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지막 선택
루나는 정령의 영역을 벗어났을 때 이미 선택을 끝내고 있었다.
별을 안고 세 바위의 폐허 안으로 들어온 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루나는 딸의 온기를 느끼며,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마지막 것들을 세고 있었다. 첫 키스의 상대. 어린 시절의 웃음소리. 엄마의 목소리. 이 모든 것이 정령과의 계약마다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루나."
에스터가 손을 내밀었다. 새벽빛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정령 혈통의 증표였다.
"마지막이야. 사랑 정령과의 계약이면 별의 능력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어. 레이언이 못 건드릴 정도로."
루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흐렸다. 기억이 남아있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남아있는 기억을 지키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이었다.
"안 할게."
에스터의 손이 떨어져 내려갔다.
"뭐라고?"
"계약 안 할 거야."
루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런데도 세 바위의 폐허 전체를 흔드는 무게가 있었다. 별이 엄마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딸의 얼굴에는 이미 깨달음이 떠올라 있었다.
"기억을 또 잃을 거라고 생각해?" 에스터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동정이 아닌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레이언이 마을까지 왔어.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집집마다 뒤지고 있어. 시간이 없어, 루나."
"그래도 안 해."
루나가 일어섰다. 별을 내려놓지 않은 채로. 딸의 작은 손이 엄마의 목을 감싸안았다.
"넌 뭘 하려고?" 에스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령의 축복 없이 추적자들과 싸울 거야? 별의 능력을 제어할 방법 없이?"
"몰라."
루나가 폐허의 입구로 향했다.
"정말 모르는 거야?"
"응. 처음엔 별을 지키고 싶어서 계약했어. 그 다음엔 별이 행복하길 바래서 계약했어. 그 다음엔..." 루나가 멈춰 섰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 다음엔 내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계약했어."
에스터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런데 이미 사라졌어. 날 찾아줄 사람이 없으면 계속 사라질 거고." 루나가 천천히 돌아서며 에스터를 바라봤다. "그럼 더 이상 계약할 이유가 없어. 내가 지킬 수 있는 건 기억이야. 별에 대한 사랑만이라도."
"루나, 이건 자살이야."
"아니야."
카엘이 폐허의 그림자에서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어깨 너머로 보이는 마을 쪽에서 횃불의 불빛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엘." 루나가 그를 보며 말했다. "난 너를 기억하지 못해."
카엘의 손이 떨렸다. 칼의 끝이 땅을 긁으며 내려갔다.
"음악회에서 만났다고 했어. 별의 아버지라고도 했고." 루나가 한 발 다가섰다. 별은 엄마의 팔 안에서 조용히 카엘을 바라봤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아직. 하지만 별의 아버지라니까 믿을게."
루나는 잠시 카엘의 얼굴을 더 자세히 살펴봤다. 낯선 남자였지만, 별이 그에게 안겨 있을 때의 편안함은 낯설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 색이 별의 얼굴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함께 별을 지켜줄래?"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꿇었다. 칼을 내려놓고, 루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그 순간, 루나의 눈앞이 밝아졌다.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카엘의 손을 통해 흘러오는 무언가. 별이 아버지의 손에 닿자 은빛이 맺혔다. 그 빛 속에는 수년간 지어온 죄책감과 후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루나가 자신을 용서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별의 아버지로서 함께 있어달라고 청하는 것. 그 청함 속에서 카엘은 마침내 자신을 용서했다.
"고마워." 카엘의 목소리는 부러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해."
폐허 밖에서 레이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령 혈통의 아이를 나보내라! 이 마을의 안전을 위해!"
루나는 카엘의 손을 놓고 별을 안은 채 폐허를 나섰다. 에스터와 카엘도 따라 나왔다. 마을의 광장은 횃불로 밝았다. 귀족 연맹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고, 그 중앙에 레이언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광기로 가득했다.
"아이를 내놔."
루나가 광장의 중심으로 나섰다. 별은 엄마의 팔에서 고개를 들었다. 딸의 눈동자가 은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난 이미 모든 걸 잃었어." 루나의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기억도, 과거도, 내 이름도. 하지만 난 여기 있고, 별은 내 딸이야. 그것만은 확실해. 정령이 주지 않은 것.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
레이언이 한 발 다가섰다.
"저주받은 혼종은—"
"내가 기억을 잃었어도, 내가 별을 사랑한다는 것만은 확실해." 루나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그것이 나야. 루나라는 것을 잊어도, 별의 엄마라는 것은 잊지 않을 거야."
레이언이 칼을 뽑았다. 그의 움직임은 빨랐다. 하지만 루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별을 더 꼭 안았을 뿐이었다.
"넌 뭘 할 건데?" 루나가 물었다. "날 죽일 거야? 아니면 별을?"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선—"
"저주? 난 저주받은 게 아니야. 난 선택했어. 별을 사랑하기로."
루나가 광장의 중심에 섰다. 딸의 작은 손이 엄마의 목에 감겼다. 그 순간, 세 바위 위에서 은빛이 피어올랐다.
정령 실이 나타났다.
그 뒤를 따라 용의 정령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지혜의 정령 현이 나타났다. 세 정령이 루나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그들의 몸은 반투명했고, 빛은 차갑고 순수했다. 레이언의 사람들이 뒷걸음쳤다.
"정령들이 계약자를 보호하네요." 미르 시장의 목소리가 광장 어귀에서 들렸다. 마을의 주민들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그들은 루나 주위의 정령들을 바라보며 한 발씩 앞으로 나섰다.
레이언은 칼을 더 높이 들었다.
"저주를 막기 위해선—"
"달빛골은 과거를 묻지 않는 마을이야." 미르가 말했다. "이 여인은 우리 마을의 일원이고, 그 아이도 우리 마을의 아이야. 그것으로 충분해."
마을 사람들이 더 가까워졌다. 아이들도 있었고,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루나를 둘러싸며 서 있었다. 정령들과 함께.
루나는 별을 더 꼭 안았다. 딸의 손이 엄마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엄마, 난 여기 있어."
"응. 나도 여기 있어. 넌 내 전부고, 나는 너를 위해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정령 실이 루나에게 가까워졌다. 그 손이 루나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 접촉 속에서 무언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아이의 울음소리. 절박한 기도. "제 딸을 살려주세요." 그 목소리가 정령의 손을 잡던 순간. 별이 첫 숨을 쉬던 그 순간이 루나의 몸 속으로 흘러들었다. 기억이 아니라 감정으로. 절망과 사랑이 뒤섞인 그 감정이.
"기억을 잃어도 괜찮아." 실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 같았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넌 기억해. 별을 사랑한다는 것을."
루나의 눈이 흔들렸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절박함. 사랑. 그리고 결심.
용의 정령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의 몸에서 흘러내린 빛이 마을 위에 보호막을 펼쳤다. 지혜의 정령 현은 루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우리는 계약자와 함께할 거야. 영원히."
레이언이 칼을 들었지만, 귀족 연맹의 사람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정령의 힘 앞에서는 인간의 무기가 무의미했다. 그들은 천천히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루나는 별을 안은 채 정령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빛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사랑을 위해 계약했던 그들의 빛을.
"미르 시장." 루나가 말했다.
"응."
"난 과거를 잃었어. 하지만 미래를 원해."
미르가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그래. 달빛골은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미래를 약속해야 하지. 넌 이미 미래를 선택했어. 이 아이와 함께."
정령들의 빛이 더 강해졌다. 그것이 마을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추적자들의 횃불은 그 빛 앞에서 희미해져 갔다. 루나는 별을 안은 채 정령 실에게 다가섰다.
"고마워. 계속 내 옆에 있어줘."
정령 실이 루나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을 놓으며, 나머지 정령들도 천천히 정령의 영역으로 물러났다. 그들의 몸이 반투명해졌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밝게 빛을 내보낸 후, 천천히 사라졌다.
마을의 광장은 새벽빛으로 돌아왔다.
루나와 별은 그곳에 남았다. 카엘과 에스터, 그리고 미르 시장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정령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축복은 남아있었다. 루나의 팔에는 여전히 별의 온기가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
별이 물었다.
루나는 마을 쪽을 바라봤다. 어제와 같은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다를 것 같지 않은 마을, 달빛골이 보였다.
"집으로 가자. 우리 집."
"응."
루나는 별을 안은 채 한 발을 내디뎠다. 카엘이 따라왔다. 그는 루나의 옆에 섰지만, 한 발 물러서 있었다. 루나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느꼈다. 별의 아버지로서의 그의 존재를.
마을로 돌아가는 길, 루나는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슬픈 생각이 아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보다, 남겨진 것들이 더 컸으니까.
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이 자신이었다.
루나가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을의 길은 더욱 명확해졌다. 어제와 같은 집, 어제와 같은 마을, 하지만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루나가 그곳을 걸어가고 있었다.
별은 엄마의 목에 팔을 감고 있었다. 작은 손가락들이 루나의 어깨에 닿았고, 그 접촉만으로도 루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엄마, 우리 이제 정령이랑 계약 안 해도 돼?"
별의 목소리에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계속해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을 봐왔다. 어른처럼 불안해하는 여섯 살 딸의 그 표정이 루나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응. 이제 안 해도 돼."
"정말?"
"응. 엄마가 약속할게."
루나는 별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안은 채로 걸었다. 마을 입구의 상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르 시장이 장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루나를 발견하자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에스터가 루나 곁에 다가왔다. 그 여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안도감이 함께 떠 있었다.
"넌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어?"
"네."
루나의 대답은 간결했다. 에스터는 루나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눈에 여전히 공백이 있었지만, 동시에 명확한 의지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기억을 되찾으려고?"
"모르겠어요. 하지만 계약은 안 할 거예요."
루나는 별을 조금 더 가까이 안았다.
"내가 별을 지키는 방법이 계약만 있는 건 아니니까."
에스터는 한참을 말없이 루나를 바라봤다. 그 침묵 속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정령 혈통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온 사람의 그 침묵. 하지만 그 눈빛은 점차 부드러워졌다. 루나의 선택을 인정하는 것처럼.
"난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넌 정말 강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요. 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그래도 넌 여기 있어. 그리고 이 아이를 안고 있어."
에스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의 최종 선택이었다. 정령 혈통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계약의 길을 포기하고, 루나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카엘이 루나에게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마치 루나가 언제든 자신을 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루나."
그가 불렀다. 루나는 천천히 그를 바라봤다. 낯선 남자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별이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의 안정감은 낯설지 않았다.
"넌 누구야?"
"난 카엘이야. 별의 아버지고."
루나는 카엘을 더 오래 바라봤다. 기억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별의 얼굴에서 그 남자의 눈동자 색이 그대로 보였으니까.
"난 널 기억하지 못해."
"알아."
"하지만 별의 아버지라니까... 함께 별을 지켜줄래?"
카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년간 자신이 지어온 죄책감과 후회가 한 줄기 눈물이 되어 흘렀다. 루나를 버렸던 날. 별을 지킬 수 없었던 그 무력함.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루나가 자신을 용서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별의 아버지로서 함께 있어달라고 청하는 것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응. 평생을."
별이 카엘에게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카엘의 손가락을 감싸며 은은한 빛을 내보냈다. 루나는 그 광경을 바라봤다. 별이 아버지와 손을 잡으며 흘러내리는 그 빛. 그것은 정령의 축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족의 빛이었다.
미르 시장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마을 사람들의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귀족 연맹의 추적자들이 떠났으니, 마을도 다시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루나. 이리 와."
루나는 별을 안은 채 미르를 따라갔다. 마을의 광장 중앙에 도착했을 때, 주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루나는 이들을 모두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호의가 담겨 있었다.
"넌 뭔가 선택했지?"
미르가 루나에게 물었다.
"네?"
"달빛골은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 그게 우리의 법이야."
루나는 미르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미래를 약속한다. 그것은 루나가 지금까지 해온 선택이었다.
"난 별과 함께 여기서 살고 싶어요."
"그래. 그게 미래야."
미르는 루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은 따뜻했다.
"넌 이미 미래를 선택했어. 이 아이와 함께."
루나는 별을 더 꼭 안았다. 딸의 머리가 엄마의 가슴팍에 닿았다. 그곳에서 심장의 고동이 들렸을 것이다.
"엄마, 우리 집에 가?"
"응. 가자."
루나는 별을 안은 채 마을의 뒷길로 향했다. 카엘은 한 발 뒤에서 따라왔다. 에스터도, 미르도 그들을 바라봤다.
마을을 벗어나 야산을 넘어 루나와 별의 작은 집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루나의 몸이 경직되었다. 별이 루나의 팔을 더 꼭 쥐었다.
"엄마."
"응. 엄마가 있어."
말을 탄 기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귀족 연맹의 추적자들이었다. 레이언이 맨 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루나."
레이언이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루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별을 안은 채로.
"내가 여기 있어."
"그 아이를 내놔."
"아니야."
루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별이 루나의 팔 안에서 움직였다. 딸의 눈동자가 서서히 은빛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를 지키려는 본능이었다.
루나는 별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괜찮아. 엄마가 있어."
그리고 레이언을 향해 말했다.
"난 이미 모든 걸 잃었어. 기억도, 과거도, 내 이름도. 하지만 기억이 없어도 별을 사랑한다는 건 변하지 않아. 그 사랑이 나를 만들었어. 그게 내 선택이야."
레이언이 칼을 뽑았다. 기사들도 따라 무기를 준비했다.
"저주받은 혼종을 방치할 수 없어."
루나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주? 난 저주받은 게 아니야. 난 선택했어. 별을 사랑하기로. 그 선택이 나를 만들었어."
그 순간이었다.
마을 쪽에서 은빛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별처럼 작은 빛이었지만,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정령 실이 먼저 나타났다. 그 뒤를 따라 용의 정령이 하늘을 가르며 내려왔다. 지혜의 정령 현도 루나 주위에 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모습이었다.
정령들의 손에 무언가 빛나는 조각들이 들려 있었다. 루나의 기억 조각들이었다. 첫 키스의 순간. 어린 시절 웃음소리. 엄마의 목소리. 별을 낳던 그 날의 절박함. 모두가 은빛으로 변해 정령들의 손 위에서 떠돌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루나가 물었다.
정령 실이 루나에게 가까워졌다.
"우리가 보관하고 있던 거야. 넌 계약할 때마다 기억을 잃었지만,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했어. 약속이니까."
정령들이 손을 펼쳤다. 루나의 기억 조각들이 은빛을 내며 떠올랐다. 그것들이 루나에게로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과 다른 무언가였다.
루나의 몸이 밝아졌다. 별도 함께 빛났다. 그 빛은 정령의 축복이 아니라, 가족의 빛이었다. 엄마와 딸이 함께 내보내는 빛.
레이언이 뒷걸음질쳤다. 귀족 연맹의 기사들도 따라 물러났다. 그들은 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루나는 별을 안은 채 빛 속에 서 있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선택했는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카엘이 루나에게 다가섰다. 그의 손이 루나의 어깨에 닿았다. 별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의 온기가 겹겹이 쌓여 하나가 되었다. 마을에서 올라오는 횃불들도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가족의 완성.
정령들이 천천히 물러났다. 그들의 임무는 끝났다. 루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기억이 없어도, 과거가 없어도, 자신을 지켜줄 사람들이 있었다.
루나는 별을 안은 채 집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카엘이 그 옆에 섰다.
마을의 불빛들이 그들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