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의 심장을 가진 의사
응급실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서인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깜빡임의 틈새로 스쳐가는 검은 실. 다섯 번째 환자였다. 심근경색으로 실려온 54세 남성. 신호는 선명했고, 강도는 가장 진했다. 서인호의 손가락이 반투명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피부 아래 혈관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수술실 준비 완료!"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서인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환자의 가슴에 올려진 손이 떨렸다. 검은 실이 환자의 심장과 서인호의 심장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었다. 두 신호가 같은 리듬으로 끊어져가고 있었다. 이건 처음이었다. 이전의 네 번 수술에서는 환자의 신호만 보였다. 자신의 신호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은 무엇인가.
"펠로우? 준비됐습니까?"
간호사가 다시 묻자 서인호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투명한 손가락이 공기 중에서 빛을 굴절시켰다. 응급실 형광등이 그 손을 통과했다.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수술실로 가던 중, 복도에서 박민준이 나타났다.
"인호."
박민준의 목소리는 떨렸다. 펠로우실 24시간 대기 당번을 마친 그는 얼굴이 창백했다. 최근 며칠간 서인호 곁에서 본 것들 때문에.
"그만해. 제발 그만해."
"뭘."
서인호는 멈추지 않았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계속 걸었다.
"이 모든 걸. 환자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뭔가를 잃고 있잖아. 넌 투명해지고 있어. 문자 그대로. 손가락부터 시작해서... 이젠 팔뚝까지. 인호, 이건 정상이 아니야."
서인호는 탈의실 문을 밀었다. 박민준이 따라붙었다.
"이수현 위원장한테 다 말해. 처음부터 다시 말해. 그 여자 환자... 검은 실이 보인다고 한 건... 그건 뭐야? 그건 설명이 안 돼. 의료윤리위원회에서는 이미 너한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어. 지금이라도 자백하면..."
"자백?"
서인호가 몸을 돌렸다. 수술복을 입은 몸. 팔뚝까지 투명해진 팔. 박민준은 그것을 직시할 수 없었다.
"나는 환자를 살리고 있어.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넌 뭔가 잘못되고 있어. 미안해, 미안해... 이 말만 반복하면서 더 깊이 빠져들고 있잖아. 인호, 제발..."
박민준의 손이 서인호의 투명한 팔을 잡으려 했다. 그 손이 서인호의 팔을 관통했다. 저항이 없었다.
박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해? 넌 정말 환자를 위해 하는 거야? 아니면... 자신을 위해?"
그 질문은 날카로웠다. 박민준도 자신이 던진 말의 무게를 느꼈는지 눈이 흔들렸다.
서인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환자를 살리려는 욕망과 자신이 특별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욕망의 경계가 어디서부터 흐릿해졌는지.
수술실의 문이 닫혔다.
---
그날 저녁, 서정환의 전화가 울렸다.
"만나자. 오늘."
목소리에는 다른 톤이 있었다. 감사함이 아니라 무언가 더 무거운 것. 서인호는 수술을 마친 후 피로에 잠긴 상태였다. 손가락의 투명함이 손등까지 올라와 있었다. 코피도 흘렀다. 아침에, 그리고 점심때, 그리고 방금 수술실에서.
"좋아."
서인호는 대답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강남의 고급 식당. 서정환은 개인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와인 잔을 손에 들고. 그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앉아."
서인호가 앉자 서정환은 와인을 마셨다.
"알아?"
"뭘."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했는지."
서정환의 눈이 서인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건설회사 회장이지. 나는 환자를..."
"그게 아니야."
서정환이 와인잔을 내려놨다.
"나는 말기 암 환자 하나를 봤어. 내 사업 파트너였지. 그 사람이 고통 때문에 죽고 싶다고 했어. 그래서 나는... 과다 투약을 했어. 모르핀을 과하게. 그 사람이 편하게 죽게."
서인호의 숨이 얕아졌다.
"넌 이제 그걸 알았어. 그리고 이제부터 넌 이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계속. 왜냐하면..."
서정환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만약 넌 이걸 신고하려고 한다면, 넌 내 증인이 될 거야. 나한테 감사했던 환자가 한 명 더 있잖아. 너는 그 사람을 살렸고, 나는 그 사람을 돈으로 사기를 했어. 경찰이 조사하려면 넌 법정에 나가야 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넌 어떻게 환자를 살렸는지 다 설명해야 한다. 그 검은 실이라는 게 뭔지. 의료윤리위원회는 어떻게 할 거고."
서정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협박이지만 마치 조언하는 것처럼.
"넌 선택할 수 있어. 나를 신고하고 넌 의료진 자격을 잃거나, 아니면 침묵하고 계속 환자를 살려."
"이건... 협박이야."
"협박? 아니야. 이건 거래야. 우리는 이제 같은 사람이야."
서정환이 다시 와인을 마셨다.
"나는 죽음을 조종했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넌 죽음을 본다. 그리고 환자를 살린다. 우린 죽음의 파트너야.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야."
그 순간, 서인호의 얼굴에 무언가가 흐릿해졌다. 혐오감이 먼저 올라왔다. 이 남자를 보는 방식은... 그런데 동시에 다른 감정도 있었다. 일종의 동질감.
"넌 뭐하는 거야?"
"침묵할 거야."
서인호는 자신도 놀랐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좋아. 좋은 선택이야."
서정환이 웃음을 터뜨렸다.
---
그 같은 날 밤, 최태성 과장의 전화가 울렸다.
"저녁 약속 가능해? 우리 함께 얘기해야 할 게 있어."
고급 일식당. 최태성은 이미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붉어있었다.
"수술 성공률이 좋네. 넌 정말... 특별한 재능이 있어."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는 필요 없어. 우리 함께 성모병원의 미래를 만들어보자. 넌 나의 수술 성공률을 높여줄 거고, 난 너를 보호해줄 거야. 노재훈 원장도 이미 알고 있어. 너는 성모병원의 자산이야. 우린 너를 잘 관리할 거야."
최태성의 손이 테이블 아래로 내려갔다. 서인호의 다리 옆에 닿았다. 서인호는 몸을 뒤로 빼지 않았다.
"의료윤리위원회? 그건 우리가 처리해. 이수현? 그 여자는 사실 우리 병원 내에서 고립돼 있어. 누구도 그 여자를 지지하지 않아. 넌 그냥 계속 수술만 해. 불가능한 수술들. 그럼 넌 영웅이 될 거고, 나도 영웅이 될 거야. 우리 모두가."
최태성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넌 정말 특별해. 처음 본 순간 알았어."
서인호는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았다.
---
병원 원장실. 노재훈은 전화 통화 중이었다.
"네, 총무 이사님. 윤리위원회 조사? 그건 형식적인 거고요. 서인호 펠로우는 성모병원의 자랑입니다. 언론에도 그렇게 얘기할 예정이고요. 이수현? 그 여자한테는 조사 자료를 제한적으로만 제공하세요. 법적으로 문제 없는 범위에서."
통화를 끝낸 후, 노재훈은 서인호의 사진을 담은 파일을 열었다. 신문 기사. 방송 뉴스. "기적의 의사". "불가능을 가능하게".
"절대 놓칠 수 없는 카드."
그렇게 중얼거렸다.
---
윤리위원회 사무실. 이수현은 첫 번째 환자의 의료 기록을 다시 펼쳤다.
이준영. 62세. 심근경색. 응급실 내원 당시 혈압 60/40. 맥박 불규칙. 심전도 파형... 이상했다.
"응급실 기록은 사망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수현의 손가락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수술실 기록은 없어."
그 순간, 그의 눈이 한 장의 종이에 멈췄다. 의료 진단서. 그 환자가 응급실에서 선포된 사망 이후의 기록. 그런데 여기에는...
"신고 기록이 없어?"
이수현은 기록을 다시 들었다. 응급실 사망 선포. 그 다음은 공백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수술 후 회복 기록이 시작되었다. 수술실 기록도, 신고 기록도 없이.
"이건... 불가능해."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노재훈이었다.
"이 위원장, 바쁘신가요?"
"원장님."
이수현은 서둘러 기록을 덮었다. 너무 늦었다. 노재훈은 이미 본 것처럼 보였다.
"서인호 펠로우에 대한 조사, 거의 마무리되었죠?"
"아직 확인할 게..."
"그 환자분, 이준영 환자분은 사실 응급실에서 사망 선포가 되었는데, 응급약 투약으로 소생했던 거거든요. 의료진들도 다 알고 있어요. 이건 기적 같은 사례지, 윤리 위반이 아니에요."
"하지만 기록이..."
"기록은 행정 담당자의 실수였어요. 이미 수정 중입니다. 이 위원장께서 너무 깊게 들어가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우리 병원의 평판도 생각해야 하고요."
노재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가벼울 수 없었다.
"이건 조사를 방해하는..."
"방해? 아니에요. 단지 사실을 알려드리는 거예요. 서인호 펠로우는 정말 훌륭한 의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자산이에요. 이 위원장도 의료인이시니까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노재훈이 돌아섰다. 문을 나가기 전에 한 번 더.
"기록 수정이 완료되면 공식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이수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기록을 펼쳤다. 응급실 사망 선포. 신고 기록 부재. 수술실 기록 부재.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회복 기록.
"뭐가 일어났던 거야?"
이수현의 손이 기록 전체를 들었다.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응급실 기록의 타임스탬프, 수술실 기록의 부재, 회복 기록의 갑작스러운 시작. 모든 것이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기록을 조작했다고. 그리고 그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하고 있다고.
그녀는 펜을 들었다. 별도의 노트에 기록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공식 파일이 아닌 개인 기록으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임스탬프, 환자명, 의료진 서명, 기록 부재 시간대.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한 줄을 더했다.
'노재훈 원장 - 기록 조작 압박. 2024년 X월 X일 야간.'
이수현은 노트를 닫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누군가의 번호 위에서 멈췄다. 의료감시위원회. 아니, 검찰. 아니, 경찰.
그 순간,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수현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노트를 책장 뒤에 숨겼다.
---
병원 옥상. 밤 11시.
서인호는 다섯 번째 환자의 신호를 받았다. 또 다른 심근경색. 또 다른 절망의 신호.
응급실로 달려갔다. 환자는 이미 수술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서인호는 환자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검은 실을 찾으려고.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없었다. 처음으로, 아무 신호도 감지되지 않았다. 서인호의 손이 떨렸다. 팔뚝까지 투명해진 손이 환자의 가슴 위에서 흔들렸다.
"뭐... 뭐야?"
"인호! 멈춰!"
박민준의 목소리가 수술실을 가르며 외쳤다.
박민준이 서인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서인호는 저항했다. 손을 뗄 수 없었다. 환자의 가슴 위에서.
"신호가... 신호가 없어."
"그래서 멈춰야 하는 거야!"
"아니야. 신호가 약한 거야. 내가 집중하면..."
서인호의 눈이 흐려졌다. 코에서 피가 흘렀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수술복 위에 떨어졌다.
"수술을 진행하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태성이었다. 그는 수술실 입구에 서 있었다.
"과장님, 신호가 없습니다. 환자의..."
"수술을 진행하세요. 서 펠로우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최태성의 손이 수술실 문을 닫았다. 박민준이 막으려 했지만, 다른 간호사들이 그를 밀어냈다. 누군가의 지시였다.
서인호는 메스를 들었다. 손가락이 반투명했다. 마치 환자의 살을 관통할 것처럼. 메스의 끝이 환자의 가슴에 닿았다.
"멈춰!"
박민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지만, 그것은 수술실 밖에서였다. 문이 닫혀 있었다.
서인호의 눈이 감겼다. 신호를 찾으려고. 도시의 모든 검은 실을 보았던 옥상처럼, 지금 이 환자 안에서도 신호를 찾으려고.
그런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뭐야?"
환자의 심장이 모니터에서 떨렸다. 비프음이 빨라졌다. 간호사가 외쳤다.
"심실세동! 심실세동!"
서인호는 메스를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처음이었다. 신호 없이 수술하는 것. 신호 없이 결정하는 것.
"제세동 준비!"
누군가가 외쳤다. 제세동기가 준비되고 있었다.
그 순간, 서인호의 눈이 떠졌다.
검은 실이 보였다.
아니다. 그게 검은 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검은 실이었다.
서인호의 심장에서 나오는 검은 실. 환자의 심장과 얽혀 있는 자신의 검은 실. 두 신호가 교차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환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안 돼. 안 돼."
서인호가 중얼거렸다.
"응급약 투약!"
간호사가 약물을 환자의 정맥에 주입했다. 그 순간, 환자의 모니터에서 신호가 돌아왔다. 일정한 비프음. 정상 리듬.
환자가 살아났다.
서인호의 손이 떨렸다. 환자가 살아났다. 신호 없이. 자신의 수명을 더 깎아내지 않고도.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서인호는 자신의 손을 봤다. 팔뚝이 완전히 투명했다. 손가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그 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수술실 밖에서 박민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호! 대답해!"
서인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
수술실을 나온 서인호는 탈진했다. 로커룸에 앉아 있었다. 수술복을 벗고 있었다.
손가락이 투명하지 않았다.
완전히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뭐... 뭐야?"
서인호가 자신의 손을 들었다. 놀랐다. 이렇게 빨리 회복된 적이 없었다. 보통은 수술 후 며칠이 걸렸다. 투명화가 진행되고, 그다음 몇 주가 지나야 회복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마치 수술 직후 투명화가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신호를 읽지 않았으니까.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신호 없이 수술했으니까."
서인호의 입에서 나온 말. 그것은 깨달음이자 동시에 절망이었다.
문이 열렸다. 박민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환자는 살았어. 정상 리듬으로 돌아왔어. 다른 합병증도 없어."
"그럼..."
"그럼 뭐야? 넌 신호도 없이 수술했어. 그런데 왜 살아났어? 그게 가능한 거야?"
박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박민준, 나도 모르겠어."
"거짓말하지 마. 넌 알고 있어. 넌 항상 알고 있었어. 그런데 자꾸 모르는 척해."
박민준이 가까워졌다. 서인호의 눈을 봤다.
"이수현 위원장이 찾고 있어. 첫 번째 환자. 이준영이. 그 환자의 기록이 이상하다고."
서인호의 몸이 경직됐다.
"뭐... 뭐가 이상하다고?"
"응급실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었는데, 그 다음에 수술실 기록이 없어. 신고 기록도 없어. 마치 그 환자가 죽었다가 갑자기 살아난 것처럼."
박민준이 서인호의 어깨를 잡았다.
"넌 그 환자를 살린 게 아니야. 넌 그 환자를 죽음에서 돌려놨어. 응급약도 없이. 그냥... 손으로."
"그만해."
서인호가 박민준의 손을 밀어냈다.
"내가 뭘 했는지는 상관없어. 지금 중요한 건 이 환자야. 이 환자가 살았어."
"신호 없이."
"그래. 신호 없이."
서인호가 일어났다. 로커를 닫으며.
"그럼 내가 신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럼 내가 그냥... 의사라는 뜻이야."
"인호..."
"그게 좋은 거 아니야? 넌 원했잖아. 나를 다시 돌려놓기를. 그럼 이제 됐어. 나는 다시 의사가 됐어."
박민준은 말할 수 없었다. 서인호의 눈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 광기나 절망이 아닌, 다른 종류의 무언가.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포기하고 대신 다른 것을 얻은 사람의 눈.
"최태성이 나한테 제안했어. 우리 함께 성모병원의 미래를 만들자고."
"뭐?"
"그리고 서정환도. 우리 같은 사람이라고. 죽음을 다루는 사람들이라고."
서인호가 박민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재훈 원장도. 나를 성모병원의 자산이라고."
"인호, 그건..."
"그리고 이제 나는 신호 없이도 환자를 살릴 수 있어. 신호 없이도."
서인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뭐... 뭐가 무슨 뜻이야?"
"내가 이제 자유롭다는 뜻이야. 신호에 묶이지 않는다는 뜻이야."
서인호가 자신의 손을 봤다. 완벽하게 회복된 손.
"신호를 읽지 않으면 투명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수명이 깎이지 않는다. 그럼 나는 신호를 무시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다."
"그럼 왜... 지금까지..."
"왜냐하면 나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신호가 울리면 몸이 반응했으니까. 자동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서인호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그런데 이제 알았어. 신호 없이도 환자를 살릴 수 있다는 걸. 의료진으로서. 의사로서. 그럼 나는 신호가 없는 환자는 버릴 수 있다는 뜻이야."
"인호..."
"그리고 신호가 있는 환자도 버릴 수 있다는 뜻이야. 신호를 무시하면 되니까."
서인호가 박민준을 마주봤다.
"그게 진짜 자유야. 그리고 동시에..."
서인호가 로커룸을 나갔다.
"나는 이제 그들의 손이 되었다는 뜻이야."
---
병원 복도. 밤 1시.
서인호는 걸어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단지 걸어가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서정환이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우리 같은 사람이 맞아."
"뭐가 일어났어요?"
"그 환자. 다섯 번째 환자. 신호 없이 살린 거. 나도 알았어. 노재훈도 알았어. 최태성도."
"어떻게..."
"수술실 카메라가 있었거든. 처음부터 설치되어 있었어. 넌 신호 없이 환자를 살렸어. 그리고 그건... 뭔가 다른 거야. 이전과는."
서인호는 침묵했다. 카메라. 처음부터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넌 더 이상 신호의 종이 아니야. 넌 이제 선택을 하는 거야. 누구를 살릴지, 누구를 버릴지. 그게 진짜 힘이야.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사람은... 우리 편이 되어야 해."
통화가 끊겼다.
서인호는 병원 복도에서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서울의 야경이 보였다. 수천 개의 불빛. 수천 개의 창.
그리고 그 모든 것 안에서, 서인호는 검은 실을 봤다.
자신의 것도, 다른 누군가의 것도. 환자의 것도, 의사의 것도, 살인자의 것도.
그것들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그물의 중심에서, 서인호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신호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