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엘의 진실
정령의 영역에서 빠져나온 루나는 카엘의 팔에 안겨 있었다. 별은 그의 어깨에 안긴 채 잠들어 있었고, 루나의 눈은 떠 있으나 초점이 맞지 않았다. 현실의 무게가 한꺼번에 몸으로 쏟아졌다. 새벽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세 바위의 폐허 안, 무너진 돌담 곁에 카엘이 루나를 내려놓았다. 루나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별이 자신의 목을 감싸고 있는 작은 손. 그것이 유일하게 현실이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누가 오는 거야?"
루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누가 자신을 찾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안 됐다. 더 무섭게는, 별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카엘은 루나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받쳤다. 그 접촉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넌 내가 누군지 알아?"
카엘이 물었다. 루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이 남자가 누구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렸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감각일 뿐이었다. 따뜻함과 그리움이 섞인, 이름 모를 감정.
"난 너를 알아. 너를 처음 본 날부터."
카엘이 말했다. 루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손이 떨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이것은 갈증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준다는 것, 그 사실 자체가 루나를 흔들고 있었다.
"대도시의 음악회에서 말이야."
카엘이 계속했다. 루나는 그 단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음악회. 자신이 무언가를 연주했다고?
루나는 자신의 손을 펼쳐 봤다. 손가락들이 약초를 만지기에 익숙해 있고, 직물을 짜기에 거칠었다. 이 손이 악기를 만질 수 있었을까. 루나는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여 봤다. 마치 건반을 누르듯이.
그 순간, 손가락 끝에 이상한 감각이 흘렀다. 음악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 따뜻함. 맥박처럼 뛰는 무언가. 루나는 손을 멈추고 카엘을 봤다.
"넌 빛나고 있었어."
카엘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마치 별처럼."
루나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카엘의 말이 자신의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넌 내가 떠나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했어."
카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왜... 떠나가려고 했는데?"
루나가 물었다. 그 질문이 나오자 카엘의 표정이 흔들렸다.
"내가 마법의 피를 가지고 있거든."
카엘이 말했다. 루나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정령의 혈통. 이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아니,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
루나의 몸이 경직되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정령 혈통의 남자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자신과 별에게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루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위험. 추적. 죽음.
"그래서 넌 나를 잊기로 했어."
카엘의 목소리에 오래된 슬픔이 담겨 있었다. 루나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슬픔을 보는 순간, 루나의 가슴이 철렁했다.
첫 키스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루나는 여전히 그 순간의 정확한 형태를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였는지, 어디였는지, 그의 입술이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두 흐릿했다. 하지만 그 감정만큼은 명확했다. 황폐한 가슴 안에 피어나는 따뜻함. 누군가를 그토록 간절히 원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포기했다는 절망감.
루나는 카엘의 손을 잡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왜... 나한테 이런 걸 말해?"
루나가 물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냐하면 넌 다시 나를 잊으려고 하고 있거든. 지혜 정령과의 계약으로."
카엘이 루나의 손을 더욱 조였다.
"그 전에... 넌 알아야 해. 넌 혼자가 아니야. 별도 혼자가 아니야."
그 접촉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정령의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체온 속에서 피어나는,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루나는 그것을 본 적이 있다. 분명히. 하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별이 깨어났다. 아이의 눈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별은 카엘의 목을 감싼 팔을 더욱 조였다.
"아빠."
그 단어가 나왔을 때, 루나는 별을 바라봤다. 딸의 얼굴에는 카엘의 면모가 선명했다. 그 닮음이 이제야 루나의 눈에 들어왔다. 별은 사랑의 결과였다. 누군가와의 계약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결과였다.
루나의 입가에서 웃음이 나왔다. 작고, 약하고, 깨질 것 같은 웃음. 모든 두려움이 그 순간 한 가지로 수렴했다. 별을 지켜야 한다는 것.
"넌 사랑의 결과야. 그게 다야."
루나가 별의 뺨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아이의 피부에 닿은 순간, 은은한 빛이 흘렀다. 루나의 손에서. 아니, 별의 손에서. 아니, 둘 사이의 접촉에서. 그 빛을 보는 순간, 루나는 무언가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와 손을 잡으며 보았던 빛.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흩어졌다.
별이 루나를 바라봤다. 아이의 눈이 진지했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해?"
루나는 말을 잃었다. 그 질문에 대답할 기억이 없었다. 자신의 첫 키스 기억도 없고, 음악회에서의 만남도 없고, 그 남자와 함께 한 날들도 모두 없었다.
있는 것은 이 아이뿐이었다. 그리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형태 없는 감정뿐이었다.
루나는 별을 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치 기억을 붙잡으려 하듯이.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는 계속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난... 모르겠어, 별."
루나가 대답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 순간, 루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 루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카엘은 루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루나는 그것을 알았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눈물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기억하지 못해도. 넌 항상 별 같았어. 빛을 잃지 말아줘."
카엘의 목소리가 루나의 가슴을 관통했다. 루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었다. 기억 속의 감정. 기억을 잃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깊고 아픈 향수.
루나는 카엘을 안았다. 별을 사이에 두고. 아이는 둘의 팔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듯 숨을 고르게 쉬었다.
"미안해. 난 너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는데..."
루나가 중얼거렸다. 밤하늘을 보며. 별들이 흐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나의 눈물이 그들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산 아래 마을 쪽에서 횃불이 올라왔다. 여러 개의 불씨가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루나의 몸이 경직되었다.
카엘도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팔이 루나를 더욱 조였다.
"저들이 누구야?"
루나가 속삭였다.
"귀족 연맹의 추적자들이야. 레이언이라는 남자가 이끌고 있을 거다."
카엘의 대답이 차갑고 명확했다.
"레이언?"
"별을 찾으러 온 사람이야. 정령의 피를 이은 모든 아이를 제거하려는 사람이지."
루나의 호흡이 가빨라졌다. 제거.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했다. 별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별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 딸이야."
루나가 중얼거렸다. 방어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말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래. 별은 그냥 별이야."
카엘이 대답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보지 않아."
카엘이 루나를 이끌었다. 세 바위의 폐허를 벗어나, 마을의 반대쪽 숲으로. 달빛이 희미하게 그들의 길을 비추었다. 루나는 뒤를 돌아봤다. 횃불의 불씨들이 산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천천히. 하지만 멈추지 않고.
"정령들은?"
루나가 물었다.
"이미 떠났어. 정령들은 인간의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어. 특히 저런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가까워질 때는."
카엘이 말했다.
"그럼... 난 어디로 가야 돼?"
루나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정령도 아니고 기억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것은 이 남자뿐이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
"내가 있어."
카엘이 루나를 멈추게 했다. 숲의 한가운데 섰다. 달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루나는 그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첫 키스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무언가를 되찾고 싶은 절실함.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가슴 아픔.
"그리고 한 명 더 있어."
카엘이 말했다.
"누구?"
"에스터야."
루나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몸이 움찔했다. 에스터. 낯선 이름이었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
"정령 혈통을 지키는 사람들의 일원이야."
카엘이 계속했다.
"넌 이미 한 번 만났어.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루나의 눈이 흔들렸다. 정령 혈통을 지키는 사람들. 그것은 무엇인가. 귀족 연맹과는 다른 존재인가.
"날 믿어, 루나."
카엘이 루나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잡았다.
"넌 항상 나를 믿었어.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
루나가 카엘의 눈을 봤다. 그 눈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깊고 검은 죄책감이었다.
"넌... 왜 그래? 왜 자꾸 나를 바꿔?"
루나가 물었다.
"바꾼 게 아니야. 넌 이미 변했어. 내가 떠난 후로."
카엘의 대답이 차분했다.
"난... 너를 남겨두고 떠나야 했어. 그게 너한테 더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정령 혈통의 남자와 함께 있으면, 언젠가 누군가가 너를 찾을 거라고. 그래서 넌 나를 잊기로 했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카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별이 생겼어."
루나의 눈이 커졌다.
"넌 여기서 별을 낳았어. 혼자."
카엘이 말했다.
"그리고 별 때문에 날 기억해야 했어. 하지만 계속 잊었어. 정령들과의 계약으로."
루나는 카엘을 바라봤다. 이 남자가 정말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의 말은 모두 사실처럼 들렸다. 자신의 영혼이 그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루나를 더욱 흔들었다. 자신이 한 선택들이 모두 이 남자 때문이었다는 것.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를 위해 기억을 포기했다는 것.
"왜... 자꾸 나를 잊게 했어? 왜 별이 있는데도?"
루나가 물었다. 그 질문은 카엘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누군가를 포기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넌 별을 지킬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어. 정령들과 계약하고, 기억을 포기하고, 혼자서 별을 키웠어."
카엘이 루나의 손을 잡았다.
"그게 사랑이야. 기억을 포기하는 것도, 자신을 잊는 것도."
루나는 눈물을 흘렸다. 기억 때문이 아니라, 현재 때문에. 이 순간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몰라서.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이 별이 되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산 아래 마을에서 횃불이 더욱 가까워졌다. 루나의 몸이 다시 경직되었다.
"가자."
카엘이 루나의 손을 잡았다. 별을 안은 팔로. 그들은 숲을 빠져나와 마을 방향으로 향했다.
마을의 가장자리에 도착했을 때, 미르 시장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그는 루나를 봤고, 카엘을 봤다. 그리고 별을 봤다.
"그 남자가 누구야?"
미르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경고도 있었다.
"마을의 평온을 지키고 싶으면, 모르는 척 해줘."
카엘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미르는 카엘을 오래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변했다. 처음에는 의심이 있었지만, 이제는 깨달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인식한 것처럼.
"달빛골은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
미르가 천천히 말했다. 횃불을 내렸다.
"넌 뭘 약속하고 있어?"
미르가 루나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무게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질문이었다.
루나는 카엘을 봤다. 카엘은 루나를 봤다. 별은 둘의 팔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별이 행복하게 자라는 거. 그게 내 약속이야."
루나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확고했다.
미르는 오랫동안 루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는 판단이 있었다. 루나가 무엇을 약속했는지, 그것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재는 눈빛.
"좋아. 그럼 이 밤은 마을이 본 게 없는 밤이야."
미르가 말했다. 그것은 단순한 허락이 아니었다. 달빛골 사람들이 루나와 별을 지키기로 한 결정이었다.
루나는 카엘의 손을 잡았다. 별을 안은 채로. 그들은 마을의 뒷길을 통해 북쪽으로 향했다. 정령의 영역과 인간의 세상 사이의 경계로.
밤하늘의 별들이 흐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나의 눈물이 그들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눈물. 기억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눈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절대 잊지 않고 싶다는 절실함의 눈물.
카엘은 루나의 손을 더욱 조였다. 그 접촉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정령의 것이 아닌, 인간의 빛. 사랑의 빛.
산 아래 마을에서 다시 횃불이 올라왔다. 이번에는 더 많았다. 더 빠르게. 더 결연하게. 루나의 몸이 경직되었다.
"저들이 미르를..."
루나가 중얼거렸다.
"아니야. 미르는 약속을 지켰어. 저건 달빛골 사람들이 아니야."
카엘이 말했다.
"귀족 연맹의 추적자들이 더 왔어."
루나는 별을 더욱 조였다. 별은 여전히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용기 정령의 축복이 그토록 깊은가.
카엘과 루나는 마을의 북쪽 끝에 도달했다. 정령의 영역과 인간의 세상이 만나는 경계. 그곳은 물리적으로 명확했다. 마을의 횃불 빛이 미치지 않는 곳. 어둠이 더욱 짙어지는 곳. 그리고 공기 자체가 다른 곳.
카엘과 루나가 한 발을 더 내디디려 할 때, 카엘은 멈추었다.
"에스터가 있어야 할 텐데..."
카엘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어둠을 헤맸다.
"여기야."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루나는 그 방향을 봤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나타났다. 긴 검은 옷을 입은 여인. 그녀의 눈은 루나를 향했다.
"루나. 오랜만이야."
에스터가 말했다.
루나는 그 여인을 봤다. 낯설었다.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 루나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 하듯이.
그 순간,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달빛이 소복하게 내리는 밤. 두 여인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루나와 에스터.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정령의 빛이 아닌, 인간의 빛. 약속의 빛.
"내가 너를 지킬게.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에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현재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그 약속... 기억해?"
루나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무언가가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혼이 기억하고 있었다.
"넌... 누구야?"
루나가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였다. 에스터가 정말 누구인지,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었다.
"난 너를 지키기로 약속한 사람이야."
에스터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카엘이 누구인지, 넌 누구인지 알려줄 사람이야."
에스터가 루나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루나의 눈에 더욱 명확한 기억이 떠올랐다. 음악회의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기억이었다. 에스터와 함께 했던 어떤 약속. 달빛이 내리는 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맹세. 그 약속의 내용은 여전히 흐릿했지만, 그 무게만큼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온 것 같았다.
"가자."
에스터가 루나의 손을 더욱 조였다.
"저들이 곧 여기 도착할 거야."
에스터가 루나를 이끌었다. 카엘과 별을 함께 데리고.
그들이 정령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산 아래에서 올라오던 횃불들이 멈추었다. 인간의 세상과 정령의 영역 사이의 경계에서.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루나는 뒤를 돌아봤다. 횃불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달빛골이 있었다. 자신이 별을 낳고 키웠던 곳.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했던 곳. 자신이 기억을 포기했던 곳.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지키기로 약속한 곳.
"우리 가자."
에스터가 루나의 손을 더욱 조였다.
"넌 이제 알아야 해. 넌 누구인지. 그리고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
루나는 카엘을 봤다. 카엘은 루나를 봤다. 별은 둘의 팔 안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정령의 영역 깊숙한 곳으로, 그들은 한 발씩 내디뎠다. 횃불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기억이 닿지 않는 곳으로.
에스터의 입이 열렸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멈춰!"
추적자의 목소리였다. 절박하고, 결연했다. 루나는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카엘이 그녀의 손을 더욱 조였다.
"돌아보지 마."
카엘이 속삭였다.
"넌 이미 선택했어."
루나는 카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뒤에서 다가오는 발소리. 횃불의 불씨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경계에서 멈추는 소리.
어둠 속으로 한 발. 또 한 발.
루나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기억이 아니라, 현재를. 누군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을.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기억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에스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넌 이제..."
하지만 그 말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