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의 층위
엄마가 가져온 죽을 밀어냈다. 숟가락이 쨍 하고 쟁반에 떨어졌다.
"당신 기억이 좋아지려면 먹어야지."
박영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완벽한 톤. 완벽한 억양. 마치 대본을 읽는 배우처럼.
"엄마."
지현이 침대에 기대앉았다. 머리의 통증은 약해졌지만, 그 자리에는 다른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심. 식을 줄을 모르는 의심.
"내 직업이 뭐였어?"
박영희가 손을 멈췄다. 죽 냄비를 들고 있는 손이 일초, 이초 정도 흔들렸다.
"디자이너였지, 왜?"
너무 빨랐다. 답변이. 마치 준비된 답처럼.
지현의 손가락이 침대 시트를 집었다. 디자이너. 그 단어가 자신의 뇌에 맞지 않았다. 마치 남편이 남편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 이미지—자신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누군가의 추억이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맞나?"
"당신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미세한 긴장. 미세한 방어.
지현은 눈을 감았다. 기억 복원. 이제는 의식적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파편들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 시간의 역순으로 몸과 마음을 펼치는 것.
통증이 왔다.
두개골 뒤쪽에서 시작되는 날카로운 통증. 마치 누군가가 뇌를 집게로 집어 비틀고 있는 것 같은 감각.
그 속에서 이미지가 떠올랐다.
병원 복도.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그곳. 자신은 하얀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차트를 들고 있었다. 의료 행정직. 환자 정보를 관리하고, 의사와 간호사 사이를 오가며 서류를 정리하는 일. 그것이 자신이었다.
눈을 떴다.
"의료 행정직이었어."
박영희의 얼굴이 굳었다. 그 순간만큼은 완벽한 배우도 마스크를 유지할 수 없었다.
"당신 기억이 틀렸어. 디자이너였어. 의사 한석준이 봤잖아."
"의사가 뭘 봤는데?"
"당신의 기록. 당신의 직업 이력."
박영희가 다시 죽을 떠올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숟가락을 너무 세게 들어 올렸다. 죽이 떨어졌다.
지현의 머리가 맑아졌다. 동시에, 어떤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모래주머니에서 모래가 새어나가는 것처럼.
어제 본 영화 제목. 무엇이었지? 간호사 유미경이 말했던 그 드라마의 이름. 사라졌다. 기억의 자리에는 공백만 남아 있었다.
"엄마, 내가 뭘 잊었어?"
박영희가 죽을 다시 내려놨다. 그리고 딸의 얼굴을 봤다. 그 눈빛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당신은 쉬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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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가 오후 3시 정도에 나타났다. 항상 그 시간이었다. 마치 정해진 스케줄처럼. 지현은 준호가 들어오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유미경이 병실을 더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다. 환자의 남편이 온다는 신호였다.
"안녕, 지현아."
준호는 웃으며 장미꽃 한 다발을 들고 들어섰다. 장미꽃. 매번 장미꽃. 지현은 그 꽃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상인가, 위로인가, 아니면 거짓의 포장인가.
"우리 어디서 만났어?"
준호가 꽃을 화병에 꽂다가 손을 멈췄다. 그 손가락. 아직도 밴드가 붙어 있었다. 거기에 뭔가가 있었다. 지현은 직감했다.
"대학교 동아리."
대답이 빨랐다. 엄마처럼. 마치 누군가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대본을 나눠준 것처럼.
"정말?"
지현이 준호를 봤다. 이 남자의 얼굴을 차근차근 관찰했다. 눈. 콧날. 입술의 형태.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상한 것이 아니라, 낯설었다. 마치 어디선가 본 배우의 얼굴을 보는 느낌. 친숙함과 거리감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낯설음.
"내가 진짜 너를 사랑했어?"
준호가 웃음을 멈췄다.
"지금도 사랑하지 않아?"
그것도 대본 같은 대사였다. 정확히 정해진 음절. 정확히 정해진 강조점.
지현은 기억 복원을 시도했다.
준호와의 만남. 그 첫 순간을 역으로 추적하려 했다. 대학교. 동아리. 어떤 동아리였지?
통증이 터졌다.
이전과는 다른, 훨씬 극심한 통증이 두개골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마치 뇌가 반으로 갈라지려는 것 같은 고통. 손가락이 침대 시트를 찢을 듯 움켜잡았다.
"지현!"
준호가 침대 옆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지현에게 닿기 전에, 또 다른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난주에 누가 방문했었지? 그 사람의 얼굴. 사라졌다.
어제 무엇을 먹었지? 아침 밥. 점심 국. 저녁 반찬의 이름들. 모두 공백으로 변했다.
한석준이 처방해준 약의 이름은? 그 약을 복용한 후의 느낌은? 시간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약을 줄까?"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멀게 들렸다. 마치 수중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약이 아니었다. 약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뇌손상의 증상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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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었다.
유미경이 저녁 약을 가져왔고, 지현은 받지 않았다. 간호사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났다. 그리고 뭔가 더. 동정심? 아니면 죄책감?
"약을 꼭 복용해야 해요."
유미경은 알약 두 개를 담은 종이컵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주치의 선생님이 처방하신 약이에요."
"뭐하는 약이?"
유미경이 말을 멈췄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수면 유도제와... 항불안제예요."
"항불안제?"
"네."
유미경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말이 없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지현은 약을 받지 않았다.
유미경이 나간 후, 병실은 고요해졌다. 형광등의 윙윙거리는 음. 밖의 도시 소음. 그리고 자신의 호흡. 그것들만이 남았다.
지현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어제 영화 제목. 지난주 방문객의 얼굴. 일주일 전의 날씨. 두 주 전의 대화. 한 달 전의 감정. 더더욱 멀리로 가면, 자신의 직업의 이름. 자신의 남편과의 만남. 자신의 첫 사랑. 자신의 어린 시절.
모두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자신이 복원한 기억들이 정말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의료 행정직. 그것이 정말 자신의 직업이었나? 아니면 자신의 뇌가 만들어낸 거짓인가?
준호와의 대학교 만남. 그것이 거짓이라는 확신이 정말 정확한가? 아니면 그것도 자신의 뇌손상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기억 복원 능력과 정신질환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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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가 다음 날 오후에 나타났다.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지현이 좋아한다고 알려진 딸기가 들어 있었다.
"지현아, 엄마가 너를 위해 특별히 골라왔어."
박영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모성애로 가득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든 이 여자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지현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얼굴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설었을까.
"엄마."
"응, 뭐야?"
"내가 딸기를 좋아했어?"
박영희의 손이 멈췄다. 비닐봉지가 침대 위에 떨어졌다. 그녀의 눈이 지현을 향했다. 그 눈에는 뭔가 경고하는 것 같은 빛이 있었다.
"왜 그런 소리를 하니? 어릴 때부터 먹던 거잖아."
"내 기억 속에는 없어."
박영희의 목소리가 변했다. 부드러움에서 뭔가 예리한 것으로. 모성애에서 뭔가 단단한 것으로.
"당신의 의심이 증상이라고 했잖아. 의사 선생님이."
지현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엄마, 내가 딸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아?"
박영희가 비닐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지현은 봤다.
"지현아, 넌 정상이야. 정상인 사람은 엄마가 사온 딸기를 먹고 좋아해야 해. 그게 정상이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지현의 뇌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파편.
검은색 차 안.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 "넌 정상이 아니야.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
통증이 밀려왔다. 뒷머리부터 시작되는 파열 같은 통증.
지현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현? 지현!"
박영희가 딸을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지현은 그 움직임을 본능적으로 피했다. 침대 반대편으로.
"엄마, 제발 나가줄래?"
"뭐라고?"
"나가줄래."
박영희는 침대 옆에 멈춰섰다. 그녀의 얼굴이 굳었다. 모성애의 탈을 쓴 어떤 다른 감정이 드러났다. 실망. 아니, 더 정확히는 통제 불능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넌 아직 회복 중이야. 혼자 있으면 위험해."
"저 혼자 있을 거야."
"그럼 유미경이라도 옆에 있어야..."
"엄마."
박영희가 멈췄다.
지현은 그 순간 뭔가를 깨달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무언가를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자신이 기억을 되찾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박영희는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전에 한 번 뒤돌아봤다.
"약을 먹어야 해."
"안 먹을 거야."
"먹지 않으면 더 심해질 거야."
"이미 심해졌어요."
박영희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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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겨진 병실에서 지현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침대에 앉은 채로 손가락을 펼쳤다 모았다. 약을 먹을지 말지. 그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약을 먹으면 의심이 사라질까, 아니면 기억도 함께 사라질까. 약을 거부하면 진실에 가까워질까, 아니면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까.
기억을 복원할 때마다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을 알았다. 어제의 영화 제목, 지난주 방문객의 얼굴. 그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능력의 대가라는 것도 이해했다. 기억은 유한한 용량의 저장소였고, 깊은 기억을 파낼수록 얕은 기억이 밀려나갔다.
그렇다면 약은 무엇인가.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봉인이었다. 기억 복원 능력을 꺼버리고, 대신 편안한 거짓 속에서 살도록 강제하는 것.
지현은 침대 옆 테이블을 봤다. 약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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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준이 저녁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침착했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했던 것처럼.
"어제 밤 어떠셨어요?"
"약을 안 먹었어요."
"네, 알고 있어요. 간호사 미경이 보고했거든요."
한석준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의 자세는 완벽했다. 의사의 자세. 동정심과 권위가 섞인 그 자세.
지현은 의사의 손을 봤다. 손가락에는 밴드가 붙어 있지 않았다.
"당신의 의심이 증상입니다. 신뢰하지 않으려는 욕동이 환각을 만듭니다."
한석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확신에 차 있었다. 마치 절대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이 정말 저를 치료하려고 하는 거예요?"
"당연하죠."
"아니면 저를 더 깊은 의심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요?"
한석준이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진심의 웃음이 아니었다. 진단적 웃음이었다. 환자를 보는 의사의 웃음. 당신은 이미 진단되었고,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웃음.
"당신은 지금 편집증적 사고를 하고 계세요. 이것은 뇌손상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특히 측두엽 손상 환자들이 보이는 패턴이에요."
한석준이 차트를 펼쳤다. 뇌 스캔 사진을 가리켰다. 그 사진 위의 빨간 표시. 그것이 손상 부위라고 했다.
"이 부위가 손상되면, 신뢰 감각이 파괴됩니다.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게 되죠. 약물 치료를 통해 이 신뢰 감각을 회복할 수 있어요."
지현이 그 사진을 봤다. 자신의 뇌. 자신의 손상. 그것이 정말 자신의 것일까.
"제 직업이 뭐였어요?"
한석준이 차트의 다른 페이지를 가리켰다.
"그래픽 디자이너. 2년 경력. 프리랜서로 일하셨어요."
지현은 그 기록을 봤다. 깔끔하게 인쇄된 글씨. 의료 차트의 공식적인 양식.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직업 항목 바로 위의 여백이 유독 넓었다. 마치 뭔가를 지우고 다시 쓴 흔적처럼.
지현이 손을 들어 그 부분을 만져봤다. 종이의 표면. 펜의 압력이 다르게 느껴졌다. 위쪽 글씨는 깊게 눌렸고, 아래쪽 글씨는 가볍게 눌렸다. 마치 원래 있던 글을 지우고 위에 덮어 쓴 것처럼.
"이 기록이 원본이에요?"
한석준이 차트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가리켰다.
"당연하죠. 입원 당시 작성된 공식 기록입니다."
지현이 다시 한 번 만져봤다. 펜의 필압을 따라가며. 지워진 글씨의 흔적을 찾으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추측해보려 했다. 의료 행정직. 그 글자의 길이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그럼 왜 여기 이 부분이..."
"당신이 기억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차트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당신의 뇌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공식 기록이 사실입니다."
한석준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그것은 설득이 아니었다. 선포였다. 그리고 그 선포 뒤에는 뭔가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지현은 느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 의도의 무게를.
"제 남편은 누구예요?"
"이준호입니다. 당신이 3년 전부터 사귀다가 1년 전에 결혼한 분이에요."
"저는 그 남자를 모르는데요."
"네, 그것도 뇌손상의 증상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으로 인식하는 현상이에요. 의학용어로 Capgras delusion이라고 부릅니다."
한석준이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매끄러웠다. 의사의 움직임. 확신이 있는 사람의 움직임. 하지만 그 확신 아래에는 뭔가 계산된 것이 있었다.
"약을 다시 복용해 주세요.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뒤에 유미경이 약을 들고 들어왔다.
"미경씨."
유미경이 멈췄다.
"만약 당신 말이 맞다면... 그게 정말 맞다면?"
유미경이 지현을 봤다. 그 눈에는 뭔가 있었다. 동정심. 아니, 더 깊은 뭔가. 죄책감인가, 두려움인가. 그것도 아니면 공모인가.
유미경의 입이 움직였다. 말을 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지현은 그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봤다. 한석준을 바라보는 눈빛과는 다른, 더 깊은 무언가. 경고. 아니면 절망.
"약을 드시는 게 좋아요."
유미경은 약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고 나갔다. 나가기 전에 지현을 한 번 더 봤다. 그 눈빛에는 죄책감이 아니라 공모의 무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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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찾아왔을 때, 지현은 병실의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
처음으로, 그 얼굴이 낯설었다.
눈이 다르다. 표정이 다르다. 광대뼈의 각도가. 입술의 색이. 모든 것이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자신에게 씌워놓은 것처럼.
혹시 자신도 준호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항상 이런 표정이었는데, 자신만 잊었던 걸까?
지현이 거울 속의 여자에게 손을 들었다. 거울 속의 여자도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 손이 지현의 손과 일치하지 않았다. 거울 속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조금 더 다른 각도였다.
아니다. 그건 불가능했다. 거울은 거울일 뿐이다.
거울 속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지현은 자신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거울 속의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지현이 아니야."
지현이 거울에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났다. 침대까지.
그 순간, 지현의 머리에 파편이 떨어졌다.
검은 차. 운전석의 남자. 그 남자가 거울을 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그 얼굴이 너무나 익숙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이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넌 이미 지현이 아니야. 너는 여기서 지현으로 살아야 해."
그 목소리.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였지?
통증이 밀려왔다. 뒷머리부터. 양쪽 관자놀이까지. 마치 누군가 자신의 뇌를 양손으로 집어짜는 것처럼.
지현이 침대에 앉았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이지현인가?
의료 행정직의 지현인가, 그래픽 디자이너의 지현인가?
준호의 아내인 지현인가, 그 남자의 아내가 아닌 지현인가?
자신이 기억하는 지현인가, 모두가 말하는 지현인가?
그리고 가장 무서운 질문.
자신이 기억을 복원할 때마다 사라지는 것이 과거의 기억일까, 아니면 현재의 '나'일까?
지현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봤다. 피부, 뼈, 근육. 모두 자신의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자신의 것일까.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약이 놓여 있었다.
지현은 약을 집어 들었다. 하얀 약. 작은 알약. 이것을 먹으면 무엇이 바뀔까.
자신의 기억이 돌아올까. 아니면 자신의 의심이 사라질까. 그것이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약을 입에 넣으려는 순간, 병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 사이에, 거울에 비친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봤다.
하지만 자신은 웃고 있지 않았다.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지현의 손에는 약이 없었다.
거울 속의 여자가 손을 들어 보였다. 약을 집어 들고 있는 손. 하지만 그것은 지현의 손이 아니었다.
지현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떨렸다.
거울 속과 거울 밖이 더 이상 일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