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 스튜디오의 건반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지호는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박준호의 곡 'Neon Night'.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시 멈췄다. 그리고 다시 눌렀다. 아홉 번째였다.
멜로디의 진행이 너무나 익숙했다. 자신이 2023년에 본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던 곡. 그런데 지금은 2014년이고, 박준호가 이미 그것을 만들어냈다. 불가능했다. 박준호가 회귀자가 아니라면.
지호는 손가락을 건반 위에 올렸다. 정확히 같은 진행을 쳤다. 음정도, 리듬도 동일했다. 한 곡이 다를 수야 있지만, 이건 이미 세 번째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이수현이었다.
"야, 너 지금 뭐 해? 회사 와. 사장이 너 찾고 있어."
"지금?"
"지금. 뭔가 프로젝트가 들어왔대."
지호는 일어났다. 건반 위에 펼쳐진 악보를 한 번 더 봤다. '시간의 언어'. 사흘을 들인 곡이었다. 음악 이론의 모든 것을 집어넣었다. 대중 음악의 구조를 역설계한 결과물. 7분짜리 한 곡이 담고 있는 것은 10년의 분석이었다.
사운드 웨이브 사무실은 강북의 낡은 건물 3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며 지호는 숨을 고르려 했다. 월급이 나올 때마다 느껴지는 불안감. 이 기획사가 언제까지 존속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여기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이수현이 문을 열고 나왔다. 서른 중반의 얼굴에는 항상 피로가 묻어났다. 같은 홍대 벨트에서 10년을 버틴 프로듀서. 지호보다는 운이 조금 나았을 뿐이었다.
"사장님 기분이 좋네. 뭔가 대형 기획사랑 네고 중이래."
"우리 같은 곳이 대형 기획사와?"
"그래서 신기하지. 들어가봐."
사무실은 좁았다. 책상 셋, 스탠드 다섯 개, 그리고 헌 스피커. 사장 김준식은 오십 중반으로, 얼굴에 주름이 패였다. 음악 업계에 30년을 바친 사람의 얼굴이었다.
"지호야, 너 곡 하나 만들 수 있겠나?"
"뭔 곡입니까?"
"신인 여자 싱어의 데뷔곡. 대형사에서 내려온 주문이야. 그쪽이 프로듀싱을 담당하겠지만, 초안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고. 너희 같은 작은 사무실이 대형사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 드물지. 이건 기회다."
기회. 지호는 그 단어를 깊이 씹었다.
"언제까지 완성해야 합니까?"
"3주. 가능하나?"
지호는 탁자를 두드렸다. 리듬을 세고 있었다. 3주는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지 않았다. 충분했다.
"가능합니다."
사장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넌 항상 그렇지. 괜찮아, 우리가 걸 거 많지 않아."
돌아가는 길, 이수현이 지호의 어깨를 쳤다.
"이건 진짜 기회야. 너 이 프로젝트 잘하면 달라질 수 있어."
"그렇지."
"근데 왜 얼굴이 그래? 좋은 일이잖아."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건반 앞에서 했던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박준호. 그리고 그 곡들. 너무도 정확한 일치.
그날 밤 11시, 지호는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신인 데뷔곡'. 마우스로 비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140 BPM. 정확한 수치였다. 대중이 가장 신나면서도 편안하게 느끼는 속도. 과학이었다.
첫 번째 구절은 미니멀했다. 보컬 하나, 신스 패드 하나.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부족함을 채우려 한다. 청자는 자신이 음악을 완성시키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중독성이다.
후렴으로 들어가는 지점에서 모든 악기가 터진다. 베이스, 드럼, 스트링. 귀의 예상을 정확히 충족시키는 순간. 이것도 과학이었다.
새벽 3시, 지호는 첫 곡을 완성했다. 곡의 이름은 '시간의 언어'였다.
이수현이 그 다음 날 오후에 들었다. 사무실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3분 52초. 지호는 음악이 나가는 동안 이수현의 얼굴을 봤다.
처음에는 무표정이었다. 그 다음엔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후렴에 들어갈 때 이수현의 손가락이 탁자에서 떨었다.
곡이 끝났다.
"이건... 뭔가 다르네?"
"뭐가?"
"몰라. 그냥... 뭔가."
이수현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지호가 설명하려고 입을 열었다.
"설명하지 마. 그냥 이대로 둬."
"?"
"이 느낌이 뭔지 모르겠는데, 설명받으면 없어질 것 같아."
지호는 입을 다물었다. 이것이 그가 원하던 반응이었다. 과학이 느낌으로 전환되는 순간. 이론이 감정으로 번역되는 지점.
곡은 발표됐다. 사장이 대형 기획사에 보낸 지 3일 후였다. 스트리밍 플랫폼에 올라갔다. 신인 프로듀서 한지호의 이름 아래에.
지호는 휴대폰을 들었다. 새로고침을 눌렀다. 그 다음 또 눌렀다. 차트 페이지를 새로고침하는 것은 도박 중독자가 슬롯머신을 당기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다.
새로고침. 100위.
10분 후. 새로고침. 95위.
1시간 후. 새로고침. 73위.
지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희미한 웃음이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있었다. 10년 만의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박준호의 새 곡이 올라왔다. 제목은 'Moment'. 차트에 진입한 지 6시간 만에 50위였다. 하루 뒤엔 20위였다.
지호의 곡은 65위에 머물러 있었다.
지호는 두 곡의 구조를 비교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스펙트럼 분석 프로그램을 켰다. 박준호의 'Moment'는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가.
음... 음... 음...
그것도 과학이었다. 똑같은 과학이었다.
140 BPM. 미니멀한 도입. 후렴에서의 폭발. 모든 것이 자신의 '시간의 언어'와 동일한 원리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박준호의 곡이 더 높게 올랐다.
왜?
지호는 음악 평론 사이트를 들어갔다.
'박준호의 신곡 'Moment', 감의 정점을 보여주다'
'신인 프로듀서의 감각적 접근, 차트를 장악하다'
그리고 자신의 곡에 대한 평론.
'신입 프로듀서의 운 좋은 데뷔곡'
'대형 기획사의 마케팅이 만든 성공'
'과도하게 계산된 구조, 인위적인 느낌'
마지막 문장에서 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인위적이라는 말. 계산됐다는 말. 그것이 그의 모든 것이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지호? 뉴스에서 봤어. 너 곡 냈다고? 들어봤는데 좋더라."
"감사합니다."
"근데 왜 목소리가 그래? 기뻐야 하지 않아?"
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음악이 너를 행복하게 해준 적이 있니?"
그것은 엊그제 어머니가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도 대답하지 못했다.
"음... 네."
거짓이었다.
그날 저녁, 음악 평론가 이정현의 팟캐스트가 올라왔다. '이 주의 차트 분석'. 지호는 헤드폰을 끼고 들었다.
"박준호의 'Moment'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교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후렴의 타이밍, 보컬 처리의 미묘함, 이 모든 것이 청자의 심리를 정확히 파고듭니다. 이것이 감입니다."
지호는 일시정지를 눌렀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정확히 파고든다? 그건 과학 아닌가. 심리학이 아닌가.
다시 재생했다.
"한지호의 '시간의 언어'는 흥미로운 데뷔작입니다.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계산된 느낌이 있네요. 마치 음악 교과서를 따라 만든 것처럼요."
지호는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 교과서? 그렇다면 그것은 재현 가능하다는 뜻이다.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차트에 올랐다는 것은 운이 좋았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장기적 성공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호는 헤드폰을 벗었다. 평론가의 말은 이미 예상 범위였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게 있었다.
박준호의 곡도 똑같은 과학을 따르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박준호도 배운 것이다. 누군가에게서.
지호는 노트북을 켰다. 박준호의 모든 곡을 다시 들었다. 이번엔 다른 귀로. 박준호가 어디서 배웠는지 찾기 위해.
2주 후, 지호의 곡은 40위까지 올라갔다. 박준호의 곡은 여전히 1위였다.
음악 평론가들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박준호는 감의 화신이고, 지호는 운이 좋은 신입이었다.
하지만 지호가 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차트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박준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면, 언제까지나 훔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호도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아는 사람과 미래를 만드는 사람 중 누가 더 빨리 달릴 수 있을까.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뉴스 알림이었다.
'박준호, 지호의 '시간의 언어'와 유사한 구조의 신곡 '시간의 흔적' 발표'
지호는 기사를 눌렀다. 댓글 섹션에는 이미 비교 이미지가 떠 있었다. 두 곡의 스펙트럼 분석. 파형. 음악 구조.
거의 동일했다.
지호의 손가락이 휴대폰 화면에서 떨어졌다.
박준호는 자신의 곡을 복제했다. 그리고 발표했다. 박준호의 곡은 이미 30만 개의 스트림을 기록했다.
지호의 곡은 여전히 40위였다.
'시간의 흔적'은 하루 만에 15위에 올라왔다.
지호는 일어났다. 창문을 통해 강남의 야경이 보였다. 저 높은 빌딩들 어딘가에, 박준호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거물 프로듀서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호를 '재능 부족'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호는 이제 안다.
재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권력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권력도 음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지호는 건반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더 강했다. 더 명확했다. 더 과학적이었다. 그리고 더 중독적이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6개월이 지나면, 박준호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지호는 깨달을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증명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은 박준호의 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용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깨달음이 멀었다.
지호는 기사를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화면을 미끄러지며 두 곡의 비교 분석에 멈췄다.
'시간의 언어' vs '시간의 흔적'
파형 이미지 위에 빨간 선과 파란 선이 겹쳐 있었다.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BPM 140. 4/4박자. A 메이저 키. 후렴 진입 전 3초의 신스 브릿지. 보컬 더블링의 타이밍까지.
지호가 설계한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
"아, 씨..."
소리는 나왔지만 감정이 따라가지 못했다. 분노도, 절망도 아닌 뭔가 더 차가운 것. 마치 자신이 만든 악보를 누군가 그대로 베껴 가는 것을 보는 기분. 아니, 이미 봤던 악보가 다시 돌아오는 기분.
이수현이 옆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뭐 해?"
"박준호가... 내 곡을 복제했어."
"뭐?"
이수현이 휴대폰을 빼앗아 화면을 봤다. 그의 얼굴이 시간에 따라 변했다. 먼저 의아함, 그 다음 분노, 마지막으로 무기력함.
"이건 명백한 표절이잖아."
"그렇지."
"고소해야 한다고!"
지호는 웃음을 흘렸다. 기계적인 웃음. 마치 누군가 그의 입꼬리를 위로 당기는 것처럼.
"누가? 나? 나는 여기서 뭐하는 사람인가?"
이수현이 대답하지 못했다.
"홍대 하위 기획사 신입 프로듀서. 강남의 천재 박준호를 상대로 고소한다? 법원에 가기 전에 이미 음악 업계에서 매장당해. 더 이상 일을 못 한다."
"그럼... 뭘 해?"
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화면에는 여전히 두 파형이 겹쳐 있었다. 빨간 선과 파란 선. 하나는 자신이 만든 것, 하나는 도둑맞은 것.
"또 만든다."
"뭘?"
"곡을."
지호는 일어섰다. 사무실의 창문을 통해 강남의 야경이 보였다. 저 고급 빌딩들의 지하 스튜디오에서 박준호와 김태성이 웃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곡을 들으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사용하며.
"근데 이제 알았어."
지호가 중얼거렸다.
"뭘?"
"이게 게임이라는 거. 그리고 난 게임을 이길 수 있는 칩을 가지고 있다는 거."
"뭔 칩?"
"미래."
지호는 사무실 뒤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그의 임시 스튜디오였다. 낡은 건반, 오래된 오디오 인터페이스, 노후한 모니터. 이곳이 강남의 어떤 고급 스튜디오보다 강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오는 음악은 미래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건반 앞에 앉은 지호는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Neon Night'보다 더 중독적이었다. 'Moment'보다 더 정교했다. 박준호가 만든 모든 곡보다 더 앞서 있었다.
왜냐하면 지호는 박준호가 만들 곡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반을 치며 지호는 생각했다.
박준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정보 우위. 지호가 강남에 갈 때마다 박준호는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었다. 누군가 지호를 감시했거나, 아니면 박준호 자신이 강북에 내려와 지호의 움직임을 추적했거나. 혹은 기획사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입수했거나.
하지만 이제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호가 만드는 곡의 속도가 박준호가 복제하는 속도보다 빠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매달 한 곡씩. 박준호가 모두 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복제할 수 있더라도 그 복제 과정 자체가 증거가 될 것이다.
지호는 새로운 곡의 제목을 정했다.
'거울 속의 악수'
박준호가 자신의 음악을 계속 복제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이 뭔가를 복제하고 있다는 것을 음악 업계 전체가 알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오면, 박준호의 모든 곡이 의심받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진정한 창작물도.
음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을 만드는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지호는 밤새 곡을 완성했다. 새벽 4시. 사무실은 조용했다. 이수현도 가고 없었다. 오직 지호와 건반만 있었다.
'거울 속의 악수'가 완성되었을 때, 지호는 그것을 이수현에게 보냈다.
아침 8시. 이수현의 회신이 왔다.
'이건... 뭐야?'
'좋아? 나빠?'
'...좋은데, 이전 곡이랑 다르네. 더 공격적이다.'
지호는 웃음을 지었다. 맞다. 이제 공격적이어야 했다. 수비적인 음악은 도둑맞는다. 하지만 공격적인 음악은 남들이 따라갈 수 없다.
그 날 오후, 지호의 두 번째 곡이 발표되었다.
동시에 박준호의 새 곡도 발표되었다. '시간의 흔적'은 이미 차트 10위에 올라 있었고, 여전히 상승 중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악수'는 달랐다.
초기 반응이 뜨거웠다. 스트리밍 플랫폼의 댓글 섹션이 터져 나갔다.
'뭐 이 곡?'
'미쳤다. 진짜 중독된다.'
'이전 곡이랑 완전 다르네. 이 사람 프로듀서가 몇 명이야?'
'박준호도 좋지만 이게 더 신선하다.'
지호는 댓글을 읽으며 차트를 새로고침했다.
'거울 속의 악수' - 차트 진입 2시간 만에 95위.
6시간 만에 42위.
24시간 만에 18위.
지호의 손가락이 휴대폰에서 떨어졌다. 이건 운이 아니었다. 이건 확실한 상승이었다.
반면 박준호의 곡은 여전히 1위에 있었다.
하지만 차트 사이트의 상승률 그래프를 보면, 박준호의 곡은 이미 정점을 지나고 있었다. 반면 지호의 곡은 여전히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김태성이었다.
"한지호?"
"예, 김 선생님."
"너 새 곡 냈더라. 들어봤어."
지호의 심장이 멈췄다.
"어... 네."
"흥미로운데? 이전 곡이랑 달라. 이전 곡은 뭔가 딱딱했는데, 이번 곡은... 살이 있네."
지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근데 여전히 뭔가 모자라. 감이 없어. 넌 음악을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계산만 하다 보면 진정한 음악을 놓친다."
"감사합니다."
"이번 곡은 평가하겠어. 하지만 다음 곡부터는 좀 더... 인간적이어야 한다. 알겠지?"
통화가 끝났다.
지호는 휴대폰을 내려놨다.
감. 또 감이었다.
음악 업계에서 '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위험한지 지호는 알고 있었다. 감은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할 수도 없었다. 감은 거물 프로듀서의 특권이었다. 그들이 뭔가를 '감'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감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호도 이제 알았다.
그 '감'이 실제로는 뭔가라는 것을.
3일간의 분석 끝에, 지호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 '감'은 대중의 심리를 정확히 읽는 능력. 음악 이론을 무의식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트렌드를 직관적으로 예측하는 능력. 즉, 과학이었다.
그것을 '감'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박준호도 똑같은 과학을 사용하고 있었다. 지호의 공식을 따라.
분노가 전략으로 변했다. 지호는 새로운 노트북 파일을 만들었다.
제목: '추격'
이 곡은 박준호를 향한 선언이었다.
'넌 나를 따라잡을 수 없다.'
곡이 완성된 것은 새벽 5시였다.
그 날 오후, 지호의 세 번째 곡이 발표되었다.
동시에 박준호도 새 곡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박준호의 곡은 '추격'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정교했다.
박준호는 지호의 곡을 듣고, 그것을 분석했고, 그것을 개선했고, 그것을 발표했다.
모두 24시간 안에.
지호는 화면을 바라봤다.
박준호의 곡은 이미 차트 5위에 올라 있었다.
지호의 곡은 여전히 진입 단계였다.
그 순간, 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뉴스 알림이었다.
'박준호, 또 다시 지호와 유사한 구조의 신곡 발표... 음악 업계 '표절 의혹' 제기'
기사를 열었다. 댓글 섹션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이건 확실한 표절이다.'
'박준호가 지호의 곡을 복제하고 있다.'
'음악 평론가들은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더 흥미로운 댓글들.
'지호가 원본이고, 박준호가 복제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박준호의 모든 곡을 재검토해야 한다.'
음악 평론가들의 반응도 달라지고 있었다. 이정현은 팟캐스트에서 직접 언급했다.
"박준호의 최근 곡들이 한지호의 곡들과 의심스러울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된 것인지 음악 업계가 심각하게 검토해야 할 시점입니다."
대형 기획사들도 입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박준호가 속한 기획사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박준호는 자신의 창의성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표절 의혹은 근거 없는 추측입니다."
하지만 그 성명은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켰다.
팬덤도 갈라지기 시작했다. 박준호의 팬들은 옹호했고, 지호의 팬들은 공격했다. 중립적인 팬들은 두 곡을 직접 비교하기 시작했다.
스펙트럼 분석. 파형 비교. 음악 구조 분석.
증거는 명백했다.
박준호는 지호의 곡을 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제 과정이 모두에게 노출되고 있었다.
지호는 기사를 읽으며 깨달았다.
마침내 게임이 바뀌었다.
음악계 전체가 박준호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지호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었다. 지호는 더 이상 '운 좋은 신입'이 아니었다.
지호는 '원본'이 되었다.
박준호는 '복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전환은 음악으로 이루어졌다.
지호는 새로운 곡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 곡은 더 강해야 했다. 더 명확해야 했다. 박준호가 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복제 과정 자체가 증거가 되도록.
1년이 남아 있었다.
6개월이 지나면, 박준호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날 것이었다.
그 때까지, 지호는 계속 음악을 만들 것이었다.
매달 한 곡씩.
박준호의 복제 속도를 앞지르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호는 자신이 진정으로 증명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것이었다.
그것은 박준호의 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용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그 깨달음이 멀었다.
지호는 건반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곡의 구성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