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0년, 조선의 기술자 — 10화
경성역 뒤 허름한 목재소. 제철소의 지하실에서 만난 그날이 떠올랐다.
한소영의 손가락이 없는 손이 서유진의 어깨에 올려졌을 때, 세상이 멈췄다. 마스크 아래 보이지 않는 얼굴. 어두운 조명. 하지만 그 손은 선명했다. 다섯 개의 손가락 중 셋이 없었다. 고문의 흔적. 저항의 증거.
"당신은 준호의 죽음이 비극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소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담했다. 슬프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서유진은 책상 앞에 펼쳐놓은 세 권의 노트와 한 장의 사진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없는 손. 그 손이 쓴 글씨. 그 손이 만든 기술.
1923년의 경성은 1920년과 달라 보였다. 신문에는 공장 사고 통계가 줄었다는 기사가 올라왔고, 암시장의 거래 물품에는 정체불명의 '안전 기계 설계도'가 섞여 돌아다녔다. 준호가 죽은 지 만 3년. 그가 남긴 것이 조선을 정말로 바꾸고 있었다.
하지만 서유진이 책으로 남기려는 것은 준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기술자 이준호의 기술이 아니라, 기술자들의 기술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한소영의 첫 말이었다. 손가락 없는 손으로 서유진의 원고를 넘기며, 그렇게 말했다.
서유진은 펜을 들었다. 원고 첫 장을 다시 읽었다. 제목은 여전히 「이준호의 기술」이었다. 내용은 박준열의 독립운동 시절 회상으로 시작했다. 두 번째 장은 한소영의 상해 임시정부 시절 고문실 장면이었다. 세 번째 장은 임재혁이 아내의 관을 내려다보는 장면이었다. 준호는 네 번째 장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은 박준열의 손과, 한소영의 손과, 임재혁의 손과 얽혀 있었다.
한소영이 원고 위에 손가락 없는 손을 올렸다.
"이 책의 주인공이 누구인가요?"
서유진이 물었다.
"준호입니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바꾸어야 합니까?"
한소영이 서유진을 바라봤다. 마스크 아래의 눈이 선명했다.
"준호는 한 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준호는 이미 우리 모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준호의 개성이 사라집니다. 그의 고유한 업적이 묻힙니다."
서유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준호의 업적은 그의 기술입니다. 그 기술이 사라지지 않으려면, 그것이 한 명의 이름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한소영이 원고를 내려놨다.
"한 명의 영웅이 죽으면, 그의 기술도 죽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기술이 되면, 그것은 절대 죽지 않습니다."
서유진은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소영의 손가락 없는 손이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그 손은 고문실에서 나왔다. 저항의 손이었다. 그 손이 쓴 글씨, 그 손이 만든 기계, 그 손이 전한 메시지.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모두의 정신.
서유진은 펜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제목 「이준호의 기술」을 줄을 그어 지웠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한 명의 영웅이 죽는 것과 모두의 정신이 살아나는 것. 그 차이를 비로소 이해했다. 준호는 자신의 죽음으로 개인을 초월했다. 그의 기술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것이 되었다. 서유진의 손이 새로운 제목을 썼다.
「조선의 기술자들」
펜을 내려놓는 순간, 서유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이 준호가 원했던 것이구나. 이것이 그가 죽음으로 남긴 유산이구나.
충청도 영지의 제철소 뒤. 준호의 무덤 앞에서 박준열을 만난 것은 그 며칠 후였다.
비밀 무덤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장소. 준호의 시신은 그곳에 없었다. 8화의 마지막, 준호는 빛으로 변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비석은 있었다. 이름도, 날짜도 없는 돌비석. 그저 기호만 새겨져 있었다. 시계 바늘이 역행하는 모양의 기호.
서유진은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돌비석의 기호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역행하는 바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래인가. 과거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손가락이 기호 위에서 맴돌았다. 기호는 침묵했다.
박준열이 나타났다. 그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한 명의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조선의 모든 사람 안에 살아있는 정신이 되었습니다."
박준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렸다. 독립운동 시절 동료들의 죽음을 본 사람의 손이, 이제 또 다른 죽음 앞에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죽음은 다른 죽음이었다. 낭비가 아닌 투자. 무의미가 아닌 필연.
박준열이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검은 표지, 손때 묻은 종이. 박준열의 손이 떨렸다. 일기장을 건네려다가 놓쳤다. 책이 땅에 떨어졌다. 서유진이 재빨리 줍고 일어섰다. 박준열의 눈이 젖어 있었다.
"읽으세요."
박준열이 목소리를 낮췄다.
서유진은 그것을 받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준호의 필체였다. 작고 정확한 글씨. 기술 설계도의 스케치처럼 규칙적인 필체.
1920년 11월 15일. 첫 번째 능력 사용 직후의 기록.
"나는 미래를 본다. 여러 개의 미래가 한 번에 들어온다. 그 중 가장 선명한 미래에서 나는 죽어있다. 하지만 조선은 살아있다. 이 미래가 맞는 미래다. 나는 이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1921년 3월 20일. 기술 개발이 본격화된 후.
"박준열이 말했다. 한 명의 영웅이 백 명을 살리면, 백 명의 죽음도 책임져야 한다고. 나는 처음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이제 안다. 나는 내 죽음으로 백 명 이상의 생명을 살리려 한다. 그것이 가능한가? 모르겠다. 하지만 시도해야 한다."
1922년 7월 2일. 임민정이 죽은 후.
"내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내 손에는 임민정의 피도, 아홉 명 노동자의 피도 묻어 있다. 이 피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조선을 살리는 것. 그것이 유일한 속죄의 길이다."
1922년 11월 18일. 마지막 일기.
"나는 미래를 본다. 그 미래에서 나는 죽어있다. 하지만 조선은 살아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유진은 일기장을 덮고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박준열은 그를 기다렸다. 제철소 뒤의 비밀 무덤 앞에서, 시계 바늘이 역행하는 기호 앞에서.
"당신은 준호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서유진이 물었다.
"알았습니다."
박준열이 답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죽게 내버려두셨습니까?"
"죽게 내버린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게 한 것입니다. 그 선택을 존중한 것입니다. 그것이 조직을 이끄는 자의 책임입니다."
박준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독립운동 시절, 나는 많은 사람을 죽게 했습니다.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죽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죽음이 의미 있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의미는 살아남은 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준호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지킬 뿐입니다."
3년이 흘렀다.
1923년 경성. 박준열은 더 이상 영지의 지주가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대로였지만, 그가 실질적으로 통솔하는 것은 전국의 지하 공장 네트워크였다. 서유진이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경기·충청·전라의 60개 이상의 공장이 박준열의 신호 체계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제 기술 축적을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군사 조직의 구성이 그것이었다.
한소영은 여성 기술자들의 집단을 이끌고 있었다. 자동 방직기의 대량 생산에 성공한 그들은 이제 경성 여러 곳의 합법적인 직조 공장에 기계를 공급하고 있었다. 표면상 그것은 일제의 산업 재편 정책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기술력이 일제의 기술을 능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임재혁은 폐병이 깊어졌지만 여전히 움직였다. 안전한 공장 환경을 만드는 기준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일. 그것이 그의 과제였다. 아내의 죽음 이후 임재혁이 찾은 것은 복수가 아니라 예방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가 죽지 않도록 하는 일. 서유진은 임재혁이 전국의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안전의 사도'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준호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1924년 겨울. 오타니 도시오는 서울에서 도쿄로 귀임 명령을 받았다. 그의 임무는 실패했다. 아니, 정확히는 실패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다.
오타니는 지난 3년간 이준호를 추적했다. 설계도를 수집했다. 공장을 급습했다. 용의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그가 잡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기술의 원리였다. 한 명의 기술자를 제거해도, 기술은 남았다. 기술의 원리를 알면, 누구나 그것을 만들 수 있었다. 준호가 남긴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조선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쿄에서 오타니가 읽은 최신 보고서는 더욱 불안한 내용으로 가득했다. 조선의 신호 네트워크가 이제 일본의 통신 체계를 간섭할 수 있다는 것. 조선의 자동직조기 생산량이 일본의 그것을 추월했다는 것. 조선의 제철 기술이 독일 유입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모든 것이 준호의 죽음 이후 가속화되었다.
오타니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 군부에 제출할 보고서. 그 보고서의 제목은 「이준호 초능력 사건 종료 보고」였다. 하지만 본문은 극도로 모순적이었다.
"목표 인물 이준호는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술 체계는 현재 조선 지하 산업 전역에 확산되어 있으며, 개별 제거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조선인 기술자들이 그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있습니다. 현재 추정 인력은 5,000명 이상입니다."
오타니가 도쿄의 관저에서 보고서를 제출할 때, 그의 얼굴은 회색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한 명의 천재를 죽임으로써, 수천의 기술자를 깨워버렸다. 그의 손이 조선의 독립을 앞당겼다. 그것이 오타니 도시오가 남은 인생 동안 짊어져야 할 죄책감이었다.
1925년 봄.
서울 종로의 한 공장 앞. 서유진은 자신의 책 「조선의 기술자들」을 들고 서 있었다. 암시장에서 배포되기 시작했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출판사 이름도 저자 이름도 없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그 책을 찾아냈다.
첫 번째 배포 이틀 후, 경성 헌병대가 움직였다. 암시장 거점 세 곳이 급습당했다. 책을 나르던 운반꾼 다섯 명이 체포되었다.
서유진은 경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침구를 챙겼다. 몇 권의 원고를 숨겼다. 하지만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체포된 운반꾼들이 입을 열지 않았다. 심문을 당해도, 고문을 당해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손은 자신의 옷을 찢었다. 책의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고문 속에서도 목청껏 외쳤다.
"손 보호 장치는 여기 추가되고..."
"온도 감지기는 이렇게 연결되고..."
"신호음은 이 주파수로..."
고문관의 채찍이 내려칠 때마다,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지만, 그들은 계속 외쳤다. 기술을 외쳤다. 조선을 외쳤다.
헌병대는 당황했다. 이것은 단순한 불법 출판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신앙이었다. 이것은 운동이었다.
서유진은 그 소식을 들었다. 경성을 떠나려던 손을 멈췄다. 다섯 명의 운반꾼이 고문 속에서도 기술을 외쳤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자신의 조직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의 침묵과 외침 속에서, 서유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것은 더 이상 책이 아니었다. 이것은 조선의 정신이 되어 있었다.
서유진은 짐을 풀었다. 경성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섯 명의 운반꾼이 고문 속에서 지킨 것을 자신도 지켜야 했다. 그들의 침묵이 만든 공간 속에서, 기술은 계속 전승될 것이었다.
그 소식이 퍼지자, 책의 수요는 폭증했다. 한 권을 읽은 사람이 손으로 베껴 다섯 권을 만들었다. 다섯 권을 읽은 사람이 열 권을 만들었다. 암시장의 거래량이 급증했다. 일제의 검열 시스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경성의 신문에는 「불법 출판물 단속 강화」라는 기사가 연일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은 역효과였다. 신문 기사 자체가 책의 존재를 알리는 광고가 되었다. 조선인들은 신문을 읽고 책을 찾아다녔다.
서유진은 자신의 책이 이렇게까지 퍼질 줄 몰랐다. 그것은 이미 책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정신이 되어 있었다.
1925년 여름. 밤거리.
신문로의 암시장. 한 명의 노동자가 자동직조기의 설계도를 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임재혁의 제자, 김석수였다. 그 설계도는 준호의 원본이 아니었다. 한소영이 개선한 버전이었다. 김석수는 그 설계도를 읽으며 중얼거렸다.
"손 보호 장치는 여기 추가되고... 온도 감지기는 이렇게 연결되고... 신호음은 이 주파수로..."
그의 손은 설계도 위에서 움직였다. 기술자의 손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노동자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은 자신감 있게 움직였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손. 임재혁에게 배운 손. 안전의 정신을 받은 손.
김석수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 설계도를 보여줄 것이다. 그 아들은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친구들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렇게 기술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될 것이었다.
경성 전역의 신호탑에서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더 이상 박준열의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신호였다. 수천의 손으로 이루어진 신경계. 수만의 뇌로 작동하는 두뇌.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모두의 집단 협력으로 만들어진 조선의 신경계.
준호는 1년 전에 죽었다.
하지만 그의 기술은 살아있었다. 그의 정신은 살아있었다. 그의 의지는 살아있었다.
조선 전역의 공장에서, 밤새 불이 켜졌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준호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기계에는 그의 손가락이 새겨져 있었다. 모든 신호음에는 그의 심장박동이 울려 퍼졌다. 모든 노동자의 손에는 그의 의지가 흐르고 있었다.
시계 바늘이 역행한다.
미래에서 본 과거. 과거에서 만든 미래. 준호가 본 그 미래가 이제 현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