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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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지의 아메리카노는 여전히 따뜻했다. 차준호는 잔을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손가락이 일곱 개였다. 어제는 여덟 개였다. 내일은 몇 개일까.

오후 4시 23분. 루프가 초기화되기까지 7시간 37분.

"다시 오셨네요."

박민지가 테이블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차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박민지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의 손가락이 하나 더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과관계는 불명확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억 조작이 그녀를 그 선택으로 밀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자신이 아직도 뭔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신은희 형사였다. 음성 메시지.

"차준호입니다. 현재 위치 확인 차원에서 전화했습니다. 전자팔찌 신호가 정상입니다.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십시오."

차준호는 카페를 나갔다.

강남의 골목은 오후 햇살 아래 반짝였다. CCTV가 그의 걸음을 따라갔다. 5초마다. 카메라의 시선이 목덜미에 닿았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루프가 반복될수록 확실해졌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로 향하는 골목에서 차준호는 멈춰 섰다.

어두운 현관 입구에 인물이 서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세요?"

차준호가 물었다.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연을 알아요?"

대답은 없었다. 다만 그림자가 한 발 물러났다. 깊어졌다. 사라졌다.

차준호는 계속 걸어갔다. 15층. 라이온스 마크 아파트. 자신의 집.

경찰은 이미 모든 것을 조사했다. 현장은 깨끗했다. 혈액도, 증거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이 가져가지 않은 것들은 여전히 있었다.

현관 신발장의 분홍색 운동화. 침실 옷장의 검은 니트, 회색 청바지, 흰 속옷들. 욕실의 칫솔, 샴푸, 드라이기. 차준호는 각 물건을 집어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손가락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이 물건들도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경찰이 압수했어야 한다."

중얼거렸다.

침대. 서연이 자던 침대. 베개에 그녀의 머리 냄새가 남아 있었다. 차준호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경찰이 압수한 것은 혈액뿐이었다. 대량의 혈액. 시신은 없었다. 유골도 없었다. 옷도 없었다. 단지 피.

혈액형이 B형.

서연은 O형이었다.

차준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럼... 누구의 피야?"

일곱 개의 손가락이 침대 위에서 떨렸다.

거울 앞에 섰다. 얼굴이 또 다시 변해 있었다. 어제보다 더 낯설었다. 눈이 더 깊어졌다. 뺨이 더 쓸려나갔다. 입술이 더 창백했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하나?"

거울에 묻었다.

이름? 직업? 나이? 모두 뭉개졌다. 마치 팩스가 잘못 들어온 이미지처럼. 차준호라는 이름도 누군가 부르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뿐, 정말 그것이 자신의 이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배터리는 100%. 루프가 초기화될 때마다 초기화되는 배터리. 연락처를 열었다. 최준환. 박민지. 신은희. 이준혁. 모두 낯선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분명히 있었다. 적어도 루프 속에서는.

최준환을 찾기 위해 편의점 세 곳을 돌았다. 모두 달랐다. CCTV에 찍히지 않을 장소를 찾는 것처럼 움직였다. 전자팔찌가 신은희 형사에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네 번째 편의점. 거기 있었다.

최준환은 라면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차준호와 똑같은 동작이었다.

"준환."

차준호가 말했다.

최준환이 돌아섰다. 그의 얼굴도 변해 있었다. 루프 초반의 최준환이 아니었다. 더 창백했다. 더 두려워 보였다.

"넌 아직도 그 거짓말을 하고 있어?"

최준환이 말했다.

"그날 밤... 서연을 봤어?"

"난 아무도 안 봤어. 그리고 넌 자꾸 거짓말을 해."

최준환이 라면을 내려놨다. 그의 손가락도 일곱 개였다.

"내 기억을 조작했잖아. 넌 내게 '서연이 살아있다'고 말했어. 그리고 난 그걸 믿었어. 그런데 다음 루프에서는 넌 '서연이 죽었다'고 말했어. 또 다음 루프에서는...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 왜냐하면 그것도 조작된 거니까."

차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뭘 하는 거야? 정말로. 넌 뭘 찾고 있어? 넌 기억하지도 못할 거면서... 넌 뭘 증명하려는 거야?"

최준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내 기억을 돌려줘. 나도 모르게 뭘 했는지, 뭘 봤는지, 뭘 말했는지... 모두 돌려줘."

"난..."

차준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올 말이 없었다.

아파트로 돌아갔다.

거실 책장에 서연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서연의 메모가 적힌 책들. 서연이 밑줄을 그은 문장들. 서연의 손가락 자국이 남겨진 페이지들.

침대 옆 탁자의 가장 아래 서랍에서 서연의 일기장을 찾았다. 작은 분홍색 일기장.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첫 페이지. 날짜는 2년 전이었다.

'오늘 준호를 만났다. 카페에서. 그는 자신의 손이 자꾸 떨린다고 했다. 왜 떨리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안 했다. 뭔가... 불안한 남자다.'

차준호의 눈이 떨렸다.

다음 페이지.

'준호와 싸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자꾸 그가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거짓말이 뭔지 모르겠다. 그냥... 뭔가 맞지 않는다.'

다음 페이지.

'준호를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는 울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이상한 웃음이었다.'

마지막 페이지.

'오늘은... 뭐라고 써야 할까. 준호가 나한테 뭔가를 했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내 기억이 이상하다. 자꾸 준호가 내 기억을 조작하는 것 같다. 아니다. 나는 미쳤다. 아니다. 준호가 미쳤다. 아니다. 우리 둘 다 미쳤다. 내일 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차준호의 손이 떨렸다. 일곱 개의 손가락이 모두 흔들렸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익명의 번호. 차준호가 받았다.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같은 목소리였다.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 하지만 이번엔 더 명확했다.

"누세요?"

"당신이 찾던 서연은 이미 죽었습니다."

목소리가 계속했다.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죽인 게 아닙니다."

"뭐... 뭐라고?"

차준호가 겨우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문자가 왔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차준호는 화면을 봤다. 시간은 오후 11시 52분이었다. 루프가 초기화되기까지 8분.

그 문자를 본 순간, 차준호는 알았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다.

자정.

차준호의 눈이 감겼다.

루프가 초기화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차준호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봤다. 하지만 그 피가 누구의 피인지 몰랐다.

거울을 봤다. 얼굴이 또 다시 변해 있었다. 이번엔 더 낯설었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얼굴 같았다.

손가락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하나가 더 사라졌다.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는 100%. 화면에는 여전히 그 문자가 남아 있었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루프를 넘어 남은 유일한 기억.

그 문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

---

서연의 일기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분홍색 표지는 오래되어 테두리가 헐었고, 마지막 페이지는 반쯤 찢겨나갔다. 차준호는 그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내일 밤 뭔가 일어날 것 같다.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문장이 끝났다. 정말로 끝이었다. 서연의 펜은 거기서 멈췄다. 마치 누군가 손을 잡아채듯이.

차준호는 침대에 떨어졌다. 다리가 더 이상 자신의 명령을 받지 않았다. 손은 계속 떨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 그 중 하나는 관절이 역으로 휘어 있었다.

아파트는 침묵했다.

거실의 시계가 오후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루프 초기화까지 45분. 하지만 차준호는 시간을 세지 않았다. 이 아파트 어딘가에 서연이 죽어 있어야 한다. 경찰이 발견한 '대량의 혈액'이 증거다. 그런데 서연의 옷은 여기 있다. 옷장에. 여전히 그 냄새를 풍기며.

차준호는 일어섰다. 옷장을 열었다.

서연의 드레스, 청바지, 하얀 셔츠들이 빽빽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옷감이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따뜻했다. 마치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한 벌을 꺼냈다. 검은색 롱 드레스.

그 옷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영수증이었다.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의 카페. 날짜는 '그날'이었다. 시간은 오후 2시 14분.

'아메리카노 1잔 - 7,000원'

그 아래 손글씨로:

'만나지 말자. 더 이상 이러면 안 돼.'

누군가의 글씨였다. 서연의 글씨가 아니었다.

차준호의 호흡이 빨라졌다. 그는 아파트를 돌아다녔다. 침실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다시 침실로. 모든 게 제자리에 있었다. 서연의 화장품 가방. 서연의 책. 서연의 향수 병. 서연의 슬리퍼. 서연의 머리카락이 여전히 묻어 있는 빗.

그런데 서연은 없었다.

경찰이 압수한 것은 혈액뿐이었다. 혈액. '대량의 혈액'이라는 것. 신은희 형사의 보고를 다시 떠올렸다. '혈액량이 생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시신은? 시신은 왜 없지?

혈액은 누구의 혈액일까?

차준호는 거실 바닥을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이 청소를 했을 리 없다. 혈액 흔적이 있다면 경찰이 남겨 놨을 것이다. 증거로. 그런데 바닥은 깨끗했다. 너무 깨끗했다.

휴대폰이 울렸다.

익명의 번호. 받았다.

"당신의 기억이 조작되었을 수 있습니다."

같은 목소리. 전에도 들었던 그 목소리. 하지만 이번엔 더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인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누세요?"

차준호의 목소리도 낯설었다. 목소리가 또 변했다.

"멈춰."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 화면에 문자가 도착했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차준호는 화면을 봤다. 시간은 오후 11시 47분. 루프가 초기화되기까지 13분.

그 문자를 본 순간, 모든 게 겹쳤다.

최준환의 목소리. "나도 모르게 뭘 했는지, 뭘 봤는지, 뭘 말했는지... 모두 돌려줘."

박민지의 얼굴. 팔목에 붕대를 감고 있던 그 얼굴.

신은희 형사의 말. "당신의 기억도 조작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서연의 일기장.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차준호는 책상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여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흔들렸다. 손을 펴 봤다. 손가락들이 제각각이었다. 길이가 다르고, 색깔도 다르고, 하나는 관절이 거꾸로 꺾여 있었다. 이건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그럼 누구의 손이지?

휴대폰 화면을 다시 봤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문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루프를 넘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발신자를 추적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번호는 알 수 없는 것으로 표시되었다. 추적 불가. 위치 불명. 정체 불명.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기를 바라고 있다.

차준호는 아파트를 나왔다.

복도에 나가자 이웃집 문이 보였다. 303호. 그곳에 사는 주민이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 사람도 자신이 조작한 것 중 하나였다. 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멈췄다.

누르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전화를 했다. 문자를 보냈다. '멈춰.'

엘리베이터로 갔다.

1층 로비에 내렸다. CCTV가 있었다. 천장에 설치된 검은 구의 렌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찰이 이미 이 영상을 압수했다. 루프 8회차 때. 그 영상에는 자신이 증인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박민지의 카페. 최준환의 집. 303호 주민의 아파트.

그런데 누가 이 영상을 지웠을까?

경찰이 압수한 영상이라면 경찰서 증거실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루프가 초기화되면 모든 게 리셋된다. 증거실도. 기록도. 경찰의 기억도.

그럼 이 영상은?

CCTV를 바라봤다. 렌즈 안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낯선 얼굴. 누구의 얼굴일까. 자신의 얼굴이 맞는가?

휴대폰을 봤다. 오후 11시 54분. 루프가 초기화되기까지 6분.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그 문자는 여전히 화면에 남아 있었다.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갔다. 골목으로. 거리로. 강남의 야경이 감싸 안았다. 고급 아파트들, 명품 매장들, 휴지를 버리는 사람들. 모든 게 정상처럼 보였다. 모든 게 거짓처럼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등 뒤가 따끔거렸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누군가의 숨결을 느꼈다.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하지만 만질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다시 익명의 번호.

"당신이 조작한 기억들이 실제가 되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아니었다.

"서연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차준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멈춰. 제발."

전화가 끊겼다.

골목 어딘가에 서 있었다. 시간은 자정 1분 전이었다. 루프가 초기화되기까지 1분.

손에 있던 휴대폰 화면에 그 문자가 여전히 떠 있었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자정.

의식이 흐려졌다. 세상이 검게 변했다. 마치 누군가 눈을 감기는 것처럼. 루프가 초기화되는 그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 밤이 정말 있었던 일일까?

자신의 손에 묻은 피가 정말 서연의 피일까?

자신이 서연을 정말 죽였을까?

루프가 리셋되었다.

자정에 깨어났다. 손에 피가 묻어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또 다시 변해 있었다. 손가락은 다섯 개였다. 하나가 더 사라졌다.

휴대폰을 켰다.

배터리는 100%.

화면에는 여전히 그 문자가 남아 있었다.

'넌 뭘 찾고 있어? 멈춰.'

루프를 넘어온 유일한 기억.

그 문자.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

침대에 앉았다. 손가락을 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제 남은 게 뭐지?

손가락이 모두 없어지면 뭐가 되지?

자신의 손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손이 되는 건가?

자신의 얼굴이 모두 변하면 뭐가 되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건가?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 속의 얼굴을 봤다. 낯선 얼굴. 창백한 피부. 검은 눈. 입술이 없는 입.

이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받았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익명의 목소리가 물었다.

차준호는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 몰랐다. 자신이 뭘 했는지 몰랐다. 자신이 왜 이 루프에 갇혀 있는지 몰랐다.

"당신이 찾던 서연은 이미 죽었습니다."

목소리가 계속했다.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죽인 게 아닙니다."

"뭐... 뭐라고?"

차준호가 겨우 말했다.

"당신은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썼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범행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를 범인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아니야. 난 서연을 죽인 거야."

"당신의 기억이 거짓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침대 위에 쓰러졌다. 손가락 다섯 개가 침대 위에서 떨렸다. 거울 속의 낯선 얼굴도 떨렸다.

시간은 오전 12시 15분이었다.

루프는 이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루프 속에서 차준호는 이제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울 속의 얼굴이 갑자기 움직였다. 차준호의 움직임과 다르게. 거울 속의 입이 웃음을 지었다. 차준호의 의도와 무관하게. 거울 속의 눈이 차준호를 바라봤다. 차준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 거울 속에 갇혀 있었다.

아니, 누군가 거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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