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 협박 전화는 오후 3시 47분에 걸려왔다.

"지훈 배우님, 저희는 당신이 무단으로 회사 자산을 반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음성은 차갑고, 억양은 정중했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지훈은 원룸의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여전히 <천사의 날개>의 한 장면이 멈춰 있었다. 필름 속 자신의 얼굴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완벽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완벽함이 덫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한진수라는 직원으로부터 무단 반출한 영상 자료에 대해 즉시 폐기 및 반환을 요청합니다. 만약 이 영상을 재공개, 유포, 상영하려는 시도가 감지될 경우 저작권법 위반, 영업비밀 침해, 명예훼손으로 당신을 고소하겠습니다. 배우로서의 경력은 완전히 종료될 것입니다."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서준영 제작사 이사의 법무팀이었다.

"뭔데 자산이라고 해? 그건 영화야. 예술 작품이지 회사 물건이 아니야."

지훈의 목소리는 떨렸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법적으로, <천사의 날개>는 당사가 제작 및 소유한 저작물입니다. 당신은 그 영화의 출연 배우일 뿐입니다. 3시간 내에 모든 파일을 삭제하고 원본 하드드라이브를 반환하지 않으면,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현재 활동 중인 모든 프로젝트의 출연을 거부하겠습니다. 아울러 촬영에 참여한 모든 배우와 스태프에게도 같은 조건을 통보하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은 여전히 완벽했다. 그 완벽함이 이제 독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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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15분, 방송국 리딩실 지하 복도.

지훈이 한진수를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종이 상자에 책, 필름 캔, 오래된 카메라가 담겨 있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한진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손은 계속 흔들렸다. 상자에 물건을 집어넣는 손이.

"서준영 이사가 직접 전화했어요. 당신이 필름을 빼냈다고. 제가 그걸 도왔다고. 지난 12년을..."

목소리가 끊어졌다. 한진수가 상자를 들어올렸다. 무거워 보였다. 그 무게가 지훈의 어깨에 내려앉는 것 같았다. 상자 위의 손가락이 하얀색으로 질려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 월급은 이미 계좌에서 빠져나갔어요.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는 문자도 받았고."

지훈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한진수의 눈이 자신을 마주쳤다. 그 눈에는 12년을 함께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력을 무너뜨린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 필름은 왜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진수가 상자를 안고 돌아섰다. 지훈이 한 발 내딛으려 했지만 멈췄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왜냐하면 건드리는 순간, 모두가 상처입거든요. 당신도, 나도, 그 영화에 관련된 모든 사람도. 그리고 그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아요. 날 봐요. 12년이 지났는데도."

한진수의 뒷모습이 복도의 불빛 아래서 움츠러들어 보였다. 그가 멀어져갔다.

지훈은 그 자리에 남았다. 손가락이 움직이려 했다. 한진수의 이름을 부르려고. 하지만 목에서 나오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뭔가를 부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을 되돌릴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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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6시, 강남역 근처 낡은 건물 4층.

이석호의 원룸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담배 연기가 새어나왔다. 지훈은 노크했다. 응답이 없었다. 다시 노크했다.

"들어와."

목소리는 무겁고 축축했다.

원룸은 생각보다 작았다. 침대, 책상, 선풍기, 그리고 담배와 술의 냄새. 이석호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맥주캔이 들려 있었고,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지훈이 본 배우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 필름 속 이석호는 카리스마 있는 중년 남배우였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그 배우의 껍데기였다.

"뭐 하러 왔어?"

이석호가 물었다. 캔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당신이 천사의 날개에 나왔던 배우라고 했어요. 민지가."

"그래. 그리고?"

"그 영화의 필름을 봤어요. 당신의 연기, 완벽했어요."

이석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캔을 들고 있던 손이 공중에서 정지했다.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 눈동자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흔들렸다.

오래 침묵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이석호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왜 상관없어요? 당신은 훌륭한 배우예요."

"훌륭한 배우였어. 과거형이야."

이석호가 일어서서 창문을 향해 걸어갔다. 창밖은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강남의 건물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 불빛 사이로 이석호의 얼굴이 움직였다.

"그 영화가 나왔을 때, 난 43살이었어. 아직 주연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영화제 회로도 있었고, 해외 배급도 검토되고 있었어. 그런데..."

이석호가 손가락으로 창문을 톡톡 쳤다.

"감독이 죽었어. 그리고 그 영화는 저주받은 작품이 됐어. 그 다음부턴 아무도 날 불러주지 않았어. 조연도 아니고, 조연의 조연도 아니고, 엑스트라도 안 들어갔어. 왜냐하면 날 봤으니까. 그 영화와 함께한 사람이라고 봤으니까."

"그럼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세상에 내보내면 어떨까요? 그럼 그건 저주가 아니라..."

"걸작?"

이석호가 돌아섰다. 그 얼굴에 웃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넌 왜 계속 뒤를 보고 있어?"

질문이 지훈을 관통했다.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석호가 계속했다.

"과거를 말하는 거지. 그 영화를 말하는 거지. 3년 전 자신을 말하는 거지. 왜 그렇게 집착해?"

이석호가 다시 침대에 앉았다. 맥주캔을 들었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캔의 금속면을 긁었다. 그 소리가 원룸에 울렸다.

"내 경우엔 이해해. 난 모든 걸 잃었으니까. 하지만 넌 달라. 넌 아직 앞에 길이 남아 있어. 아직 현재가 있어. 그런데 넌 왜..."

이석호가 천천히 지훈을 봤다.

"그 필름 속에서 나가올 수 없는 거야?"

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필름 속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어느 것이 진짜인지.

"만약에 말이야."

지훈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가 함께 이 영화를 복원하면? 완성하면? 그럼 당신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석호가 한참 생각했다. 맥주캔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그 손가락이 캔의 금속면을 긁었다. 그 소리가 울렸다.

"좋아. 하자."

지훈이 눈을 떴다.

"정말요?"

"그런데 말이야."

이석호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남의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건 우리 모두를 죽일 거야."

"뭐... 뭐라고요?"

"서준영이는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는 걸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 영화는 그의 경력에 오점이고, 제작사의 이미지에 흠집이야. 그 사람은 그걸 완전히 소거하려고 해. 그리고 그걸 막으려고 할 누군가는... 반드시 희생이 될 거야."

이석호가 지훈을 봤다. 그 눈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체념인지.

"이미 한 명이 죽었어. 감독 박준호. 그리고 지금 또 다른 누군가가 직업을 잃었어. 그 다음은?"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였다.

"지훈, 한진수가 제작사에서 해고당했대. 넌 이걸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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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지훈의 원룸.

노트북 화면에는 PDF 파일이 떠 있었다. 한진수가 건넨 박준호 감독의 일기와 촬영 일지였다. 지훈은 한 페이지씩 넘기며 읽었다.

*"3월 14일. 지훈의 연기가 나왔다. 내가 원하던 그것. 저 배우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있어. 진정한 광기. 이건 영화가 아니라 영혼의 추출이다."*

*"4월 22일. 제작비가 또 초과했다. 제작사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건 타협할 수 없어. 이 영화는 한국 영화의 역사를 바꿀 작품이다."*

*"5월 3일. 지훈이 현장에서 다쳤다. 세트 무너짐.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기억을 잃었다고 한다. 그래도 촬영은 계속된다. 이 영화가 완성되려면 그래야 한다."*

*"6월 10일.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제작사는 즉시 완성을 요구하고 있고, 출연진들은 지쳐 있다. 하지만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 절대로."*

마지막 페이지.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

그것뿐이었다. 그 다음은 빈 페이지였다. 그리고 박준호는 일주일 뒤 자살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그 문장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을 다시 봤다. 완벽했다. 그리고 그 완벽함이 자신을 완전히 집어삼키고 있었다.

필름을 재생했다. 같은 장면을 또 봤다. 이번에도 과거의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독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윤희였다.

"지훈, 우리 만나야 해. 지금. 이거 장난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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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시, 강남 카페 지하.

윤희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밤 1시에.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넌 뭘 하고 있어? 진짜. 서준영이가 얼마나 화났는지 알아? 경찰에 고소장을 낼 거래. 저작권법 위반으로."

"그건 불의야. 그 영화는..."

"그 영화는 뭐? 완성되지 않은 폐기 자산이야. 법적으로. 넌 그걸 건드린 거야. 그리고 제작사는 이미 계약서를 통해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어. 누구든 너와 연관되면 프로젝트에서 제외된다고. 나도 포함해서."

윤희의 손이 테이블을 쳤다. 카페 직원이 쳐다봤다.

"그리고 난 말했잖아. 그 영화는 저주받은 거라고. 건드리면 안 된다고."

"왜? 왜 저주받은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상처입고 있거든. 계속. 그 영화가 나온 순간 우리는 끝났어. 그리고 그걸 다시 꺼내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죽어. 다시 한 번."

윤희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도 알아. 그 필름 속 내 연기가 얼마나 좋은지. 그 당시 난 정말 좋은 배우였어. 그런데 그 영화가 나온 순간, 난 '그 영화의 배우'가 돼버렸어. 그 이후로 12년을 그렇게 살았어."

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2년 전에 겨우 '그 영화의 배우'라는 낙인이 떨어졌어. 다른 작품들을 하면서 내 이름을 되찾았어. 그런데 넌 왜 자꾸 그걸 다시 붙이려고 해?"

"윤희..."

"그 영화를 복원하면, 난 다시 '그 영화의 배우'가 돼. 영원히. 그리고 넌? 넌 '천사의 날개의 배우'가 될 거야. 조연 배우가 아니라. 그리고 그건 더 나쁜 낙인이야. 왜냐하면 그 영화는 저주받은 영화니까. 캐스팅 거절, 역할 제의 제외, 모든 게 반복돼. 12년을 그렇게 살아야 돼."

윤희가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그리고 넌 또 다른 걸 모르고 있어. 서준영이는 이미 움직이고 있어. 고소장 초안을 준비하고,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들한테 직접 압박을 가하고 있어. 누가 너와 연관되면 블랙리스트에 올린다고. 이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잘려나갈 거야. 한진수처럼. 그게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고, 이석호일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조용히 해. 그 필름은 잊고, 현재를 살아. 그게 우리 모두를 위한 거야."

윤희는 일어섰다. 그리고 떠났다.

카페 문이 닫혔다. 지훈은 그 자리에 남았다. 윤희의 말이 맴돌았다. '현재를 살아.' 그런데 그녀는 어떤가. 12년을 '그 영화의 배우'로 살면서 현재를 살았나. 아니면 과거의 낙인 속에서 버틴 건가. 그 질문이 지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윤희가 자신에게 조언한 것이 정말 그녀가 해낸 일인지, 아니면 하지 못한 일을 후배에게 강요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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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지훈의 원룸.

노트북 화면에는 여전히 <천사의 날개>의 한 장면이 떠 있었다. 지훈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회색 페인트와 전등뿐이었다.

선택지를 정리해봤다.

첫째, 필름을 삭제한다. 한진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석호는 계속 죽어 있다. 박준호는 이미 죽어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죽음들을 외면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현재를 살 수 있다. 윤희처럼. 12년 후에야 낙인이 떨어질 것이라는 보장 없이, 하지만 살 수 있다.

둘째, 필름을 지킨다. 모두가 죽는다. 자신도, 윤희도, 이석호도. 그리고 이번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박준호의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이석호의 12년은 보상받는다. 한진수의 해고는... 아니다. 그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선택이 없다. 어느 길을 가든 누군가는 죽는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석호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 결연함 같은 것.

"지훈."

"네."

"그 일기장 받았어?"

"네. 받았어요."

"읽었어?"

"네."

"그럼 알겠지. 박준호가 뭘 하려고 했는지. 그리고 왜 죽었는지."

이석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했어. 그리고 그 말이 그를 죽였어. 그런데 넌 그 말에 사로잡혀 있어. 필름 속의 완벽한 자신에게. 넌 그 말을 반복하고 있어. 모르는 사이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모르겠어. 난 이미 죽어 있으니까. 하지만 넌 아직 살아 있어. 그래서 넌 선택해야 해. 그 말을 끝낼 건지, 아니면 계속할 건지."

지훈은 이석호가 말하려는 바를 이해했다. 박준호의 '완벽함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말. 그것이 필름 속 지훈을 지배하고 있다. 그 완벽함을 지키려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아니, 이미 잃고 있다.

"그런데..."

"뭐?"

"당신은?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통화가 끝났다.

지훈은 천장을 계속 봤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석호가 한 질문의 의미를.

"왜 계속 뒤를 보고 있어?"

그것은 비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훈은 앞을 봐야 했다.

하지만 앞에는 무엇이 있는가.

절망.

제작사의 법무팀. 경찰. 고소. 그리고 경력의 종료.

혹은 침묵. 필름의 삭제. 과거의 소거. 그리고 12년을 짊어진 채 현재를 살아가는 것.

손가락이 움직였다.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떨렸다. 메시지 작성 창을 열었다.

'서준영 이사님께. 저는 <천사의 날개>의 필름을 반환하겠습니다. 모든 파일을 삭제하고, 앞으로 그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손가락이 다음 글자를 누르려 했다. 멈췄다. 다시 누르려 했다. 또 멈췄다. 화면의 글자들이 흔들렸다. 손가락의 끝이 떨렸다.

'한진수를 다시 고용해주세요'?

'이석호를 보호해주세요'?

'이 모든 걸 멈춰주세요'?

그 어떤 말도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메시지를 삭제했다. 보내지 않았다. 화면을 지웠다.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노트북을 다시 켰다.

<천사의 날개>. 그 영화는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필름을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이번엔 다르게 봤다.

감독의 광기가 아니라, 박준호가 남긴 상처를 봤다.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가 아니라, 그 연기 뒤에 있는 절망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 뒤에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봤다.

한진수. 이석호. 윤희.

그리고 박준호.

그들은 모두 이 영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훈은 그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필름이 재생되는 동안, 지훈은 화면을 끄려고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전원 버튼에 닿았다.

그리고 멈췄다.

손가락의 끝이 버튼 위에서 경련했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과거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필름 속 자신의 목소리, 그 눈빛, 그 몸짓이 현재의 지훈을 집어삼키려 했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누를 수 없었다. 화면의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지훈의 표정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공중에서 떨렸다.

화면을 끌 수 없었다. 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절망이었다. 진정한 절망.

왜냐하면 선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름을 삭제하면, 한진수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석호는 계속 죽어 있다. 박준호는 이미 죽어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죽음들을 외면한 사람이 된다. 그것이 윤희의 길이었다. 12년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낙인 속에서 버티면서.

필름을 지키면, 모두가 죽는다. 자신도, 윤희도, 이석호도. 그리고 이번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지만 박준호의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이석호의 12년은 보상받는다. 한진수의 해고는... 아니다. 그것도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길도 완벽하지 않았다. 어느 길도 모두를 구하지 못했다.

박준호는 완벽함을 원했다. 그리고 죽었다.

지훈은 지금 그 완벽함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밤이 깊었다. 그리고 24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석호였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뭔가 결정적인 것이 있었다.

"지훈. 내일 뉴스를 봐. 그럼 모든 게 끝날 거야."

통화는 끝났다.

지훈은 휴대폰을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석호의 의도를 읽으려고 했다. 자살인가. 폭로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오직 내일의 뉴스만이 답을 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뉴스가 나오는 순간, 지훈은 자신의 선택을 해야 했다.

필름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버릴 것인가.

손가락이 여전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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