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밤 11시 52분. 기숙사 옥상 난간에서 내려온 지 2분.

도연의 손가락이 여전히 반투명했다. 팔뚝에서 어깨까지 이어진 흐릿함은 물속에 잠긴 팔처럼 보였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목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거울 속에는 머리와 몸통만 떠 있었다. 도연이 거울을 내려다보다가 등 뒤의 발자국 소리에 몸을 굳혔다.

"너 어디 가는 거야?"

박세진이었다. 노트를 들고 있었다. 항상 들고 다니던 검은색 노트. 도연은 천천히 돌아섰다.

"욕실 다녀오는 길."

거짓말이 입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거짓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거짓말이 도연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박세진이 한 발 다가섰다. 야간 조명 아래에서 그의 눈이 반짝였다. 관찰자의 눈. 기록자의 눈.

"입시 이후로 널 봤어?"

"응."

"응? 진짜? 넌 검술도 못 하던데 왜 시험에서 통과했어?"

도연의 호흡이 얕아졌다.

박세진이 노트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날짜, 시간, 상황, 도연의 변화. 입시 전후로 도연이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손가락 끝의 투명함. 눈빛의 변화. 말투의 미묘한 차이. 심지어 도연이 친구들과 있을 때 누군가 도연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법도 다루고 있잖아. 지난주 보물고에서 본 그 마법은?"

"그건..."

"그건 뭐?"

박세진이 한 발 더 다가섰다. 도연은 벽에 등을 기댔다. 기숙사 복도의 벽. 차가운 돌 위에서 도연의 반투명한 어깨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난 모르겠어."

진실이었다. 도연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표정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도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박세진이 노트를 더 가까이 들었다. 손가락이 페이지를 짚으면서 도연의 손가락이 투명해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기록되는 순간마다 도연이 지워져 나갔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정상적인 현상의 중심이 넌 거야. 입시 이후 여러 명이 갑자기 능력을 드러냈어. 검술, 마법, 신체 강화... 다 따로따로 일어난 게 아니야. 넌 그걸 알고 있지?"

박세진의 말 한 마디씩이 도연을 더 빠르게 지워나갔다. 인식. 기억. 관찰. 그 모든 것이 도연을 소비했다.

"난 다만 살고 싶은 거야."

"살고 싶은 거? 넌 지금 죽어가고 있잖아."

박세진의 말이 맞았다. 도연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사라지고 있었다. 그 둘이 같은 건지 다른 건지도 도연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복도 끝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도연은 박세진을 피해 반대쪽으로 몸을 날렸다. 슬리퍼가 바닥에서 떨어졌다. 도연은 맨발로 복도를 뛰었다. 반투명한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다.

"잠깐, 어디 가!"

박세진이 뒤따라왔다. 노트를 들고.

도연은 계단을 내려갔다. 1층인지 2층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기억이 흐릿했다. 이 건물의 구조를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낯설었다. 투명한 팔이 손잡이를 잡으려 했지만 손가락이 제대로 붙잡을 수 없었다. 물질이 물질을 붙잡지 못하는 것처럼.

기숙사 로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도연을 막아섰다. 이한나였다.

"도연!"

이한나의 눈이 도연의 반투명한 몸을 보며 커졌다.

"뭐... 뭐야? 넌 뭐하는 거야?"

이한나가 도연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도연은 손을 피했다. 피해야 했다. 누군가 자신을 붙잡을수록 도연은 더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가오지 마."

"뭐하는 소리야? 난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왜..."

"난 도움이 필요 없어."

도연의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도연의 입으로 말하고 있었다. 도연은 자신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말이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도연은 로비를 빠져나갔다. 밤의 아카데미 마당은 고요했다. 달빛이 도연의 반투명한 팔을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가 아니라 반사광. 도연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었다. 반투명한 유령이었다.

"도연!"

박세진이 로비에서 나왔다. 이한나도 뒤따라 나왔다. 둘 다 도연을 찾고 있었다. 찾고 있다는 것은 도연이 아직 존재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도연이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도연을 기억하려는 노력인가?

도연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도서관은 닫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도연은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갔다. 반투명한 몸은 창문의 틈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도서관 내부는 어두웠다. 책들의 냄새가 도연을 감싸고 있었다. 도연은 가장 깊숙한 선반 사이에 웅크렸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거야. 여기서는 아무도 날 부르지 않을 거야. 여기서는 내가 계속 존재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도서관 입구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최준영이었다.

최준영이 도서관 내부를 천천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밤 12시 반이 넘은 시간에. 도서관이 닫혀 있는 시간에. 최준영은 도연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걸어 다니고 있었다.

선반 사이에서 도연은 숨을 참았다. 반투명한 가슴이 숨을 멈췄다.

최준영이 도연의 숨겨진 자리에 도달했다. 선반을 사이에 두고 도연과 마주봤다.

"넌 뭔가 다르지?"

최준영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차갑지만 흥미로웠다.

"주인공들처럼."

도연의 심장이 멈췄다. 주인공들처럼. 그 말은 도연이 더 이상 조연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도연이 두려워했던 바로 그것. 도연이 절대로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것.

최준영이 선반을 밀쳤다. 책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연 앞에 서 있는 최준영의 눈은 도연을 '도전자'로 보고 있었다. 조연이 아니라. 배경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무대 위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세 번째를 써 봤어?"

최준영이 물었다. 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 안 썼구나. 그럼 이제 써야지."

최준영이 한 발 다가섰다. 도연은 선반에 등을 기댔다. 책이 도연의 반투명한 등을 통과했다. 물질이 물질을 통과했다.

"세 번째를 쓰는 순간, 넌 주인공이 돼. 그리고 나와 같은 무대에 서게 돼. 그게 싫으면 지금 나한테 무릎을 꿇어."

도연의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해지고 있었다. 투명해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박세진의 관찰, 이한나의 진심, 최준영의 인식. 모든 것이 도연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도연이 입을 열려 했을 때, 누군가 도서관 문을 밀었다.

류현우였다.

류현우가 도연과 최준영 사이에 서 있었다. 밤 12시 45분. 류현우의 눈은 도연을 보고 있었다. 천장의 빔에서 내려온 듯 그의 옷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세 번째를 쓰지 마."

류현우가 말했다.

"한 번 더 쓰면 넌 완전히 사라져."

도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지금 도연이 느끼는 이 소실감, 이 공포감, 이 존재의 희미함은?

"아직도 돌아올 수 있어. 세 번째 전까지는."

류현우가 도연의 손을 잡았다. 반투명한 손. 류현우의 손에 도연의 손가락이 닿으면서, 도연은 느꼈다.

자신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박세진이 도서관 입구에 나타났을 때, 도연은 이미 류현우의 손을 놓고 있었다. 최준영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도서관은 다시 어둠으로 물들었다. 박세진의 손에는 노트가 들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넌 정말 뭐야?"

박세진이 묻지 않았다. 박세진이 선언했다.

도연은 선반 사이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반투명한 팔이 책을 밀었다. 책은 그대로 떨어졌다. 중력이 도연을 잡아당기지 않는 것처럼, 도연의 손가락도 세상을 붙잡을 수 없었다.

"입시에서 검술 강화를 썼어. 마법 수업에서 마법 감응을 썼어. 그리고 지금 최준영이 너한테 세 번째를 강요하려고 했어."

박세진이 노트를 펼쳤다. 페이지마다 도연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었다. 입학식 때의 도연. 입시 이후의 도연. 마법 수업 이후의 도연. 그리고 지금의 도연.

"이건 뭐야? 이 변화는?"

박세진의 질문은 추궁이 아니었다. 관찰의 결과였다. 박세진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박세진이 원하는 것은 도연의 고백이었다.

"모르겠어요."

도연이 대답했다. 도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렸다는 것은 도연이 아직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목소리 없는 유령은 두려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세진이 한 발 다가섰다. 노트의 페이지를 도연 앞에 들었다.

"여기 봐. 입시 전후로 학생들의 도연에 대한 기억이 변했어."

박세진이 구체적인 사례를 보여줬다.

"김준호는 도연이 자신의 검술 제자라고 생각하고 있어. 근데 넌 입시 전에 검술을 못 했어. 이한나와 카페에서 만났을 때 그 기억이 없다고 했어. 서혜진은 도연과의 추억을 아예 다르게 기억하고 있어."

박세진이 노트의 한 페이지를 더 넘겼다.

"지난주에 직접 확인했어. 서혜진에게 '도연이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거든. 서혜진은 '초콜릿'이라고 했는데, 도연은 '딸기'라고 했지. 그 기억이 완전히 다르게 각인되어 있어."

박세진의 목소리에 이상한 온기가 깃들었다. 친구의 비밀을 폭로하는 순간의 슬픔, 혹은 죄책감.

"넌 점점 사라지고 있어. 그리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

박세진이 도연의 손을 집었다. 손가락이 투명했다. 박세진의 손가락이 도연의 손을 통과했다. 그 순간, 박세진의 표정이 변했다. 지식에서 현실로의 전환. 추상에서 구체로의 충격.

"이게 뭐야?"

박세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에는 박세진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가 물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한 순간의 공포.

"미안해요."

도연이 말했다. 도연의 말은 진심이었다. 도연은 박세진에게 미안했다. 박세진이 도연을 관찰하게 만든 것도, 박세진이 도연의 비밀을 알게 된 것도, 지금 박세진이 공포를 느끼게 된 것도 모두 도연 때문이었다.

"미안하다고? 넌 지금 뭔가 말해야 할 거 있지?"

박세진이 도연의 팔을 잡았다. 손가락이 통과했지만, 박세진은 놓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정상적인 현상의 중심이 바로 넌 거야. 주인공들의 버프. 그들의 성장. 그들의 운명. 모든 게 넌 중심이야."

박세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제는 추궁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그리고 넌 더 이상 조연이 아니야."

도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이 두려워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조연이 아니라는 것. 배경이 아니라는 것.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것.

"넌 주인공들 사이의 주인공이야. 넌 그들을 움직이고, 그들을 성장시키고, 그들의 운명을 결정해."

박세진이 노트를 들었다.

"그래서 내가 물어. 넌 정말 뭐야? 도연이 맞아?"

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도연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손가락이 투명해지면서, 도연의 정체도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박세진."

누군가 도서관 입구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한나였다. 이한나의 옷자락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한나가 뛰어온 것이었다.

"도연을 놔. 도연은 내 친구야."

이한나가 도연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박세진은 한쪽, 이한나는 다른 쪽. 도연은 둘 사이에서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한나, 넌 모르는 거야. 도연이 뭔지—"

"상관없어."

이한나가 박세진을 끊었다.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다.

"뭐든 상관없어. 도연은 도연이야. 그게 다야."

도연의 눈이 따뜻해졌다. 따뜻한 감정이 도연을 흘렀다. 하지만 동시에, 도연의 손가락이 더 투명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붙잡을수록, 도연은 더 빨리 사라진다. 버프를 받을 때마다 도연이 지워진다면, 사랑받을 때마다 도연이 지워지는 건가?

도연은 이한나의 손을 느꼈다. 따뜻한 손. 하지만 도연의 손은 이미 반투명했다. 이한나의 손가락이 도연의 손을 통과했다.

"가자. 우리 방으로."

이한나가 도연을 끌었다. 박세진은 도연의 팔을 놓지 않았다.

"안 돼. 도연이 세 번째를 쓰기 전에 모든 걸 말해야 돼. 아카데미 전체가 위험해."

"도연이 위험한 게 아니야. 도연은 착해. 도연은 좋은 애야."

이한나의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었다.

"내가 알아. 내가 제일 잘 알아."

도연은 둘의 논쟁 속에서 천천히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손목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팔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이한나의 손이 도연의 손을 완전히 통과하기 시작했다.

"멈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의 목소리였다. 차갑고 명확한 목소리.

서혜진이 도서관에 나타났다. 서혜진의 손에는 마법이 모여 있었다. 푸른 빛이 도서관을 밝혔다.

"아무도 도연을 건드리지 마."

서혜진의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서혜진, 넌 뭐 하는 거야?"

박세진이 물었다.

"도연을 지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서혜진의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도연을 가장 깊이 상처 입혔다. 도연이 서혜진을 거절했는데, 서혜진은 여전히 도연을 지키고 있었다.

"서혜진..."

도연이 중얼거렸다. 도연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도연은 서혜진의 마법을 거절해야 했다. 서혜진의 보호를 거절해야 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때마다 도연은 더 빨리 사라진다. 도연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도연은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마법이 폭발했다. 아니, 마법이 방출된 것이었다. 서혜진의 마법이 도서관 전체를 덮었다. 책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선반이 흔들렸다.

그리고 도연의 투명한 팔이 다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박세진이 외쳤다.

서혜진의 마법이 도연을 감싸고 있었다. 마법이 도연을 보호하고 있었다. 도연의 투명한 부분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도연을 내가 볼게. 넌 상관하지 마."

서혜진이 말했다.

"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넌 사라지면 안 돼."

도연의 팔이 완전히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도연의 내부는 여전히 투명했다. 껍데기만 도연이 되돌아온 것이었다. 도연은 서혜진의 마법 속에 갇혔다. 보호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도연을 더욱 옭아맸다.

도서관 문이 또 열렸다. 이번에는 김준호였다. 김준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아니, 검술 에너지가 모여 있었다.

"서혜진, 뭐 하는 거야? 왜 도연이—"

김준호가 멈췄다. 김준호의 눈이 도연을 마주쳤다. 그 순간, 김준호의 표정이 굳었다.

"도연이... 투명했어?"

김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준호도 알았다. 도연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도연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도연이 내 버프를 복사했어?"

김준호의 질문이 도서관을 가득 채웠다.

도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도연의 입이 열려 있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이 모든 답이었다.

김준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김준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김준호가 느끼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배신감이었다. 자신의 버프가 누군가에 의해 복사되었다는 것의 배신감. 도연이 자신의 능력을 빌려갔다는 것의 배신감.

"몇 번이야?"

김준호가 물었다.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너 몇 번이나 복사했어?"

도연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이야."

박세진이 대신 대답했다.

"검술 강화. 마법 감응. 그리고 한 번이 남았어. 세 번째를 쓰는 순간, 넌 완전히 주인공이 돼. 그리고 도연은 완전히 사라져."

박세진의 말이 도서관에 울렸다.

도연의 가슴이 철렁했다. 세 번째. 도연은 세 번째를 절대로 쓸 수 없었다. 세 번째를 쓰는 순간, 도연은 도연이 아니게 된다. 도연은 주인공이 되고, 도연의 정체성은 사라진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도연이 세 번째를 쓰기를 원하고 있었다. 김준호는. 서혜진은. 박세진은. 최준영은. 모두가.

"넌 세 번째를 써야 해."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도서관의 천장에서. 류현우가 천장의 빔에 매달려 있었다. 옷에 묻은 먼지와 흙이 그의 이동 경로를 말해주고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걸까?

"넌 세 번째를 써야 해. 그래야만 주인공들이 더 이상 널 찾지 않아."

류현우가 뛰어내렸다. 류현우의 발이 도연의 앞에 착지했다.

"세 번째를 쓰는 순간, 넌 주인공이 돼. 그리고 주인공들은 너를 두려워할 거야. 그러면 넌 안전해져."

류현우의 말이 도연을 흔들었다.

"안전해지려면, 넌 사라져야 한다는 거야?"

도연이 물었다. 도연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저항이 담겼다.

"맞아."

류현우가 대답했다.

"넌 지금 사라져 가고 있어. 하지만 세 번째를 쓰면, 넌 완전히 다른 형태로 존재하게 돼. 넌 도연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이 돼. 그리고 그것이 너를 구할 유일한 방법이야."

도연은 류현우를 바라봤다. 류현우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류현우도 주인공이었다. 류현우도 버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류현우는 왜 도연을 도우려고 하는 걸까?

"왜?"

도연이 묻자, 류현우가 웃었다. 류현우의 웃음은 슬픈 웃음이었다.

"넌 나처럼 도망치고 싶은 거지?"

류현우의 말이 도연을 관통했다. 도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도연은 조용히 졸업하고 싶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박세진의 관찰이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한나의 사랑이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서혜진의 보호가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김준호의 배신감이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류현우의 제안이 도연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있었다.

도연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반투명한 손가락. 도연은 류현우의 손을 밀어냈다.

"싫어."

도연이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지만 명확했다.

"난 세 번째를 안 쓸 거야."

"그럼 넌 계속 사라져."

류현우가 말했다.

"넌 조연으로 남겠다는 거야?"

"네."

도연이 대답했다.

"난 조연으로 남고 싶어.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구하고 싶지도 않아. 누군가의 운명을 결정하고 싶지도 않아. 난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

도연의 말이 도서관을 채웠다. 도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공포가 아니라 결의였다.

"그렇다면 넌 사라진다는 뜻이야."

박세진이 말했다.

"맞아. 난 사라질 거야."

도연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내 선택이야.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선택이 아니야."

도연의 가슴이 다시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손가락부터 팔로, 팔에서 목으로. 이번에는 다르다. 도연은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연은 이것을 선택하고 있었다.

박세진이 노트를 내려놨다.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박세진의 손이 떨렸다.

"도연..."

박세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박세진이 도연을 놓는 순간, 도연의 투명화 속도가 느려졌다.

이한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이 도서관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도연은 울지 않았다. 도연은 조용히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서혜진의 마법이 흩어졌다. 마법이 도연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도연은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그 자유함 속에서 도연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김준호는 검을 내려놨다. 에너지가 흩어졌다. 김준호의 배신감도 함께.

류현우는 도연을 바라봤다. 류현우의 눈에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류현우도 알고 있었다. 도연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서관의 밖에서 종이 울렸다. 밤 1시.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이 잠든 시간.

도연은 천천히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손가락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손목이 투명해졌다. 팔이 투명해졌다. 목이 투명해졌다. 몸통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도연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렸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그 말이 끝나자, 도연은 완전히 사라졌다.

도서관에는 네 명의 주인공만 남았다. 박세진의 빈 손. 이한나의 눈물. 서혜진의 꺼진 마법. 김준호의 내려진 검. 그리고 천장의 빔에서 내려온 류현우.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연은 조연으로 남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꿔놨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