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션장의 형광등이 너무 밝았다.
지훈은 심사위원 세 명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눈을 뜨려 해도 눈썹 위쯤에서 시선이 멈췄다. 방금 읽은 대사가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입술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네, 결과는 연락드리겠습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손을 들어 보냈다. 그것이 떨어졌다는 신호라는 걸 지훈은 알고 있었다. 세 번 떨어지고, 네 번 떨어지고, 다섯 번 떨어진 후부턴 그 손짓의 의미를 너무 잘 알게 된다.
문을 나오며 지훈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른 배우들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누군가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를 봤고, 누군가는 동정하는 눈빛으로 봤다. 둘 다 견딜 수 없었다.
휴대폰에 메시지가 떴다.
**민지: 어떻게 됐어?**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고 있었지만 답장을 할 글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냥 화면을 꺼버렸다.
***
강남의 지하는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제작사 건물 지하 3층. 영상미디어 폐기 처분 필름 보관소. 지훈은 서고 같은 이 방에서 일한 지 삼 개월째였다. 조연 오디션에 떨어지는 날들 사이에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한진수 과장은 서른 중반의 남자였다. 회사에서는 조용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이 보관소만큼은 그의 영역이었다.
"오늘 폐기 목록 들어왔어. E-4부터 E-12까지. 다 상태 확인하고 박스 채워."
한진수는 체크리스트를 건넸다. 손가락이 목록을 가리켰다. E-7에 표시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천사의 날개 - 박준호 감독**
지훈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거... 언제부터?"
"삼 년 전. 감독이 돌아가신 후로는 계속 금고에 있었대. 이번에 상여금 정산을 하면서 폐기 결정이 내려온 거야. 서준영 이사 지시야."
한진수는 다른 필름들을 정렬하고 있었다. 지훈은 그 말을 들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천사의 날개.
삼 년 전이면 사고 직전이었다. 그 영화를 촬영했던 건... 기억이 없었다. 사고 이후 지훈의 기억은 끊어져 있었다. 의사는 외상 후 기억상실이라고 했다.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고 했다.
"이 필름, 한 번 봐도 돼?"
"뭐하는 거야. 폐기 목록이야."
"잠깐만. 한 번만."
지훈의 목소리에 뭔가 다른 게 들었는지 한진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을 보는 지훈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한진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필름을 꺼내주었다.
***
필름 룸은 더 어두웠다.
창문이 없는 방. 벽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스크린과 영사기만 있었다. 지훈의 손이 떨렸다.
영사기가 켜졌다.
검은 화면에 크레딧이 흘러나왔다.
**천사의 날개** **감독: 박준호** **주연: 이석호, 윤희, 지훈**
지훈이라는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을 때, 그의 호흡이 멈췄다.
첫 장면. 병원 침대 위의 남자. 창밖으로 새벽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훈이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지훈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눈에는 뭔가가 살아 있었다.
깊이가 있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떠 있는 눈. 지훈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대사가 나왔다.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까?"
그 말을 하는 순간, 지훈의 몸에 뭔가 흘렀다.
근육이 경직되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신체를 자기 손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팔이 그 각도로 들려졌다. 손가락이 그렇게 펼쳐졌다. 목에 힘이 들어갔고, 성대가 울렸다.
화면 속 지훈의 눈이 창밖을 향했다. 지훈도 그 방향을 따라갔다. 눈의 초점이 이동했다. 마치 과거의 신체가 현재의 몸을 빌려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필름 속 지훈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재의 지훈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움직임이 정확히 겹쳤다. 손가락이 가슴팍을 짚었고, 호흡이 가빠졌고, 눈이 흔들렸다.
화면에 쏟아지는 감정의 결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무엇인지 지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것들이었다. 자신이 느낀 것들이었다. 자신이 살았던 감정들이었다.
삼 년 만에 돌아오는 기억이 아니었다.
신체 기억이었다.
지훈의 손이 화면을 향해 뻗어졌다.
그 손가락들이 화면 속 자신의 손과 겹쳤다. 그렇게 화면 속 세계와 현재의 세계가 한 점에서 만났다.
영사기의 음성이 계속 흘러나왔다. 지훈의 대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지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삼 년 전의 지훈이 남긴 음성이었다. 그 음성이 현재의 지훈의 몸 안에서 울렸다.
화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야외 촬영 장면이었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지훈. 누군가의 손이 지훈의 어깨를 터치했다. 그 손은 윤희의 손이었다. 하지만 화면 속에서는 그저 손이었다. 터치였다. 감정의 전달이었다.
지훈의 어깨가 그 터치에 반응했다.
현재의 지훈의 어깨도 반응했다.
"나는... 이 정도의 배우였다."
지훈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화면을 보며 나온 말이었다. 그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동시에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재의 자신은 그 깊이를 잃어버렸다. 그 완벽함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화면 속에는 여전히 그것이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필름이 계속 흘렀다.
더 깊은 장면들로. 더 복잡한 감정들로. 지훈이 화면 속에서 무너지는 장면. 그 무너짐이 현재의 지훈 안에서도 일어났다.
화면 속 지훈의 얼굴이 틀어졌다. 입술이 떨렸다. 그 감정이 현재의 지훈을 침범했다. 마치 지훈의 몸이 화면 속 배우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필름이 끝났다.
검은 화면이 되었다.
***
보관소의 불이 켜졌다.
어둠 속에서 지훈은 여전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은 이미 검은색이었지만, 지훈의 눈은 그곳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지훈의 뒤에서 이 방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발자국이 지훈의 뒤에 멈췄다.
침묵이 흘렀다.
길었다.
불이 켜졌다.
한진수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이 떠 있었다. 아니, 놀람을 넘어 뭔가 다른 감정이 있었다. 지훈을 보는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걸... 왜 보셨어요?"
한진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훈은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울음의 표정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필름... 왜 폐기해야 하는 거죠?"
지훈의 목소리가 물었다.
한진수가 입을 떨었다. 뭔가 말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눈이 필름을 향했다. 필름 통에는 '폐기 예정'이라는 빨간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감독이... 돌아가셨어요. 자살로."
한진수가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배우들도... 다 어려워졌어요. 제작사에서는 이 영화 자체를 없었던 일로 만들려고 해요. 법무팀도 움직이고 있고... 서준영 이사가 직접 지시한 거라고."
지훈은 필름을 들었다.
"그래서 이걸 폐기하는 거구나."
"네... 상여금 정산을 빌미로 이제 처분하기로 한 거예요.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진수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지훈은 필름을 들고 서 있었다. 그 검은 필름 통 안에는 자신의 완벽함이 갇혀 있었다. 삼 년 동안 잃어버린 자신의 배우로서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지훈이 물었다.
"뭐요?"
"이 필름들은... 왜 다 버려져야 하는 거죠?"
한진수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이 보관소 전체를 훑었다. 어둠 속에 쌓인 폐기 필름들. 누군가의 작품들. 누군가의 노력들. 누군가의 꿈들. 모두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한진수가 중얼거렸다.
지훈은 필름을 품에 안았다.
"빌려갈 수 있을까?"
"안 돼요. 폐기 목록이야."
"언제까지 폐기 안 해요?"
한진수가 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지훈은 알았다.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지훈은 필름을 들고 나왔다.
한진수는 그를 막지 않았다.
***
집에 돌아온 지훈은 필름을 침대 위에 놓았다.
천사의 날개.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영화가 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속에 자신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
지훈이 받았다.
"어디야?"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
"오디션 떨어졌어?"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떨어졌네. 지훈, 괜찮아?"
"응."
"거짓말하지 마. 오늘 서준영 이사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뭔가 웅성거렸어. 폐기 영화 건으로 법무팀이 움직인다고. 그게 혹시..."
지훈의 호흡이 멈췄다.
"뭐?"
"천사의 날개? 그 영화?"
"민지, 이 영화 알아?"
"응. 한 번 들었어. 감독이 돌아가신 영화. 지훈이 출연했던 거 말이야. 사고 나기 전에."
지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석호 형도 출연했어?"
"응. 그리고 윤희도. 근데..."
"근데?"
"너한테 말해도 괜찮을까? 그 영화... 저주받은 영화래. 건드리면 안 된대."
지훈은 필름을 내려다봤다.
"누가 그렇게 했어?"
"제작사. 감독이 죽었고, 촬영 중에 배우도 크게 다쳤고... 여러 일이 있었대. 그래서 모든 기록을 지우려고 해. 지훈, 혹시 그 영화 얘기한 거 아니겠지?"
지훈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석호 형이 물었어. 넌 왜 계속 뒤를 보고 있냐고. 지훈, 앞을 봐. 제발."
민지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지훈은 필름을 들었다.
손가락이 필름 통의 테두리를 따라갔다. 그 안에는 자신의 완벽함이 있었다. 현재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그 옛날의 자신이 있었다.
"지훈?"
"응. 알겠어."
지훈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지훈은 필름을 다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화면을 켰다. 다시 보고 싶었다. 그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몸이 과거로 돌아가는 그 느낌을 다시.
필름이 재생되었다.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까?"
화면 속 지훈이 말했다.
그 말이 현재의 지훈의 몸 안에서 다시 울렸다.
성대가 진동했다.
지훈의 목이 그 대사를 따라가려고 움직였다. 자신이 아닌 화면 속의 자신이 말하는 문장을 자신의 입술로 만들려는 본능적 움직임. 손가락이 떨렸다. 필름 통을 내려놓고 화면에 더 가까이 얼굴을 댔다.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까?"
지훈이 따라 말했다.
화면 속의 자신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 속에 서 있었다. 얼굴의 절반만 드러나는 그 구도에서 지훈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인다. 슬픔과 결단 사이의 어떤 것. 현재의 지훈은 그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이 기억했다.
눈썹이 내려갔다.
턱이 조였다.
모니터 속 화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카메라가 빠져나가고, 뒷모습이 남겨진다. 그 뒷모습의 어깨가 살짝 들렸다가 내려온다. 마치 무거운 것을 내려놓듯이.
지훈의 어깨도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그것은 모방이 아니었다. 기억이었다.
근육이 기억하고 있었다. 3년 전 촬영장에서 박준호 감독이 "한 번 더, 하지만 이번엔 마음을 더 깊이 내려가"라고 말했을 때의 감각.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했는지, 어느 근육을 어느 정도로 이완시켰는지. 그 모든 게 되살아났다.
화면이 계속 흘러갔다. 다음 장면. 그 다음 장면.
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모니터 빛에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가까이 앉아, 자신의 완벽한 연기를 지켜봤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필름이 끝났을 때, 지훈의 눈물이 흘렀다. 울음이 아닌 눈물. 의식하지 못한 채 흐른 눈물. 마치 그 눈물도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3년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흘러내린 것처럼.
지훈은 필름을 정지시키지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검은 화면이 앞에 펼쳐진 채로.
휴대폰이 울렸다.
**윤희**
지훈이 받지 않았다.
다시 울렸다.
**윤희**
이번엔 받아야 했다. 지훈은 손을 들었다.
"뭐해?"
윤희의 목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집."
"한진수가 너한테 천사의 날개 필름 줬대?"
지훈의 손이 경직됐다.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보관소에서 봤어. 넌 필름을 들고 나갔어."
침묵이 흘렀다.
"지훈, 그 영화는 건드리면 안 돼. 이해해?"
"왜?"
"왜냐고? 감독이 자살했어. 그 영화 때문에. 배우도 다쳤어. 그리고 우리는... 우리는 그 영화와 함께 묻혀야 해."
윤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그래야 해?"
"왜냐면 그게 아니면 살 수 없기 때문이야. 이 업계에서 그 영화에 묶이면 끝이야. 너도 알아. 넌 이미 한 번 떨어진 배우잖아.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건 그 영화를 잊기 때문이야. 다시 그걸 꺼내면..."
"내가 뭐가 되든 상관없잖아. 난 이미..."
"상관있어! 넌 내 동료야. 그 영화와 함께 빠져나가면 나도 함께 빠져나가!"
윤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영화는 저주받은 거야. 건드리면 안 돼."
전화가 끊겼다.
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모니터는 여전히 검은 화면이었다. 필름이 끝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훈의 눈에는 여전히 그 마지막 장면이 떠 있었다. 카메라가 빠져나가고, 자신의 뒷모습만 남겨지는 그 순간. 어깨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그 움직임.
지훈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따라 했다.
어깨를 천천히 올렸다. 그리고 내려놨다.
목이 조였다.
3년 만에 자신의 몸이 무엇인가를 기억했다.
당신은 배우다.
그 목소리가 들렸다. 박준호 감독의 목소리. "당신은 배우다. 그래서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모든 것을."
현재의 자신은 그것을 줄 수 없었다. 조연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자신은 그 깊이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필름 속의 자신은 달랐다. 그 자신은 완벽했다.
지훈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자신을 봤다. 30대 초반의 평범한 남자. 조연 배우라는 낙인이 찍힌 평범한 남자.
그런데 거울 속에 자신의 눈이 빛났다.
필름 속의 자신이 보였다.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까?"
지훈이 따라 말했다. 이번엔 거울을 보며.
그 말이 나갈 때, 뭔가가 깨졌다.
현재의 지훈과 과거의 지훈 사이의 벽이.
손가락이 거울을 긁었다. 유리가 울었다. 그 소리가 지훈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팔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침을 삼켰다. 음성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팍에서 시작되어 팔 끝까지 전해졌다.
거울 속의 눈이 흔들렸다.
그것은 더 이상 현재의 지훈의 눈이 아니었다.
***
다음날 오전.
지훈은 영상미디어센터의 복합 스튜디오 구역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대형 제작사들의 편집실과 특수 효과팀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한진수의 근무지인 필름 보관소도 이 건물 지하에 있었다.
지훈은 한진수를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필름 보관소의 불이 켜져 있었다. 한진수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 화면엔 폐기 목록이 떠 있었다.
"한진수 형."
지훈이 말했다.
한진수가 놀라서 돌아봤다.
"어? 지훈?"
"천사의 날개 필름 복원할 수 있어?"
한진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뭐해? 이미 나왔던 말인데..."
"복원할 수 있냐고 물었어."
"...기술적으로는 가능해. 하지만 안 돼. 제작사에서..."
"법무팀이 뭐라고 해?"
"지훈, 이건..."
"그냥 물어봐. 법무팀이 뭐라고 해?"
한진수가 한숨을 쉬었다.
"필름 복원 금지, 유포 금지, 재상영 금지. 어기면 법적 조치.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도 문제가 돼."
지훈은 한진수의 눈을 봤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뭔가 다른 감정도 있었다. 불의함? 연민? 지훈은 알 수 없었다.
"만약에 내가 혼자 한다면?"
"뭐?"
"만약에 내가 필름을 복원하는 모든 과정을 혼자 한다면? 형은 모르는 척할 수 있지 않을까?"
한진수가 일어섰다.
"지훈, 이건 진심인가?"
"응."
"그럼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한진수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 남자가 얼마나 절실한지. 이 영화가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한진수는 의자에 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법무팀 사람들이 매일 여기 들어와. 폐기 진행 상황을 체크해. 만약 내가 도와준다는 게 들통나면..."
"안 들통날 거야."
"어떻게?"
"내가 알아서 할게. 형은 그냥 시간만 줘."
한진수는 지훈을 오래 봤다. 그 눈에는 고민이 떠 있었다. 직업의 위험과 정의감 사이에서 흔들리는 눈.
"내일 밤 8시. 아무도 없을 때 와."
한진수가 마침내 말했다.
"그리고 절대 들키지 마. 안 그럼 나도 끝나고, 넌 소송 맞아."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말고 조심해. 이 건물에 서준영 이사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한진수가 잠시 멈췄다.
"그 영화가 정말 봐야 할 영화냐고 생각해봐. 혹시 모르니까."
한진수의 눈에 불안감이 떠 있었다.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필름 보관소의 어둠 속을 바라봤다.
그 어둠 속에는 얼마나 많은 폐기된 영화들이 있을까. 얼마나 많은 누군가의 완벽함이 그 속에 갇혀 있을까.
지훈은 그걸 알아야 했다.
자신이 왜 뒤를 돌아보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필름 속 자신이 묻는 그 질문에 답해야 했다.
"나는... 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될까?"
그 대사가 지훈의 입술을 맴돌았다.
마치 주문처럼.
마치 저주처럼.
건물을 나온 지훈은 휴대폰을 켰다.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알 수 없는 번호**
"당신이 찾던 영화가 있어. 그 영화는 저주받은 게 아니야. 단지 누군가에 의해 묻혀야 했던 거야. 왜 그런지 알고 싶으면, 내일 오후 3시 강남역 2번 출구 카페 '셀레스틴'으로 와."
지훈의 손이 떨렸다.
누가 이 번호를 알 수 있을까.
그리고 누가 자신을 추적할 수 있을까.
지훈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저주받은 게 아니야."
그 말이 자신의 심장을 두드렸다. 현재의 자신은 저주받은 배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영화 자체가 저주받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묻혀야 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 영화는, 박준호 감독의 유작은, 자신의 완벽한 연기가 담긴 그 필름은 정말로 뭐였을까.
지훈은 하늘을 봤다.
강남의 회색 빌딩들 사이로 흐린 하늘이 보였다.
그 하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혹은 자신의 과거가.
혹은 자신이 잃어버린 3년이.
지훈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 오후 3시.
그 시간이 올 때까지, 자신은 어떻게 버텨야 할까.
필름을 또 볼까.
그 감각을 또 느껴볼까.
자신의 몸이 과거로 돌아가는 그 전율을.
지훈의 발걸음이 강남역 방향으로 향했다.
밤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건물 밖 어딘가의 그림자가 지훈의 뒷모습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