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으로 바람이 밀려들자 위패당의 촛불이 일제히 눕는다.
무진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숨을 죽였다. 사흘 전부터 산 아래에서 어른거리던 그림자들이 마침내 올라온 것이다. 대전 무너진 기둥 사이로 발소리가 셋, 넷, 다섯. 아니, 여섯이었다. 쇠못 박힌 신발이 불탄 마룻바닥을 밟을 때마다 재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 안이다. 결계 안쪽만 멀쩡하다고 했지."
굵은 목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무진은 벽에 등을 붙인 채 낡은 검 한 자루를 쥐었다. 날이 세 군데나 이 빠진, 아버지의 유품도 아닌 잡검이었다. 진짜 검들은 지금 그의 눈앞, 위패당 제단 위에 수백 자루로 꽂혀 있었다. 손대는 순간 목숨을 갉아먹는 것들.
문이 열리는 대신 발로 걷어차였다. 나무 문짝이 경첩째 떨어져 나가며 흙먼지가 솟았다.
"오, 애송이가 하나 지키고 있었네."
앞장선 사내가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씩 웃었다. 얼굴에 칼자국이 세 줄. 그 뒤로 다섯이 부챗살처럼 퍼졌다. 손에 든 것이 창, 철퇴, 그물, 짧은 쇠뇌. 도굴이 아니라 사냥을 준비한 자들이었다.
"검가의 마지막 강아지라던 그놈이냐?" 칼자국이 도끼로 제단을 가리켰다. "저 검들, 흑철련이 자루당 금 백 냥에 산다더라. 비켜라. 다치기 싫으면."
"나가."
무진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실을 여유가 없었다.
"여긴 무덤이다. 당신들이 밟는 재가 전부 사람이었어."
"허, 말은 곱게 하네."
칼자국이 손짓하자 오른편 사내가 쇠뇌를 겨눴다. 시위가 튕기는 소리보다 화살이 무진의 어깨를 스치는 것이 빨랐다. 벽에 박힌 화살대가 부르르 떨었다. 경고였다. 다음은 목이라는.
무진은 뒷걸음질쳤다. 검을 든 손이 떨렸다. 여섯을 상대로 이 잡검 한 자루. 산 아래 유민들에게 검술을 조금 배웠다지만, 그건 나뭇짐 지는 법 곁다리로 익힌 흉내였다. 여기서 죽으면—
'나만 죽으면 되는 게 아니다.'
이 검들이 흑철련으로 넘어가면, 삼백 년 검가의 검혼 수백이 무기 밀매상의 진열대에 걸린다. 조상들이 필생을 응축한 자아가 금 백 냥짜리 물건이 된다. 그것만은.
칼자국이 도끼를 치켜들며 다가왔다. "마지막 기회다, 강아지."
무진의 등이 제단에 닿았다. 손등이 뾰족한 무언가에 걸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가장 오래된 위패검, 검신에 '武天玄'이라 새겨진 초조 무천현의 검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고 말했었다. 이 검엔 우리 가문에서 가장 강했던 어른의 혼이 잠들어 있다고. 절대 함부로 깨우지 말라고. 대가가 목숨이라고.
지금이 그 극한이 아니면 언제인가.
무진은 왼손을 검날에 갖다 댔다. 이 빠진 잡검을 버리고, 무천현의 검자루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왼 손바닥을 검날에 그었다.
살이 갈라지는 느낌은 뒤늦게 왔다.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 새겨진 이름의 홈으로 스며들었다.
"武天玄." 그가 조상의 이름을 불렀다. "빌리겠습니다. 한 번만."
칼자국의 도끼가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무진의 몸속에서 무언가 문이 열렸다.
차가운 물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쏟아지는 감각. 심장이 한 박자 멎었다가, 낯선 리듬으로 다시 뛰었다. 무진의 눈동자에 은빛 서리가 번졌다. 그의 팔이—그의 의지보다 먼저—움직였다.
도끼날이 닿기 직전, 무천현의 검이 위로 솟았다. 무진이 배운 적 없는 각도, 배운 적 없는 속도. 도끼자루가 두 동강 나며 칼자국의 손목이 꺾였다.
"뭐—"
칼자국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검신의 평평한 면이 그의 관자놀이를 후려쳐 옆으로 날려버렸다. 기둥에 부딪힌 몸뚱이가 쌀자루처럼 미끄러졌다.
무진의 몸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아니라 뼈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었다.
《검을 이렇게 잡는 게 아니다. 손목의 힘을 빼라. 검이 무거워질수록 가볍게 쥐어라.》
무진은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사백 년 전 대륙을 굽어보던 검객의 것이 되어 있었다.
쇠뇌 사내가 두 번째 화살을 쐈다. 무진의 검이 허공에서 반원을 그렸다. 화살이 두 조각으로 갈라져 발치에 떨어졌다.
창을 든 자가 달려들었다. 무진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창끝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초심자라면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검조의 몸놀림에 창은 허공을 찔렀고, 무진의 팔꿈치가 사내의 명치에 박혔다. 창을 쥔 손이 풀리는 순간 검자루가 턱을 올려쳤다. 이빨 몇 개가 재 위로 튀었다.
"이 새끼, 뭐야! 언제 이런—"
철퇴를 든 거한이 고함쳤다. 나머지 셋이 동시에 덮쳐왔다. 그물이 펼쳐지고, 철퇴가 반원을 그리고, 짧은 도가 옆구리를 노렸다.
무천현의 검혼은 웃지 않았다. 냉철하게, 낭비 없이 움직였다.
무진의 발이 반보 미끄러졌다. 그물이 빈 공간을 덮었다. 검이 한 번 그어지자 철퇴 사슬이 끊어져 거한이 제 무게에 휘청였다. 같은 동작의 연장선에서 검끝이 짧은 도를 든 자의 손등을 그었다. 비명. 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여섯 중 다섯이 쓰러지거나 무릎 꿇는 데 채 열 호흡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하나, 그물잡이가 오줌 지린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괴, 괴물이다…!"
《살려 보내라.》 검혼이 명했다. 《전할 자가 필요하다. 이곳은 아직 강아지의 무덤이 아니라고.》
무진의—아니, 무천현의 검끝이 사내의 코앞에서 멈췄다. 은빛 눈동자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가서 전해라." 무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그의 것이면서 그의 것이 아니었다. 더 무겁고, 더 오래된 울림이었다. "무천검가는 아직 문을 닫지 않았다."
사내가 굴러가듯 도망쳤다. 그물이 재 위에 널브러졌다.
승리였다. 압도적인.
그 순간 무진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이긴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긴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 손이, 발이, 검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창밖을 본 승객이었다.
《돌려주마.》 검혼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네 몸이다. 아직은.》
아직은. 그 두 글자가 목덜미에 박혔다.
밀려들었던 차가운 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은빛 서리가 눈에서 사라지고, 무진은 제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끼며 제단 앞에 주저앉았다. 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쨍그랑 소리를 냈다.
숨이 가빴다. 방금 백 리를 달린 것처럼. 아니, 그런 육체의 피로가 아니었다. 몸 안쪽 어딘가가—평생 쓸 무언가가—덜어져 나간 헛헛함이었다.
무진은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상처는 이미 아물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손등이었다. 스물셋 청년의 손등에 새겨질 리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살이 마르고 가죽이 얇아져, 파란 핏줄이 도드라졌다. 검버섯 같은 반점 하나가 엄지 아래 번져 있었다. 노인의 손이었다.
"…이게."
떨리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관자놀이 옆, 손가락에 걸린 것이 있었다. 뽑아서 눈앞에 들었다.
머리카락 한 올. 뿌리부터 끝까지 하얀.
무진은 그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검혼 한 번에 몇 달인가, 몇 년인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초대 검조는 한 번에 수년이 사라진다.' 무천현은 그 초대 검조였다.
방금 그는 도굴꾼 여섯을 쫓는 데 자기 인생의 몇 조각을 태웠다.
이상하게도 후회는 오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이 오히려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그는 오래 살 생각이 없었다. 멸문의 배후를 찾아 목에 검을 겨누는 그날까지만 버티면 됐다. 그 뒤의 삶은 계획에 없었다. 죽은 수백 명을 두고 혼자 살아남은 자에게 무슨 뒷날이 있겠는가.
그러니 수명 따위, 태워 없애면 그만이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너를 살리려 판 것이다.》
무진의 등줄기가 얼어붙었다.
목소리였다. 방금 전 무천현의 것과는 달랐다. 더 낮고, 더 축축하고, 위패당 바닥 밑에서 배어 올라오는 것 같은. 어느 위패에서 나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사방에서 동시에, 혹은 그의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촛불만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그 여덟 글자만 재의 냄새처럼 공기 중에 남았다. 너를 살리려 판 것이다. 무엇을 판단 말인가. 누가. 누구를 살리려.
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위패당을 둘러보았다. 수백 자루의 위패검이 촛불에 붉게 물든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 검들 전부가 이쪽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멸문지야, 그 봄밤. 수백의 무인이 검 한 번 제대로 뽑지 못하고 쓰러졌다. 대전이 불탔고 연무장이 무너졌고 담장이 갈라졌다. 무천산장의 모든 것이 재가 되었다.
단 하나, 위패당만 빼고.
무진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손등의 마른 살갗이 뺨에 닿아 차가웠다.
왜 여기만 남았을까.
어린 시절엔 그저 결계가 강해서라고 생각했다. 조상들의 혼이 지켜서라고. 그러나 열여덟 이후로 그 생각은 그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계는 사람이 관리하는 것이다. 진법은 스스로 켜지지 않는다. 그날 밤 검가의 모든 사람이 죽어갈 때, 누군가는 이 위패당의 결계만은 온전히 유지되도록 손을 썼다는 뜻이다.
사람은 죽게 두고, 검은 지켰다.
수백 명이 마당에서 도륙당하는 동안, 이 검들은 촛불 아래 무사했다. 무진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사형들도 재가 되었지만, '武天玄'이라 새겨진 이 검만은 손끝 하나 그을리지 않고 남아 방금 그의 목숨을 받아먹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우연일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무진은 재가 쌓인 바닥에 이마를 댔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가 살아서… 미안합니다. 여기만 남아서, 그 밤에 아무것도 못 해서."
그날 밤 그는 열여섯이었고, 심부름으로 산 아래에 내려가 있었다.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잿더미와, 온전한 위패당과, 시신조차 남지 않은 몇몇 자리. 그는 삼 년을 이 폐허에서 산 사람을 위한 무덤지기로 살았다. 산 것이 죄인 사람처럼.
그 죄를 갚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문을 안에서 열어준 자를 찾아, 이 검으로 목을 베는 것.
무진은 이마를 들었다. 마른 손등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상관없다고 되뇌었다. 이 손이 다 마르고 머리가 다 세어 목숨이 바닥나도, 그날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걸어왔다.
이번엔 사방에서 새어 나오는 축축한 소리가 아니었다. 방금까지 그의 몸을 빌렸던 검혼, 무천현의 목소리였다. 강림이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처음으로 그에게 직접 말을 걸어왔다. 위엄 있고 냉철한, 조상의 음성이.
《아이야.》
무진은 몸을 굳혔다.
《네가 지금 무엇을 원망하는지 안다. 밖에서 온 원수를 찾겠다고, 그 밤 담을 넘은 마교의 그림자를 쫓겠다고 그 몸을 태우고 있지.》
촛불이 무진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였다. 흰머리 한 올이 손가락 사이에서 아직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두어라. 헛되다.》
"…왜."
무진의 물음이 위패당의 정적을 갈랐다.
무천현의 검혼이, 사백 년의 침묵 끝에 처음으로 말했다.
《멸문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