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2시 12분. 응급실 모니터의 심박수 파형이 급격히 요동친다.

"심박 145, 산소포화도 87%."

윤태희의 목소리가 침착하지만, 손이 떨린다. 정하윤의 작은 가슴이 헐떡거린다. 8살 아이의 몸은 더 이상 기적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2주라고 읽었던 시간이 수시간으로 압축되고 있다.

한준혁이 아이의 손목을 잡으려 하는 순간, 정하윤의 엄마가 비명을 지른다.

"살려주세요! 제발!"

아이의 눈이 한준혁을 찾는다. 손가락이 파랗다. 산소 부족. 뇌에 혈류가 제대로 가지 않는다. 한준혁은 이미 알고 있다—이 아이가 원하는 것이 생명 연장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데 엄마 앞에서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으니 손을 잡을 수 없다.

"심박 160. 의식 저하!"

응급 카트가 움직인다. 수술실로 간다. 한준혁도 따라간다. 그 뒤를 박서은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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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은 3시간 걸렸다. 정하윤의 좌심실이 더 이상 혈액을 펌프질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준혁은 인공심장 삽입 대신 심장 이식 대기 중 생명을 유지하는 ECMO(체외 막 산소공급장치)를 연결하기로 결정했다. 수술은 성공했다. 아이는 살았다. 하지만 그 살아있음이 생명인지 연장된 고통인지, 한준혁은 여전히 모른다.

응급실로 돌아온 것은 새벽 5시 47분이었다.

박서은이 따라붙었다. 전화는 울렸다가 끊기고, 울렸다가 끊기고를 반복했다. 한준혁은 받지 않았다. 손을 씻고 있었다. 혈흔이 손톱 아래에 박혀 있었다. 정하윤의 피인지, 이전의 환자들의 피인지 구분이 안 간다.

"의사님."

박서은이 응급실 로비에서 손을 잡는다. 라이터 하나를 들고 있다.

"지금은 안 돼."

"5분만."

"안 돼."

한준혁은 손을 빼고 병원 카페로 향한다. 남은 근무 시간은 2시간 16분. 그 시간을 버티려면 커피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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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 34분. 응급실로 돌아온 한준혁은 윤태희를 찾았다. 간호사는 정하윤의 침대 옆에 있었다. ECMO 기계음이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는 자고 있다. 평온하다. 고통이 없다.

윤태희가 한준혁을 본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카페."

"이 시간에?"

"응."

한준혁이 정하윤의 손을 본다. 이제 손이 분홍색이다. ECMO가 혈액을 순환시키고 있다. 산소포화도 99%. 완벽한 수치. 완벽한 죽음의 연장.

윤태희가 한준혁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뭔가 다르다. 수술 전과 달라진 표정.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결정을 내린 후의 얼굴.

"의사님... 괜찮으세요?"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는다. 정하윤의 차트를 다시 본다. ECMO 연결 성공. 생존율 상향. 그런데 그 아래 엄마의 서명이 있다. 기적을 강요하는 서명. 그리고 아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선택.

응급실의 복도에서 이사장의 전화가 울렸다. 새벽 6시 47분.

"한 의사? 좋은 아침이야. 어제 수술 잘 들었어. 정하윤이 기사까지 났네. 우리 병원의 기적이라고."

한준혁이 전화를 받는다.

"예."

"근데 말이야, 이렇게 좋은 흐름을 유지하려면... 좀 더 많은 환자가 필요할 것 같아. 보험사에서 한두 명 더 거부하는 환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어때? 한 번 보면 될까?"

한준혁의 손이 떨린다.

"...예."

"좋아. 이따 이름을 줄게. 아, 그리고 한 의사? 정의에 대한 투자라는 말, 참 좋았어. 그런데 정의는 수익과도 연결된다는 걸 알지?"

전화가 끝난다.

한준혁이 응급실로 돌아온다. 그 순간, 응급차의 사이렌이 들린다.

"도로 교통사고 환자 입원 예정. 2분 뒤 도착."

윤태희의 목소리다. 한준혁은 준비 자세를 취한다. 그런데 그 순간, 응급실의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이 보인다.

12세 여성. 뇌종양.

아이의 어머니는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며칠 전부터 아이가 두통을 호소했고, 응급실에 왔다가 뇌 스캔을 받은 후 그대로 입원했다. 보험사는 거부했다. 비용 효율성이 맞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이는 이미 여기 있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거지?

한준혁이 차트를 본다. 입원일: 어제 오후 4시 12분. 보호자: 모 김영미. 증상: 심한 두통, 시력 저하, 의식 변화. 진단: 뇌종양 의심. 상태: 악화 중.

한준혁이 아이의 침대에 다가간다. 아이의 얼굴은 창백했다. 뇌 압박으로 인한 두통으로 자고 있는 것인지,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간다.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잡는다.

그 순간.

시간이 보인다.

'3일 21시간 14분'

그리고 동시에, 한준혁은 느낀다.

이 아이가 죽어가는 고통을.

뇌가 부풀어 오르는 압박감. 마치 두개골 안에서 폭발할 듯한 통증. 안구가 튀어나올 듯한 극심한 압력. 의식이 흐려지면서 세상이 사라지는 공포. 죽음으로 가는 길의 모든 감각이 한순간에 한준혁의 몸을 관통한다.

한준혁이 손을 놓는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린다. 얼굴이 창백해진다.

"의사님? 괜찮으세요?"

윤태희가 다가온다.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의 차트를 본다.

'보험사 거부. 비용 효율성 미흡. 치료 불가능.'

그리고 차트의 한 귀퉁이에 이름이 있다.

'담당 검토: 김준호 이사장'

한준혁의 눈이 감긴다. 정의는 수익과 연결된다. 이사장의 말이 반복된다. 이 아이를 살리면, 다른 누군가는 거부된다. 이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자신이 죽음의 고통을 느낀다. 둘 다 지옥이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다.

이 아이는 이미 거부당했다. 누군가 이미 선택했다. 이 아이의 죽음을.

응급차의 사이렌이 더 가까워진다.

한준혁은 응급실의 중앙으로 간다.

그의 주머니에는 박서은의 명함이 여전히 들어 있다.

1분 뒤, 교통사고 환자 4명이 밀려온다.

한준혁은 그들을 맞이한다. 다리 절단, 복부 외상, 내출혈 의심. 한 명은 이미 들어올 때 뇌사 상태다. 한준혁의 손이 움직인다. 응급실의 리듬이 가속된다.

하지만 그의 눈은 자꾸만 침대 위의 아이를 향한다.

3일 21시간 14분.

그 시간 안에 뭘 할 수 있을까.

---

오전 8시 42분.

수술실에서 나온 한준혁은 정신이 없었다. 교통사고 환자 4명 중 3명을 살렸다. 한 명은 이미 들어올 때 뇌사 상태였다. 성공률 75%. 평소보다 낮다.

응급실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박서은이었다.

"한 의사? 저 기자 박서은이에요. 어제 정하윤 수술 정말 기적이었어요. 혹시 지금 시간 있으세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님?"

"지금 응급실 근무 중이에요."

"알아요. 근데 진짜 중요해요. 정하윤 같은 환자들이 왜 이렇게 많이 거부당하는지... 혹시 알고 싶지 않으세요?"

한준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뭐라고요?"

"당신이 구한 환자들. 그 환자들이 왜 보험 거부를 당했는지 아세요? 그게 우연이 아니라는 거. 시스템이라는 거."

한준혁은 응급실로 들어갔다.

이수진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의식이 없었다. 뇌압이 높아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수면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응급실 와. 지금."

한준혁이 전화를 끊었다.

---

오전 10시 23분.

응급실의 대기실. 박서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한준혁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수술로 인한 피로도 있었지만, 더 깊은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박서은이 앉았다.

"정하윤은 언제 입원했어요?"

"3일 전."

"그리고 보험사는?"

"심장이식 비용이 너무 크다고 거부했어."

"그 이유가 뭐였어요?"

한준혁이 박서은을 봤다.

"회복 가능성 2% 미만. 기대 수명 연장 불가능."

박서은이 노트북을 열었다. 화면에 문서들이 떴다. 모두 보험사의 거부 판정문이었다.

"이 아이는 폐암 말기. 이건 간경화. 이건 심부전. 이건 뇌종양. 거부 이유는 다 같아. '회복 가능성 2% 미만. 기대 수명 연장 불가능.'"

박서은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했다. 수십 개의 문서가 흘러갔다.

"지난 1년간 보험사가 거부한 말기 환자는 총 312명. 거부율 94%. 근데 여기 주목해 보세요."

박서은이 특정 문서를 확대했다.

"이 환자들은 모두 성의료원으로 와야 했어요. 왜냐하면 다른 병원에서는 받아주지 않으니까. 그리고 성의료원에 오면?"

"내게 온다."

"정확해요. 당신에게 온다. 당신이 성공시키면 보험사는 '기적의 의사'라고 불리는 당신 때문에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실패하면 '말기 환자는 어차피 회복 불가능하다'고 주장해요. 당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보험사의 거부 판정은 정당해진다는 거예요."

한준혁이 화면을 봤다. 312명의 환자. 그 중 몇 명이 자신의 손을 거쳤을까. 몇 명이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났을까. 몇 명이 죽음의 고통을 자신에게 전했을까.

"이게 뭐하는 건가요?"

박서은이 노트북을 닫았다.

"의료 정의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인권 변호사, 의료 윤리 전문가, 퇴직 의사들, 그리고 언론인들. 우리는 이런 거부 판정들을 기록하고 있어요. 패턴을 찾고, 증거를 모으고 있어요."

"우리?"

"저도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에요. 그리고..."

박서은이 잠시 말을 멈췄다.

"최민준도."

한준혁의 눈이 커졌다.

"최민준?"

"폐암 말기였던 환자죠. 당신이 살린. 지금은 대학생이에요. 그리고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어요."

박서은이 휴대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 와. 카페."

---

오전 11시 15분.

병원 지하 카페. 테이블 세 개짜리 구석진 자리.

최민준이 나타났을 때 한준혁은 거의 일어날 뻔했다.

"의사님!"

최민준은 훨씬 건강해 보였다. 얼굴에 색이 돌았다. 머리가 자랐다. 1년 전의 창백한 환자는 사라졌고, 눈에 생기가 있는 청년이 서 있었다.

한준혁이 손을 맞잡았다.

"잘 지냈나?"

"네. 의사님이 저를 살렸으니까요."

최민준이 앉았다. 박서은도 앉았다.

"저 1년 동안 뭐 했는지 아세요?"

"모르겠네."

"대학 진학했고, 법학과 들었어요. 그리고..."

최민준이 가방에서 폴더를 꺼냈다.

"제 수술 과정에서 보험사가 거부했던 모든 기록들을 수집했어요. 제가 살아있다는 게 그들의 거부 판정이 틀렸다는 증거거든요."

한준혁이 폴더를 펼쳤다. 안에는 보험사의 편지, 병원의 내부 메모, 의료 기록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의사님, 이거 아세요?"

최민준이 한 장의 문서를 가리켰다.

"제가 수술받을 때 보험사가 보낸 거부 편지. 사유는 '회복 불가능한 투자'였어요. 근데 제가 살았어요. 왜? 의사님이 제 돈을 안 받고 수술했으니까요."

한준혁이 문서를 봤다. 1년 전 자신이 서명한 수술 동의서가 있었다. 옆에는 보험사의 거부 판정. 그 아래는 최민준이 해 온 소송 기록들이었다.

"저 같은 환자는 저뿐만이 아니에요."

최민준이 다른 폴더를 꺼냈다.

"지난 1년간 같은 이유로 거부당한 환자들. 보험사 대리인은 같은 사람이에요. 황준식. 그리고 거부 판정을 최종 승인한 사람도 같아요."

최민준이 손가락으로 서명을 가리켰다.

'승인: 김준호 이사장'

한준혁의 손가락이 떨렸다.

이사장.

정의는 수익과 연결된다.

이사장의 말이 다시 들렸다.

"의사님, 당신의 성공률이 높을수록 그들의 거부 판정이 정당해져요. 왜냐하면 '기적의 의사'가 있으니까 가능한 환자들은 와야 하고, 불가능한 환자들은 안 와도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거든요."

박서은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해요. 당신의 성공 사례들이 정말 기적인지, 아니면 시스템의 도구화인지를 증명할 필요가 있어요. 당신이 그 아이를 만나면, 당신은 그 아이의 시간을 알 게 돼요. 그리고 그 시간이 증거가 돼요."

한준혁이 일어섰다. 주먹을 쥐었다. 목이 타올랐다.

"개인의 고통을 도구화하려고 한다는 거네요."

목소리가 떨렸다.

박서은이 한준혁을 본다.

"당신은 이미 도구가 되고 있어요. 병원의. 보험사의.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한준혁이 손을 저었다. 주먹을 풀었다.

"그래도 그건 다르다. 당신들은 의도적으로 그 아이를 이용하려고 해요."

"이용? 당신이 그 아이를 살리면 그건 이용이 아니라 구조예요. 동시에 증거도 되는 구조."

한준혁이 손을 저었다. 다시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이수진이를 살리는 건 내 의무예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당신들의 운동에 끌려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고요."

"의사님..."

최민준이 말했다.

"저는 당신 때문에 살았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한 일이 뭔지 알고 싶어요. 당신이 정말 기적을 일으킨 건지, 아니면 누군가를 희생시킨 건지."

한준혁이 카페를 나갔다. 박서은과 최민준은 그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

오후 12시 47분.

응급실. 한준혁이 이수진의 침대 옆에 섰다.

아이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뇌압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안구가 약간 튀어나와 있었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한준혁이 이수진의 차트를 다시 봤다. 보험사 거부. 비용 효율성 미흡. 치료 불가능.

그리고 승인 서명.

'김준호 이사장'

한준혁이 이사장실로 향했다.

---

오후 1시 12분.

이사장실. 김준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의사? 반가워. 어제 정하윤 수술 정말 멋있었어. 언론도 많이 났고, 병원 평판도 올라갔어. 고마워."

"이수진이 뇌종양 환자입니다."

한준혁이 이수진의 차트를 탁자에 놨다.

"보험사에서 거부했어요."

"아, 그 아이? 네,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어서..."

"제가 수술할 수 있습니다."

이사장이 웃었다.

"물론이지. 넌 뭐든 할 수 있잖아. 근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뇌종양 수술에 심뇌 집중치료? 아무리 봐도 회복 불가능해."

"저는 수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병원은 못 해. 손실이 너무 커."

한준혁이 이사장을 봤다. 눈빛이 차가웠다.

"정의에 대한 투자라고 하셨잖아요."

"정의? 아, 그건 마케팅 용어야. 정하윤은 회복 가능성이 조금 있었고, 언론 가치가 있었어. 하지만 이 아이는 그냥 죽어가는 아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한준혁이 문을 나갔다. 복도에서 멈췄다. 주머니 속 박서은의 명함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

오후 2시 18분.

응급실. 한준혁이 윤태희를 찾았다.

"정하윤은?"

"안정화됐어요. ECMO가 잘 작동하고 있고, 심박도 규칙적이에요."

윤태희가 한준혁의 얼굴을 본다.

"의사님, 뭔가 결정하신 것 같은데?"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이수진의 침대로 간다. 아이의 뇌압이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호흡이 더 불규칙해졌다.

"이수진을 수술하겠습니다."

"비용은?"

"제가 댈게요."

윤태희가 한준혁의 손을 잡는다.

"의사님, 당신 혼자로는 못 해요. 이건 개인의 의료비로 감당할 수 없는 규모예요."

한준혁이 윤태희를 본다. 간호사의 눈이 깊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이 한 의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해야 해요."

"왜요?"

한준혁이 말을 잇지 못한다. 윤태희의 눈이 더 깊어진다.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해요. 이건 당신만의 싸움이 아니에요."

한준혁이 박서은의 명함을 꺼낸다.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들었다.

"박서은? 저 한준혁이에요.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일게요.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

오후 3시 51분.

응급실 준비실. 한준혁이 박서은과 마주앉았다.

"조건이 뭐예요?"

"이수진을 살리는 게 목표고, 그 과정이 증거가 되는 거예요. 반대로 하지 않겠다는 거."

박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리고 최민준에게 전해줄 말이 있어요. 내가 한 일이 정의인지 부정인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 환자들이 판단할 문제라고."

박서은이 노트북을 켰다.

"모든 기록을 남길 거예요. 영상, 음성, 모든 것. 이건 증거가 될 거고, 동시에 당신이 한 선택의 기록이 될 거예요."

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박서은이 펜드라이브를 꺼냈다.

"이게 의료 정의 네트워크가 수집한 모든 거부 판정 기록이에요. 312명의 환자. 312개의 시스템의 실패. 이수진은 313번째예요."

한준혁이 펜드라이브를 받았다.

"3일 21시간 14분이에요. 그 시간 안에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세요."

---

오후 4시 51분.

수술실. 이수진이 누워 있었다. 뇌종양 제거 수술. 난이도 극상. 성공률 통상 12%.

한준혁이 마취 전 이수진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보인다.

'3일 18시간 52분'

그리고 동시에.

한준혁은 느낀다.

이수진이 죽어가는 고통을.

뇌가 부풀어 오르는 압박.

의식이 흐려지는 공포.

죽음으로 가는 길의 모든 고통을.

한준혁이 손을 놓는다.

그의 눈 앞에 수술 화면이 떠오른다.

최적의 절개 위치. 필요한 시간. 모든 것이 명확하다.

수술실의 조명이 밝아온다. 의료진이 준비를 마친다. 박서은의 카메라가 켜진다.

한준혁이 메스를 들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메스가 피부를 가른다.

첫 번째 절개. 정확하고 신속하다.

30분 뒤.

한준혁은 뇌종양의 일부를 노출했다. 종양은 예상보다 컸다. 뇌간 근처에 침투해 있었다. 제거 과정에서 신경 손상의 위험이 매우 높았다.

"흡입기."

한준혁의 손이 움직인다. 종양 조직을 조심스럽게 제거한다. 한 밀리미터 단위의 정밀함이 필요했다.

1시간 뒤.

"혈압 떨어져요. 90/60."

마취과 의사의 목소리가 긴장한다.

"출혈?"

"네. 종양 주변 혈관 손상."

한준혁의 얼굴이 굳어진다. 이것이 예상치 못한 합병증이었다. 종양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주변 혈관이 손상된 것이다. 혈류를 막으면 뇌 조직이 괴사한다. 혈류를 유지하면 뇌출혈이 계속된다.

"혈압 80/50. 빠르게 떨어져요!"

한준혁의 손이 떨린다. 이것이 내가 느낀 고통의 일부인가. 이수진의 죽음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혈압이 떨어질 때마다 한준혁의 뇌에도 이수진의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자신이 그 아이와 함께 죽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준혁의 눈이 뜨인다.

시간이 보인다. 명확하게.

손상된 혈관. 그 위치. 그 크기. 그리고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

"미세 클립. 지금."

한준혁의 손이 움직인다. 초정밀 수술용 미세 클립을 손상된 혈관에 정확히 장착한다. 1초의 오차도 없다.

"혈압 회복 중. 95/65."

"산소포화도?"

"98%."

한준혁이 숨을 쉰다.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계속 진행합니다."

또 다른 1시간이 지난다.

한준혁은 종양의 90%를 제거했다. 남은 10%는 뇌간에 너무 가까워서 제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뇌압이 급격히 낮아질 것이고, 이수진은 회복할 시간을 얻게 될 것이다.

"마무리합니다."

또 다른 30분. 수술은 끝났다.

총 수술 시간: 2시간 47분.

"혈압 안정화. 산소포화도 99%. 모든 수치 정상."

한준혁이 메스를 내려놨다.

그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오후 7시 38분.

회복실. 이수진은 마취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한준혁이 옆에 섰다. 아이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의사님?"

이수진의 목소리가 약했다.

"네. 수술 다 끝났어요."

"머리가... 안 아파요."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시간이 보인다.

'3일 18시간 52분'

그런데 이제 그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었다.

박서은이 카메라를 내렸다. 그 모든 장면이 기록되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합병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한 의사의 손. 그리고 살아난 아이.

"의사님..."

윤태희가 한준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당신 혼자가 아니에요."

한준혁이 윤태희를 본다. 그 말이 이제 이해가 된다.

---

밤 11시 42분.

응급실. 정하윤은 여전히 ECMO에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얼굴은 평온했다. 고통이 없었다.

한준혁이 정하윤의 침대 옆에 섰다.

"이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윤태희가 물었다.

"심장이식을 기다리는 거죠. 그 동안 ECMO가 생명을 유지해 줄 거고요."

"그리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한준혁이 정하윤의 손을 본다.

"이 아이가 원하는 게 생명 연장인지, 아니면 편안한 죽음인지는 이 아이와 가족이 결정할 거예요. 우리는 선택지를 제공할 뿐."

---

자정.

박서은이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2시간 47분의 수술. 그 모든 과정이 화면에 담겨 있었다.

최민준이 옆에서 봤다.

"이거 공개할 거예요?"

"네. 그리고 312명의 거부 판정 기록과 함께."

"의사님이 알면?"

"알 거예요. 이미 동의했으니까."

박서은이 영상을 저장했다.

"이건 증거가 될 거고, 동시에 질문이 될 거예요. 기적이 정말 기적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부조리인가."

---

새벽 2시 14분.

한준혁이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48시간 연속 근무를 마친 뒤였다. 침대는 의사실의 소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사장이었다.

"한 의사? 이수진 수술 잘했다고 들었어. 정말 대단해. 근데 말이야, 이번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봤는데..."

"네?"

"정의에 대한 투자는 좋은데, 병원도 살아야 하지 않나?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이제부턴 거부당한 환자들 중에서 회복 가능성이 있는 환자들만 받기로 했어. 어때?"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한 의사?"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따 새 환자 명단 줄게."

전화가 끝난다.

한준혁이 천장을 본다.

박서은의 영상이 공개되면 어떻게 될까. 이사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병원은 어떻게 될까.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수진은 살았다.

그것이 전부였다.

---

새벽 6시 47분.

응급실. 정하윤이 깨어났다.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의 엄마가 울고 있었다.

"우리 아이... 살았어요?"

한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살았어요."

"얼마나 살 수 있어요?"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의사님?"

"심장이식을 받으면 많이 살 수 있어요. 받지 않으면... 모르겠어요."

정하윤의 엄마가 아이를 본다. 아이의 눈이 엄마를 찾는다.

"엄마."

아이가 말한다.

"힘들어."

엄마의 얼굴이 굳어진다.

한준혁이 응급실을 나간다.

---

오전 8시 22분.

한준혁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박서은이었다.

"영상 공개됐어요. 조회수 50만. 댓글 3만. 언론에서 연락 오고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메시지.

최민준이었다.

"의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차례예요."

한준혁이 응급실로 들어간다.

이수진은 회복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지고 있었다.

윤태희가 옆에서 돕고 있었다.

"의사님, 이수진이 깨어났어요. 의식도 명확하고, 신경학적 반응도 정상이에요."

한준혁이 이수진을 본다.

아이의 눈이 맑다.

"아프세요?"

"네... 근데 전에처럼 심하지 않아요."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시간이 보인다.

'3일 18시간 52분'

그 시간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죽음의 시간이 아니라, 선택의 시간이었다.

이수진이 그 시간 안에 무엇을 할지 선택할 수 있는 시간.

---

오전 10시 15분.

한준혁이 응급실 복도에 섰다.

박서은의 전화가 울렸다.

"의사님, 뉴스 봤어요? 언론이 터졌어요. '기적의 의사, 의료 부정의 도구였나' 이런 제목으로."

"네."

"이사장 측에서 입장문을 냈어요. '의료 정의 네트워크의 일방적 주장이며, 병원은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대우한다'고."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의사님? 후회하세요?"

한준혁이 이수진의 병실을 본다. 아이는 창문을 통해 밖을 보고 있었다.

"아니요."

"정하윤은?"

"정하윤은... 선택을 해야 해요. 심장이식을 받을지, 아니면 ECMO를 끄고 편히 가질."

박서은이 침묵한다.

"그건 의료의 영역을 넘어서는 거 같은데요."

"네. 그래서 더 중요한 거예요."

---

오후 2시 33분.

응급실 의사실. 한준혁이 이사장과 마주앉았다.

"한 의사, 뭐 하는 거야? 영상 때문에 언론이 난리야. 병원 평판이 떨어지고 있어."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뭐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네트워크 활동을 할 거야? 아니면 병원에 집중할 거야?"

한준혁이 이사장을 본다.

"저는... 환자를 봐야 해요."

"환자를 본다는 게 뭐야? 모든 의사가 환자를 보는데?"

"네. 그래서 저도 환자를 봐야 해요. 거부당한 환자들도."

이사장이 일어선다.

"그럼 당신은 이 병원을 떠나야 해. 우리 병원은 정의 운동을 하는 곳이 아니라, 수익을 내는 곳이야."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생각해 봐. 1주일 안에 결정해."

이사장이 나간다.

---

저녁 6시 47분.

한준혁이 정하윤의 침대 옆에 섰다.

아이는 자고 있었다. ECMO의 기계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정하윤의 엄마가 옆에 있었다.

"의사님."

"네?"

"제 아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의사님이 손을 잡으셨잖아요. 그때 뭔가 보신 거 같은데."

한준혁이 정하윤의 엄마를 본다.

"심장이식을 받으면... 많이 살 수 있어요."

"그리고?"

"받지 않으면... 3개월 정도."

정하윤의 엄마가 아이를 본다.

"제 아이가 원하는 게 뭘까요?"

한준혁이 대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의료의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이었다.

---

밤 10시 12분.

응급실. 이수진이 일어나 앉았다.

"의사님."

한준혁이 다가간다.

"네?"

"저 괜찮아요?"

한준혁이 이수진을 본다.

"네. 수술 잘 됐어요."

"그럼... 살 수 있어요?"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잡는다.

시간이 보인다.

'3일 18시간 52분'

그 시간은 이제 희망의 시간이었다.

한준혁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책임감이 눈빛에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아이를 살렸다. 하지만 그것이 정의인지, 아니면 또 다른 시스템의 일부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네. 살 수 있어요."

이수진의 얼굴에 웃음이 떠오른다.

한준혁이 아이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손가락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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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

한준혁이 응급실의 중앙에 섰다.

정하윤. ECMO에 연결된 아이. 3개월의 시간.

이수진.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아이. 3일 18시간 52분의 시간.

그리고 312명의 거부당한 환자들.

한준혁의 주머니에는 박서은의 펜드라이브가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모든 기록이 있었다.

기적이 아닌 시스템의 부조리.

의료 정의를 향한 첫 발걸음.

그리고 한 의사의 선택.

응급실의 모니터들이 계속 울렸다.

새로운 환자들이 밀려왔다.

한준혁이 준비 자세를 취한다.

"응급차 도착, 2분."

윤태희의 목소리다.

한준혁은 응급실의 중앙으로 간다.

그의 손이 움직인다.

응급실의 리듬이 가속된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기록되고 있었다.

박서은의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

변화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 의사가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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