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벽 4시의 거래

새벽 4시, 노트북 화면의 푸른 빛이 이준호의 얼굴을 비췄다.

클라이언트로부터 온 메일을 확인했다. 프로젝트 취소. 예정된 150만 원의 수입이 사라졌다.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놨다.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을 최소화했다. 바탕화면에 붙여 놓은 스티커를 봤다. 손글씨로 쓰인 숫자들.

전세금: 2억 5천만 원 부모 빚: 3억 원 월 수입: 150만 원 현재 저축: 412만 원

계산기를 켰다. 412만 원으로 5억 2천만 원을 갚으려면. 손가락이 번개같이 움직였다.

348개월.

29년.

이준호는 29살이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설계일까. 그 생각은 곧 사라졌다.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새벽 4시 반. 음성 메시지였다. "준호야, 미안해. 또 독촉 전화가 왔다. 이번엔 변호사까지 나왔단다. 이게... 이게 언제까지..."

음성을 재생하는 손가락이 멈췄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카톡 알림이 떨어졌다.

【타임트레이드 공식 앱】

당신은 타임트레이드 시스템 베타 테스터로 선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준호는 이 메시지를 읽고 멈췄다. 타임트레이드. 그건 뉴스에서 봤다. 2년 전부터 떠들썩했던 거. 남은 수명을 돈으로 바꾼다는 거.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베타 테스터 초대장이 떨어졌다.

앱을 클릭했다.

로딩 화면이 떴다. 신경계 네트워크처럼 생긴 애니메이션이 돌아갔다. 그 다음 화면이 켜졌다.

【타임트레이드 대시보드】

사용자명: 이준호 나이: 29세 3개월 남은 수명: 23년 4개월

이 숫자들이 떠올랐을 때, 준호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23년 4개월. 그게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계산된, 확률로 도출된 자신의 죽음까지의 거리.

화면을 아래로 스크롤했다.

【현재 시간 단가】

초당: 1,200원 분당: 72,000원 시간당: 4,320,000원

준호의 눈이 확대되었다.

시간당 432만 원이라는 숫자가 화면에 박혔다. 그의 월 수입이 150만 원인데, 1시간을 판다면 432만 원을 번다는 뜻이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더 내렸다. 거래 버튼이 있었다. 빨간 배경에 흰 글씨.

【시간을 판다】

준호는 손가락을 들었다. 내렸다. 다시 들었다.

새벽 4시 47분.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맴돌았다. 1초만 팔면 1,200원이다. 1시간을 팔면 432만 원이다. 부모의 빚을 갚으려면 694시간을 팔면 된다. 29일이다.

29일이면 끝난다.

손가락을 누렀다.

화면이 반응했다.

【거래 완료】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9분 59초

통장 입금: 1,200원

이 숫자들이 빨간 테두리로 반짝였다. 정확히 말하면, 남은 수명 숫자가 빨간색으로 깜빡였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준호의 입술이 벌어졌다.

자신의 생명이 1,200원이 되는 것을 봤다. 추상적이지 않게. 구체적으로. 숫자로. 화면에 명시되어. 거래 완료. 입금 완료.

그 순간, 뭔가가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 죄책감과 해방감이 뒤섞여 흘렀다. 동시에 공포가 척추를 타고 내려왔다. 자신이 방금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감정들이 신경계를 따라 뇌간까지 전해졌다.

휴대폰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빠."

"어? 준호냐? 이 시간에?"

"방법을 찾았어."

침묵.

"정말이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변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그 변화가 준호의 귀에 들어왔다.

"응. 진짜다."

준호는 화면을 다시 봤다.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9분 59초. 통장 잔액: 412만 1,200원.

1초의 거래로 1,200원이 증가했다.

"고마워, 아들. 고마워."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준호는 그 울음을 들으며,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판 시간으로 아버지를 구하고 있다는 것. 동시에 해방감도 느껴졌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는 것.

그리고 그 해방감 아래에는 공포가 있었다. 이것이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노트북으로 돌아갔다. 타임트레이드 앱의 설명서 탭을 열었다.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타임트레이드 시스템 개요】

개발자: 신경과학자 박수영 (2035년) 초기 목적: 의료용 수명 예측 및 치료 효율성 제고 현재 용도: 전지구적 금융 거래 시스템 거래 원리: 사용자의 남은 수명을 초 단위로 현금화 시장 단가: 실시간 수급에 따라 500~3,000원/초 변동

월별 거래 한도: 개인당 최대 72시간 (약 3,456만 원)

부작용: 거래 시 뇌 해마 영역에 '시간 흔적' 축적 증상: 기억 감퇴, 판단력 저하, 누적 시 회복 불가능

주의: 상세 의학적 설명은 추후 별도 문서 참조

준호는 '회복 불가능'이라는 단어에 눈을 멈췄다. 그 다음 화면을 넘겼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은행 앱을 열었다. 계좌 조회.

잔액: 412만 1,200원 최근 입금: 1,200원 (타임트레이드 시스템)

1,200원이 명시되어 있었다. 부모의 3억 원 빚 중 0.0004%가 갚혔다.

준호는 앉아만 있었다. 30분 동안. 화면을 바꾸지 않으면서.

그 다음, 머리가 지끈거렸다.

묵직한 느낌이 관자놀이에서 시작되어 뒤쪽으로 퍼졌다. 현기증은 아니었다. 더 정확했다. 뇌가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것 같은 느낌. 마치 자신의 생각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처럼.

준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정은미와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제 오후였나? 정확하지 않았다.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카톡 기록을 봤다. 어제 정은미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요즘 뭐하냐? 요즘 연락 없네."

그 메시지를 읽었지만, 언제 받았는지 모르겠다.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기억이 없다.

잔액: 412만 1,200원 최근 입금: 1,200원

이 숫자는 명확했다.

준호는 이 숫자를 봤다. 1,200원. 자신이 판 1초. 자신이 얻은 현금. 자신이 잃은 시간.

화면이 깜빡였다.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9분 59초.

빨간색이었다.

그 빨간색을 응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 감각이 흐릿했다. 새벽 5시는 넘었을 것이다. 창밖은 여전히 검었다.

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다시 들었다. 반복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조종하는 것처럼.

타임트레이드 앱. 거래 버튼. 그 버튼이 보였다.

1초를 팔 때마다 1,200원. 1시간을 팔면 432만 원.

부모의 3억 원 빚은? 3억 원 ÷ 432만 원 = 약 69시간.

69시간. 2.875일. 이틀 반.

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이틀 반이면 부모의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다. 이틀 반이면 아버지가 채권자의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 이틀 반이면 전세금도 해결된다.

화면을 켰다. 꺼냈다. 켰다.

거래 버튼이 손가락 끝에서 맥박처럼 뛰었다.

누르면 된다. 딱 한 번 더 누르면 된다. 아니, 여러 번 누르면 된다. 월별 거래 한도가 72시간이라면 이번 달에만 72시간을 팔 수 있다는 뜻이다. 72시간이면?

72시간 × 432만 원 = 3억 1,104만 원.

정확히 부모의 빚을 갚고도 남는다.

가슴이 철렁했다. 불안함이었는지, 기대였는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러나 손가락은 멈췄다.

'회복 불가능'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설명서에 있던 그 단어. 거래 시 뇌 해마 영역에 '시간 흔적' 축적. 기억 감퇴. 판단력 저하.

준호는 손을 내려놨다. 노트북을 켰다. 검색창에 입력했다.

'해마 뇌 영역'

결과가 떴다. 신경과학 논문들. 의학 자료들. 그 중 하나를 클릭했다.

해마(hippocampus)는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뇌 영역이다. 손상 시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없으며, 과거 기억도 접근 불가능해진다.

준호는 읽고 또 읽었다. 손가락으로 아래로 스크롤했다.

해마 손상의 가역성: 경미한 손상은 회복 가능하나, 신경세포 사멸이 발생한 경우 회복 불가능.

현기증이 다시 밀려왔다. 이번엔 더 강했다.

준호는 눈을 감았다. 뒤로 누웠다. 침대 위에. 천장을 봤다.

어제 저녁. 정은미가 뭐라고 했더라?

여전히 기억이 안 났다.

그 순간, 거울이 보였다. 침대 맞은편 벽에 붙은 거울. 준호는 일어나 앉았다.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자신의 것이 맞나?

눈동자가 흔들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피부 톤도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준호?"

자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자신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했나?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은행 앱을 다시 열었다.

최근 입금: 1,200원

이 숫자는 몇 분 전인가? 30분 전인가? 시간이 흐릿했다. 하지만 이 숫자는 명확했다.

다시 타임트레이드 앱을 열었다.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9분 59초

이 숫자도 명확했다.

준호는 거래 버튼을 다시 봤다.

한 번 더. 단 한 번 더 누르면?

1,200원 × 2 = 2,400원.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8분 58초.

그러면 아버지의 울음이 조금 더 길어질 것이다. 아버지의 절망이 조금 더 줄어들 것이다.

두 번 누르면?

1,200원 × 2 = 2,400원.

아니다. 거래할 때마다 단가가 다를 수 있다. 설명서에 '실시간 수급에 따라 500~3,000원/초 변동'이라고 했다.

현재 단가는 1,200원이다. 충분히 높다.

준호는 손가락을 거래 버튼 위에 올렸다. 화면을 터치하려 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아버지의 이름이 떴다. 최태수. 새벽 5시 30분.

"아버지?"

"준호, 깨있냐?"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떨리고 있었다.

"응. 뭐하셨어?"

"채권자가 또 전화했다. 새벽부터. 말이야, 이제 정말 끝인 것 같다. 너한테 민폐를 끼쳤구나. 미안해."

침묵.

준호는 화면을 봤다. 거래 버튼. 그 위에 떠 있는 숫자들.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9분 59초 현재 시간 단가: 초당 1,200원

"아빠. 괜찮아."

"뭐가 괜찮아. 너 때문에..."

"아빠, 내가 빚을 갚을 수 있어. 곧."

아버지의 숨소리가 멈췄다.

"진짜냐?"

"응. 정말이야."

준호는 거래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직 누르지 않았다. 다만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돼? 너 괜찮아?"

"응.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은미와의 대화가 기억 안 났다. 거울 속의 얼굴도 낯설었다. 하지만 통장 잔액은 명확했다.

412만 1,200원.

거래 한 번으로.

"고마워, 준호. 고마워."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전화 너머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울음을 들으며, 준호는 손가락을 누렀다.

【거래 완료】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8분 58초

통장 입금: 1,200원

빨간색으로 깜빡였다.

아버지의 울음소리와 화면의 깜빡임이 겹쳤다. 한 박자씩. 한 초씩.

"준호? 준호?"

아버지가 부르고 있었다.

"응. 여기 있어."

"뭐 했어? 뭔가 소리가..."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는 이제 좀 쉬어. 난 해결할 거니까."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을 봤다.

현기증이 더 심해졌다. 마치 세상이 한 박자씩 어긋나가는 것 같은 느낌. 뇌가 현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다음, 무언가가 깨달았다.

정은미와의 대화 내용은 여전히 모른다. 손가락이 어제 입력한 코드도 기억하지 못했다. 거울 속의 얼굴도 낯설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것보다는 거래가 중요하다. 아버지의 울음소리가 중요하다. 그 울음소리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숫자가 중요하다.

69시간. 2.875일.

준호는 다시 앉았다. 노트북 앞에. 거래 버튼을 바라봤다.

한 번 더 누르면? 한 번 더 누르면 1,200원이 더 들어온다. 남은 수명이 한 초 더 줄어든다. 그 빨간 숫자가 한 초 더 깜빡인다.

그리고 그 깜빡임을 볼 때마다, 뭔가가 뇌를 훑고 지나간다. 전기 같은 것. 화학 같은 것. 정의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손가락이 떨렸다. 그 다음 멈췄다. 그리고 자동으로 움직였다.

타임트레이드 앱의 거래 버튼 위에서.

현재 시간 단가: 초당 1,200원.

이 숫자를 보며, 준호는 생각했다.

내가 이걸 멈출 수 있을까?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손가락이 알고 있었다. 화면을 터치하려 하고 있었다.

아직 누르지는 않았지만, 곧 누를 것이다.

손가락이 내려갔다.

화면이 반응했다.

【거래 완료】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7분 57초

통장 입금: 1,200원

빨간색이 더 빠르게 깜빡였다.

그 다음도 누를 것이다.

손가락이 다시 내려갔다.

화면이 반응했다.

【거래 완료】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6분 56초

통장 입금: 1,200원

준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자신의 것이 맞나?

거래 버튼이 다시 보였다.

손가락이 내려갔다.

화면이 반응했다.

【거래 완료】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5분 55초

통장 입금: 1,200원

이제 4,800원이 입금되었다. 부모의 3억 원 빚 중 0.0016%가 갚혔다.

준호는 멈췄다. 손가락이 아직 움직이려 했지만,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엔 더 강했다.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얼굴이 흐릿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 투명하게 겹쳐 있는 것처럼.

"이준호?"

다시 중얼거렸다. 거울 속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자신의 의도와 일치했나?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통장 잔액을 확인했다.

412만 4,800원.

이 숫자는 명확했다.

남은 수명: 23년 3개월 364일 23시간 55분 55초.

이 숫자도 명확했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았다.

준호는 거래 버튼을 다시 봤다.

69시간을 팔면 정말 끝날까?

아니면 이것도 시작일까?

손가락이 떨렸다. 화면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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