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름 속의 죽음
노트북 화면의 재생 버튼에서 손가락이 떨렸다. 삭제할 것인가, 계속 볼 것인가. 새벽 3시 47분. 지훈은 그 경계에서 꼼짝도 못 했다. 서준영 프로덕션의 최종 경고 메시지가 화면 아래 떠 있었고, 필름은 여전히 일시정지 상태로 3년 전 자신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손가락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사흘 뒤. 강남 한 스튜디오 지하.
차수진은 필름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독립영화사 '시선'의 대표이자 촬영감독. 그녀의 손이 떨고 있었다.
"이게 정말로 폐기 예정이었다고?"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필름 속의 이미지가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박준호 감독의 유작이군. 내가 봐도..." 차수진이 필름을 들어 빛에 비췄다. "완벽하다. 정말로 완벽해."
그녀는 지훈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을 읽으려는 듯한 시선.
"너 이 영화 속 배우 맞지?"
"네."
"그럼 너 이 장면들 재현할 수 있어?"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재현. 그 단어는 지훈이 모든 밤을 깨워가며 생각해온 것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차수진이 웃었다. "좋아. 그럼 우리 함께 해보자. 필름 속의 장면을 현실에서 다시 만드는 거야. 그게 가장 강한 증명이 될 거야."
―
일주일의 준비. 지훈은 필름을 백 번 이상 봤다.
옷. 첫 번째 장면에서 자신이 입었던 회색 니트와 검은 슬랙스. 스타일리스트가 같은 옷을 구해왔다. 완벽하게 같은 옷. 심지어 같은 브랜드, 같은 사이즈.
메이크업. 촬영 당시의 피부 톤, 아이라인의 각도, 입술의 색상.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필름을 프레임 단위로 멈춰가며 재현했다.
머리. 같은 스타일로 세팅했다. 같은 무스, 같은 드라이 방식.
모든 것이 같았다. 아니, 같아야 했다.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다. 같아야만 과거가 현재에 침투할 수 있다고.
촬영장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췄다.
조명. 카메라. 세팅된 세트. 모두가 3년 전과 같은 배치는 아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공간이었다. 촬영장의 냄새. 전기의 냄새, 분장실의 분장품 냄새, 그리고 긴장의 냄새.
민지가 촬영장 한쪽에 서 있었다. 지훈이 요청했고, 차수진이 허락했다. 민지는 조명 스탠드 뒤에서 지훈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훈, 준비됐어?"
차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 수 없었다. 온몸이 진동하고 있었다.
"첫 번째 장면이야. 너 필름에서 본 그 장면. 기억해?"
"네."
"좋아. 그럼 자리로."
지훈이 세트 위로 올라갔다. 카메라가 그를 바라봤다. 조명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음향팀이 마이크를 확인했다.
"롤링."
카메라가 돌아갔다.
지훈이 필름을 떠올렸다. 3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 장면. 창문에 서 있던 자신. 밖을 바라보던 자신의 표정. 눈빛. 어깨의 무게. 숨의 리듬.
감정이 밀려왔다.
파도처럼 밀려왔다.
3년 전의 절망이, 3년 전의 갈망이, 3년 전의 모든 것이 현재의 신체를 장악했다. 지훈은 더 이상 지훈이 아니었다. 필름 속의 그가 되었다.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그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실제로 과거를 보고 있었다.
입술이 떨렸다. 성대가 진동했다. 마지막 대사가 나왔다.
"...나는 여기 있는 건가?"
목소리가 필름 속의 목소리와 일치했다. 음향팀이 헤드폰을 벗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컷!"
차수진이 외쳤다.
"완벽하다!"
세트 전체에 박수가 터져나왔다. 스태프들이 일어섰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이상했다.
카메라가 멈춘 건 언제였는가? 촬영이 몇 분이었는가? 한 시간이었나? 아니, 3년이었나?
현실의 지훈이 돌아오고 있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흔들렸다. 지훈이 한 발 물러섰다.
"지훈? 괜찮아?"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난 괜찮아."
지훈의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너 자꾸 멀어지는 것 같은데. 지훈, 정말 괜찮아?"
지훈이 민지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선명하지 않았다. 아니, 선명했지만 현실 같지 않았다.
"난 괜찮아. 난 지금 가장 나다워."
지훈이 대답했다. 자신도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민지가 물러섰다. 그녀의 눈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입술을 깨물었다. 말을 꺼내려다 멈췄다.
"지훈, 이게 정상은 아니야."
"뭐가?"
"넌. 이 영화에 너무 빠져 있어. 마치 너 자신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여."
지훈은 민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차수진이 지훈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지훈의 어깨에 닿았다.
"넌 정말 배우다. 진짜로."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
촬영은 계속됐다.
다섯 시간. 여덟 시간. 시간을 세는 게 의미가 없었다.
지훈은 필름 속의 여덟 개의 장면을 모두 재현했다. 각 장면마다 3년 전의 감정이 현재의 신체를 침범했다. 각 장면마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각 장면마다 지훈은 현실에서 한 발씩 멀어졌다.
마지막 장면이 끝났을 때, 촬영장의 조명이 꺼졌다. 누군가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32분.
차수진이 지훈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이 영상들이면 충분해. 정말로 충분해. 우리가 이 필름을 세상에 내보내면..."
"제작사 측에서 뭐라고 할까요?"
민지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그건 우리 문제야. 법적으로 대응하면 되지."
차수진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감돌았다.
"차 대표님, 저희가 이 영상을 공개하면 서준영 프로덕션에서 저작권 침해로 나올 텐데, 그 과정에서..."
민지가 말을 멈췄다. 그녀는 업계의 구조를 알고 있었다. 대형 제작사와의 법적 분쟁은 개인 배우의 경력을 파괴한다. 특히 지훈 같은 신인에게는 치명적이다. 명예훼손 고소, 손해배상 청구,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업계의 낙인. 지훈은 이 영화 하나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예술이야. 박준호 감독의 유산을 지키는 일이야."
차수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확신이었다. 지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민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공포와 의심이 뒤섞여 있었다. 공포는 상황 전체를 향했고, 의심은 지훈을 향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지훈이 정말 괜찮은가.
지훈이 촬영장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이 검었다. 별이 없었다. 서울의 밤하늘은 항상 검었다.
지훈은 촬영장의 벽에 기대섰다. 숨을 쉬려고 했지만 숨이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부재중 전화. 한 개.
울렸다.
또 한 개.
울렸다.
지훈이 휴대폰을 켰다. 촬영 중에는 휴대폰을 촬영장 밖 탁자에 두었다. 완벽한 재현을 위해. 현재의 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
화면이 점등되는 순간, 수십 개의 알림이 쏟아져 내렸다. 부재중 전화 스물다섯 개. 메시지 열아홉 개. 모두 이석호에게서 온 것이었다.
지훈이 메시지를 열었다.
'지훈. 나 좀 봐.'
'응답해.'
'지훈!'
'제발.'
오후 6시 20분부터 시작된 메시지들. 촬영이 시작된 시간이었다.
'지훈, 촬영장 어디야? 나 너한테 가야 할 게 있어.'
'촬영장 주소 알려줄 수 있어?'
'제발 답장해. 나 정말 너를 봐야 해.'
오후 7시 45분. 메시지의 톤이 변했다.
'지훈, 제발. 나 지금 촬영장 근처야.'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내가 거기 가도 돼?'
'지훈!'
'제발 문자 받아.'
오후 8시 30분. 메시지가 더 절박해졌다.
'캐스팅 탈락했어. 그 영화. 넌 알고 있지?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지.'
'제작사 대표가 직접 전화했어. "너는 이 프로젝트에 맞지 않는다"고. 그게 전부야.'
'그 다음은 침묵이었어. 업계 전체가 침묵했어. 너도 알잖아, 이런 낙인이 뭘 의미하는지.'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훈, 제발. 넌 나를 봐야 해. 지금. 이 순간.'
오후 9시 47분. 마지막 메시지.
'지훈, 난 더 이상 못할 것 같아. 미안해.'
지훈의 손이 얼어붙었다.
그는 달렸다.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차수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들리지 않았다. 민지가 뭔가 외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택시. 이석호의 주소. 강남 한 오피스텔. 지훈은 기사에게 주소를 외쳤다. 기사는 악셀을 밟았다.
택시 안에서 지훈은 메시지들을 다시 읽었다. 촬영장으로 오려던 이석호. 지훈을 찾으려던 이석호.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난 더 이상 못할 것 같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훈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내가 필름을 봤을 때 이석호는 어디에 있었나.
필름을 보는 동안 이석호는 뭘 했나.
나는 왜 이석호를 보지 못했나.
촬영장에서 이석호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 시간, 지훈은 필름 속에 있었다. 과거 속에 있었다. 현재를 외면한 채로.
택시가 오피스텔 앞에서 멈췄다. 지훈이 내렸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비가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3층. 문이 열렸다.
복도가 길었다. 긴 복도. 끝이 없는 것 같은 복도.
1304호. 지훈이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이석호!"
지훈이 외쳤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지훈이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잠금 장치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어둠이 지훈을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 지훈의 눈이 조금씩 적응했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거실의 윤곽이 드러났다. 소파. 테이블. 그리고.
바닥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석호!"
지훈이 달려갔다. 무릎을 꿇었다. 손이 이석호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석호, 깨어. 깨어!"
이석호의 눈이 떠졌다. 천천히. 매우 천천히.
"...지훈?"
목소리가 있었다. 약한 목소리. 하지만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왜!"
지훈이 외쳤다. 손이 계속 이석호를 흔들었다.
"약을 먹었어. 많이."
이석호가 중얼거렸다.
"언제? 몇 개를 먹었어?"
"모르겠어. 셀 수 없었어."
이석호의 눈이 다시 감겼다.
지훈이 휴대폰을 집었다. 손이 떨렸다. 119. 번호를 눌렀다. 버튼을 눌렀다.
"구급차를 보내주세요. 오피스텔. 강남구. 주소는..."
지훈이 주소를 외쳤다.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환자의 상태는?"
"약물 복용. 의식이 있어요. 하지만..."
"몇 개를 복용했습니까?"
"모릅니다. 많다고 했어요."
"진정하시고. 환자를 옆으로 누우세요. 구토하면 기도가 막힐 수 있습니다."
지훈이 이석호를 옆으로 돌렸다. 이석호의 몸이 무거웠다. 아니, 가벼웠다. 매우 가벼웠다. 뼈만 남은 것처럼.
"이석호, 깨어. 제발 깨어. 구급차가 온다고."
지훈이 이석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입술이 푸르스름했다.
"왜 이런 짓을 했어? 왜!"
이석호의 눈이 다시 떠졌다. 초점이 없었다.
"넌... 왜 계속 뒤를 보고 있어?"
이석호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과거를. 왜 계속 과거만 봐. 넌 현재에 있어야 해. 이 순간에."
"이석호, 말하지 마. 힘을 아껴."
"난... 현재를 못 봤어. 그래서... 이 꼬락서니야."
이석호의 손이 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매우 차가웠다.
"넌 다르잖아. 넌 아직 시간이 있어. 과거는... 죽은 거야. 지훈. 죽은 과거를 자꾸만..."
"멈춰. 제발 말하지 마."
"...살리려고 하지 말아."
이석호의 손이 떨어졌다.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지훈은 이석호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그 손이 따뜻해지길 바라면서. 하지만 손은 더 차가워졌다.
구급차가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이 이석호를 들었다. 스트레처에 올렸다. 지훈이 따라갔다.
"당신은?"
구급대원 중 한 명이 물었다.
"친구입니다."
"병원에 가시겠습니까?"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급차 안. 이석호가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의료진이 정맥 주사를 놓았다. 지훈은 이석호의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이석호. 제발. 병원에 도착하면..."
지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을 거야. 의사들이 도와줄 거야."
이석호의 눈이 떠졌다 감겼다를 반복했다.
"...영화... 어떻게 됐어?"
"뭐?"
"천사의... 날개..."
"그런 건 상관없어. 지금은..."
"...잘 복원됐어?"
지훈이 대답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됐어. 넌... 계속해. 그 영화... 끝까지... 하는 거야."
이석호의 손이 지훈의 손을 꽉 조였다.
"이석호..."
"약속해. 넌...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봐. 이 순간을... 살아. 알겠어?"
"알겠어. 약속할게. 그니까 제발 깨어있어."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의료진이 이석호를 들어냈다. 지훈이 따라갔다. 응급실. 의사들이 이석호를 진료실로 옮겼다.
대기실. 지훈이 앉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차갑고 딱딱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였다.
"지훈! 너 어디야! 촬영장에서 갑자기..."
"이석호가... 약을 먹었어."
침묵이 흘렀다.
"뭐?"
"자살 시도. 병원에 있어."
민지의 숨이 들렸다.
"지금 가. 나 지금 간다."
전화가 끊겼다.
지훈은 천장을 바라봤다. 응급실의 천장은 흰색이었다. 강남의 밤하늘보다 훨씬 밝았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 같았다. 모든 게 거짓 같았다.
휴대폰을 켰다. 1시간 전 촬영 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필름 속의 자신. 완벽한 자신. 현재의 자신이 아닌, 3년 전의 자신.
영상을 삭제할까 했다. 손가락이 삭제 버튼 위에서 멈췄다.
의사가 나왔다.
"보호자입니까?"
지훈이 일어났다.
"네. 어떻게... 괜찮을까요?"
의사의 얼굴이 엄숙했다.
"위 세척을 했습니다. 환자는 의식이 있으나, 상당한 약물 농도가 검출됐습니다. 지금으로선 생명 위험이 직접적이지 않으나, 향후 간 기능 손상 가능성을 모니터링해야 합니다. 정신과 상담이 필수적입니다. 환자가 회복되는 대로 정신 건강 전문가와 상담하도록 강력히 권장합니다."
지훈이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언제 깰까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완전히 깨어날 것 같습니다. 계속 관찰하겠습니다."
의사가 떠났다.
지훈이 다시 앉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번엔 차수진이었다.
"지훈, 정신 차려. 뉴스에 났어. 너 왜 촬영장을 그냥 튈 생각을..."
지훈이 전화를 끊었다.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휴대폰 속 영상 파일을 가리켰다. 촬영 영상. 필름의 재현. 완벽한 지훈.
그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프레임을 넘겼다. 자신이 연기하는 장면들. 완벽한 재현. 그리고 화면의 한쪽 구석, 조명 뒤의 어두운 공간.
거기에 누군가가 있었다.
프레임을 더 확대했다.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그 어두운 공간에서 누군가가 지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석호였다. 촬영장 한쪽에 서서, 지훈을 찾아 촬영장에 온 이석호가 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지훈이 마지막 대사를 말하는 그 순간.
이석호가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입에 집어넣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촬영장의 한쪽 구석에서, 이석호가 자신의 죽음을 결심하는 순간까지도 녹화되어 있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알 수 없는 번호에서.
"지훈. 제작사 서준영입니다. 복원 필름 유포로 인한 저작권 침해. 명예훼손으로 고소 진행합니다. 변호사와 상담하시길."
5분 뒤, 또 다른 메시지가 들어왔다.
"추가로 촬영 영상의 무단 공개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모든 영상 파일 삭제를 요청합니다. 응하지 않을 경우 손해배상 청구를 진행하겠습니다."
그리고 10분 뒤.
"본사 법무팀에서 귀사 및 관계자에 대한 소송을 준비 중입니다. 24시간 내 모든 영상 자료 삭제 및 공개 중단을 요청합니다. 미응시 시 강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지훈의 손이 더 떨렸다.
벽시계가 새벽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석호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필름은 여전히 지훈의 휴대폰 속에 있었다.
그 안에는 지훈의 완벽한 연기만이 아니라, 이석호의 죽음의 순간도 담겨 있었다.
민지가 응급실에 도착했다. 얼굴이 창백했다.
"이석호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민지가 지훈 옆에 앉았다. 그녀의 손이 지훈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훈, 너 뭘 한 거야?"
그 말이 질문이 아니라 절규처럼 들렸다.
"이석호가 캐스팅에서 떨어진 후로 업계에서 낙인이 찍혔어. 제작사의 압박이 심했어. 그리고 우리가 이 영상을 공개하려고 하니까 제작사가 법적 조치를 들고 나왔고, 그 소식이 이석호에게 전해진 거야. 이석호는 자신 때문에 너까지 망할까봐..."
민지가 말을 잇지 못했다.
지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우리가 뭘 한 거야, 지훈. 정말로."
민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도 지훈의 휴대폰 화면을 봤다. 필름 속 이석호의 모습. 그리고 그 순간. 촬영장에서 절망 속에 약을 삼키는 이석호의 모습이 화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가 뭘 한 거야."
민지가 다시 중얼거렸다. 그것은 지훈을 향한 비난이 아니었다. 상황 전체를 향한 절규였다. 예술을 지키려던 선택이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의 순간을 담은 영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절규였다.
지훈은 여전히 대답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