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천사의 날개

이석호의 오피스텔 현관 앞에서 지훈의 손가락은 벨을 누르고 있었다. 울리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이석호?"

문을 두드렸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쾅쾅쾅.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석호!"

목이 터져나갈 듯 외쳤을 때, 지훈은 비로소 깨달았다. 이석호의 마지막 메시지들—"뒤를 보지 마", "뒤를 보면 넘어져", "계속 뒤를 보고 있으면..."—그것들이 경고가 아니라 고별이었다는 것을.

발길이 멈췄다. 손가락이 벨을 누르다 멈췄다. 핸드폰을 들었다. 119. 하지만 버튼을 누르기 전에 관리사무소로 내려갔다. 비상 상황. 열어달라고 했다. 관리사는 의심의 눈빛으로 지훈을 봤지만, 지훈의 목소리—악을 쓰는 절박함—에 움직였다.

현관이 열렸을 때, 지훈은 안 것을 알았다. 냄새가 아니었다. 침묵이었다. 방 안 가득한 그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석호!"

침대 옆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팔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고, 옆에는 약병과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지훈은 그의 목을 짚었다. 맥박이 있었다. 약한 맥박이지만 있었다.

"깨어, 이석호! 깨어!"

손가락으로 눈꼽을 밀어냈다. 눈동자가 반응했다. 119에 전화했다. 주소를 말했다. 약물 과다복용. 의식 불명. 목소리가 떨렸다. 지훈은 이석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그의 손목을 쓸어내렸다. 따뜻했다. 아직 따뜻했다.

구급차 사이렌이 들렸을 때, 지훈은 이석호의 얼굴을 봤다. 눈이 반쯤 떠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이미 어딘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살아, 이석호. 제발 살아."

---

병원 응급실 대기실.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지훈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멈추지 않았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피가 났다. 민지가 옆에 앉아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았다.

15분이 지났다. 30분이 지났다. 의사가 나왔다. 생명 위험은 벗어났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옮긴다고 했다. 48시간이 고비라고 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다 내 때문이야."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그 영화를 고집했으니까. 내가 이석호를 밀어붙였으니까."

손가락이 떨렸다.

"내가 필름을 봤으니까."

---

2시간 후, 중환자실 앞 복도.

윤희가 나타났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은 빨갛다. 마치 몇 시간을 울었던 것처럼. 지훈을 보자마자 멈췄다. 현관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멈췄다.

"윤희... 왜 왔어?"

윤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지훈의 옆에 앉았다. 민지는 조용히 일어나 복도 끝으로 물러났다.

"이석호는 내 친구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3년 전부터 내 친구였어. 사고 이후로도. 그 영화 이후로도. 우리는 서로의 무덤을 지켜주기로 했거든."

지훈이 윤희를 봤다. 그녀의 눈을 마주쳤다.

"그 영화는 저주받은 게 아니야, 지훈. 저주가 아니라 살인이야."

침묵이 흘렀다.

"3년 전, 넌 사고가 났어. 그리고 박준호는 미쳤어. 넌 모르지? 그 다음에 뭐가 일어났는지."

윤희가 숨을 들이마셨다.

"박준호는 완벽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 넌 사고가 났으니까 넌 쓸모가 없었어. 그래서 우리를 다시 촬영했어. 나, 이석호, 다른 배우들. 우리는 모두 너의 장면들을 다시 찍었어. 몇십 번이나."

윤희의 손이 떨렸다.

"박준호는 우리에게 말했어. '너희는 소모품이다. 완벽함을 위해서는 소모품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계속 촬영했어. 내 장면은 모두 컷됐어. 나는 배경이 됐어. 하지만 박준호는 멈추지 않았어. 더 깊이, 더 절실하게, 더 완벽하게를 반복했어."

윤희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이석호는 주연을 잃었어. 대사를 못 외웠어. 박준호가 계속 소리질렀어. '이석호, 이석호, 이석호. 넌 왜 이렇게 못하냐고.' 촬영장은 지옥이었어. 우리는 매일 죽었어. 그리고 박준호는..."

윤희가 눈을 감았다.

"박준호는 자살했어. 그 완벽함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영화는 완성되지 않았어. 필름은 폐기 처분 직전이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는 살아남았어. 하지만 살아있는 시체처럼. 그 영화의 그림자 안에서."

윤희가 지훈을 봤다.

"그래서 나는 그 영화를 묻었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석호도 그랬어. 우리는 과거를 죽이기로 했어. 그래야만 살 수 있었거든. 우리는 서로를 지켜주기로 약속했어."

"그런데..."

윤희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넌 그 과거를 깨우려고 했어. 필름을 꺼냈어. 방송하려고 했어. 그리고 이석호는... 이석호는 그걸 견디지 못했어."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박준호처럼 되고 있어."

윤희가 말했다.

"자신의 완벽함에만 집착하고 있어. 주변을 보지 않아. 이석호가 죽으려고 했는데도."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지훈이 외쳤다. 목소리가 떨렸다.

"난 그냥... 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어. 난 배우야. 난 진짜 배우였어. 그 필름이 증거였어..."

"증거? 지훈. 그건 증거가 아니라 강박이야."

윤희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강박이 사람을 죽여."

---

침묵이 복도를 채웠다.

그 순간, 중환자실 안에서 모니터 소리가 들렸다. 경보음. 지훈과 윤희가 동시에 중환자실 창문을 봤다.

이석호가 눈을 떴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얼굴이 찌푸려졌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

"이석호! 깨어났어!"

지훈이 외쳤다. 간호사들이 달려갔다. 의사가 들어갔다. 지훈과 윤희는 창문 너머로 봤다.

이석호의 눈이 뜨였다.

하지만 그 눈빛은 공허했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입이 움직였다. 뭔가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의사가 손가락을 들었다. "이름이 뭡니까?" 이석호가 눈을 깜빡였다. "몇 살입니까?" 또 눈을 깜빡였다. 의식은 있었다. 하지만 뭔가 빠져 있었다. 빛이 빠져 있었다.

지훈은 중환자실 유리창에 손을 갖다댔다. 따뜻하지 않았다. 차가웠다.

"의사선생님, 회복될까요?"

간호사가 지훈을 봤다.

"신체적으로는 회복될 겁니다. 하지만..."

의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석호의 뇌파 검사 결과를 보고 있었다.

"뇌손상이 있습니까?"

지훈이 물었다.

"약물로 인한 신경독성이 확인됩니다. 특히 해마 부위에. 단기 기억 형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그리고 정서 중추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회복 가능성은 있지만, 장기적인 재활이 필요합니다."

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중환자실 안에서 이석호는 계속 천장을 보고 있었다. 눈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음성 없는 울음이었다.

"이석호..."

지훈이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뭘 한 거야?"

---

밤 11시. 지훈은 병원 화장실에 들어갔다.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이 창백했고, 입술이 파랬다.

핸드폰을 꺼냈다.

노트북에 저장된 영상들. 완벽하게 재현한 <천사의 날개>의 장면들. 8개의 촬영 영상.

지훈의 손이 떨렸다.

그 영상들은 지훈 자신이었다. 3년 전의 완벽한 지훈. 그리고 배경에는 이석호가 있었다. 이석호가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훈의 재현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 이석호는 지금 중환자실에서 천장만 보고 있다.

지훈은 첫 번째 영상을 눌렀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지훈이었다. 완벽한 표정. 완벽한 제스처. 완벽한 지훈.

그 영상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화면이 물었다.

지훈의 손가락이 떨렸다. 마우스 위에서 떨렸다. 삭제를 누르기 전에. 취소를 누르기 전에.

그 순간, 지훈의 머리에는 한 가지만 맴돌았다.

이석호의 공허한 눈.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단지 존재하고 있었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그 눈.

지훈은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커서 위에서 맴돌았다. 마우스 버튼 위에서. 한 번의 클릭이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3년의 노력. 완벽함의 증거.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유일한 기록.

하지만 그 클릭 너머에는 이석호의 공허한 눈이 있었다.

지훈은 숨을 참았다.

"삭제."

한 번의 클릭이었다.

영상이 사라졌다. 다음 영상. 또 삭제. 다음. 또 삭제. 여덟 번째 영상까지. 모두 사라졌다.

하드드라이브도 포맷했다. 휴지통도 비웠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지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떨리면서도 계속 움직였다. 마치 자신을 벌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을 지우는 것처럼.

그리고 차수진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필름 복원은 중단합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모든 작업을 멈춰주세요. 저작권 침해로 고소해주시기 바랍니다. 죄송합니다."

---

자정 무렵, 지훈은 병원 로비에 앉아 있었다.

민지가 옆에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난 박준호처럼 되고 있었어."

지훈이 중얼거렸다.

"내 완벽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밀어붙였어. 이석호를 밀어붙였어. 한진수를 밀어붙렸어. 너도 밀어붙렸어."

손가락이 떨렸다.

"그리고 이석호는..."

말이 끝나지 않았다.

민지가 지훈의 손을 잡았다.

"이석호는 살았어."

"하지만 그의 눈이... 의사가 말했어. 기억 손상. 정서 중추 손상. 그게 뭐야. 그게 뭐라는 거야."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그를 죽인 거야.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난 그를 죽인 거야."

"아니야."

민지가 말했다.

"넌 그를 살렸어. 그 문을 열지 않았으면 이석호는 죽었어."

"그게 뭐가 다르냐고!"

지훈이 외쳤다.

"살아있는 시체가 낫다고? 그게 구원이라고?"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환자실 쪽에서 간호사가 나왔다. 이석호가 안정화되었다고 했다. 내일부터는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다고 했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서준영 제작사에 메일을 보냈다.

"필름 관련 모든 작업을 중단합니다. 저작권 침해로 고소해주시기 바랍니다."

클릭.

그리고 지훈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하지만 손가락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거울처럼. 과거처럼. 필름처럼.

민지가 지훈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이제 여기 있어. 현재에."

지훈은 민지의 손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했다. 필름 속의 감정보다 따뜻했다. 과거의 기억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 속에서도, 지훈의 머리에는 한 가지만 계속 맴돌았다.

이석호의 공허한 눈.

그리고 그 눈에서 흘렸던 음성 없는 눈물.

"내가... 그걸 되돌릴 수 있을까?"

지훈이 속삭였다.

"이석호가... 정말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영원히 그 눈을 짊어져야 할까?"

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의 모니터 음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비프, 비프, 비프. 생명의 신호였다. 하지만 그 신호가 희망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오직 경고처럼만 들렸다.

---

새벽 6시. 일반 병실로 옮겨진 이석호의 침대 옆에 지훈이 앉아 있었다.

이석호는 여전히 눈을 떠 있었다. 천장을 보고 있었다. 산소 마스크는 벗겨져 있었고, 수액만 팔에 남아 있었다.

"이석호."

지훈이 조용히 불렀다.

이석호의 눈이 움직였다. 천천히. 지훈을 향해.

"왜... 날 깨웠어."

목소리가 나왔다. 갈라진 목소리였다.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은 악기처럼.

지훈의 가슴이 철렁했다.

"이석호..."

"난...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어."

이석호가 계속 말했다. 눈은 여전히 천장을 보고 있었다.

"완벽함 없이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박준호도 그걸 알았어. 그래서 죽었어."

"그게 아니야."

지훈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넌 남아있어. 이석호, 넌 남아있어."

"배경처럼?"

이석호가 물었다.

"박준호처럼?"

지훈이 이석호의 손을 잡았다.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니야. 넌 사람이야. 배우가 아니라 사람이야."

"그게... 뭐가 다른데."

이석호가 물었다.

지훈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손만 더 단단히 잡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석호가 무엇을 잃었는지.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능력이었다. 이석호는 이제 배우도, 사람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할 뿐이었다.

"내가 뭘 한 거야."

지훈이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뭘 한 거야."

---

오전 8시. 윤희가 병실에 들어왔다.

이석호를 보자마자 멈췄다. 그의 눈이 윤희를 향해 움직였다.

"윤희."

이석호가 불렀다.

윤희가 침대 옆에 앉았다. 손을 잡았다.

"미안해."

윤희가 말했다.

"내가 말해야 했는데. 더 일찍. 박준호가 한 일들을. 우리가 겪은 것들을."

"뭘."

이석호가 물었다.

"그게 다 박준호 때문이라는 걸. 우리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었어."

이석호가 천천히 말했다.

"근데 그게... 뭐가 다르냐고."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그 영화의 일부였어. 박준호가 우릴 부쉈어도, 우리는 그 일부였어. 그리고 지훈이는..."

이석호가 지훈을 봤다. 하지만 그 눈에는 인식이 없었다. 그저 시선만 있을 뿐이었다.

"지훈이는 그 영화를 다시 살리려고 했어. 우리를 다시 부수려고."

"그게 아니야."

지훈이 말했다.

"난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게 누군데."

이석호가 물었다.

"완벽한 배우? 그런 배우는 없어. 박준호도 알았어. 그래서 죽었어. 그리고 우리는..."

이석호가 말을 멈췄다. 마치 다음 단어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뭐야."

윤희가 부드럽게 물었다.

"우리는 살아있어."

이석호의 눈이 다시 천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표정이었다. 마치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살아있다는 게..."

이석호가 중얼거렸다.

"뭐야."

---

한진수는 그 소식을 뉴스로 알았다. 유명 배우의 약물 과다복용. 회복 중. 그리고 지훈의 필름 복원 프로젝트 중단.

한진수는 병원으로 갔다.

지훈을 찾았다. 병실 앞 복도에 서 있었다.

"뭐 하는 거야?"

한진수가 물었다.

지훈이 돌아봤다. 얼굴이 창백했다.

"한진수... 왜 왔어?"

"왜 왔냐고? 넌 왜 연락이 없었어? 이석호가 입원했다는 걸 뉴스로 알았어. 그리고 넌?"

한진수가 지훈을 봤다.

"넌 뭐 한 거야?"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필름 복원을 중단했어."

"왜?"

"이석호가 자살을 시도했거든."

한진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

"내 때문이야. 내가 그 필름을 계속 고집했으니까. 내가 이석호를 밀어붙였으니까."

지훈이 말했다.

"그래서 멈췄어. 모든 걸."

한진수는 말이 없었다. 지훈을 보고 있었다.

"넌 뭐 할 거야?"

한진수가 물었다.

"모르겠어."

지훈이 대답했다.

"그냥... 이석호가 회복되길 바랄 뿐이야."

한진수가 지훈의 옆에 섰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지훈이 한진수를 봤다.

"없어. 이미 너무 많이 했어."

"뭘 했냐고."

"넌 날 믿었어. 그 필름을 복원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난 그 믿음을 배신했어."

지훈이 말했다.

"너도 밀어붙렸어. 내 옆에서. 그리고 이석호는..."

"이석호는 살았어."

한진수가 말했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한 달 후.

이석호는 퇴원했다.

지훈은 공항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디 가?"

지훈이 물었다.

"모르겠어."

이석호가 대답했다.

"여기가 아닌 곳."

"언제 돌아와?"

"모르겠어."

이석호가 짐을 들었다.

"혹시 돌아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고."

지훈이 이석호의 팔을 잡았다.

"미안해."

"미안은 이미 충분해."

이석호가 말했다.

"이제 다른 게 필요해."

"뭐?"

"모르겠어. 아직."

이석호가 짐을 들고 걸어갔다.

지훈은 그를 따라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없어."

이석호가 말했다.

"넌 이미 충분히 했어."

그 말이 용서인지, 단순한 체념인지, 지훈은 알 수 없었다. 이석호의 얼굴은 여전히 공허했다. 하지만 그 공허함 속에는 뭔가가 남아 있었다. 살아있다는 무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공항의 형광등이 지훈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석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보안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

그날 밤.

지훈은 스튜디오에 들어갔다.

새로운 오디션이 있었다. 신인 감독의 작은 영화. 주연 역할.

지훈은 대본을 펼쳤다.

첫 장면은 남자가 거울 앞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 그 표정은 낯설음으로 가득 차 있다.

지훈은 거울 앞에 섰다.

대사를 읽었다.

"내가 누구야."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배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감독이 지훈을 봤다.

"좋아. 그런데 이 장면에서 넌 뭘 느껴?"

지훈은 잠시 생각했다. 필름을 삭제한 후 며칠간의 공백. 그 공백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 그리고 아직도 답이 없다는 깨달음.

"공포."

"공포?"

"네.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공포."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공포로 연기해봐."

지훈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며칠간의 공백 이후. 필름 없이. 기억 없이. 오직 현재의 감정으로만.

"내가 누구야."

이번엔 다른 목소리였다. 필름 속의 완벽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목소리였다. 떨리고, 불안정하고, 진실된. 마치 처음으로 자신을 묻는 것처럼.

감독이 박수를 쳤다.

"완벽해."

지훈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낯설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연기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더 진실된 것이라는 것도.

"다음 장면은?"

지훈이 물었다.

감독이 대본을 넘겼다.

"이 남자는 누군가를 찾아가. 자신이 상처 준 사람을."

지훈은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뭐가 되나?"

"모르겠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감독이 말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중요해. 완벽한 결말보다 현재의 노력이."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본을 다시 펼쳤다.

그 장면에서 남자는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필름 없이.

기억 없이.

오직 현재의 감정으로만.

지훈은 그 대사를 읽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했다.

---

공항을 떠난 이석호는 기차에 탔다.

창밖으로 도시가 지나갔다.

그의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움직였다.

핸드폰을 들었다.

메시지를 읽었다.

윤희로부터: "안녕. 어디 있어? 우린 아직 친구야."

한진수로부터: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나 여기 있어."

지훈으로부터: "미안해. 계속 미안해."

이석호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삭제하지도 않았다.

그저 보관했다.

마치 그것들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증거인 것처럼.

기차는 계속 나아갔다.

이석호는 창밖을 봤다.

도시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결국 사라졌다.

오직 검은 터널만 남았다.

그 터널 속에서 이석호는 생각했다.

내가 누구야.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아니, 아직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도 뭔가가 남아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계속 맥박을 치고 있었다.

비프, 비프, 비프.

생명의 신호.

혹은 경고.

이석호는 그 음을 들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필름 없이.

기억 없이.

오직 현재의 심장박동으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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