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천경의 밤거리가 전쟁터로 변했다.

황실 검객 수련원의 정예 부대가 한유를 둘러싸고 있었다. 회백색 제복을 입은 검객들이 일렬로 늘어섰고, 그 중앙에 이문호가 서 있었다. 한유는 손 위에서 검기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32명의 죽음이 하나로 통합된 그 검기는 이제 자신의 것이 아닌, 검맥 전체의 목소리였다.

"또 달아나지는 않겠지."

이문호의 목소리는 전과 달랐다. 질문이 아니라 선언에 가까웠다. 그의 검이 천천히 들려졌다. 그 움직임 하나에 거리의 공기가 갈라지는 듯했다.

한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백영, 구화, 연화가 자신의 뒤에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믿고 이곳까지 온 것이다. 그 신뢰가 무거웠다.

검을 들려고 했을 때, 이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검을 드십니까?"

이전과 다른 질문이었다. 이문호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명령을 따르는 검객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찾아 헤매는 누군가의 눈이었다.

한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었다.

황실 검객들의 진격이 시작됐다. 첫 번째 물결이 쏟아져 내렸을 때, 구화가 움직였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의 몸이 지면에 고정되었고, 그 불안정함이 곧 강점이 되었다. 검이 호를 그렸다. 세 명의 검객이 뒤로 날아갔다.

구화는 한 팔로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움직였다. 한 다리는 땅에 박혀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의 강점이 되었다. 움직일 수 없기에 더욱 강해지는 것. 그것이 구화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또 다른 두 명의 검객이 그의 칼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구화의 목소리는 고통이 없었다. 오직 결의만 있었다.

"내가 견디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백영이 앞으로 나섰다. 한쪽 눈이 먼 그의 몸이 흔들렸다. 검의 기운으로 상대를 감지하는 천심검법. 그의 검 앞에 서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았다. 노인의 손에서 나오는 검기는 점점 약해지고 있었지만, 30년을 넘게 살아온 몸이 이 순간을 견디고 있었다. 황실 검객 다섯 명이 그의 칼날에 스러졌고, 백영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검맥의 정통성은 죽음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백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생애 마지막 전투임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자각이 그의 검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연화는 한유의 곁에서 움직였다. 단검이 번개처럼 휘갈렸다. 그녀의 움직임은 황실 검객들의 패턴을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자신의 동료들의 약점을 훤히 알고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전투였다. 한 명씩 무너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황실의 감시자로서의 냉정함이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자신이 버려야 할 모든 것에 대한 두려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선택했습니다."

연화가 한유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황실의 감시자로서의 냉정함이 없었다. 오직 자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만 있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은 선택의 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 속에는 황실과의 모든 인연을 끊는 것, 자신이 지켜온 질서를 거부하는 것, 그 모든 것의 대가를 감수한다는 자각이 담겨 있었다.

한유가 처음으로 느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 순간, 이문호가 돌진했다. 검이 하늘을 가르며 내려왔다. 한유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다. 32명의 죽음이 일제히 폭발했다. 천경의 거리 전체가 검기로 뒤덮였다. 흰색과 검은색의 파장이 충돌하며 공중에서 부서졌다.

이문호가 뒤로 밀려났다.

그 순간이었다. 한유는 이문호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최후의 일격을 날릴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하지만 한유의 손이 멈췄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었다. 한유는 의식적으로 검을 거두었다.

이문호의 눈이 변했다. 명령을 따르는 검객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찾아 헤매는 누군가의 눈이었다. 그 눈빛이 한유를 멈추게 했다.

황실 검객들이 다시 포위를 좁혀 왔다. 한유 일행은 점점 중심으로 몰려갔다. 백영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화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연화의 단검도 속도를 잃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천경의 밤하늘이 쪼개졌다.

황제 유신이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그림 속의 그것이 아니었다. 눈빛이 미쳐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손에서 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한유가 경험한 32명의 죽음과는 다른 종류의 검기였다. 하지만 같은 절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직접 이 일을 끝내겠다."

황제의 목소리는 부서져 있었다.

동시에 황후 지은이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황실의 정예 세력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를 향해 검을 들고 있었다.

"황제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황후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30년 전 검맥을 멸절시킨 그 손으로 만든 질서는 이제 부패했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었다. 황제가 한유를 추격하는 동안, 황후는 자신의 세력을 모았다. 황실 내의 파벌을 장악했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계획이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한 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천경의 거리가 세 개의 전장으로 나뉘었다. 한유 일행 대 황실 검객 수련원. 황제 유신 대 황후 지은의 세력.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이문호가 서 있었다. 그의 손은 검을 들었으나, 더 이상 누구를 향해 검을 들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한유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32명의 죽음이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책임이라는 것을.

거리 위에 32명의 환영이 나타났다. 역대 황제검맥의 무인들이 한유의 곁에 섰다.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 충분했다.

한유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황제가 한유 앞에 섰다.

황제의 손에서도 같은 검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32개가 아닌, 다른 종류의 검기였다. 하지만 같은 절망으로 이루어진 검기였다.

"네가 경험한 32명의 죽음? 나는 그것을 30년간 매일 밤 꿈꿔왔다."

황제의 목소리에는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내 몸 속에도 그들이 살아 있다. 검맥의 혈통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같은 무게로."

한유는 황제의 말을 이해하려 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황제도 32명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것과 다른 기연을 개발했다는 뜻인가.

"이제 그것을 끝낼 시간이다."

황제의 검이 들려졌다. 한유는 검을 맞받쳤다.

천경의 밤이 다시 갈라졌다.

황제의 검기가 내려왔을 때, 한유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마주한 것이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검이 부딪혔다. 하늘이 울음을 터뜨렸다. 32명의 죽음이 한유의 몸을 통해 터져 나왔고, 황제의 검기가 그것을 맞받았다. 두 검기는 충돌할 때마다 천경의 거리를 뒤흔들었다. 돌이 부서지고, 건물의 벽이 갈라졌다.

"왜 놓았는가?"

황제가 물었다. 검을 휘두르며, 한유를 밀어붙이며.

"이문호를 이길 수 있는 순간에, 왜 검을 놓았는가?"

한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32명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검기를 더욱 강하게 모았다. 하지만 그 손은 여전히 떨렸다.

황제의 검이 너무 강했다. 그것은 단순한 검술이 아니었다. 30년간 매일 밤 32명의 죽음을 꿈꿔온 절망이 담긴 검기였다. 한유가 경험한 것은 순간이었지만, 황제가 견딘 것은 30년이었다.

"아버지."

한유가 말했다.

황제의 움직임이 멈췄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처음 인정합니다."

검기가 흔들렸다. 황제의 손에서 검기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검객이 되지 않겠습니다."

한유가 다시 검을 들었다. 이번에는 다르게. 32명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검으로.

"나는 검맥의 후예입니다. 그것이 내 정당성입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광기 섞인 웃음이었다.

"검맥의 정당성이라니?"

황제가 다시 검을 들었다.

"나는 그 정당성이 두려워서 검맥을 멸절시켰다. 그것을 알고 있는가? 내가 죽인 것은 32명의 검객이 아니라, 나 자신이 견디지 못한 정당성이다."

검들이 다시 부딪혔다. 이번에는 더욱 격렬했다. 황제와 한유의 검이 천경의 거리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뒤에서 황후 지은의 세력과 황제의 검객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이문호는 여전히 검을 들고 서 있었지만,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은 한유와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영이 한유의 곁에서 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몸이지만, 그 검은 여전히 우아했다. 한눈이 먼 그의 눈빛은 검기로 모든 것을 본다. 황실 검객 셋을 동시에 밀어붙였다.

그 순간, 천경의 밤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검기로 인한 대기의 진동이 만든 빗줄기였다. 그 빗속에서 두 검객은 계속 싸웠다.

이문호가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검이 들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한유를 향한 것도, 황제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검은 황실 검객 수련원의 일부를 향했다. 자신의 동료들을 향해.

"내 검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이문호가 외쳤다. 빗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의 몸이 흔들렸다. 자신의 동료 중 한 명이 그의 칼날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또 다른 동료가. 그것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었다. 황실 검객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 알겠습니다."

이문호가 한유를 바라봤다.

"당신의 말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습니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명령을 따르는 검객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찾은 누군가의 눈이 되었다.

"정당성이 무엇인지."

이문호가 깨달았다. 자신의 검이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한유가 놓친 이유가 약함이 아니라, 자신의 검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자신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그 깨달음이 그의 검을 새로운 방향으로 돌렸다.

황후 지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흥미롭군."

그녀가 말했다.

"황제도 무너지고, 검객도 흔들린다. 이제 질서를 재정의할 시간이다."

황후의 검객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이문호가 그들을 막았다. 검을 들고.

"황후 지은, 물러나십시오."

이문호의 목소리는 이제 확신으로 가득 찼다.

"내 검은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의를 거스르지도 않습니다."

천경의 거리가 다시 흔들렸다.

한유와 황제의 검이 최후의 충돌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제의 얼굴에서 광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30년의 절망. 그것이 마지막 검기가 되어 모아지고 있었다.

한유는 알았다. 자신이 이 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의 검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것이 자신의 정당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32명의 죽음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검기 속에서, 한유는 한 가지를 더 봤다.

32명의 환영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한 명의 환영. 그것은 자신의 얼굴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얼굴이었다. 황제의 아들로 살 수도 있었고, 검맥의 후예로 살 수도 있었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죽을 수도 있었던 모든 경로의 교차점. 그 교차점에서 한유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정당성은 누군가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그 선택 위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황제의 검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도, 한유는 처음으로 검을 들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한유가 중얼거렸다.

"내가 봐야 할 것은 이것이었군요."

황제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한유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의 정당성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한유가 말했다.

"내 정당성을 묻는 것이었군요."

그 순간, 한유의 손에서 새로운 검기가 터져 나왔다. 32명의 죽음이 아닌, 한유 자신의 것이었다. 과거의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32명의 절망과 한유 자신의 선택이 만나는 지점. 그곳에서 새로운 검기가 피어났다.

천경의 밤이 다시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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