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밤 열두 시 반, 시온이 횃불을 들고 수선실의 문을 걷어찬다.
목재가 부서지는 소리. 라나는 일어나지 않는다. 투명해진 몸을 일으킬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미르가 시온 앞으로 나간다. 카일도. 그들의 어깨가 나란히 선다.
"물러서."
시온의 목소리는 차다. 숲 사냥꾼의 목소리다.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처럼 단호하다.
"이 여우는 마을을 망치고 있어. 사람들을 약하게 만들고 있어. 자기 상처와 마주하게 한다고? 그건 치유가 아니라 독이야. 사람은 강해져야 한다. 상처 따윈 묻어두고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시온의 추종자들이 횃불을 더 가까이 가져온다. 불빛이 벽을 핥는다. 잠깐, 벽에 그림자가 생긴다. 라나의 그림자. 하지만 라나는 투명하다. 그림자는 미르와 카일의 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올리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손에는 수첩이 들려있다.
"마을이 약해진 게 아니라, 마을이 제 얼굴을 보기 시작했어요."
시온이 올리버를 향해 돈다.
"토끼 손님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 후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떠나기 전에 자신의 딸한테 편지를 남겼어요. 딸이 자신처럼 같은 실수를 하지 말라고. 목수의 아내는 자신이 왜 남편과 싸웠는지 알게 됐어요. 그리고 남편에게 처음으로 진짜 말했어요. 강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이 약해진 게 아니라—"
"그들이 떠났잖아!"
시온의 목소리가 폭발한다. 횃불이 더 높이 들린다.
"마을의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어. 그게 치유라고? 그게 구원이라고? 이건 저주야. 이 여우의 손길이 닿은 모든 게 무너지고 있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노엘이 앞으로 나간다.
작은 몸이다. 열 살 아이의 몸. 시온 앞에 선다.
"제 엄마도 떠났어요."
노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는다.
"처음엔 제가 라나 언니를 미워했어요. 엄마를 빼앗아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엄마를 빼앗아간 게 아니었어요."
라나의 투명한 눈이 노엘을 본다. 올리버가 수첩에 펜을 들이댄다. 기록한다. 이 순간을 기록한다.
"제 엄마는 라나 언니 때문에 떠난 게 아니라, 자기 때문에 떠났어요. 자신의 상처를 본 후에. 그리고 그건..."
노엘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하지만 분명하다.
"나쁜 게 아니었어요."
시온이 한 발 내딛는다. 횃불이 노엘의 얼굴을 비춘다. 라나의 투명한 손이 움직인다. 하지만 닿지 못한다. 손가락이 빛처럼 흐릿하다.
미르가 노엘 앞을 막는다.
"라나는 사람들을 빼앗아간 게 아니야. 사람들에게 선택을 돌려줬어. 자신의 상처와 마주할지, 계속 외면할지. 자신의 삶을 바꿀지, 같은 길을 걸을지. 그게 약함이라고? 그게 저주라고?"
시온이 미르를 향해 한 발 더 내딛는다. 카일이 미르의 옆에 선다.
"당신은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상처를 외면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왜? 그게 당신에겐 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편하기 때문이에요."
카일의 말은 길지 않지만 정확하다.
"라나가 대장간 화재 때 저를 구했다고 했죠. 그건 거짓이에요."
라나의 투명한 눈이 깜빡인다. 기억에 없다. 카일은 계속한다.
"라나는 저를 구하지 않았어요. 저는 제 자신을 구했어요. 라나는 다만... 그 과정을 지켜봤어요. 제가 쓰러진 후에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카일이 라나를 향해 돈다. 투명한 얼굴을 본다.
"당신이 저한테 준 건 구원이 아니라, 시간이었어요. 제 상처와 마주할 시간."
시온이 횃불을 높이 든다.
"그만해. 이 여우의 수선실을 폐쇄해. 아니면 당신의 손을 포기해."
침묵이 떨어진다. 불빛만 흔들린다. 라나는 일어난다. 투명한 몸이 천천히 일어난다. 미르도 카일도 막지 않는다. 노엘만 라나의 투명한 손을 잡으려 한다. 손가락이 통과한다. 하지만 노엘은 손을 놓지 않는다.
라나가 걸어간다. 불타는 수선실의 한구석으로. 거울이 있는 곳으로.
거울은 반쯤 탔다. 가장자리는 검게 그을렸지만, 중앙은 여전히 빛을 반사한다. 라나가 거울 앞에 선다. 자신을 본다.
투명하다. 완전히 투명하다. 거울 속에 라나는 없다. 대신 수선실의 벽이 보인다. 불타는 벽. 재가 되어가는 목재. 라나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내 손이..."
라나의 목소리는 공기처럼 희미하다.
"누군가를 상처냈나요?"
올리버가 수첩을 펼친다.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긴다. 페이지마다 이름이 적혀있다. 토끼. 젊은 여자. 목수의 아내. 상인의 아들. 할머니. 아이. 그리고 더.
"라나는 누군가를 빼앗아갔나요?"
올리버가 읽는다.
"토끼는 떠났지만, 자신의 딸과 처음으로 진짜 대화했어요."
올리버가 읽는다.
"젊은 여자는 집을 떠났지만,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게 됐어요."
올리버가 읽는다.
"목수의 아내는 마을을 떠났지만, 남편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어요. 그리고 남편은 처음으로 아내의 말을 들었어요."
거울 속에서 라나의 모습이 아직 없다. 하지만 거울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모인다. 올리버의 기록이 불어난다. 페이지가 쌓인다. 이야기가 쌓인다. 사람들이 쌓인다.
라나가 손을 들어올린다. 투명한 손. 거울 위에 놓는다.
손가락이 거울을 통과하지 않는다. 거울이 반사한다. 투명한 손의 형태를 반사한다. 거울 속에서 처음으로 라나의 일부가 보인다. 손의 윤곽. 가늘고 긴 손가락. 재봉바늘 자국이 있는 지문.
시온이 한 걸음 더 내딛는다.
"당신의 선택은?"
라나가 거울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요?"
라나의 중얼거림. 시온이 멈춘다.
"내 손이 뭔가요? 내가 뭔가요? 내 기억이 뭔가요?"
라나가 거울을 들어올린다. 깨어지지 않은 중앙 부분. 거울이 불빛을 반사한다. 라나의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지만, 거울은 밝다. 밝게 빛난다.
"나는 내 손으로 정의되지 않아요."
라나가 돈다. 시온을 향해 거울을 들고 돈다.
"내 기억으로도 정의되지 않아요."
라나가 한 발 내딛는다. 투명한 몸이 불빛 속으로 걸어간다.
"나는 그들 속에 있어요."
올리버의 수첩이 라나를 비춘다. 기록된 이야기들이 라나를 비춘다.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의 선택 속에. 그들이 나를 기억하는 동안, 나는 사라지지 않아요."
라나가 거울을 들고 시온을 향해 간다.
시온이 물러난다.
"당신이 뭐든 말해도 좋아요. 내 수선실을 폐쇄하고 싶으면 폐쇄하세요. 내 손을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하세요. 하지만 나는 이미 사라졌어요. 그래서 이제 난 자유예요."
라나의 투명한 눈이 시온을 본다. 눈이 없는데도 본다. 보는 것 같은 압박감이 시온을 누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요. 그래서 난 누구든 될 수 있어요."
거울이 떨어진다. 라나의 손에서. 거울은 바닥에 떨어진다. 깨지지 않는다. 단지 기울어진다. 기울어진 거울이 불빛과 올리버의 수첩과 미르와 카일과 노엘을 반사한다.
라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투명하지 않다.
거울 속에서 라나는 모두의 기억 속에 있다. 토끼의 기억 속에. 젊은 여자의 기억 속에. 올리버의 수첩 속에. 미르의 눈 속에. 카일의 손 속에. 노엘의 마음 속에.
거울 속에서 라나는 선명하다.
시온이 횃불을 내린다.
"당신이 뭐든."
시온이 뒤돌아 나간다. 추종자들도 따라간다. 불빛이 수선실을 떠난다. 어둠이 남는다. 그리고 올리버의 수첩이 남는다.
올리버가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펜을 들이댄다.
'가을의 밤, 라나는 투명해졌다. 하지만 투명함 속에서 라나는 가장 선명해졌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선택 속에서. 타인의 손길 속에서.'
올리버가 펜을 멈춘다.
'라나는 누구인가? 라나는 자신을 고친 사람들이다.'
미르가 라나의 투명한 손을 잡는다. 손가락이 통과하지 않는다. 라나가 미르를 본다. 라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거울 속에서만 라나는 라나다.
"당신은 우리 안에 있어요."
미르가 중얼거린다.
"당신이 우리를 고쳤으니까."
카일이 거울을 들어올린다. 거울 속에서 라나의 모습이 더 선명해진다. 모두의 손길이 거울을 들고 있다. 모두의 기억이 거울을 밝힌다.
노엘이 라나의 옆에 선다.
"라나 언니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제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노엘이 말한다.
"제 엄마는 라나 언니 때문에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제 엄마는 매일 밤 편지를 써요. 제게. 제 아빠에게. 라나 언니한테도."
노엘이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낸다. 여러 장. 모두 같은 필체로 쓰여있다.
"엄마는 말해요. 라나 언니는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제 엄마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라나가 편지를 본다. 투명한 눈으로 본다. 거울 속에서 라나의 눈이 촉촉해진다.
"그럼... 난 누구예요?"
라나가 묻는다.
올리버가 수첩을 든다.
"당신은 기록이에요."
올리버가 말한다.
"모든 사람들 안에 기록된 누군가예요. 그리고 기록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언어로 쓰이고, 행동으로 증명되고, 기억으로 남아요."
올리버가 수첩을 더 높이 든다. 불타는 수선실의 재 위에서 수첩이 빛난다.
"당신이 투명해져도, 당신은 여기 있어요. 여기. 그리고 여기."
올리버가 수첩을 가슴에 안긴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곳에."
라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서 라나를 본다. 투명한 몸. 하지만 거울 속에서 라나는 밝다. 모두의 손길로 만들어진 밝음.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라나. 이제 라나는 자신의 손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타인의 손길로 정의된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라나.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라나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라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수선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벽은 계속 타 내려간다. 하지만 불 속에서 거울이 반사한다. 거울 속에서 라나가 반사한다. 모두의 손길 속에서 라나가 반사한다.
올리버가 마지막 문장을 쓴다.
'가을이 끝나간다. 겨울이 온다. 라나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라나는 남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펜이 멈춘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가 닫힌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한다. 다음 계절에 라나가 누구일지. 라나 자신도.
# 마지막 선택
거울 속에서 라나를 본다. 투명한 몸. 하지만 거울 속에서 라나는 밝다.
시온이 횃불을 내린다.
"당신이 뭐든."
시온이 뒤돌아 나간다. 추종자들도 따라간다. 불빛이 수선실을 떠난다. 어둠이 남는다. 올리버의 수첩만 여전히 펼쳐져 있다.
올리버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 펜을 들이댄다.
'가을의 밤, 라나는 투명해졌다. 하지만 투명함 속에서 라나는 가장 선명해졌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선택 속에서. 타인의 손길 속에서.'
펜을 멈추고 올리버는 미르를 본다. 미르가 라나의 투명한 손을 잡는다. 손가락이 손가락 사이를 통과하지 않는다. 무언가 그곳에 있다. 라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만 존재한다.
"당신은 우리 안에 있어요."
미르가 중얼거린다.
"당신이 우리를 고쳤으니까."
카일이 거울을 들어올린다. 거울 속에서 라나의 모습이 더 선명해진다. 모두의 손길이 거울을 들고 있다. 불타는 벽 너머로 거울이 반사한다.
노엘이 라나의 옆에 선다. 어린 얼굴이 울음을 참고 있다. 입술이 떨린다.
"라나 언니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제 엄마한테 물어보세요."
노엘이 목소리를 낸다.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
"제 엄마는 라나 언니 때문에 집을 떠났어요."
노엘이 멈춘다. 라나를 본다.
"하지만 제 엄마는 매일 밤 편지를 써요. 제게. 제 아빠에게. 라나 언니한테도."
노엘이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낸다. 여러 장. 모두 같은 필체로 쓰여있다. 봉투에는 '라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엄마는 편지에서 말해요. 라나 언니는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제 엄마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고."
노엘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눈물이 흘러내린다.
"처음에 저는 엄마가 라나 언니 때문에 떠났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를 빼앗아갔다고. 하지만 아니었어요. 엄마는 라나 언니를 만나서, 자신의 상처를 봤어요. 그리고 그 상처와 마주하기로 선택했어요. 라나 언니가 강요한 게 아니라, 엄마 스스로."
노엘이 라나의 투명한 손을 두 손으로 잡는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통과하지 않는다. 뭔가 그곳에 있다.
"제가 잘못했어요. 라나 언니에게 엄마를 돌려달라고 했던 것. 엄마를 돌려줄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자신을 선택하게 해준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건 나쁜 게 아니었어요."
라나가 편지를 본다. 투명한 눈으로. 거울 속에서 라나의 눈이 촉촉해진다.
"그럼... 난 누구예요?"
라나가 묻는다. 목소리가 가늘다. 마치 바람처럼 들린다.
올리버가 수첩을 들어올린다. 불타는 수선실의 재 위에서 수첩이 반사한다.
"당신은 기록이에요."
올리버가 말한다. 말투가 처음과는 다르다. 더 이상 정보 수집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 안에 기록된 누군가예요. 그리고 기록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언어로 쓰이고, 행동으로 증명되고, 기억으로 남아요."
올리버가 수첩을 더 높이 든다. 페이지가 넘어간다. 토끼. 젊은 여자. 목수의 아내. 모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모두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모두의 라나와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당신이 투명해져도, 당신은 여기 있어요. 여기. 그리고 여기."
올리버가 수첩을 가슴에 안긴다. 불빛이 수첩을 비춘다. 글씨가 선명해진다.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곳에."
미르가 라나의 다른 손을 잡는다. 카일이 거울을 더 높이 든다. 노엘이 라나의 옆에 몸을 기댄다. 올리버가 수첩을 펼친다.
라나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거울 속에서 라나를 본다. 투명한 몸. 하지만 거울 속에서 라나는 밝다. 모두의 손길로 만들어진 밝음.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라나. 이제 라나는 자신의 손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타인의 손길로 정의된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라나.
그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라나는 여전히 모른다.
하지만 라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수선실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벽이 계속 타 내려간다. 창틀이 검게 그을린다. 목재가 부서진다. 하지만 불 속에서 거울이 반사한다. 거울 속에서 라나가 반사한다. 모두의 손길 속에서 라나가 반사한다.
올리버가 마지막 문장을 쓴다. 펜이 종이에 스친다. 글자가 새겨진다.
'가을이 끝나간다. 겨울이 온다. 라나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라나는 남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펜이 멈춘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가 닫힌다.
불이 더 세져진다. 추종자들이 다시 돌아온다. 시온이 앞장선다. 횃불이 높아진다. 시온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것을 끝내야 한다."
시온이 말한다.
"당신의 수선실을 폐쇄하거나. 아니면 당신의 손을 포기하세요."
최후통첩이다. 라나를 향한 마지막 선택지.
라나는 손을 본다. 투명한 손. 여전히 떨린다. 아니, 처음부터 떨리고 있었다. 1화에서 토끼 손님에게 옷을 건네줄 때처럼. 그 때와 같은 떨림. 자신의 손을 의식하는 떨림.
라나가 거울을 든다.
올리버의 손에서 거울을 빼앗아 든다. 거울 속에는 자신을 완전히 못 알아보는 얼굴이 있다. 눈이 있지만 색깔이 없다. 입이 있지만 감정이 없다. 얼굴이 있지만 사람이 없다.
"그럼 내가 누구인가요?"
라나가 중얼거린다.
거울을 들고 있는 손이 더 투명해진다. 손가락이 하나씩 사라진다. 하지만 거울을 놓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요?"
라나가 다시 묻는다. 이번엔 더 크게. 마치 누군가에게 묻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시온이 한 발 더 나간다. 횃불이 라나의 얼굴을 비춘다.
"당신은 아무도 아니다."
시온이 말한다.
"당신은 사라져야 한다."
라나의 손이 거울을 높이 든다. 거울 속에는 모두가 있다. 미르, 카일, 노엘, 올리버. 모두 라나를 보고 있다. 모두 라나의 손을 잡고 있다. 모두 라나를 기억하고 있다.
거울이 반사한다.
시온의 횃불이 거울에 반사한다. 불빛이 흩어진다. 불빛이 모두에게 닿는다. 모두의 얼굴이 밝아진다.
"내가 누구인지는..."
라나가 말한다.
"내가 정하는 게 아니에요."
라나가 거울을 내린다. 거울 속에서 라나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다른 누군가가 정하는 거예요."
미르가 거울을 함께 들어올린다.
카일이 거울을 함께 들어올린다.
노엘이 거울을 함께 들어올린다.
올리버가 거울을 함께 들어올린다.
거울이 하늘을 향한다. 거울이 불을 향한다. 거울이 시온을 향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너희가 기억하는 나예요."
라나가 말한다.
시온이 거울을 보려 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것은 자신의 횃불뿐이다. 자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거울에는 라나가 가득 차 있다. 타인의 기억으로 채워진 라나가.
시온이 횃불을 내린다.
"이건 끝이 아니다."
시온이 말한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시온이 돌아서 나간다. 추종자들도 따라간다. 하지만 이번엔 횃불을 들지 않는다. 불은 수선실에만 남는다.
불은 계속 탄다.
수선실의 벽이 무너진다. 천장이 떨어진다. 하지만 거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거울 속에서 라나는 계속 존재한다. 투명하지만, 존재한다.
올리버가 수첩을 다시 펼친다.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는다.
'라나는 누구인가? 라나는 자신을 고친 사람들이다.'
그리고 올리버는 이 문장 아래에 새로운 문장을 쓴다.
'그리고 라나는 자신을 고친 사람들에게 고쳐진다.'
펜을 놓는다.
겨울이 온다.
라나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봄의 손님들을 잊고, 여름의 만남을 잊고, 가을의 이름도 잊을 것이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라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을 것이다.
하지만 라나는 남을 것이다.
타인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손길 속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는 곳에서.
거울 속에서 라나가 미소한다. 투명한 얼굴이 미소한다. 누구의 미소인지는 알 수 없다. 라나의 미소인지, 아니면 모두의 미소인지.
불이 모든 것을 태운다.
하지만 거울은 반사한다.
그리고 거울 속에서 라나는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