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새벽 4시 22분

중환자실 입구의 모니터에서 이석호의 심박이 정상 범위로 돌아왔다. 의료진이 한 명씩 빠져나갔다. 지훈은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병실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이석호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이 떠 있었다. 초점이 없었지만 떠 있었다. 지훈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이석호! 깨어났어!"

목소리가 떨렸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석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옆으로. 지훈의 얼굴을 향해. 그 눈빛은 어떤 기쁨도 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수심 깊은 곳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린 것 같은 공허함뿐이었다.

"넌 왜 날 살렸어?"

목소리는 쉬었고 가늘었다.

"뭐라고?"

"난 죽고 싶었는데."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니터의 비프음이 유일한 소리였다.

"넌 뭘 말하는 거야. 너는—"

"그 영화 때문에 난 3년을 죽어있었어."

이석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지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 속에는 증오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끝없는 피로만 있었다.

"그리고 넌 그 영화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려고 해. 그럼 난 영원히 죽지 못할 거야. 3년 더. 10년 더. 죽을 때까지."

지훈의 입술이 떨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건 아니야."

이석호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지훈의 가슴을 향해.

"넌 필름 속의 자신에게만 집착하고 있어. 하지만 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이야. 날 봐."

지훈이 봤다. 이석호의 얼굴을, 창백한 피부를, 입술의 갈라진 틈을 봤다.

"난 여기 있어. 넌 나를 보지 않고 있어. 넌 누구도 보지 않고 있어."

이석호가 숨을 쉬었다. 기계의 도움 없이는 힘들어 보이는 숨.

"그 감독 박준호는 뭘 했냐면, 완벽함을 추구했어. 자신의 비전을 위해서면 모든 걸 바쳤어. 그리고 그 결과가 뭐였냐면—"

이석호가 눈을 감았다 떴다.

"자기 자살이야.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죽는 거야. 우리 영혼들을 갈아서. 넌 그 길로 가고 있어. 박준호처럼."

지훈의 손이 떨렸다.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나왔다. 의식하지 못한 채. 화면을 켰다. 7화 말미에 한진수가 건넨 하드드라이브에서 옮겨온 마스터 파일이 있었다. 필름 속 자신의 모습들이 썸네일로 줄지어 있었다. 완벽한 표정. 완벽한 음성. 완벽한 몸짓.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

박준호의 일기장 페이지가 떠올랐다. 지훈은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자신도 같은 문장을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만 주어가 달랐을 뿐. '완벽함 없이는 배우가 될 수 없다.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 그 문장 속에 박준호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이석호가 죽어 있었다. 그리고 지훈이 죽어 있었다.

"그 영화를 포기해."

이석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그리고 현재에서 살아. 지금 이 순간에서. 넌 배우야. 지훈. 배우는 그 순간을 살아내는 거야. 과거를 복원하는 게 아니라."

지훈의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삭제 폴더를 열었다.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파일 전체를 선택했다. 마우스 커서가 '영구 삭제'에 올라갔다.

그 순간, 세 년이 지나갔다.

세 년 전 촬영장. 박준호 감독이 지훈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넌 할 수 있어. 넌 완벽할 수 있어." 그 말에 지훈은 모든 걸 불태웠다. 몸도 마음도 영혼도. 그리고 박준호는 자살했다. 그 필름이 나왔다. 그 필름이 지훈을 3년간 죽게 했다. 지훈은 자신이 완벽했던 그 자신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미 죽어 있었다. 죽은 감독의 손가락으로 조종당하는 시체였다.

엄지손가락이 내려갔다.

하지만 멈췄다.

손가락이 버튼 위에서 떨렸다. 누를 수 없었다. 박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할 수 있어. 넌 완벽할 수 있어.' 그 말이 손가락을 묶었다. 3년을 손가락을 묶었다.

그 순간, 이석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병실 안에서가 아니라 지훈의 뇌 깊은 곳에서.

"넌 현재에서 살아."

지훈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떠났다.

손가락이 내려갔다.

'영구 삭제'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먹색으로 변했다.

"파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지훈이 다시 눌렀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화면이 깜박였다. 삭제 진행 바가 나타났다.

10%.

박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할 수 있어.'

20%.

필름 속 자신의 완벽한 표정이 떠올랐다.

30%.

지훈은 눈을 감았다. 감은 채로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50%.

세 년. 그 시간 동안 지훈은 이 파일을 몇 번이나 켜고 닫았는가. 몇 번이나 자신의 얼굴을 봤는가. 몇 번이나 그 완벽함에 취했는가.

70%.

이석호가 죽어가고 있었다. 지훈이 손가락을 떼지 않는 동안.

90%.

"현재에서 살아."

이석호의 마지막 말이 울렸다.

100%.

"삭제 완료."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었다. 해방의 떨림이었다.

"그럼 넌? 넌 어떻게 되는 거야?"

지훈이 물었다.

이석호가 웃음을 내뱉으려 했다. 하지만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폐에서 나오는 마지막 공기였다.

"난 괜찮아. 이제 난 과거를 포기했으니까."

이석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병실의 모니터에서 심박음이 느려졌다. 비프. 비프. 비프. 간격이 길어졌다.

"이석호?"

지훈이 손을 잡았다.

"이석호!"

이석호의 손은 따뜻했다. 아직. 하지만 그 온기는 빠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내부에서 불을 꺼가고 있는 것처럼.

비프.

비프.

길어진 침묵.

비프.

의료진이 뛰어왔다. 지훈을 밀어내고 침대 주위를 에워쌌다. 누군가가 지훈의 팔을 잡았다.

"나가주세요!"

지훈이 저항했다.

"나가주세요!"

그의 팔이 당겨졌다. 침대 위 이석호의 얼굴이 점점 멀어졌다. 창백했다. 입술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마지막 말을 하던 자세 그대로. 눈은 감겨 있었고, 이미 빛이 없었다.

병실 문이 닫혔다.

복도의 형광등이 지훈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서 있었다. 혼자. 청색 조명 속에서. 손가락 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

병원 로비를 빠져나온 지훈은 강남의 새벽 거리를 헤맸다. 한 발, 한 발. 휴대폰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민지가 먼저 전화했다.

"지훈! 넌 뭘 한 거야! 서준영 법무팀에서 전화가 왔어! 넌 필름을 삭제했다고?!"

"이석호가 죽었어."

말하는 순간 목소리가 부러졌다.

통화 건너편에서 민지의 숨소리가 멈췄다.

"뭐... 뭐라고?"

"필름을 삭제했어. 모두."

침묵.

"지훈... 이게 무슨—"

지훈은 통화를 끊었다.

강남역 근처를 헤매다 한 카페 앞에서 멈춰 섰다. 간판에 '시선'이라고 적혀 있었다. 차수진의 독립영화사였다. 유리창을 통해 편집실의 불이 켜져 있었다. 차수진이 일하고 있었다. 새벽 5시, 아직도.

지훈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

차수진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우스를 클릭했다. 클릭했다. 다시 클릭했다.

"필름이 없어졌어?"

차수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악수하는 손가락이 그의 감정을 드러냈다.

"네."

"모두?"

"네."

차수진이 마우스를 내려놨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지훈을 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이 있었다.

"그걸 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고 혼자 삭제했어?"

"미안합니다."

"미안하다고 해서 뭐가 바뀌냐고."

차수진이 일어났다. 키가 컸다. 지훈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석호가 죽었다고? 정말?"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수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서쪽 하늘이 밝아지고 있었다. 검은색에서 남색으로. 남색에서 보라색으로.

"난 그 영화를 부활시키고 싶었어. 정말로. 박준호 감독의 유작이 이렇게 사라진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차수진이 지훈을 다시 봤다.

"하지만 넌 그 영화를 구원하려던 게 아니야. 너 자신을 구원하려던 거야. 이석호가 그걸 봤고, 넌 못 봤어."

지훈이 말하지 않았다.

"가. 집에 가. 그리고 다시는 이 영화를 언급하지 마."

지훈이 나갔다.

거리는 이제 밝아지고 있었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 강남의 직장인들이 지하철역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지훈은 그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유령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윤희였다.

"지훈, 넌 정신이 있어? 이석호가 죽었대. 그리고 넌 필름을 삭제했고? 넌 뭘 한 거야?"

"응."

"응? 응이 뭐야! 넌 이제 끝이야! 우리 모두가 끝이야!"

지훈이 물었다.

"윤희, 넌 왜 그 영화를 그렇게 싫어했어?"

통화 건너편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윤희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건... 그건 상관없어. 넌 이제 도망쳐. 다른 나라로 가든지 뭐든지. 아니면 넌 영원히 여기서 죽어 있을 거야."

통화가 끊겼다.

한진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진수, 미안해. 필름을 삭제했어. 모두."

답장이 들어왔다. 몇 초 후였다.

"알았어요. 저도 필름 보관소의 마스터 필름을 삭제했어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완전히."

지훈은 휴대폰을 내렸다.

완전히. 그 말이 정확했다. 세 년의 집착이 사라졌다. 박준호의 광기가. 이석호의 고통이. 모두. 데이터 속에서 1과 0으로 분해되어 우주의 검은 곳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지훈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었다.

필름 속 자신의 완벽한 표정이.

박준호의 일기장 문장이.

이석호의 마지막 말이.

"넌 현재에서 살아. 지금 이 순간에서."

지훈은 강남역 근처의 모텔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이석호가 죽었다. 아니, 이미 죽어 있었다. 약물을 마신 순간부터. 지훈이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죽어 있었을 것이다. 지훈이 그를 살린 것이 아니다. 고통의 시간을 3일 더 연장했을 뿐이다.

방 문을 열었다. 낡은 침대. 곰팡이 냄새. 벽에는 누군가 남긴 낙서가 있었다. '여기를 떠나고 싶다'

지훈이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병원이었다.

"혹시... 이석호 환자의 보호자세요?"

"네?"

"환자분이... 의식을 다시 잃으셨습니다. 뇌사 상태로 진입했고, 유족분들께서 장기 기증을 결정하셨습니다."

지훈이 전화를 끊었다.

손이 떨렸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모텔을 나갔다. 목적지는 없었다. 다시 움직이고 싶었다. 멈추면 필름 속의 자신이 나타날 것 같았다. 완벽한 표정으로. 완벽한 목소리로. 그리고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강남의 아침은 화려했다. 건물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간판들이 켜졌다. 카페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훈은 그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멈췄다.

한 간판 앞에서.

'박준호 감독 추도식 - 오늘 오후 2시 강남 장례식장'

지훈이 읽었다. 다시 읽었다.

박준호. 그 감독의 추도식이 오늘이었다. 3년 전 자살한 그 사람의 제사가. 오늘.

이석호의 마지막 말이 울렸다. '현재에서 살아.' 지훈은 이제 알았다. 필름을 삭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다는 건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었다. 박준호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 죽음이 자신과 이석호를 어떻게 엮었는지, 그 죽음 위에 자신이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를.

지훈이 휴대폰을 켰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8시 47분.

5시간 13분. 그것이 지훈에게 남겨진 시간이었다.

지훈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방향이 명확했다.

강남 장례식장으로.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새벽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오는 거리 위에서. 지훈은 자신이 무엇을 마주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았다. 그곳에 가야 한다는 것을. 박준호의 추도식에 가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현재에서 사는 첫 발걸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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