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2시 47분
새벽 2시 47분, 지훈의 원룸은 필름 감상실로 변모했다.
노트북 화면이 깜박거렸다. 한진수가 건네준 USB 드라이브에서 추출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여덟 번째. 아니, 아홉 번째일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이상했다. 자정 무렵 재생을 시작했는데, 지금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봤다. 2시 47분. 그럼 2시간 47분이 흐른 건가. 하지만 그 시간이 영화처럼 느껴졌다. 프레임 단위로 나뉜 것 같았다.
화면 속 자신이 움직였다.
3년 전의 지훈. 어두운 병실.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흐릿하게 보이고, 주인공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다.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것이 슬픔인지 절망인지 분노인지 한 장면으로는 알 수 없다. 여러 감정이 섞여 있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울 앞에 선다. 현재의 얼굴을 본다. 창백했다. 이마에 가는 주름이 생겼다. 3년 사이에 생긴 주름이다.
지훈은 눈을 감는다.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린다. 침대 위의 자신. 천장을 보는 눈. 그 눈의 초점. 눈동자의 떨림. 모든 것이 생생했다.
눈을 뜬다.
거울 속의 지훈이 변했다. 목소리가 나왔다. 필름 속 대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 손이 올라온다. 침대 위의 손. 그 손의 각도. 손가락의 곡률. 모든 것이 일치한다. 지훈의 몸이 기억했다. 3년을 건너뛰고 과거의 신체가 현재의 몸을 장악했다.
완벽했다.
그 순간, 거울이 무너졌다. 아니, 지훈의 시야가 무너졌다. 방이 회전했다. 바닥이 천장이 되고 천장이 바닥이 되는 것처럼. 지훈이 옆으로 넘어진다. 어깨가 벽에 부딪혔다. 쿵. 묵직한 소리가 났다. 손을 짚어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지럼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뇌가 두 개의 시간대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순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고, 다른 순간은 원룸의 바닥에 쓰러져 천장을 보고 있다.
5초일 수도, 5분일 수도 있었다.
숨을 고르면서 일어선다. 다리가 떨렸다. 손가락도 떨렸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마치 두 번의 감정이 동시에 터져나오는 느낌. 필름 속 지훈의 감정과 현재의 지훈의 감정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전기 같은 것.
노트북으로 돈다. 다시 눌렀다. 재생.
이번엔 배경음악에 집중한다. 3년 전에 들었던 그 음악이 정확히 귀에 들어온다. 바이올린의 음정. 첼로의 음정. 피아노의 음정. 모든 악기가 분리되어 들린다. 마치 스튜디오에 있는 것처럼. 촉각도 깨어난다. 침대 시트의 재질감. 병실의 냄새. 형광등의 눈부심. 모든 감각이 동원되어 3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훈이 중얼거렸다.
"나는 이 정도의 배우였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자조감과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강박이었다. 계속해서 그 말을 반복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
화면을 멈춘다. 시간을 확인한다. 2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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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낮, 방송국 리딩실
민지는 드라마 오디션을 준비 중이었다. 스크립트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일상적이었다. 조연 배우의 일상. 매일 다른 오디션, 매일 다른 역할, 매일 떨어지는 통지.
지훈이 리딩실 문을 밀었다.
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지훈, 넌 왜 이렇게... 얼굴이."
지훈의 얼굴은 창백했다. 검은 눈썹 아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밤을 새운 흔적이 선명했다.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다.
"3년 전 영화를 봤어."
민지가 스크립트를 내려놨다. "뭐? 무슨 영화?"
"천사의 날개. 폐기된 영화."
민지의 눈이 커졌다. "지훈, 그건... 감독이..."
"박준호 감독. 자살했어. 그 필름이 남아 있었고, 나는 그걸 봤어."
지훈이 말을 멈췄다. 어떻게 설명할지 몰랐다.
민지가 지훈을 더 자세히 봤다. 그의 눈에는 집착이 어려 있었다. 위험한 종류의 집착. "지훈, 그 영화 건드리면 안 돼. 윤희도 그랬고..."
"봐. 한 번만."
지훈이 노트북을 꺼냈다. 손가락이 떨렸다. USB를 연결한다. 파일을 찾는다. 같은 장면. 병실의 장면.
화면이 켜진다.
민지가 화면을 본다. 몇 초 후,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처음에는 의심의 눈빛이었다가, 점점 감동으로 바뀐다. 필름 속 지훈의 연기가 그렇게 강력했다. 순수했다. 마치 영혼을 드러내는 것처럼 투명했다.
"이게... 정말 너야?"
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했어? 넌 왜..."
민지가 말을 이었다. "왜 지금 이 정도로 못 하는 거야?"
지훈의 목이 메인다. 손가락이 경직된다. 화면을 보고 있지만 눈앞이 흐릿해진다. 3년 전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겹쳐진다. 그 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이 영화 뭐야? 왜 내가 못 본 거야?"
지훈은 민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이미 필름 속에 있었다.
"폐기됐어. 감독이 자살했고, 제작사가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해."
민지가 고개를 젖혔다. "저주받은 영화네. 진짜로."
그 순간, 리딩실의 문이 열렸다.
윤희였다. 그녀는 스크립트를 들고 들어오다가 화면을 봤다. 화면 속 지훈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그 창백함은 1초 정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 1초 후, 윤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문을 닫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민지와 지훈이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둘 다 알았다. 윤희의 반응은 단순한 놀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필름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지가 지훈의 팔을 잡았다. "지훈, 너 뭐 하는 거야? 이 영화를 공개하면..."
"복원할 거야. 공개할 거야."
"뭐?"
"이 영화를 제대로 된 형태로 만들어서 세상에 내보낼 거야."
민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훈, 그러면 넌 이 업계에서 끝나. 그리고 나도, 윤희도, 한진수 씨도 다 망가진다고."
"알아."
"알아? 그럼 왜?"
지훈이 민지를 봤다. 그의 눈에는 이미 결정이 내려져 있었다. "저 필름 속의 내가 진짜 나야. 그걸 증명해야 해."
"넌 지훈이야. 지금 여기 있는 지훈이."
"그게 아니야."
민지가 손을 놨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럼 나는? 나도 함께 망가지는 거야?"
지훈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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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오후, 지하 필름 보관소
지하 필름 보관소. 형광등이 깜박거리는 어두운 공간. 한진수는 필름 캔을 정렬하고 있었다.
"필름을 복원해 줄 수 있나?"
한진수가 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천천히 돌아선다. "지훈 씨, 그건..."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가능하지만..." 한진수가 말을 고르고 있었다. "법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법적으로?"
"이 필름은 제작사의 승인 없이는 건드릴 수 없어요. 공식적으로 폐기 대상이거든요. 만약 제작사가 알면 당신도, 저도, 그리고 민지 씨도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훈이 한진수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말했다. "그럼 제작사는 뭘 두려워하는 거야? 폐기된 영화인데?"
한진수가 입을 다물었다. 그건 좋은 질문이었다.
"이 영화가 나가면 박준호 감독이 왜 자살했는지, 그리고 제작사가 뭘 숨기려고 했는지 다 들통날 거야. 그래서 필름을 복원해야 해."
"그건 당신의 일이 아니에요."
"그럼 누구의 일이야?"
한진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지훈은 한진수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또 다른 감정도 있었다. 책임감. 죄책감.
"넌 왜 이 필름을 보관했어? 진짜 이유를."
한진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감독이... 이 영화를 지켜달라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지훈의 몸이 경직되었다. "마지막으로?"
"자살하기 전에. 날 찾아와서 이 필름만큼은 남겨달라고. 언젠가는 누군가 이 영화를 볼 거라고."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박준호 감독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지막 유언처럼.
"복원해 줄 수 있나? 나한테?"
한진수가 눈을 내려봤다. "위험해요. 정말로. 제작사는 이 영화 복원을 추적할 거고, 결국 들킬 거라고요. 당신도, 나도, 민지 씨도. 다 망가진다니까요."
"그래도 괜찮아."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지훈의 눈빛이 변했다. 공포도, 절망도 아닌 다른 것. 결연함. 또는 광기.
한진수는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일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이것도 박준호 감독의 뜻이기 때문이었다. 감독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 누군가는 이 영화를 봐야 한다는 그 확신.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지훈이라는 것. 한진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일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을 좀 해봐. 하루만. 내일 밤에 대답해 줄 수 있어?"
한진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둘 사이를 채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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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밤
지훈은 그 밤을 잠들지 못했다.
원룸의 창문으로 서울의 야경이 들어왔다. 강남의 불빛들이 깜박거렸다. 지훈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휴대폰이 있었다. 휴대폰 화면에는 필름의 장면들이 떠 있었다. 몇십 번을 본 장면들. 하지만 매번 새로웠다.
그 장면에서 지훈은 누군가를 안고 있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은 화면에 나오지 않았지만, 지훈의 눈빛은 말해주고 있었다. 절망. 사랑. 포기.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섞여 있었다.
지훈이 손가락을 터치했다. 다시. 또 다시. 같은 장면. 다른 각도. 같은 감정. 다른 깊이.
새벽 2시.
지훈이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현재의 자신. 창백하고, 초라하고, 작은 배우. 조연. 단역.
그리고 휴대폰 화면을 본다. 필름 속의 자신. 강렬하고, 확신에 찬, 빛나는 배우. 주연. 별.
그 두 이미지를 겹쳐본다.
거울 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필름의 장면을 재현한다. 손가락이 천천히 올라온다. 목소리가 나온다. 작은 음성으로. 그 장면의 대사를 중얼거린다.
"내가... 날 지킬 수 없어."
목소리가 떨린다. 그 떨림이 필름 속의 떨림과 정확히 일치한다. 근육이 기억했다. 3년 전의 몸이 소환된다.
그 순간, 거울 속의 지훈과 화면 속의 지훈이 겹쳐진다.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하나가 깨진다.
지훈이 거울에서 몸을 돌린다. 현실로 돌아온다. 하지만 현실이 흔들린다. 세상이 회전한다.
지훈이 침대에 쓰러진다.
시간이 뒤틀렸다.
휴대폰을 본다. 4시 47분. 기억이 혼란스럽다.
몸이 떨린다. 전신이. 마치 고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하지만 온도계는 정상이다.
지훈이 손으로 얼굴을 누른다. 손가락 사이로 새는 호흡. 빨라진 호흡. 조절할 수 없는 호흡.
휴대폰이 울린다.
아침 6시. 민지 메시지.
"지훈, 괜찮아? 어제 이후로 계속 생각이 나. 너 정말 저런 연기했어? 진짜 너야?"
지훈이 손가락으로 글자를 치려다 멈춘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맞아.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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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9시, 방송국 복도
리딩실 밖. 창밖으로 서울의 아침이 들어온다. 차량음, 사람들의 목소리, 일상의 소음.
민지가 나온다. 지훈의 얼굴을 본다.
"어제 밤 뭐 했어? 얼굴 봐."
"많이 봤어. 필름을."
민지가 지훈의 팔을 잡았다. 팔이 차갑고 떨리고 있었다. "지훈, 이거... 뭔가 이상한데?"
"아니야. 괜찮아."
"거짓말 하지 마. 내 눈을 봐."
지훈이 민지의 눈을 본다. 그 순간, 뭔가 현실이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민지의 눈. 현재의 것. 따뜻한 것. 살아 있는 것.
"한진수가 복원을 도와주기로 했어?"
"아직 아니야. 근데..."
"근데?"
"복원할 거야. 어떻게든."
민지가 지훈의 손을 놨다. 그리고 한 발 물러섰다. "지훈. 내가 너한테 뭔가 물어봐도 돼?"
"응."
"왜 넌 계속 뒤를 보고 있어?"
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은 어제 민지가 던진 것과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넌 지훈이야. 지금 여기 있는 지훈이. 그 사람이 아니야."
"같은 사람이야."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완전히 달라졌어. 저 필름을 본 이후로."
지훈이 대답하지 않았다. 민지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필름 속의 자신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었고, 현재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복원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근데 조건이 있어."
"뭔데?"
"이 일 때문에 너 혼자만 지쳐 마. 알겠어? 나도 함께 지칠 거니까."
지훈이 민지를 본다. 그 말에 뭔가 위험한 것을 느낀다. 민지가 자신과 같은 길로 빠져들 수 있다는 위험성. 하지만 지훈은 그것도 멈출 수 없었다.
"고마워."
"고마워 하지 말고, 정신 차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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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오후, 한진수의 결정
지하 필름 보관소. 형광등이 깜박거린다. 한진수는 복원 장비 앞에 앉아 있었다. 손 위에는 필름 캔이 있었다. 천사의 날개.
한진수가 눈을 감는다. 그리고 기계에 필름을 넣는다.
"미안해요. 박준호 감독. 미안해요."
기계가 작동한다. 휘익휘익거리는 소리. 영상이 디지털화된다. 프레임 하나하나가 저장된다. 3시간. 4시간. 새벽까지.
복원 완료.
한진수가 파일을 USB에 저장한다. 손가락이 떨린다. 이제 이 영화는 다시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감독의 마지막 부탁. 자신이 지켜야 할 유일한 것. 그것을 위해 자신은 이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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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날
지훈이 USB를 들고 있다.
자신의 과거 전체가 이 작은 기계 안에 들어 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린다.
제작사 법무팀. 서준영.
"지훈 씨. 마지막 경고야. 그 파일을 재생하거나, 공개하거나, 어디 건네주기라도 하면... 당신은 이 업계에서 영구 추방이야. 그리고 민지, 윤희, 그리고 한진수 씨까지. 모두."
지훈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서준영은 이미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당신은 이미 조연 배우 신세잖아. 이걸 더 망칠 거야? 생각해봐."
전화가 끊겼다.
지훈이 휴대폰을 내려놨다. 손이 떨렸다. 공포가 몰려왔다. 절망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것도 곧 다른 감정으로 변했다. 민지를 해칠 수 있다는 깨달음. 한진수를 해칠 수 있다는 깨달음. 윤희를 해칠 수 있다는 깨달음.
지훈의 손가락이 경직되었다. 이 작은 기계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다. 3년 전의 자신. 완벽했던 자신.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30초. 1분. 2분. 지훈은 그 갈등 속에서 흔들렸다. 타인을 해친다는 것. 그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 자신의 욕망이 타인을 강압한다는 것. 그 인식이 명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의 손이 움직였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민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후 2시. 널 만나야 해."
메시지를 보낸 후, 지훈은 한진수에게도 연락했다.
"복원이 끝났어?"
잠시 후, 답이 왔다.
"네. 끝났습니다."
지훈이 화면을 켰다. 노트북을 켜고, USB를 꽂았다. 파일이 열렸다.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복원된 영화는 존재한다. 그리고 지훈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아니, 공개해야 한다.
그 순간, 지훈은 자신의 선택을 명확히 했다. 필름을 공개하겠다는 선택. 민지와 한진수, 윤희의 미래를 담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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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룸, 오후 2시
민지가 도착했다.
지훈이 문을 열었다. 민지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뭐 하려고 했어? 어제 메시지가..."
"필름을 공개하려고 해."
민지가 움직임을 멈췄다. "뭐?"
"내일. 내일 이 필름을 인터넷에 올릴 거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지훈, 넌 미쳤어. 정말로."
"미쳤을지도. 근데 이게 맞는 거야."
민지가 지훈의 손목을 잡았다. "넌 뭘 하는 거야? 이러면 넌 끝나. 영원히 끝나."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상관없어? 나는? 나도 끝나는데?"
지훈이 민지를 본다. 그 눈에는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미안해."
민지가 손을 놨다. 그리고 뒤돌아섰다. 문을 향해 걸어간다.
"기다려. 제발."
민지가 멈췄다. 돌아섰다.
"내일 함께 올려. 같이 올려. 그러면 넌 혼자가 아니야."
민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게 도움이 돼? 우리 둘 다 망가지는 게 낫다고?"
"응. 그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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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밤
지훈은 필름을 준비했다. 자막을 달았다. 설명을 붙였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했다.
그리고 밤 11시 59분.
지훈의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 있었다. 업로드 버튼. 한 번 누르면 모든 것이 끝난다.
한 번 더 필름을 본다. 병실의 장면. 자신의 얼굴. 그 눈빛. 그 감정.
"미안해. 박준호 감독. 미안해. 하지만 이 영화는 죽으면 안 돼."
지훈이 버튼을 눌렀다.
업로드 중.
10%. 20%. 30%.
화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50%. 60%. 70%.
지훈의 심장이 빨라진다.
90%. 95%. 99%.
그리고.
100%.
업로드 완료.
천사의 날개가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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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3시
지훈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리고 울렸다. 그리고 울렸다.
제작사로부터의 전화. 방송국으로부터의 전화. 경찰로부터의 전화.
지훈은 모든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노트북 화면을 봤다.
조회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1000. 5000. 10000. 100000.
댓글들이 달렸다.
"이게 진짜 배우의 연기야?"
"이런 영화가 폐기됐다고?"
"박준호 감독을 다시 평가해야 한다."
"지훈이라는 배우를 기억하자."
지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어린 웃음. 또는 안도감의 웃음.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새벽이 온다.
여전히 화면은 재생 중이다.
그리고 조회수는 계속 올라간다.
지훈의 눈빛이 깊어진다. 필름 속의 자신과 현실의 자신이 완전히 겹쳐진다.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다. 누가 진짜 지훈인지. 어느 것이 현실인지.
다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천사의 날개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지훈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는 확실히 죽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