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하윤의 심박수가 148로 치솟았다.
모니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한준혁은 응급실 침대 옆에 섰고, 윤태희가 이미 산소 마스크를 아이의 얼굴에 갖다 대고 있었다. 밤 1시 47분. 도로 교통사고 4명의 환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응급실은 이미 전쟁터였다.
"혈압 162 over 98. 산소 포화도 떨어지고 있어요."
윤태희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손의 미세한 떨림이 상황의 심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하윤은 침대 위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8살 아이의 가슴이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호흡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한준혁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정하윤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이미 세 번의 수술을 받은 이 아이는 지금 심부전의 말기 단계에 있었다. 한준혁이 3일 전 감지한 생존 시간은 2주일. 14일. 그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하윤아, 힘내. 선생님이 여기 있어."
한준혁이 아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미열이 있었다. 심박수가 더 오를 것 같았다.
정하윤의 엄마 김지은이 응급실 입구에서 비명을 질렀다.
"아들! 아들!"
간호사가 그녀를 붙잡았다. 병실 침대에서 아이를 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몸부림. 한준혁은 그 소리를 듣고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정하윤의 손을 잡아야 했다. 손을 잡으면 명확한 수술 시간이 보일 것이고, 심장 판막의 정확한 위치가 떠오를 것이고, 이 아이를 살릴 방법이 직관적으로 명확해질 것이다.
손을 잡으면 된다.
하지만 한준혁의 손은 정하윤의 손 위에서 멈춰 있었다. 닿지 않은 채로.
"의사 선생님…"
정하윤이 입을 열었다. 산소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뭉쳐 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나 아파요."
침묵이 흘렀다.
모니터의 경고음이 계속 울렸다. 심박수 152. 혈압 168 over 102. 하지만 응급실의 모든 소리가 그 순간 멀어진 것 같았다.
"자꾸 아파요."
정하윤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8살 아이의 눈빛이, 고통에 지친 사람의 눈빛이 한준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준혁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 순간 호흡이 얕아졌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는 것 같았다. 시야가 일순간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손가락 끝이 저렸다.
"…알겠어. 괜찮아. 선생님이 있으니까."
무엇을 약속하는 말인지 자신도 모르지 않은 채 말했다.
윤태희가 한준혁의 얼굴을 봤다. 그 표정을 읽으려고 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의사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 깨진 사람의 표정이었다.
"심박수 안정화되는 중입니다. 산소 포화도 95로 올라옵니다."
간호사의 보고가 들렸다. 정하윤의 호흡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경고음의 간격이 길어졌다. 아이는 눈을 감았다. 잠이 드는 것 같았다.
한준혁은 일어섰다.
"혈압을 계속 모니터링 하고, 산소 포화도가 90 이하로 떨어지면 즉시 보고해."
"알겠습니다."
응급실을 나가던 한준혁의 걸음이 불규칙했다. 폐쇄회로 복도로 나가자마자 그는 벽에 기댔다. 손가락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정하윤이 손을 잡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다고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의 수술, 더 이상의 항암제, 더 이상의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엄마의 간절한 바람도, 의료진의 노력도, 자신의 능력도 이 아이의 진정한 바람과는 다르다는 것.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응급실 복도에서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김지은이 담당 간호사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우리 아들은 살겠죠? 꼭 살겠죠?"
간호사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 목소리도 확신에 찬 것이 아니었다.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 아이는 2주일 이상 살기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그 2주일 동안 고통은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한준혁은 응급실 사무실로 들어갔다.
윤태희가 정하윤의 의무기록을 펼쳐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분노가 떠 있었다.
"심장 이식 수술 승인이 거부됐어요."
"뭐?"
"보험사에서. 말기 아동 환자에 대한 이식 수술은 '회복 불가능한 투자'라고 판단했대요. 공식 거부 통지서가 오늘 아침에 들어왔습니다."
윤태희는 거부 통지서를 한준혁 앞에 내밀었다. 보험사 황준식의 서명이 있었다. 거부 사유: 환자의 예후 불량, 수술 비용 대비 생존 기간의 비효율성.
"이 아이는 심장 이식을 받으면 최소 5년, 10년도 살 수 있어. 의학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윤태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정하윤을 6개월 동안 봐왔다. 아이의 모든 입원 기록을 관리했고, 엄마의 모든 간청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공식 항의를 해야 해요. 병원 차원에서 보험사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한준혁이 손을 들었다.
"안 돼."
"뭐가 안 돼요?"
"공식 항의는 병원 이미지에 악영향을 준다. 이사장이 말했어."
윤태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래서 뭐라고? 이 아이가 죽도록 놔둔다고?"
"…"
한준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정하윤의 손을 잡으면 된다. 능력을 사용해서 심장 이식 수술을 정확히 계획하고 실행하면 된다. 보험사의 거부 따위는 관계없이.
하지만 정하윤은 아프다고 말했다.
"정하윤이 뭐라고 했어?"
윤태희가 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응급실 사무실을 나갔다.
사무실 밖에서 이사장 김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 1시인데 이사장이 응급실에 와 있었다. 그의 옆에는 보험사 대리인 황준식이 서 있었다.
"…훌륭한 사건이야. 말기 소아 환자, 기적의 의사, 그리고 무정한 보험사. 언론이 좋아할 만한 구성이지."
이사장이 웃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 병원의 의료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보여줄 수 있다. 정하윤 수술이 성공하면, 우리는 '아이들의 생명을 살리는 병원'이 된다. 실패해도 '의료 시스템의 문제'로 돌릴 수 있고."
황준식이 중얼거렸다.
"말기 환자 치료는 낭비야. 한정된 의료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게 맞지. 이 아이는…"
황준식의 시선이 응급실 침대 쪽을 향했다. 정하윤이 자고 있는 방향이었다.
"…이미 끝난 거야."
한준혁은 그 말을 듣고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며 자신의 손을 봤다. 정하윤의 손 위에서 멈춘 손가락들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가 한준혁을 멈췄다.
"의사 선생님."
박서은이었다. 기자는 밤 1시 반의 응급실 복도에 서 있었다. 손에는 노트북이 들려 있었고, 눈빛은 예리했다.
"정하윤 사건 알고 계세요?"
한준혁의 얼굴이 경직됐다.
"어떻게…"
"의료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박서은이 한 발 다가섰다. 그 눈빛이 한준혁을 관통했다.
"당신이 뭔가 특별한 거,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뭐라는…"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요. 보험사의 부조리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박서은이 그의 앞에 명함을 내밀었다. 이미 한 번 받은 명함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정하윤이를 위해서라면, 우리와 함께하세요."
한준혁은 명함을 받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탔다.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기 전에 박서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성공률은 통계적으로 불가능해요. 뭔가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그게 뭐든, 이 아이를 위해 쓸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한준혁은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정하윤의 손을 잡으면 모든 게 명확해질 것이다. 수술 시간, 절개 위치, 필요한 기술. 그리고 이 아이의 죽음까지.
하지만 정하윤은 아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적의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 한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윤태희였다.
"정하윤이 깨어났어요. 그리고… 엄마를 만나고 싶대요. 그리고 선생님도 만나고 싶대고."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갔다.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정하윤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엄마 김지은이 그의 옆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정하윤의 눈은 한준혁을 향하고 있었다.
"선생님…"
"응, 여기 있어."
한준혁이 침대 옆에 섰다. 정하윤이 한 손을 들었다. 엄마의 손을 놓고.
한준혁의 손이 정하윤의 손 위로 내려갔다.
그 순간, 세상이 멈췄다.
2주일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다른 것이 보였다. 심장의 펄럭임. 아이의 고통. 그 고통의 질감과 깊이.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존엄하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길.
정하윤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저씨, 나… 엄마 때문에 살아야 하나요?"
한준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손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왜 그런 말을 해?"
"왜냐하면… 정말 아파서."
응급실의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모니터의 경고음도, 엄마의 울음소리도, 병원의 모든 소음도.
오직 정하윤의 목소리만 남았다.
"저… 아파요."
한준혁의 손이 정하윤의 손 위에서 얼어붙었다.
손을 놓아야 한다. 지금 당장.
하지만 손가락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의 피부가 차갑고 축축했다. 맥박이 약했다. 그리고 그 약한 맥박 속에서 한준혁은 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2주일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의학적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가 겪을 고통의 시간이었다.
정하윤의 몸은 이미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였다. 심박수 상승, 혈압 상승, 호흡 곤란.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이의 내적 고통이었다. 통증 수준 8단계. 정상인이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넘어선 고통. 그 고통 속에서 아이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한준혁은 입을 열었다 다물었다. 의사로서의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교과서, 모든 임상 경험, 모든 의료 윤리가 이 순간에는 무력했다.
"정하윤."
김지은이 아이의 다른 손을 잡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하윤이, 엄마가 있잖아. 엄마가 있으니까…"
"엄마."
정하윤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눈빛은 놀랍도록 맑았다.
"엄마, 미안해요.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김지은의 울음이 더 커졌다. 윤태희가 곁에 서서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얼굴도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한준혁은 여전히 정하윤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아니, 놓지 않으려고 했다. 손을 놓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아이와의 연결이 끝나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것도 끝날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
정하윤이 한준혁을 다시 봤다.
"내가… 죽으면 아파요?"
한준혁의 목이 메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정직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도, 거짓으로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의료 시스템 어디에도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없었다.
"응급실에는 진통제가 있어."
한준혁이 겨우 말했다.
"충분해?"
"…충분하도록 하겠다."
정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엄마를 봤다.
"엄마, 나한테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 정말 피곤해요.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안 돼, 우리 하윤이…"
"엄마."
정하윤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작지만 확고했다.
"의사 선생님이 나를 살릴 수 있대요. 근데 엄마, 나 살고 싶지 않아. 나 정말 아파."
그 말이 응급실에 떨어졌을 때, 모니터의 경고음이 울렸다. 정하윤의 심박수가 상승하고 있었다. 혈압도.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 반응이었다.
한준혁이 정하윤의 손을 놓고 손을 들었다.
"진정해. 깊게 숨을 쉬어."
"선생님, 나…"
"진정해."
한준혁의 손이 정하윤의 가슴에 닿았다. 아이의 심장 위에. 그 순간 뭔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불안이 손을 통해 자신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감정 전달이 아니었다.
한준혁은 자신의 손가락이 정하윤의 심장의 리듬을 감지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리듬을 천천히, 깊게, 안정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모니터의 숫자들이 내려왔다. 심박수 110에서 95로. 혈압 145/92에서 130/85로.
정하윤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다. 아이의 눈이 감겼다.
"자, 이제 쉬어. 그냥 자."
한준혁이 손을 거둬 놨다. 정하윤은 이미 자고 있었다. 피로와 약물의 영향으로.
김지은이 아이를 바라봤다.
"우리 아이가… 저런 생각을…"
"엄마."
윤태희가 김지은의 손을 잡았다.
"아이의 통증 수준이 8단계예요. 정상인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을 훨씬 넘어선 거예요. 아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의료 전문가 입장에서 그건 합리적인 반응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포기가 아니에요."
윤태희가 한준혁을 봤다. 그의 표정을 읽으려는 듯이.
"그게 뭔지 아직 모르겠지만, 이 아이를 위한 다른 길이 있을 거 같은데요. 의료만이 아니라…"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응급실을 나갔다. 의료 기록실로.
2층 의료 기록실은 밤 1시 반이었지만 불이 켜져 있었다. 행정부는 24시간 가동된다. 야간 담당자 김 과장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정하윤 진 환자의 보험 검토 기록을 보고 싶습니다."
"이 시간에?"
"이 시간에."
한준혁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김 과장은 컴퓨터를 두드렸다. 몇 분 뒤 프린터가 울렸다.
A4 용지 3장. 보험사의 거부 사유서였다.
**[치료 불가 판정 사유]** **환자: 정하윤 (8세, M)** **진단: 선천성 심실 중격 결손증, 좌심실 기능 부전** **의학적 판단: 말기 상태로 회복 불가능** **비용-편익 분석: 수술 비용 1,200만 원 > 예상 생존 기간 연장 가치** **결론: 보험 적용 불가, 호스피스 권장**
한준혁의 손이 떨렸다.
"비용-편익 분석?"
"네, 보험사에서는 의료 자원의 효율성을 고려해서…"
"이건 아이입니다."
"의료 현실상…"
한준혁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 아이가 수술받을 경우 생존 확률이 몇 퍼센트인지 적혀 있나요?"
"그건…"
"없다는 거네요."
한준혁이 다시 읽었다. 서류 어디에도 의학적 근거는 없었다. 오직 '회복 불가능'이라는 주관적 판단과 숫자만 있었다.
"이 판정을 내린 의사가 누구입니까?"
"그건 보험사에서…"
"보험사 의사네요. 우리 병원의 의사가 아니라."
한준혁이 서류를 집어 들고 나갔다.
4층 이사장실. 밤 1시 45분이었지만 불이 켜져 있었다. 이사장 김준호가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옆에는 보험사 대리인 황준식이 있었다.
"의사 한준혁."
이사장이 한준혁을 봤다.
"이 시간에 어디서 오셨습니까?"
"정하윤 진 환자의 보험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한준혁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이 판정이 타당한가요?"
이사장과 황준식이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이사장의 표정이 굳었다. 한준혁의 의도를 읽은 것 같았다.
"의료 현실상…"
"현실이 아닙니다."
한준혁이 서류를 들었다.
"이건 거부입니다. 의학적 근거 없이 아이의 치료를 거부하는 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법적 리스크를 만듭니다."
이사장의 눈빛이 변했다.
"법적 리스크?"
"네. 보험사의 자의적 거부 판정에 병원이 동조했다는 기록이 남습니다. 나중에 의료 소송이 발생하면, 이 기록은 병원의 과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한준혁이 서류를 내려놨다.
"더구나 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 병원이 보험사와 결탁했다는 의혹도 피할 수 없습니다."
황준식이 불편해 보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공식 입장을 바꿔야 합니다."
한준혁이 차분히 말했다.
"병원은 이 아이의 수술을 진행합니다. 보험사의 거부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합니다. 의학적으로 수술이 가능하고, 아이의 생명을 살릴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장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손실이…"
"손실이 아닙니다. 이건 투자입니다."
한준혁이 다시 말했다.
"우리가 이 아이를 살리는 병원이 되려면, 정말로 그래야 합니다. 보험사의 부조리한 거부에 맞서 병원이 책임진다는 걸 보여주면, 그것이 진정한 의료 정의를 추구하는 병원입니다. 그게 언론 효과보다 훨씬 강하지 않을까요?"
이사장의 표정이 흔들렸다. 한준혁의 말이 이전의 이미지 관리 논리와는 다르게, 오히려 병원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법적으로도, 보험사의 부조리한 거부에 대해 병원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은 나중의 법적 리스크를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사장은 한참을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수술을 진행하세요."
한준혁이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에서 멈추지 않았다. 계단으로. 응급실로.
응급실 대기실은 여전히 울음으로 가득했다. 밤 2시. 응급 환자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한준혁은 정하윤의 침대 옆에 섰다. 아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안정적인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한준혁은 자신의 손을 봤다.
정하윤의 손을 잡으면 모든 게 명확해진다. 2주일의 생존 시간. 최적의 수술 방법. 그리고 이 아이의 죽음까지.
하지만 지금 한준혁이 알고 싶은 건 다른 것이었다.
이 아이의 고통을 어떻게 덜어줄 것인가.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성을 지켜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깨달음 속에서 한준혁은 정하윤의 손을 다시 잡았다.
2주일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도 보였다.
아이가 겪을 고통의 질감. 그리고 그 고통을 어떻게 존엄하게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길.
수술실의 형광등. 정확한 절개 위치. 심장 이식의 모든 단계. 그 길은 고통의 완화로 이어졌다. 통증 관리를 위한 고용량 진통제, 불안감 완화를 위한 진정제, 엄마와의 마지막 시간들을 최대한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의료 계획.
만약 수술이 성공한다면, 정하윤은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한다 해도, 아이는 고통 없이 존엄하게 그 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박서은이었다.
"의사 선생님, 저 박서은입니다. 정하윤 사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요."
한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의 성공률 92%는 통계적으로 불가능해요. 그리고 그 뒤에는 뭔가 있어요. 우리는 알아요. 의료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누가…"
한준혁의 손가락이 떨렸다. 박서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마치 먼 곳에서 오는 것 같았다.
"변호사, 기자, 의료 윤리 전문가, 그리고 당신처럼 시스템을 바꾸고 싶은 의사들이요."
한준혁은 호흡을 고르려 했다. 박서은의 말이 정하윤을 도구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이의 고통이 '증거'가 되는 것. 아이의 존엄성이 '시스템 비판의 수단'이 되는 것. 그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지만 동시에 한준혁은 알고 있었다. 박서은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이 시스템이 정하윤 같은 아이들을 계속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의 성공이 필요하고, 당신의 고통도 필요해요. 그것이 증거가 되거든요."
"증거?"
"네. 이 시스템이 얼마나 부조리한지의 증거요."
한준혁은 대답했다.
"정하윤의 고통이 증거가 되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통화 끝에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렇다면 다르게 생각해보세요. 정하윤의 존엄성이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아이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을 때, 의료 시스템이 그것을 존중하는 모습이 증거가 되는 것이라고."
박서은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것이 진정한 의료 정의 아닐까요?"
한준혁은 잠시 침묵했다. 정하윤의 손을 다시 봤다. 아이의 손은 작고 차갑고 약했다.
박서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정하윤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 아이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료 정의였다.
"알겠습니다. 정하윤의 모든 의료 기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한준혁이 말했다.
"정하윤의 존엄성은 반드시 지켜주세요. 아이의 고통이 아니라, 아이의 의지와 선택이 중심이 되도록."
"약속하겠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한준혁은 정하윤의 손을 다시 봤다.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3층 의료 기록실로.
서류를 복사했다. 정하윤의 모든 의료 기록. 보험사의 거부 사유서.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성한 수술 가능성 평가서. 아이의 통증 수준 8단계에 대한 의료 기록도 포함했다.
그리고 그 서류들을 들고 박서은에게 전송했다.
메시지: "정하윤 케이스의 전체 기록입니다. 아이의 고통의 근거, 보험사의 부조리한 거부, 그리고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 이것이 증거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단, 정하윤의 존엄성은 반드시 지켜주세요."
응급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새벽 3시였다.
정하윤은 여전히 자고 있었고, 모니터는 안정적인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준혁은 침대 옆에 앉았다.
그리고 정하윤의 손을 다시 잡았다.
2주일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명확했다.
수술실의 형광등. 정확한 절개 위치. 심장 이식의 모든 단계.
그리고 그 수술 이후의 시간들.
통증 관리를 위한 완화의료. 고용량 진통제로 아이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것. 필요하면 진정제를 사용해 아이가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 엄마와의 마지막 시간들을 최대한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료였다.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것.
한준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이의 맥박이 느껴졌다. 약하지만 분명한 맥박.
그리고 그 맥박 속에서 한준혁은 깨달았다.
정하윤이 원하는 것이 죽음 자체가 아니라, 고통에서의 해방이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명확했다.
수술로 생명을 연장하고, 완화의료로 고통을 덜어주고, 그 모든 과정에서 아이의 의지를 존중하는 것.
2주일이라는 시간이 남았다면, 그 시간을 최대한 의미 있게 만들어야 했다.
한준혁은 정하윤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의 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