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역 근처 카페. 오후 3시 47분.
지훈의 손이 떨렸다. 노트북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재현하려던 순간,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켰다. 병원 응급실 장면. 환자 역할을 하는 자신.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를 내려던 그 순간—
시간이 멈췄다.
화면 속 자신의 눈동자가 움직이는데, 현실의 신체는 반응하지 않았다. 입술이 따라 움직인다. 눈물이 흐른다. 마치 두 개의 신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는 필름 속에서 살아 숨 쉬고, 하나는 카페 의자에 고정된 채로.
지훈이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돌아왔다. 노트북 시간 표시: 3시 47분.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다시 펼쳤다. 신체가 자신의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서준영 제작사의 최종 경고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필름 반환 최후 통첩. 24시간 내 응하지 않으면 법적 조치 진행」
손가락이 재생 버튼으로 향했다. 누르지 않았다. 그저 멈춘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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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강남역 근처 골목의 낡은 건물 3층.
계단의 벽에는 영화제 수상작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칸, 베를린, 부산. 지훈은 이곳이 어떤 공간인지 직감했다. 제작사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영역.
3층 방문을 열자 책과 필름 통이 가득한 사무실이 나타났다. 책상 위에는 커피잔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스크린이 켜져 있었다. 여자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40대 초반. 단정한 복장. 눈빛이 예리했다.
"차수진 대표님이신가요?"
여자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지훈을 바라봤다.
"누세요?"
"지훈입니다. 배우 지훈."
차수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앉으세요."
책더미를 옆으로 밀어낸 의자에 지훈이 앉았다. 차수진은 여전히 지훈을 관찰하듯 봤다.
"뭔데요? 오디션 소개 받으러 온 건 아니겠고."
"제가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지훈이 노트북을 꺼냈다. USB를 꺼냈다. 손이 조금 떨렸다.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봐주시겠어요?"
차수진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USB를 받았다.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이 열렸다.
영화 시작. 오프닝 크레딧.
「천사의 날개」
차수진의 얼굴이 움직였다. 눈썹이 올라갔다.
"이건... 뭐야?"
"3년 전에 촬영된 영화입니다."
"3년 전?"
화면에서 지훈의 모습이 나타났다. 병원 응급실 장면. 지훈이 환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표정이 다르다. 현재의 지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눈빛이 살아 있었다. 신체가 생생했다.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차수진이 화면에 더 가까워졌다.
"잠깐. 이건 뭐야? 이 연기는."
"제 연기입니다."
"이게 너?"
"네."
차수진이 다시 화면을 봤다. 2분. 3분. 5분이 흘렀다. 화면 속 장면이 계속 진행됐다. 지훈의 캐릭터가 의사와 대사를 나눴다. 슬픔과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 눈물은 연기가 아니었다.
차수진이 돌아봤다.
"이건...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다."
그 말이 지훈의 가슴을 때렸다. 외부의 확인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이 본 것과 같은 것을 보고 같은 평가를 했다. 그것이 증명이었다.
"왜 이걸 보여줬어요?"
"필름 복원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필름 복원?"
"이 영화는 제작사에서 폐기 처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실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수진이 의자에 기댔다. 지훈을 바라봤다.
"그건 법적 분쟁이 될 거야. 제작사가 절대 놔두지 않을 거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가 세상에 알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수진이 다시 화면을 봤다. 지훈의 연기 장면이 계속 흘러나왔다.
"감독이 누구야?"
"박준호 감독입니다."
차수진의 손이 멈췄다.
"박준호?"
"알고 계신가요?"
"알지. 그 사람. 완벽주의자였지. 그리고..."
차수진이 말을 잇지 못했다. 지훈도 알고 있었다. 그 다음 말을. 자살했다. 그 말.
"제작사 이름은?"
"서준영 프로덕션입니다."
차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 회사. 그 회사는 흑역사 전문이야. 실패한 프로젝트는 모두 완전히 소거하려고 한다. 법적으로도, 미디어 상에서도,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차수진이 지훈을 바라봤다.
"너 왜 이렇게까지 하려고?"
"제 연기를 누군가는 봐야 합니다."
그 말이 나가는 순간, 지훈 자신도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보고 싶은 것이었다.
차수진이 다시 한 번 화면을 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좋아. 도와주겠어."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지훈이 숨을 쉬었다. 누르고 있던 숨을 마침내 내놨다.
"진짜요?"
"이 작품은 소실되어서는 안 돼. 너도 맞고, 나도 맞아. 이건 영화야. 누군가의 예술이야. 그리고 그게 폐기되는 건 범죄야."
차수진이 일어섰다.
"전문가들을 모아야겠다. 필름 복원 팀. 법무팀도."
"필름 복원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먼저 필름 손상도를 스캔으로 파악해야 해. 그 다음 색보정, 음성 복원 순서야. 이건 3~4일이면 기본 복원은 끝날 거고, 그 다음에는 법적 구조를 정리해야 해. 저작권 문제는 복잡하거든."
차수진이 노트북 화면을 가리켰다. 필름의 손상된 부분들이 보였다. 우측 상단의 색바래짐, 음성 트랙의 노이즈.
"이 정도면 복구 가능해. 하지만 제작사가 감시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경험이야. 나는 이 업계에서 30년을 싸웠어."
차수진이 전화를 들었다.
"민호? 나야. 프로젝트 하나 있는데... 그래, 폐기 필름 복원이야. 3년 전 박준호 감독의 작품이야. 알아, 그 감독. 그래, 그 영화. 내일 아침에 스캔 시작해. 손상도 파악이 우선이야. 색 정보 손실이 심할 것 같으니까 디지털 복원 장비 풀로 준비해."
차수진이 통화를 끝냈다.
"복원 작업이 내일부터 시작될 거야. 우선 필름을 스캔하고 손상 부위를 정밀 분석할 거고, 그 다음에 색보정과 음성 정리 작업으로 들어가."
그 순간, 차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차수진이 화면을 봤다. 표정이 경직됐다.
"뭐야..."
"무슨 일이세요?"
차수진이 통화를 받았다.
"네, 저 차수진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뭐라고요? 경고장이요?"
차수진이 지훈을 봤다.
"경고장이 왔어. 우편으로. 지금 막."
지훈이 서 있었다. 차수진도 서 있었다.
"내용이 뭐라고 하는데요?"
"필름의 무단 복원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며, 이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그리고... 배우 지훈의 이름도 명시되어 있어. 초상권 침해까지 거론하고 있네."
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벌써요? 제가 여기 온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이미 감시하고 있었어. 너를 따라왔거나, 아니면 내 움직임을 감시했거나. 제작사는 이런 일에 능숙해."
차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두려움의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투적인 웃음이었다.
"좋아. 그럼 싸우자. 그들이 원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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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카페.
윤희는 늦었다. 15분. 20분. 30분.
윤희가 들어왔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앉지 않았다. 서 있었다.
"왜 날 불렀어?"
"함께하자."
"뭘?"
"우리 영화를. 천사의 날개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자."
윤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 안 돼."
"왜?"
윤희가 테이블을 내려쳤다. 커피잔이 넘어졌다.
"왜냐고? 그 영화가 나왔을 때 나한테 뭐가 됐는데? 조연이었던 나는 완전히 사라졌어. 박준호의 광기 때문에."
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치 봉인해 둔 기억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그 감독은 한 장면을 위해 배우들을 몇십 번이고 다시 찍었어. 내 목소리가 부러질 때까지, 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건 완벽함이 아니라 고통이야. 그 영화에 내 영혼이 다 빨려나갔어."
윤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난 3년을 걸려서 그걸 다시 모았단 말이야. 그리고 그 영화는 저주받은 거야. 감독은 죽었고, 배우들은 다 상처받았고, 제작사는 모든 걸 지우려고 해. 그런데 넌 왜 자꾸 파고드는 거야? 왜 우리를 다시 그 지옥으로 끌어가려고 해?"
"우리의 연기는 훌륭했잖아."
"훌륭한 게 뭐 어때? 내가 원하는 건 훌륭함이 아니라 평온이야. 조용한 삶이야. 그냥 조연으로 살아가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왜냐면 내가 죽지 않으니까."
윤희가 돌아섰다. 가버렸다. 지훈은 혼자 남겨졌다. 흘러내린 커피를 보고만 있었다.
그 순간, 지훈이 깨달았다. 이 영화는 단순한 폐기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상처 입힌 영화라는 것을. 그리고 그 상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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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뉴스 기사가 올라왔다.
「폐기 필름 복원 논란, 제작사 vs 배우 법적 분쟁 예상」
기사에는 지훈의 이름이 명확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배우 지훈. 3년 전 사고 이후 조연으로 낙인찍혔던 그 배우. 그리고 그의 얼굴.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야」
「쯧쯧, 저주받은 영화다」
「감독이 죽은 영화를 왜 다시 파고드냐」
「이 배우 미쳤나?」
지훈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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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23분. 원룸.
지훈이 노트북을 켰다. USB를 꽂았다. 필름이 떠올랐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병원 응급실 장면. 환자 역할. 의사와의 대사. 슬픔과 절망. 눈물.
필름 속의 자신의 연기가 점점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감정의 깊이가 더 선명해진다. 신체 감각이 밀려온다.
시간이 흐른다.
5시간이 흐른다.
8시간이 흐른다.
밤 11시부터 새벽 7시까지. 8시간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지훈의 신체가 경련을 일으킨다.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움직인다. 입술이 파래진다. 호흡이 얕아진다. 눈동자는 화면을 따라 움직이지만, 의식은 현실과 필름 사이를 진동한다.
화면 속 자신과 현실의 자신이 겹쳐진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구분할 수 없다. 필름 속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신체가 그것을 따라 재현한다. 눈물이 흐른다.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현재의 지훈의 목소리가 아니다. 3년 전 필름 속 지훈의 목소리다.
창밖은 새벽이 되어 있다.
창문이 열린다. 민지가 몸을 굽혀 들어온다. 지훈의 원룸 창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민지는 그 창문으로 들어오곤 했다.
"지훈!"
민지가 지훈을 흔든다. 손이 닿자 지훈의 신체가 반응한다. 하지만 느리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몇 시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어!"
지훈의 얼굴이 창백하다. 입술이 파랗다. 손가락이 차갑다. 피부가 축축하다. 땀이 식어가고 있었다.
"뭐... 뭐야?"
"셋 시부터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어."
민지가 지훈의 어깨를 더 세게 흔든다.
"눈을 떠. 눈을 제대로 떠!"
지훈의 눈동자가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일반적인 각성과는 달랐다. 마치 깊은 수심에서 서서히 떠올라오는 다이버처럼, 시간이 필요했다. 입술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필름 속 대사를 따라.
민지는 지훈의 손을 잡는다. 차갑다. 너무 차갑다.
"몇 시간을 본 거야?"
"뭘?"
"영상을. 필름을."
지훈이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노트북을 본다. 화면은 검게 꺼져 있다.
"모르겠어.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어."
민지가 지훈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입술의 색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이상하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 마치 두 개의 시간 사이를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너 의사 봐야 해. 진심이야."
"난 괜찮아."
"괜찮으면 뭐 해? 넌 오후 3시부터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어.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내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넌 몇 시간을 더 그렇게 앉아 있었을 거야."
지훈이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민지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길었는지는 인식할 수 없었다. 필름 속의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현실의 시간이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
"너 뭐 봤어? 그렇게까지?"
지훈이 노트북을 본다. 다시 켜고 싶다. 하지만 민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다.
"우리 영화야. 천사의 날개. 복원된 버전."
"또?"
"다르게 느껴져. 매번 다르게. 마치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민지가 한숨을 쉰다. 그 한숨에는 걱정과 절망이 섞여 있다.
"지훈, 들어. 이건 정상이 아니야."
"뭐가?"
"너. 너의 이 행동. 넌 필름에 중독되고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넌 필름 속에 빨려가고 있어."
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느렸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아니야. 난 그냥... 내 연기를 되찾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야. 넌 지금 사라지고 있어. 현실에서 사라지고 있어."
민지의 목소리가 떨린다. 지훈을 본다. 정말로 본다. 민지는 지훈을 오래 알고 있었다. 같은 조연 배우로서,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 하지만 지금의 지훈은 다른 사람이었다. 필름을 볼 때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밥 먹자."
"안 배고파."
"상관없어. 밥을 먹어."
민지가 지훈의 팔을 잡는다. 일으켜 세운다. 지훈이 비틀거린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8시간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으니까.
라면을 끓인다. 민지가 끓인다. 지훈은 침대에 앉아서 그것을 본다. 국물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현실로 돌아오는 냄새였다.
"먹어."
지훈이 숟가락을 든다. 손이 여전히 떨린다. 라면 국물을 떨어뜨린다.
"어제는 어떻게 됐어? 윤희는?"
지훈이 라면을 한 입 집어넣는다. 씹는다. 삼킨다. 그 과정이 마치 외국 배우가 한국 배우를 연기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거절했어."
"알았어. 그리고?"
"뭐가?"
"그 다음에 뭐가 있잖아. 차수진 이야기. 넌 차수진을 만났어?"
지훈이 고개를 든다. 그제야 민지의 눈을 본다. 초점이 조금 돌아온 것 같다.
"응. 오늘 오전에."
"어떻게 됐어?"
"그가 필름을 봤어. 그리고..."
지훈이 멈춘다. 그 순간을 다시 생각한다. 차수진의 표정. 그 표정이 지훈에게 준 희망.
"그가 말했어. '이건 정말로 훌륭한 작품이다'라고."
민지의 표정이 복잡해진다.
"그래서?"
"그래서 그가 필름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어. 필름 전문가들이 투입됐고, 내일부터 스캔 작업이 시작돼. 손상도 파악이 우선이야. 그 다음에 색보정과 음성 정리 작업으로 들어갈 거고."
"그리고?"
"제작사에서 경고장이 날아왔어. 저작권 침해라고. 초상권 침해까지 거론하면서. 그리고 내 이름도 명시되어 있었어."
민지가 라면 그릇을 옆으로 밀어낸다. 지훈을 바라본다.
"지훈, 넌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심이야. 이게 정상인 줄 알아?"
"뭐가?"
"모든 게. 너는 필름에 잠긴다. 8시간을 움직이지도 않고 필름을 본다. 제작사는 법적 조치를 한다고 협박한다. 윤희는 거절했다. 그런데 넌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왜? 왜 계속 앞으로 나아가?"
지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왜일까? 왜 멈출 수 없을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지훈이 받는다.
"여보세요?"
"배우 지훈입니까?"
목소리가 낮다. 공식적이다.
"네."
"저는 서준영 제작사의 법무팀장 박철수입니다. 당신에게 최종 경고를 드립니다."
지훈의 얼굴이 굳어진다. 민지가 알아챈다.
"폐기 필름의 무단 복원은 저작권 침해에 해당합니다. 배우의 초상권을 제작사의 동의 없이 사용하는 것 역시 불법입니다. 48시간 이내에 모든 파일을 삭제하고 복원 작업을 중단할 것을 명령합니다. 응하지 않으시면 손해배상 청구와 함께 형사 고발을 진행하겠습니다."
"제 영화잖아요. 제가 출연한 영화인데—"
"저작권은 제작사에 있습니다. 배우는 촬영료를 받은 것으로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이는 표준 계약서에 명시된 사항입니다. 초상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거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48시간입니다. 이후로는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긴다.
지훈이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손이 떨린다. 이번엔 필름 때문이 아니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민지가 휴대폰을 집어 든다.
"뭐라고 했어?"
"48시간 안에 모든 파일을 삭제하지 않으면 손해배상 청구와 형사 고발을 한다고. 저작권과 초상권 모두 제작사에 있다고."
"그럼 삭제해."
"뭐?"
"파일을 삭제해. 지훈, 이건 너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 뒤에는 제작사가 있고, 법무팀이 있고, 돈이 있어. 그들은 전쟁을 이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야."
지훈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다리에 이제 힘이 돌아오고 있었다. 현실이 그를 깨워주고 있었다.
"내일 차수진을 만나야 해."
"뭐하려고?"
"계획을 짜야 해.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갈지. 법적으로 우리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민지가 지훈의 팔을 잡는다.
"너 정신 차려. 이건 너 혼자의 전쟁이 아니야. 이건 제작사라는 거대한 기계와의 싸움이야. 그들은 이런 일을 수백 번 해본 거야."
그 순간,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이번엔 알려진 번호였다. 이석호였다.
지훈이 받는다.
"형?"
"지훈아."
이석호의 목소리가 들린다. 술에 취한 목소리였다. 밤 11시 30분. 새벽이 아닌 밤 11시 30분에.
"뭐해?"
"지훈아, 그 영화 다시 생각해 봤어?"
"뭘?"
"천사의 날개. 그거 정말로 해야 하는 거야? 정말로?"
지훈이 대답하지 않는다. 이석호가 계속한다.
"넌 왜 계속 뒤를 돌아보고 있어? 넌 왜? 우린 모두 앞으로만 나아가려고 했는데."
그 목소리에 깊은 절망이 담겨 있다. 지훈이 처음 느껴본다. 이석호의 절망이. 그리고 그 절망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형, 난..."
"그 영화를 다시 꺼내면... 모든 게 드러나.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지금은.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왜 우리가 그 영화를 묻어야 했는지."
"형, 무슨 말이야?"
"그 영화에 있어. 감독이 죽은 이유. 그리고 우리가 왜 살아남아야 했는지. 그게 다 그 필름에 담겨 있어."
지훈의 심장이 멈춘다.
"형, 뭔가 있어? 그 영화에?"
"지훈아, 제발... 그 영화는 그대로 묻어둬. 제발.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이석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형, 뭐가 있는 거야? 정확히 뭐가?"
"감독이... 감독이 촬영 중에 어떤 사고를 봤어. 그리고 그 사고를 은폐하려고 했어. 그 모든 게 필름에 남아 있어. 프레임 안에. 배경에. 그리고 감독은 그걸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감독은 죽었어."
전화가 끊긴다.
지훈이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손이 떨린다. 민지가 묻는다.
"뭐라고?"
"잘 모르겠어. 하지만..."
지훈이 창밖을 본다. 밤의 서울이 보인다. 불빛들. 그 불빛 사이에 숨겨진 수많은 비밀들.
"그 영화에 뭔가 있어. 단순한 폐기 작품이 아니야. 감독의 죽음과 관련된 뭔가가."
민지가 지훈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럼 더 위험해. 지훈, 그런 것들은 건드리면 안 돼. 그런 것들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묻어놓은 거야. 이유가 있어서."
밤이 깊어간다. 민지는 소파에 누운다. 지훈은 침대에 누운다. 둘 다 잠을 자지 못한다. 천장을 본다. 어둠 속에서.
그리고 지훈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이 정도의 배우였다.*
그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증명이 아닌 강박처럼. 그리고 그 강박 뒤에는 또 다른 질문이 숨어 있었다.
*그렇다면 왜 모두가 이 영화를 죽이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