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 회차는 아직 그래픽 노블 장면이 제작되지 않아 일반 노블로 보여드려요.

발소리는 계단 입구에서 더 내려오지 않았다.

무진은 검날을 촛불 쪽으로 기울인 채 그림자를 읽었다. 도굴꾼이라면 벌써 뛰어내려 왔을 것이다. 이 걸음은 그가 검을 겨눈 것을 알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안전하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내려오지 마."

무진의 목소리가 지하의 눅눅한 공기를 갈랐다. 세 번째 이름이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방계의 어른, 폐허를 찾아와 그의 어깨를 짚던 얼굴—그자가 제 발로 돌아온 것인가.

"내려가면 그쪽 검이 나를 벨 것 같아서 말이지."

여자의 목소리였다. 조롱기와 피곤이 반씩 섞인 음성. 무진의 손끝에서 힘이 반 박자 풀렸다.

"난 무기 안 들었어. 그리고 무천진의 위패검을 훔치러 온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 검들, 너 아니면 뽑히지도 않잖아."

검가의 내부 사정을 아는 말이었다. 도굴꾼은 저런 말을 하지 못한다. 무진은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이름을 대."

"서린. 세 살 아래 사촌누이도 못 알아보는구나, 무천검가 마지막 후계자님."

그 이름에 무진의 숨이 멎었다. 서린. 멸문지야 사흘 전, 성 아래 약초방으로 심부름을 갔던 아이. 그날 밤 산장에 없었던, 몇 안 되는 얼굴. 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람 중 하나.

무진은 검을 내리지 않고 계단 아래에 섰다.

"서린은 그날 밤 산장 밖에 있었어. 그 뒤로 소식이 없었고. 네가 서린이라는 증거는."

계단 위 그림자가 무언가를 꺼냈다. 종이 스치는 소리. 낡은 책 한 권이 계단을 굴러 촛불 밑까지 떨어졌다. 무진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가죽 표지에 낙인처럼 새겨진 무천(武天) 두 글자. 검가 후계자만이 지니는 계율첩이었다. 그의 것은 멸문의 밤에 불탔다. 그런데 이건—

"큰집 서고에 사본이 하나 더 있었어. 내가 챙겨 나왔지. 불타는 산장에서, 시신들 사이를 기어서."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무진은 검을 벽에 세워두고 여자가 내려오도록 두었다. 촛불 아래로 걸어 들어온 그녀는 무진보다 반 뼘쯤 작았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짧은 흉터가 턱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매만은 그가 기억하는 아이의 것이었다. 열두 살 서린. 지금은 눈가에 잔주름이 앉은 스물다섯.

그녀가 무진의 얼굴을 훑었다. 관자놀이의 흰머리, 손목까지 번진 마른 살갗. 표정이 굳었다.

"……너, 손이 왜 그래."

"신경 쓸 것 없어."

"신경 쓸 것 없다고?" 서린의 목소리가 치솟았다. "나이 든 흔적이 손목까지 올라왔잖아. 검혼을 부른 거지? 몇 번이나. 대가가 수명이라는 건 계율첩에도 적혀 있어. 넌 지금 스스로를 태우고 있는 거고."

"내가 태울 수명이 있어서 태우는 거야." 무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걸로 배후를 찾을 수 있다면."

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무진의 손에 들린 계율첩을 낚아채 거칠게 페이지를 넘겼다. 손끝이 한 구절 위에서 멈췄다. 그녀가 그 줄을 손톱으로 짚어 무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검은 명예를 위해 뽑되, 목숨은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후계자는 홀로 짊어지지 않고, 가문과 함께 검을 나눈다.

"읽어. 소리 내서."

"서린."

"읽으라고."

무진은 읽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돌렸다. 그 구절은 어릴 적 큰아버지가 회초리로 손등을 때려가며 외우게 한 문장이었다. 홀로 짊어지지 않는다. 그 계율을 지켜줄 가문은 이제 없었다.

"가문이 사라졌어." 무진이 낮게 말했다.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 나 혼자 남았으니, 내가 다 짊어지는 게 맞아."

서린이 계율첩을 탁 덮었다.

"혼자 남았다고 누가 그래."

그 말이 지하의 공기를 흔들었다.

"산 아래에 검가 사람이 열아홉 명 살아 있어. 하인이었던 사람, 마부, 대장간 노인, 연무장에서 물 나르던 아이들. 그날 밤 성 밖에 있었거나, 시신 더미에서 기어 나왔거나. 나는 삼 년 동안 그 사람들을 먹이고 숨겼어. 무천검가 유민이라는 게 알려지면 관도 맹도 흑철련도 우릴 그냥 두지 않으니까." 서린이 무진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런데 너는, 그 사람들 존재도 몰랐지."

무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난 네가 위패당에서 미쳐가는 동안, 열아홉 명 목숨을 붙들고 있었어. 그러니까 네가 함부로 죽으면 안 되는 이유가, 너 하나만이 아니라는 거야."

무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손등의 마른 살갗을 소매로 덮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회피였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봄비가 흩뿌렸다. 서린은 앞장서 걸으며 무진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폐허를 벗어나 반 시진쯤 내려가자, 무너진 옛 관제묘가 나타났다. 담쟁이가 지붕을 뒤덮어 멀리서는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서린이 문 앞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안에서 빗장 벗기는 소리가 났다.

무진이 문턱을 넘어서자, 온기와 함께 시선들이 쏟아졌다. 화롯불 주위에 모인 사람들. 무진은 그 얼굴들을 하나씩 훑었다. 다리를 저는 노인. 팔이 하나 없는 중년 사내. 화상 흉터로 뺨이 일그러진 여자. 그리고 아이 셋.

노인이 먼저 일어섰다. 지팡이에 의지해 절뚝이며 다가와, 무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대장간에서 검을 벼리던 노인이었다. 무진의 첫 검을 만들어준 손.

"도련님……."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살아 계셨습니까. 정말로."

무진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흉터 진 뺨을 타고 내렸다.

"큰마님이, 마지막에 도련님을 성 밖으로 보내신 게,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 아이들 아비 어미가 다 죽는 걸 보면서도, 저는 도련님만 살아 계시면 검가가 끝난 게 아니라고……."

무진의 손이 떨렸다. 죄책감이 목을 조여왔다. 이 사람들은 그가 살아남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무진에게 이들의 생존은 다른 무게였다. 그가 그날 밤 산장에 있었다면, 검혼을 강림해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대장장이의 아들이, 저 아이들의 부모가.

"제가……." 무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그날 밤 산장에 없어서, 여러분의……."

"닥쳐."

서린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화롯불 옆에 웅크린 아이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애들 앞에서 자책하는 소리 하지 마. 애들은 네가 무천검가 후계자라는 것만 알면 돼. 살아남은 게 죄인 얼굴을 하고 온 어른은, 저 애들한테 아무 힘도 못 돼."

무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밖에서 개가 짖었다. 짧고 다급한 소리 뒤에 뚝 끊겼다.

서린의 손이 허리춤 단검으로 갔다. 무진은 이미 몸을 돌려 문을 향해 있었다.

"불 꺼." 서린이 낮게 외쳤다. 유민들이 화롯불에 흙을 끼얹었다. 어둠이 관제묘를 삼켰다.

담장 너머로 발소리가 번졌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여섯, 일곱. 무거운 군화가 젖은 흙을 밟는 소리. 도굴꾼의 어수선함이 아니라 훈련된 자들의 정렬된 움직임이었다.

"흑철련이야." 서린이 이를 갈았다. "이 근방에서 저런 발맞춤을 하는 건 그놈들뿐이야. 우릴 찾아냈어. 삼 년을 숨었는데."

무너진 담 틈으로 횃불이 어른거렸다. 사내 하나가 문 쪽을 향해 외쳤다.

"검가 잔당은 값이 나가지. 산 채로 넘기면 흑철련이 두둑이 쳐준다더군. 애새끼도 상관없다니까 편하게 가자고."

무진은 검을 뽑았다. 서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일곱이야. 네가 검혼을 부르면 또 수명을—"

"열아홉 명이라고 했지."

무진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중 아무도 여기서 안 죽어."

그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섰다. 빗물이 그의 흰머리를 적셨다. 검날에 왼손 손바닥을 그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자상 위로 새 피가 배어 나왔다. 그 피를 검신에 발랐다.

"무천현."

핏방울이 검을 따라 흘렀다. 지하의 그 무게가 다시 어깨를 눌러왔다. 시야가 한 겹 뒤집히고, 서늘한 감각이 척추를 따라 올라왔다. 무진의 발이 저절로 자세를 잡았다—삼백 년 전 검조의 보법으로.

습격조 하나가 창을 내질렀다. 무진의 몸이 반 뼘 옆으로 흘렀다. 창날이 빗물을 갈랐고, 그의 검은 이미 창대를 타고 올라 사내의 손목을 스쳤다. 창이 진흙에 떨어졌다.

"검가 놈이 아직 검을 든다고?"

두 번째, 세 번째가 동시에 덤볐다. 무천현의 검혼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진의 몸을 통해 흐르는 검격은 크지 않고 정확했다. 한 걸음에 한 명, 손목·오금·어깨. 죽이지 않고 무너뜨리는 검. 검은 살기 위해 뽑는 것—지하에서 검조가 남긴 말이 몸 안에 배어 있었다.

네 번째가 등 뒤에서 도를 휘둘렀다. 무진의 검이 뒤도 보지 않고 도신을 받아 흘렸다. 그 순간, 무진의 입이 열렸다. 검조의 목소리가 무진의 성대를 빌려 새어 나왔다.

"그날 밤에도, 이자와 같은 눈을 한 자가 문을 열었다. 그자의 이름은…… 무영—"

말이 뚝 끊겼다.

검혼이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무진의 목구멍에서 그 이름의 나머지가 억지로 삼켜졌다. 마치 검조가 무진의 성대를 강제로 붙잡은 것처럼. 무진의 눈동자 색이 옅게 흔들렸다가, 검조의 것으로 다시 굳었다.

무진은—아니, 무진 안의 검조는 남은 세 명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마지막 사내가 진흙에 무릎 꿇고 검 끝을 목에 받은 채 떨었다.

강림이 풀렸다. 시야가 돌아왔다. 관자놀이가 터질 듯 아팠다. 또 흰머리가 늘었을 것이다. 무진은 개의치 않았다.

관제묘 문가에서 유민들이 그를 보고 있었다. 대장장이 노인이, 화상 흉터의 여자가,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 무진은 빗물과 피에 젖은 채 검을 세우고 서 있었다. 열아홉 명 앞에, 무천검가 후계자가 처음으로 검을 세운 밤이었다.

노인이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번엔 눈물이 아니라, 오래 잊고 있던 예를 갖추는 무인의 자세로.

무진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대신 무릎 꿇은 사내에게 검을 겨눈 채, 자기 안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방금, 무슨 이름을 말하려던 거지.'

검혼은 침묵했다. 지하에서처럼, 그 침묵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무영—까지 말했어. 무영, 무영천. 방계의 어른. 나에게 살길을 열어주겠다던 그 사람 맞아? 검조, 당신은 알고 있는 거야?'

돌아온 것은 아무 말도 없는 서늘함뿐이었다. 검조는 아는 것을 삼켰다. 검가의 조상들이, 진실을 알면서 무진에게 말하지 않는 이유가 분명 있었다.

서린이 다가와 무릎 꿇은 사내의 품을 뒤졌다. 젖은 기름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내 펼쳤다. 밀서였다. 흑철련의 인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

"이건 잔당 사냥 명령서가 아니야." 서린의 눈이 글자를 훑으며 좁아졌다. "우릴 잡는 건 곁다리였어. 진짜 목적은 따로 있어."

무진이 젖은 종이를 넘겨받았다. 빗물에 번진 먹 사이로 한 줄이 또렷했다.

—무천검가 멸문의 진실을 사려는 자에게 넘길 것. 값을 부른 자, 무림맹 검객 제갈운(諸葛雲).

무진의 손끝에서 밀서가 떨렸다.

가문의 진실을. 사려는 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무진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자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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