, 그 밤의 절반은 영원히 묻힌다."
위패당의 진동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무진의 손이 무천려의 검에서 떨어졌다.
강림이 끝났다. 무진의 등이 앞으로 꺾이고, 무천현의 위엄이 검신 속으로 물러났다. 무진은 제단 앞에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흰머리가 관자놀이까지 번졌고, 손목의 마른 살갗이 손등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러나 눈가의 붉은 실핏줄만은—강림을 끝냈는데도—사라지지 않았다.
서린이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됐어. 됐으니까 일어나."
"들었지." 무진이 갈라진 목으로 말했다. "무영천이 위패당은 지켰다는 거. 사람은 죽이고, 넋은 살렸다는 거."
"들었어." 서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인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직접 물어야 해." 무진은 서린의 팔을 짚고 일어섰다. "검조들도 반밖에 모른다잖아. 그 인간 입으로 들어야 나머지 반이 채워져."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안다." 무진이 품에서 흑철련 장부를 다시 꺼냈다. 매매 기록 하단, 인수 물자가 향한 곳. 봉인지로 덧칠되지 않은 지명 하나가 남아 있었다. "화탄과 옥추가 마지막으로 실려 간 곳. 흑철련 접경, 검총(劍塚)."
"검총?" 서린이 미간을 좁혔다. "부러진 검을 묻는 그 폐허? 거긴 흑철련도 정파도 발을 안 들이는 무연고 무덤 자리야."
"그러니 숨기 좋지." 무진은 장부를 접었다. "삼 년간 죽은 사람 행세를 하려면, 산 사람이 없는 곳이어야 하니까."
서린이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손끝이 검게 갈라진 살갗에 닿았다. "무진. 검총까지 가려면 흑철련 접경을 통과해야 해.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넌 또 강림을 할 거고, 또 태울 거야. 그러다 검총에 닿기도 전에 네 몸이 그 목소리한테 넘어가면?"
"그래서 준비가 필요해." 무진은 제단을 돌아보았다. 강한 검조들의 검이 도열해 있었다. "무천려는 진법을 읽었지. 무천현은 검격이 최강이고. 검총 근처에서 급습이 오면, 격이 높은 검조를 하나 골라 단번에 끝내야 해. 여러 번 태우는 것보다 한 번 크게 태우는 게—"
"그게 더 위험하잖아!"
"덜 위험해." 무진이 눈을 마주 보았다. 붉게 물든 그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잠식은 강림 시간에 비례해. 짧고 강하게 끝내면, 자아가 밀리기 전에 검을 거둘 수 있어. 계율첩에 그렇게 쓰여 있었어. 네가 준 그거."
서린이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검은 함께 나눈다—그 계율첩이, 이번엔 무진의 무기가 되어 돌아온 셈이었다.
"혼자 안 가." 서린이 말했다. "나도 간다. 검총이든 흑철련 접경이든. 너 혼자 보내면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뻔해."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엔 거절하지도 않았다. 그 작은 침묵이 서린에게는 승낙이었다.
두 사람이 위패당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제단 뒤편,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울렸다.
무진이 멈춰 섰다. 지금껏 강림을 거듭할 때마다 미세하게만 떨리던 그것—위패당 최심부의 봉인검. 아직 아무도 열지 못한, 초대 이전의 검. 오늘은 미세하지 않았다. 검신 전체가 눈에 보일 만큼 좌우로 흔들렸다. 검을 감싼 봉인의 부적이 한 장, 두 장, 스스로 떨어져 나갔다.
"무진." 서린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저거… 저거 원래 저래?"
"아니." 무진의 목이 말랐다. "저건, 삼 년 동안 한 번도—"
봉인검이 마지막으로 크게 요동쳤다. 그리고 위패당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새벽 빛이 닿지 않는 그 어둠에서, 낯설고 탁한 목소리가—며칠 전 산길에서 무진의 눈을 붉게 물들였던 바로 그 목소리가—이번엔 온 위패당에 울려 퍼졌다.
"무진."
무진의 눈가 실핏줄이 확 번졌다. 명치 안쪽 실이 다시 팽팽해졌다.
"네가 원수를 만나러 가는구나." 목소리가 웃었다. 웃음소리가 쇠를 긁는 것 같았다. "잘 가거라. 그 검총에서 네가 진실의 절반을 듣고 나면, 네 절망은 지금의 갑절이 될 것이다. 그때가 좋겠지. 나를 부르기에."
"누구야." 무진이 봉인검을 향해 목소리를 짜냈다. "누구냐고."
"곧 알게 된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무천현이 네게 검격을 빌려주고, 무천려가 진법을 읽어 준들, 그들은 너를 죽음에서 건지지 못한다. 나는 다르다. 나는 네게 죽지 않는 힘을 줄 수 있다. 조건은 단 하나."
봉인검의 마지막 부적 한 장이, 스르르 떨어졌다.
"네 안엔 나를 부를 절망이 있다."
무진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명치를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