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정령들의 빛이 루나를 감싸고 있었다.

루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완전히 잊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정령들이 움직였다.

야산의 어둠 속에서 세 개의 정령이 한 점으로 모여, 그들의 광채가 루나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실의 은은한 자줏빛, 용의 격렬한 주황빛, 현의 맑은 청색빛이 겹쳐지며 만드는 색채는 마치 수채화가 물에 흐르듯 아름다웠다. 루나는 그 빛 속에 서 있었고, 별은 루나의 팔 안에서 작게 숨을 쉬고 있었다.

"우리를 봐, 루나."

실의 목소리였다. 정령의 음성은 언어라기보다 감정의 파동에 가까웠다. 그것이 루나의 피부를 스쳐 지나갔고, 루나의 가슴 한복판에서 울렸다.

"우리는 너를 잊지 않았어. 너의 모든 기억을."

루나는 눈을 떴다. 정령들의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반사되며 헤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려 했지만, 목에서 나오는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물결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감각이었다.

첫 번째 파도.

음악회의 홀. 샹들리에가 걸린 천장 아래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루나는 한 남자를 마주쳤다. 그의 눈이 자신을 찾아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루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이름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현악기의 선율이 귀를 스쳐 지나갔고, 그 음색 위로 그의 얼굴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것은 카엘이었다.

"그건... 내가?"

루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별이 그녀의 팔에서 몸을 일으켜 루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엄마의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괜찮아, 별. 엄마야."

루나의 손이 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별의 손이 루나의 손을 잡았다.

은은한 빛이 흘렀다.

두 번째 파도.

루나가 카엘과 함께 정원을 걷고 있었다. 야밤의 정원에서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루나는 그의 입술을 기억했다. 그것이 자신의 입술과 만나는 순간의 온기를 기억했다. 달빛 아래 온기. 그 키스 속에는 약속이 있었다. 영원함이 있었다. 모든 것이 있었다.

"아, 아아..."

루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령들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세 정령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지켜왔어. 너의 모든 것을."

세 번째 파도.

루나의 어린 시절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자신을 안고 있던 모습. 첫 눈이 소복이 내리던 날 뛰어다니던 자신의 발걸음. 아버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날. 가족에게 버림받던 그 순간도.

하지만 그 다음이 있었다.

별을 처음 안던 날. 별의 눈을 마주하던 순간. 별이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던 그 음성. 그 기억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루나를 이루는 가장 견고한 기둥이었다.

루나는 광장 한복판에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맑고 강했다.

"나는 루나야."

정령들의 빛이 밝아졌다.

"내 딸의 이름은 별이야."

루나의 두 팔이 별을 꼭 안았다. 별은 엄마의 목을 감싸 안았고, 그 순간 별의 몸에서 흘러나온 빛이 모든 것을 바꿔놨다.

별의 정령 능력이 완전히 각성되었다.

여섯 살 아이의 몸에서 나오는 빛은 정령의 축복을 그 이상으로 초월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 정령의 힘을 합친 것보다 더 순수했고, 더 강했다. 루나가 정령과의 계약으로 얻지 못한 것을 별은 타고났던 것이다. 정령의 피라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구나. 루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뒤에서 다가오던 귀족 연맹의 기사들이 멈춰 섰다.

레이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불가능해. 이렇게 어린 아이가... 이런 힘을..."

별의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것이 광장 전체를 밝혔고, 그 빛 속에서 루나는 카엘을 봤다. 그는 루나의 손을 잡으려고 팔을 뻗고 있었다. 루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

음악회의 홀에서 시작된 그 모든 것. 카엘이 자신을 찾아낸 이유. 카엘이 자신을 사랑한 이유. 그리고 루나가 왜 자신의 첫 키스 기억을 정령에게 넘겨야 했는지.

루나는 카엘을 봤다. 그의 눈빛이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을 찾는 눈빛이었다.

"미안해."

루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제 기억했어. 넌 나를 사랑했고... 나도 너를 사랑했어."

카엘이 루나를 향해 한 발 더 나아갔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넌 왜 나를 잊었어?"

카엘의 목소리는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루나는 그 질문의 무게를 느꼈다.

"별을 지켜야 했어. 내 모든 기억이 그 아이에게 위험이 될 수 있었어. 그래서..."

루나의 목이 메었다. 자신이 그를 선택하지 못했던 이유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 깨달았다.

"그래도 넌 나를 찾아줬어. 기억이 없어도 넌 나를 사랑했어."

루나가 카엘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이제 기억했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카엘이 루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별의 빛이 그를 눌러 앉힌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루나를 향한,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모든 것을 향한 깨달음의 무릎이었다.

"미안해, 루나. 정말로 미안해."

카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너를 지켜주지 못해서. 내가 너를 잃게 해서. 내가..."

"괜찮아. 이제 우리가 함께 있으니까."

루나가 카엘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별이 루나의 다른 손을 잡았다.

"우리 셋이 함께 있는 거야?"

별의 목소리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응. 우리 셋이 함께 있는 거야."

루나와 카엘이 별을 중심으로 안았다. 그 순간, 별의 빛이 한 번 더 반짝였다. 마치 축하하는 듯.

귀족 연맹의 기사들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별의 빛 앞에서 그들은 한 발도 더 내려올 수 없었다.

레이언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별의 빛이 그를 눌러 앉혔다.

"불가능해... 이런 일이..."

레이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는 더 이상 루나를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별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공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 순간, 레이언의 표정이 변했다. 공포에서 깨달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깨달음. 정령 혈통을 저주로 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깨달음.

"철수해."

레이언이 중얼거렸다. 귀족 연맹의 기사들이 천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별의 빛은 계속 이어졌다. 별이 루나의 목을 감싸 안았고, 루나는 별의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별. 이제 괜찮아."

정령 실이 루나 곁에 나타났다. 그것은 더 이상 계약의 형태가 아니었다. 친구가 친구 곁에 서는 방식이었다.

"넌 해냈어, 루나."

실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넌 정말로 해냈어. 정령도, 인간도 아닌 모든 것들의 다리가 돼."

에스터가 광장 끝에서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루나, 넌 정령과 인간의 다리가 될 수 있어. 아니, 이미 되었어. 별을 봐. 그 아이가 바로 그 증거야."

루나는 별을 내려놨다. 별의 발이 땅에 닿았고, 별의 손이 루나의 손을 다시 잡았다. 그 순간, 별의 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제는 위협이 아니라 포용이 되어 있었다.

미르 시장이 마을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지만, 그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루나, 넌 미래를 약속했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겠지?"

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하겠습니다."

"그럼 됐어. 달빛골은 넓다. 그리고 여긴 과거를 묻지 않는 곳이야. 넌 여기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어."

루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의 눈물이었다. 드디어 누군가가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었다. 자신의 과거를 묻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겠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엘이 루나의 옆에 섰다. 그의 손이 루나의 등을 감싸 안았고, 루나는 그 온기를 느꼈다. 이것이 바로 기억 속의 온기였다. 음악회의 홀에서 느껴본 그 온기.

"루나, 이제 우리 셋이 함께 살 수 있을까?"

카엘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마치 한 번 더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듯.

루나는 카엘을 봤다. 그리고 별을 봤다. 별은 루나와 카엘을 번갈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루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처음이었다. 정말로 처음이었다. 루나가 의도적으로 웃음 짓는 것. 그것도 완전히 행복한 웃음으로.

"응. 우리 셋이 함께 살자."

루나의 손이 별의 손을 잡았고, 다른 손이 카엘의 손을 잡았다. 세 손이 하나가 되는 순간, 별의 빛이 한 번 더 반짝였다.

그 빛 속에서 루나는 마지막 기억을 되찾았다.

정령 실이 자신에게 속삭이던 말. "계약의 대가로 잃은 기억은 정령의 마음 속에 남아있어. 언젠가는 되찾을 거야. 그리고 그 기억들은 더욱 소중해질 거야."

루나는 정령 실을 봤다. 정령이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모든 기억이 담겨 있었다. 루나가 잃어버린 모든 순간들이.

"고마워, 실."

루나가 속삭였다.

정령 실이 미소를 지었다. 정령이 미소를 짓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축복이자 약속이었다. 루나가 이제 완전하다는 축복.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약속.

광장의 밝기가 서서히 옅어졌다. 정령들의 빛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더 이상 초자연적인 빛이 아니라, 별 아이의 몸 안에 스며드는 빛으로.

별이 루나를 올려다봤다.

"엄마, 이제 우리 집에 가?"

루나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응. 우리 집에 가자."

카엘이 루나의 다른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이 야산의 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정령들이 그들을 따랐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계약자와 정령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루나는 몰랐다.

마을 북쪽의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시선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그 시선은 루나가 잃어버린 기억의 또 다른 조각을 가지고 있었고, 루나와 별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정령들의 축복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실이 남아 있었다.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집 안의 모든 것이 루나에게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집이었고, 자신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비록 기억의 조각들이 사라졌어도, 그것들은 모두 여기, 이 벽 안에 남아 있었다.

별이 루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 이제 우린 행복할 거야?"

루나는 별을 바라봤다. 그 얼굴에서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카엘을 보았다.

"응. 우리 이제 행복할 거야."

카엘이 루나의 옆에 섰다. 그의 손이 루나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마치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말하는 듯.

하지만 루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마을 북쪽, 세 바위 너머에서 또 다른 시선이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루나가 잃어버린 기억의 가장 중요한 조각을 가지고 있었고, 루나와 별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정령 실도 그것을 감지했다. 실의 눈빛이 한순간 흐려졌다. 마치 무언가 불가피한 것을 보는 사람처럼.

루나가 정령 실을 바라봤다.

"실, 뭔가 있어?"

실은 루나의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루나. 아무것도."

하지만 실의 말은 거짓이었다.

마을 북쪽에서, 누군가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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