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밀서의 먹은 손바닥 위에서 아직 번지고 있었다. 무진은 젖은 종이를 접지도 펴지도 못한 채 이름 석 자를 노려봤다.

제갈운.

'검조.' 그는 다시 안을 향해 물었다. '이 이름을 알아? 무영천은 삼키더니, 이자에 대해선 왜 아무 말도 없지.'

위패검을 쥔 손끝으로 서늘함만 흘러들었다. 검조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습격자를 보며 '무영—'까지 뱉다 스스로 성대를 붙잡던 그 침묵. 무진은 이를 악물었다. 조상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를 어둠 속에 세워두고 있었다.

"들어가자." 서린이 그의 팔뚝을 잡아끌었다. 턱의 흉터가 빗물에 번들거렸다. "비 맞으면 너 또 사흘 앓아. 그 몰골로 앓으면 진짜 죽어, 너."

"제갈운이 누군지 알아?"

"몰라. 근데 무림맹 검객이 흑철련한테 값을 불렀다는 게 문제야. 정파 놈이 흑도한테 손을 벌렸다는 건—" 서린이 밀서를 낚아채 품에 쑤셔 넣었다. "그 진실이 정파 안에서도 못 꺼낼 물건이란 소리지. 들어가. 지금 머리 굴릴 몸 상태 아니야."

무진은 무릎 꿇은 사내를 마지막으로 내려다봤다. 검 끝을 목에서 거두자, 사내가 진흙에 얼굴을 처박고 기어 달아났다. 살려 보냈다. 언제나처럼.

이레가 지났다.

관제묘의 아침은 젖은 짚 냄새로 시작됐다. 무진은 마당 한쪽에서 위패검을 무릎에 눕히고 날을 닦고 있었다. 손등의 마른 살갗은 손목을 넘어 팔뚝 안쪽까지 옅게 번져 있었다. 스물셋의 팔이 아니었다.

그때 대장장이 노인이 문가로 달려왔다. 숨이 목에 걸려 있었다.

"후계자님. 산 아래에…… 낯선 자가. 혼자, 검 한 자루만 차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 척후가 붙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곧장 이리로 옵니다."

무진은 검 닦던 천을 내려놨다. "몇이야."

"하나입니다. 하나뿐인데—" 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하나가, 산길의 검막을 다 읽으며 올라옵니다. 함정 진법을 밟지 않고 피해서요. 검가 사람이 아니면 못 읽을 배치를."

서린이 벌떡 일어섰다. "그럼 우리 은신처를 이미 안다는 소리잖아."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마당 입구의 넝쿨문이 소리 없이 젖혀졌다.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청삼에 흙 한 점 묻지 않았고, 젖은 산길을 올라온 자의 숨은 어디에도 없었다. 등에 검 한 자루. 나이는 무진보다 두어 살 위쯤. 얼굴엔 웃음이 걸려 있었는데, 그 웃음이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무천검가의 마지막 후계자." 사내가 포권했다. "먼 길이었소. 산 아래에서 사흘을 기다렸는데, 그쪽 사람들 경계가 어찌나 촘촘한지. 결국 내가 올라오는 수밖에."

"이름을 대."

"제갈운." 그가 웃음을 조금 넓혔다. "무림맹 소속. 요즘 대륙에서 검을 좀 뽑는다는 소리를 듣소."

마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유민들이 무기를 집어 들었고, 서린이 무진의 앞으로 반걸음 나서며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

"밀서의 그 제갈운." 무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가문의 진실을, 돈 주고 사려던 자."

"정확하오." 제갈운은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 밀서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지만. 흑철련이 그쪽 은신처를 쳤다는 소문을 듣고 왔소. 값을 치른 물건이 엉뚱한 데로 흘러가면 안 되니까."

"값을 치렀다고." 서린이 코웃음을 쳤다. 입담이 튀어나왔다. "정파 검객이 흑도한테 은자 뿌려서 남의 집 멸문을 사재기해? 그거 맹규 위반 아냐? 걸리면 목 날아가는 거 아니고?"

제갈운의 시선이 서린에게 잠깐 머물렀다. "말이 험한 분이시군. 맞소. 걸리면 내 목이 날아가지. 그러니 나도 필사적이오." 그가 다시 무진을 봤다. "본론을 말하겠소. 나는 무천검가 멸문의 진실을 원하오. 전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문을 열었는지."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쓸 데가 있소." 웃음이 사라졌다. "지금 무림맹은 맹주 자리를 두고 파벌이 갈렸소. 검가 멸문 사건을 서둘러 덮은 손이 그 파벌 한복판에 있소. 내가 그 진실을 쥐면—" 그가 손바닥을 폈다 쥐었다. "판을 엎을 수 있지."

무진의 안에서 무천현의 서늘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검조가 무언가에 반응했다. 무진은 그 떨림을 붙들어 두려 애썼다.

"그래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거래요." 제갈운이 한 걸음 다가섰다. "나는 그쪽이 모르는 걸 알고, 그쪽은 내가 모르는 걸 아오. 나는 멸문 사건을 덮은 자의 이름을, 맹 안에서 캐낸 정보를 가지고 있소. 그쪽은 그날 밤 위패당 안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오직 생존자만 아는 걸 가졌지. 우리가 각자 절반씩 내놓으면, 둘 다 온전한 그림을 얻소."

솔깃한 말이었다. 무진은 그걸 알아차렸기에 더 경계했다.

"무진." 서린이 낮게 그를 불렀다. 그의 소매를 손가락으로 잡았다. "저 얼굴 봐. 저건 진실이 궁금한 얼굴이 아니야. 저 사람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진실의 값이야. 우리 집안 멸문이 저 사람한테는 맹주 자리 살 밑천인 거라고. 넘겨주는 순간 우린 저 사람 정치판의 패로 팔려. 알아?"

제갈운이 서린 쪽으로 눈을 접었다. 화내지 않았다. "부인하지 않겠소. 나에게 그 진실은 값이 매겨진 물건이오. 하지만—" 그가 무진을 정면으로 봤다. "그쪽에게도 값이 있는 건 마찬가지 아니오? 복수라는 값. 나는 최소한 정직하게 값을 부르오. 위선을 떨진 않지."

무진은 검을 세웠다.

"당신이 정직한지 어떤지, 나는 몰라. 다만 하나는 알아야겠어." 그가 검집에서 반 뼘쯤 날을 뽑았다. 마당의 유민들이 숨을 죽였다. "당신이 정말 판을 엎을 만한 검객인지. 진실을 지킬 힘도 없는 자한테 가문을 넘길 순 없으니까."

"나를 시험하겠다?" 제갈운이 웃었다. 이번엔 눈까지 닿는 웃음이었다. "좋소. 아주 좋아. 그래야 거래도 값이 서지."

말이 끝나기 전에 무진은 손바닥을 그었다. 피가 위패검 날에 번졌다.

'무천현.'

부름에 검조가 응했다. 무진의 눈동자 색이 짙어지고, 등뼈가 곧게 펴졌다. 스물셋의 몸에 삼백 년 검리가 내려앉았다. 그 순간에도 위패당 방향—산 정상 폐허 쪽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울렸다. 가장 깊은 곳, 아무도 열지 못한 봉인검이. 무진의 명치 안쪽에서 그 진동이 실처럼 당겨졌다. 강림할 때마다였다. 강림할 때마다 그 검이 반응했다.

지금은 그걸 헤아릴 틈이 없었다.

무진이 발을 뗐다. 검조의 보법이었다. 마당의 진흙이 발밑에서 튀지 않았다.

제갈운이 검을 뽑았다. 뽑는 동작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검이 나와 있었다는 편이 옳았다. 그 순간 무진의 살갗을 검압이 짓눌렀다. 마당 전체의 공기가 검객 하나에게 눌려 아래로 가라앉았다. 노인이 비틀거렸고, 아이 하나가 주저앉았다.

'당대 최강이라는 말이, 허명이 아니었군.' 무천현의 목소리가 무진의 머릿속에서 낮게 울렸다. '이자의 검은…… 산 자의 검이다. 나는 죽은 자다. 짧은 강림으로는 밀린다. 조심해라.'

검이 부딪쳤다. 한 번.

무진의 팔이 통째로 뒤로 밀렸다. 발이 진흙을 반 자나 파고 물러났다. 제갈운의 한 수는 무겁지 않았다. 무겁지 않은데도 밀렸다. 힘이 아니라 결이었다. 물살처럼 무진의 검로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결.

두 번째 수가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여기서 무진 안의 무천현이 결단했다. 밀리는 힘으로 맞받지 않았다. 검조가 삼백 년 전 어느 밤 마교의 마검을 흘려보냈던 심득—맞서지 않고 상대의 결에 제 검을 실어 방향만 비트는 한 수.

제갈운의 검이 무진의 목 옆을 스쳤다. 반 치 차이로. 그리고 그 힘 그대로 옆으로 흘러 허공을 갈랐다. 제갈운의 몸이 처음으로 균형을 잃고 반걸음 어긋났다.

강림이 풀렸다. 무진의 눈동자 색이 돌아왔다. 무릎이 후들거렸고, 관자놀이가 터질 듯했다. 삼백 년 검리를 지탱할 수명이 또 한 줌 타 없어졌다. 그는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서 있었다.

마당이 조용했다.

제갈운이 어긋난 발을 천천히 제자리로 옮겼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검을 내려다봤다. 방금 흘려진 궤적을 되짚는 눈이었다.

"방금 그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백 년 전 무천검가 이대 검성이 마교 검마를 잡을 때 쓴 흘림수요. 기록에만 남은. 실전에서 본 자는 이미 다 죽었소." 검을 검집에 넣었다. 소리가 났다. "그걸 스물셋짜리 애송이가 내 검을 상대로 썼단 말이지."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무진이 거친 숨을 골랐다. "확인했으면 됐어."

"확인했소." 제갈운이 포권했다. 이번엔 웃음이 아니었다. 무인이 무인에게 갖추는 예였다. "인정하오. 그쪽은 진실을 지킬 자격이 있소. 거래할 만하오."

서린이 무진을 부축하며 이를 갈았다. "저 미친놈이. 또 태웠어. 이깟 자존심 세우자고. 네 목숨이 몇 년어친 줄 알아?"

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치 안쪽에서, 방금 그 강림이 남긴 진동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산 정상 봉인검의 실이, 아까보다 조금 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강림할수록 그것이 깨어난다. 무진은 그 감각을 처음으로 또렷이 자각했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검조.' 그는 속으로 물었다. '위패당 제일 깊은 그 검. 강림할 때마다 우는데. 저게 뭐야.'

무천현은 침묵했다. 이번 침묵엔 서늘함이 아니라, 낯선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제갈운이 넝쿨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갈 사람의 걸음이었다.

"거래는 성립됐소. 그쪽이 위패당에서 본 것을 정리해 두시오. 나는 다음에 맹 안의 이름을 가져오겠소." 그가 멈칫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하나. 거래의 성의로, 값을 받지 않고 미리 알려주는 정보가 있소."

무진이 고개를 들었다.

"멸문 사건을 덮은 건 무림맹 고위 인사요. 이건 그쪽도 짐작했을 거요." 제갈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내가 캐다 보니, 그 고위 인사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덮었는가—거기에 걸리는 게 하나 있소."

"뭐야."

"멸문을 안에서 도운 자가." 제갈운이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 눈이 무진을 똑바로 겨눴다. "죽지 않았소. 검가의 혈족이, 살아 있소. 그자가 맹 고위 인사와 지금도 선이 닿아 있고."

무진의 손끝이 얼어붙었다.

위패검 자루를 쥔 손가락이 감각을 잃었다. 무천현의 침묵이, 그 삼킨 이름이, 명치 안쪽 봉인검의 진동이—전부 한 점으로 모여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살아 있는 혈족.

그에게 살길을 열어주겠다던, 방계의 그 어른.

"이름은." 무진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그 혈족 이름은."

제갈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넝쿨문을 젖히며, 등 뒤로 한마디를 흘렸다.

"그건 값을 치러야 할 물건이오. 다음에."

문이 닫혔다. 마당엔 무진 혼자 얼어붙은 채, 서린의 부축을 받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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